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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왕자 길들이기 (57)화 (57/123)

57화

그나마 내게 위안이 된 건 식사를 하는 동안의 우리가 꼭 이름 없는 성에 되돌아간 것 같았다는 점이었다. 물론 우리의 주변 환경은 몇 번이고 언급할 만큼 부담스러울 정도로 달라졌지만.

아셰라드렌은 여전히 서툴긴 하지만 내가 가르쳐 준 대로 열심히 고기를 썰어 입가에 가져갔다. 굶주렸던 기간이 길었던 그는 음식을 먹는 내내 잡담을 하는 법이 없었다.

분명 메이드들이 엄청나게 많은 양의 식사를 가져왔던 것 같은데, 어느새 테이블 위의 접시들은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아셰라드렌은 마지막으로 사과 주스를 마셔 입가심을 한 뒤 행복한 숨을 뱉어 냈다.

“배가 부르니까… 누, 눈이 자꾸 감겨.”

“원래 다 그런 법이에요. 게다가 왕자님은 며칠 동안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못하셨으니까요.”

나는 타르트의 크림이 묻은 그의 입가를 가리키며 웃었다. 이름 없는 성이었다면 당연히 내가 닦아 줬겠지만, 이제는 더 이상 그를 마냥 아이 취급할 수가 없었다.

그 때문이었을까, 아셰라드렌이 부드럽게 올라가 있던 입꼬리를 대번 아래로 내렸다.

“아셰라고 부, 불러. 지금은 우리 둘밖에 없잖아.”

“아… 하지만 여기는 왕성이에요. 보는 눈이 많잖아요.”

“그, 그래도 우리 말고는 아무도 없는데.”

왕자를 애칭으로 부른다는 걸 들켰다가는 나만 큰 비난을 받을 텐데. 상상만 해도 아찔했다. 그러나 감옥까지 다녀와 평소보다 더 예민해 보이는 그에게 차마 안 된다고 하기가 쉽지 않았다.

“알았어요, 아셰. 그러니까 그런 표정 짓지 말아 줘요.”

“응. 여, 역시 난 다프네가 그렇게 불러 주는 편이 좋아.”

등받이에 늘어지듯 앉은 그가 천장을 바라보며 눈을 접어 웃었다. 나는 무심결에 그를 따라 고개를 들다 샹들리에가 쏘아 보내는 환한 불빛을 맞고 눈을 감았다.

“…왕성에 적응하려면 시간이 좀 걸리겠어요.”

“나, 나도. 여긴 사람이 너무 많아.”

“슬슬 일어날까요? 얼른 가서 주무셔야죠.”

차라리 어두워지면 좀 나아질까. 나는 10년 치 연봉 짜리 의자에서 일어나 아셰라드렌을 이끌었다. 복도로 나간 나는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메이드들을 마주쳐 움찔 뒷걸음을 쳤다.

우스테 후작가에서는 나도 저 메이드들 중 하나에 불과했는데. 지금은 꼭 떳떳하지 못한 방법으로 신분 상승을 한 정부가 된 느낌이었다.

있어서는 안 될 자리에 있는 것 같다고나 할까. 덕분에 내 뒤를 졸졸 따라오던 아셰라드렌은 내게 발등을 밟혔다. 그런데도 그는 아픈 기색 하나 보이지 않았다.

“응? 왜 그래?”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먼저 들어가세요.”

나는 순진하게 눈만 깜빡이는 아셰라드렌을 재촉했다. 저들은 과연 왕자의 침실에 들어가는 나를 보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우와, 여기도 장난 아니네요. 침대가 저렇게 큰데도 방이 넓어서 작아 보여요.”

아셰라드렌은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는데, 괜히 나만 이런저런 신경을 쓰게 되는 것 같다. 나는 쓸데없는 생각을 지우려 과장되게 감탄하는 척을 했다.

“그, 그런가. 꼭대기 층보다는 좁은 것 같은데.”

“…거긴 굳이 따지자면 방이 아니었어요. 그나저나 옷은 어디서 갈아입으셔야 하지.”

우스테 후작가의 주인 가족들은 저마다 침실에 딸린 드레스 룸을 가지고 있었다. 왕성도 그와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벽에 난 문 여러 개를 살펴보던 나는 프리지어가 알려 준 방이며 호화스러운 욕실, 그리고 드레스 룸을 찾아냈다. 대체 여기엔 옷이 몇 벌이나 준비되어 있는 건지.

“장사해도 되겠어요. 어림잡아도 삼백 벌은 되겠는데요?”

“자, 장사.”

“내다 파는 거요. 물론 농담이에요. 잠옷은 어디에 있으려나.”

옷장의 문만 해도 열 개는 넘어갔다. 나는 그것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다 소매가 긴 남색 잠옷을 골라 들었다. 그러고는 뒤를 돌아보자, 문가에 서서 내 움직임을 눈으로 좇고 있던 아셰라드렌이 헤, 하는 웃음소리를 내며 해맑게 눈매를 휘었다.

“그, 그런데 그걸 굳이 입어야 할까?”

“입으셔야죠. 지금 입고 계신 옷은 너무 불편….”

나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마침내 기운을 찾은 아셰라드렌이 눈 깜짝할 새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이젠 너무도 익숙한, 바닥에 떨어진 옷가지들과 그 안에서 꼬물꼬물 기어 나오는 작고 하얀 강아지.

신이 난 그는 꼬리를 마구 흔들어 대며 내게 다가왔다.

“안 돼요, 아셰. 어떻게 이러실 수가 있어요? 제가 그 모습에 약한 거 아시면서.”

그렇기 때문에 변신한 것일지도. 입을 벌려 헥헥대는 강아지의 속마음이 들려오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아셰라드렌은 얼른 안아 달라며 앞발을 들어 내게 매달렸다.

“안 돼요. 진짜 안 돼요. 여긴 왕성이잖아요. 이름 없는 성이 아니라고요.”

“끼이잉….”

“그렇게 귀여운 소리를 내셔도… 그리고 전부터 계속 말씀드렸잖아요. 혼자 자는 연습도 해 보셔야 한다고요.”

쉽지 않다. 절대로 쉽지 않다. 저렇게 작고 소중한 강아지를 밀어내는 일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나는 한숨을 쉬며 아셰라드렌을 안아 들었다.

“잠시만, 그런데 몸이 좀 무거워지지 않으셨어요? 살이 붙으셨나?”

그럴 리가 없는데. 사람이었을 때의 아셰라드렌은 오히려 얼굴이 반쪽이 되어 있었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를 공중에 띄워 보았다.

“알겠다! 키가 크셨네요. 전보다 반의반 뼘 정도.”

그런데 이게 이럴 수가 있는 건가? 그가 가진 변신 능력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납득해야만 했으나 그래도 뭔가 이상하다는 기분을 지울 수는 없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과장을 좀 보태 내 주먹만 한 강아지였지 않나. 이 상태로도 성장할 수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신기해라. 아셰는 정말 흥미로운 분이네요. 그리고 아무튼 귀여워.”

이러면 어떻고 저러면 또 어때. 사람 모습을 한 아셰라드렌의 성장기를 보지 못해서인지 오히려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나는 왕자를 품에 끌어안고 보들보들한 머리털에 뺨을 부볐다.

“끼잉, 끼이잉….”

그러자 아셰라드렌이 사랑스러운 울음소리를 내며 내 턱을 열심히 핥았다. 축축하고 보드라운 핑크빛 혀로 얼굴 전체를 세수시킬 기세였다.

“아, 진짜 안 되는데. 정말로 오늘이 마지막이에요. 네? 약속해 주세요.”

“…….”

“이거 봐, 또 대답 안 하신다. 제 말 다 알아들으시는 거 알거든요?”

선택지는 없었다. 나는 아셰라드렌이 그리웠고, 굳이 말하자면 강아지인 그가 너무 보고 싶었다. 마지막으로 그를 내 배 위에 올려놓고 잠이 들었던 게 언제였더라? 나는 조그만 몸을 부르르 떨어 대는 그를 도저히 저 드넓은 들판 같은 침대에 혼자 두고 싶지 않아졌다.

이게 다 아셰라드렌 때문이야. 나는 또 그에게 속절없이 넘어가 이름 없는 성에서와 같은 생활로 돌아가고 있었다.

⋆★⋆

“…어떻게 할까요? 깨우는 편이 좋겠지요?”

그렇게 잠이 든 건 저녁나절쯤이었을까. 키친 메이드로서의 고된 노동에 지친 나는 이름 없는 성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푹신한 침대에 흠뻑 빠져들었다.

긴 시간 동안 꿈도 꾸지 않고 잠을 잤다. 중간에 아셰라드렌이 사람으로 돌아와 나를 끌어안았을 때만 빼고. 다만 뺨에 닿는 그의 맨살조차도 나의 노곤함을 이기지는 못했다.

그러다 정신을 차린 것은 사람들의 수군거림 때문이다.

“마, 망측도 하여라! 어떻게 이런!”

차라리 눈을 뜨지 않았으면 좋았을까. 어떤 상황인지 바로 깨달은 나는 쇄골을 덮고 있는 묵직한 팔을 밀어내며 일어나려 했다. 그러나 보기엔 늘씬해도 아셰라드렌의 무게는 의외로 묵직해서, 끙끙대며 빠져나오려고 해도 별 소용이 없었다.

“으… 왜 그래, 자꾸.”

왕자의 잠긴 목소리가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귓가를 간지럽혔다. 나는 다급하게 그의 팔을 두드렸다.

“왕자님. 일어나 보세요, 얼른요!”

“응….”

평소라면 나보다 귀가 밝은 그가 먼저 저들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내가 아닌 사람들을 극도로 경계하는 그가 이렇게 미적대는 경우는 거의 없다시피 했다.

그래도 아셰라드렌은 뭔가를 감지한 듯 금세 팔을 치우고 인상을 썼다. 그런 그가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마주한 것은 오만상을 찌푸리고 있는 30대 중후반의 한 귀족 여인이었다.

“…뭐, 뭐야. 무, 무서워. 다프네.”

상반신을 노출하고 있던 그는 이불을 잡아당겨 나를 그 안으로 숨겨 버렸다. 아니, 무서운 건 내가 아니라 본인이면서.

“왕자님! 왕자님은 아직 혼인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이불 속에서 시선을 교환했다. 보랏빛 눈동자에 당혹스러움과 더불어 의아함이 번져 나갔다. 아셰라드렌은 이불 밖으로 눈만 빼꼼 내밀어 귀부인을 바라봤다.

“호, 혼인?”

“하아, 이럴 때가 아니란 건 알지만 우선 제 소개를 하지요.”

“돼, 됐어. 굳이.”

“아니요! 꼭 해야겠습니다. 저는 얼마 전까지 레티스 공주님의 예절 교육을 도맡았던 지르젤 백작 부인입니다. 마담 지르젤이라 부르시면 됩니다.”

“아….”

마담 지르젤도 여간내기는 아닌 듯했다. 예니체 경은 왕자가 딱 잘라 거절하면 시무룩해져서는 입을 닫아 버리고는 했건만.

아셰라드렌은 다시금 이불 속으로 들어와 난감한 듯 나를 쳐다보았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이러고 있을 때야? 우려하던 일이 현실로 벌어진 충격은 생각보다도 컸다.

나는 억지로 이불을 끌어 내리고는 살금살금 침대 밑으로 내려와 고개를 조아렸다. 쥐구멍이라도 있다면 숨고 싶다는 심정이 바로 이런 거구나.

하필이면 마담 지르젤은 혼자도 아니었다. 그녀의 뒤로 늘어선 시녀들의 향연에 나는 콱 죽어 버리고 싶어졌다.

“…프리지어 양에게 전해 들었습니다. 왕자님께서는 모르는 단어가 나오면 그 말을 반복하신다고.”

마담 지르젤의 따가운 눈총이 정수리로도 느껴졌다. 그녀가 나갈 때까지 절대로 고개를 들지 말자. 그렇게 되뇐 순간, 그녀가 설명을 덧붙였다.

“혼인이란, 남자와 여자가 영원히 함께하자는 약속을 하는 것이랍니다. 왕자님께서는 장차 이 나라를 함께 이끌어 갈 왕자비를 맞이하게 되실 테지요.”

“여, 영원히 함께한다고?”

아셰라드렌이 밝아진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다음에 나올 발언이 대충 예상이 가서, 나는 침음을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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