59화
“그럼 나, 그거 다프네랑 하, 할래.”
“…제가 잘못 들은 게지요? 아니면 왕자님께서 제 말을 귀 기울여 듣지 않으셨을까요?”
“그, 그러니까 결혼이랑 같은 말인 거잖아. 가, 가족이 돼서, 애도 낳고.”
아셰라드렌은 분명히 이해했다. 다만 남들에 비해 편견이 없고 상식이 부족할 뿐.
마담 지르젤이 관자놀이를 짚으며 옆으로 쓰러지는 시늉을 하자 뒤에 있던 시녀들이 그녀를 부축하려 했다.
“마담! 괜찮으세요?”
“어쩌면 좋을까, 가르칠 게 산더미 같구나….”
그녀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푹푹 쉬어 댔다. 솔직히 내가 왕자의 교육 담당이 되었어도 저랬을 것 같긴 했다. 애초에 우리가 고용인과 고용주, 그 이상의 관계를 맺는 것 자체가 남들에게는 어불성설이었을 테니까.
“왕자님은, 왕자님께 걸맞은 여성을 배필로 삼으셔야 합니다. 절대로! 저런 평민 계집은 아니 될 말씀이지요. 나중에 혼인을 하신 뒤에 정부로 들이시면 또 모를까.”
“…저, 정부.”
“결혼을 하신 뒤에, 후계자를 낳고 나시면 그때부터는 자유입니다. 물론 현 국왕 부부께서는 금슬이 좋으셔서 그런 일이 없긴 합니다만.”
확실히 교육을 업으로 하는 사람이라 그런지 마담 지르젤은 나나 프리지어보다 설명에 능숙했다. 그녀는 정부의 뜻을 아셰라드렌에게 알려 주며 손을 뻗어 내 손등을 꼬집었다.
“정부란! 혼인 관계가 아님에도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여인입니다. 왕자님께서는 귀족, 혹은 왕족의 여인과 결혼하셔야 할 테니 이 계집은 첩으로도 과분하지요. 참고로 첩이란, 정부와 같은 뜻이랍니다.”
“다프네를 괴, 괴롭히지 마! 아,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잖아.”
아셰라드렌이 벌떡 일어나 내게 다가오려 했다. 그러나 그가 나신인 것을 알아챈 시녀들에게 가로막혀 침대에서 벗어나지는 못했다.
미간에 깊은 주름을 만든 그가 저를 막아선 시녀 하나를 내동댕이쳤다. 나는 움찔 놀라 아셰라드렌을 힐끔거렸다. 그가 내뱉는 공기가 새하얗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
“아, 안 돼요. 왕자님, 약속하셨잖아요. 절대로 변신해 남을 해치지 않겠다고.”
변화를 눈치챈 것은 나뿐이었으므로, 나는 급히 그를 향해 외쳤다. 시녀들이며 마담 지르젤의 시선이 내게 집중되었다.
왕자는 다시는 나와 떨어지고 싶지 않겠지. 감옥으로 돌아가는 것도 끔찍할 것이다.
나는 간절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아셰라드렌의 손등에 털이 돋아나고 있었다.
“…윽.”
반듯한 모양을 하고 있던 귀가 쭉 찢어지듯 옆머리를 타고 올라갔다. 강아지로 변하는 것처럼 펑! 하고 바뀌는 게 아닌 걸 보니 그도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렇지만 누군가 지금의 그를 목격해 버린다면!
초조해진 나는 그래서는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마담 지르젤의 손을 대차게 쳐 냈다. 당황한 그녀가 곧이어 나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이 무슨….”
“보세요. 저 이제 괜찮아요. 아프게 꼬집으신 것도 아니고, 그냥 경고를 하신 거예요. 말씀드렸잖아요. 메이드는 왕자님과 한 침대를 써서는 안 돼요….”
마담 지르젤은 내게 따지려던 것을 그만두었다. 그녀도 따로 들은 얘기가 있을 테니, 이 이상 아셰라드렌을 자극해서는 안 된다는 걸 깨달은 듯했다.
대신, 그녀는 왕자보다 만만한 내게 아니꼬운 시선을 던졌다. 앞으로의 왕성 생활이 정말이지 기대가 되는군.
지금은 나는 아셰라드렌을 살살 달래는 데 온 신경을 집중해야 했다.
“진정하세요. 잘못은 제가 한 거예요. 마담 지르젤은 맞는 말씀을 하신 것뿐이고요.”
“…하, 하지만 다프네와 같이 자겠다고 한 건 나였어.”
그는 가슴이 부풀어 오르도록 크게 숨을 들이마시며 힘겹게 입을 뗐다. 어떻게든 나를 감싸 주려는 의도가 보여, 마담 지르젤은 혀를 끌끌 차며 시녀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왕자님을 놓아 드리거라!”
“네, 마담.”
그래도 최소한, 내가 아셰라드렌의 침대에서 잠이 든 게 아니라서 다행일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프리지어가 마련해 준 나의 새로운 침실에 있었고, 마담 지르젤은 초록색 깃털로 장식한 부채를 펼치며 뒤로 물러났다.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얼른 단장을 마치고 오세요. 오늘부로 이 시간에는 저와 함께 궁중 예법을 배울 것입니다.”
이윽고 그녀는 시녀들을 데리고 우아한 걸음걸이로 자리를 떴다. 방이 좁아 마담 지르젤의 뒤로 꼭 어미 오리를 따르는 새끼 오리들처럼 시녀들이 줄지어 늘어섰다.
그들이 모두 사라진 후, 나는 당장이라도 주저앉고 싶은 것을 억지로 참아 냈다. 어떻게든 약속을 지켜 낸 아셰라드렌이 기특하기도 하면서 답답하기도 했다.
상식이 없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어쩜 그렇게 당당하게 나랑 결혼하겠다는 소리를 할 수가 있는지. 오늘 이후로 세상 밖은 내게 가시밭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닐 것이다.
“저희도 욕실로 가요. 씻고 계시면 오늘 입으실 옷들을 가져다드릴게요. 아무래도 서두르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그렇다고 해서 아셰라드렌에게 화풀이를 할 마음은 없었다. 나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를 대했다.
“다프네는, 아무렇지도 아, 않아?”
“네? 네. 괜찮아요. 언젠가 이런 날이 올 줄 알았거든요.”
괜찮을 리가. 불편해서 숨이 막히고 위장이 뒤틀린다.
“이, 이해가 안 돼. 마, 마담 지르젤은 왜… 나한테는 그렇게 친절하면서, 다프네한테는.”
털이 사라진 손등을 내보이며 그가 거칠게 제 얼굴을 쓸어내렸다. 내리깐 은빛 속눈썹 사이로 보이는 보랏빛 눈이 슬퍼 보였다.
나는 억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건 당연한 거예요. 왕자님은 고귀한 왕족이시고, 저는 그렇지 않으니까요.”
“고, 고귀한.”
“음, 고귀하다는 게 뭐냐면요.”
“대, 대충 알 것 같아. 그리고 내가 고귀하다면, 다프네도 고귀해.”
나 그런 말은 여태껏 들어 본 적이 없는데. 이렇게 갑자기 감동을 주다니.
괜히 목이 막히는 것 같아 나는 고개를 돌리고 헛기침을 했다. 다시 아셰라드렌을 바라보았을 때, 그는 힘없이 일어나 내게 다가오고 있었다.
“악! 옷도 안 입으시고 지금….”
“이, 입을게. 씻고… 마담 지르젤을 보러 갈게. 난 바보라서 잘은 모, 모르지만, 그렇게 해야 다프네가 괴롭지 않을 것 같으니까.”
성장한 건 강아지일 때의 모습만이 아닌 듯했다. 아셰라드렌의 입에서 저런 소리가 나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는 상체를 숙여 내 어깨에 살짝 기대는 듯하더니, 이내 성큼성큼 걸어 방을 나가 버렸다.
⋆★⋆
“국왕 폐하께서는, 필요시에는 제가 왕자님께 체벌을 해도 좋다 허락하셨습니다.”
“체, 체벌.”
한 시간 뒤, 응접실에서 아셰라드렌은 대뜸 뜻 모를 통보를 받아들여야만 했다. 소매와 깃에 왕가의 문장이 새겨진 셔츠를 입은 그는 멀뚱멀뚱 마담 지르젤의 뒤에 있는 나를 바라보았다.
“제게 집중하시지요! 그러지 않으시면 저 계집아이는 내보내도록 하겠습니다.”
“아, 아까부터 계집이 대체 뭐길래.”
“여자를 뜻하는 단어입니다. 어쨌거나, 왕자님이 제 교육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셨을 경우, 저는 왕자님을 어쩔 수 없이 때려야 합니다.”
어떻게 감히 왕족의 몸에 손을 대겠다는 소리를 할 수 있지. 레티스에게는 절대로 그런 식으로 벌을 준 적이 없을 것이 틀림없었다.
왕성의 사람들이 아셰라드렌을 진짜로 짐승으로 여기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정작 그는 별로 아무렇지 않다는 듯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기만 할 뿐이었지만.
“아, 아픈 건 싫은데… 그보다 마담 지르젤도 계집이야?”
“…저는 계집이 아닙니다! 저를 욕하시는 겁니까?”
“…하, 하지만 여자라는 뜻이라며.”
저래서 무슨 교육을 하겠다고. 나는 마담 지르젤의 시녀들과 벽에 붙어 있다 한숨을 쉬었다.
아셰라드렌은 억울해하며 되물었으나 그의 발언은 이미 마담 지르젤의 뚜껑을 열리게 만들었다.
바보라더니,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잖아.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러다 마담 지르젤이 탁자에 놓인 가느다란 회초리을 집어 드는 것을 보고 숨을 집어삼켰다.
“저 같은 귀족에게는 그런 표현을 쓰지 않습니다. 손바닥을 내미시지요. 방금 왕자님은 큰 실수를 하셨습니다.”
“아….”
설마 진짜로 때리기야 할까. 이미 첫 만남에서부터 마담 지르젤의 눈 밖에 나 버린 나는 차마 아셰라드렌을 위해 끼어들 수가 없었다.
물론 아셰라드렌은 소중하고 또 소중했지만, 내 인생을 그의 목숨을 구하는 데 바치겠다고 다짐하기까지 했지만.
이제 나는 과거를 떠나 현재의 아셰라드렌, 그 자체를 바라보고 있는 것에 가까웠지만.
그래도 도저히 오늘만큼은 더 이상 남들의 미움을 살 게 뻔한 행동을 하고 싶지 않았다.
짜아악!
“윽!”
마담 지르젤은 왕자를 봐주는 법이 없었다. 그녀가 아셰라드렌의 손바닥을 내리친 것은 겁을 주기 위해서라던가, 경각심을 일깨워 주기 위한 목적 따위가 전혀 아니었다.
얼씨구나 국왕을 등에 업고, 그녀는 소년을 학대하고 있었다. 그것은 절로 가학심이 들게 하는 아셰라드렌의 부드러운 인상 때문이었을까.
나는 순간적으로 묘하게 즐거워 보이던 마담 지르젤의 표정을 기억했다. 아셰라드렌은 꽤나 고통스러운지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있었다.
살짝 붉어진 눈가에 물기가 어렸다. 그는 예쁜 아랫입술을 깨물며 물끄러미 나를 보았다.
“이제 아시겠습니까? 계집이란, 하찮은 여자들을 낮잡아 이르는 말입니다.”
“응….”
“그리고 여기서 계집이라 불릴 만한 여자는 단 하나밖에 없지요. 그게 누군지 아시겠습니까?”
“…모, 모르겠어.”
“그럴 리가 없으실 텐데요.”
마담 지르젤의 예절 교육 1일 차. 그녀는 모든 것을 제쳐 두고 가장 먼저 내게 분수를 알라고 가르치고 있었다.
짜아악!
“다시 묻겠습니다, 왕자님. 이곳에는 제 주제도 모르고 감히, 하늘같이 높으신 분을 넘보려 하는 계집이 있습니다.”
“…….”
“그게 누구인지 아시겠습니까?”
그냥, 안다고 말해. 그건 다프네라고.
만약 그게 마담 지르젤이 원하는 대답이라면, 물론 나는 좀 서글퍼지겠지만, 더 이상의 체벌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내 이름을 말해.
왕자의 손바닥에 그어진 새빨간 세로줄은 이렇게 멀찍이 떨어져 있어도 분명히 보였다. 목을 옥죄어 오는 듯한 무거운 공기 속에서, 나는 힘없이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리고 아셰라드렌은 답했다.
“…모르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