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느, 늦었어…. 다프네. 너무 느, 늦게 왔다고.”
두 남녀 중 하나였던 아셰라드렌이 의자를 넘어뜨리며 일어났다. 감옥에서 봤을 때는 사방이 어두워 몰랐는데, 샹들리에 아래에 있는 그는 병약한 미소년 그 자체였다.
창백한 낯빛과 흥분해 붉어진 눈가. 그는 감옥에서 입었던 푸른 조끼가 아닌, 빳빳한 진녹색 조끼와 어두운 갈색 바지를 입고 있었다.
울먹이며 다가온 아셰라드렌에게서는 처음 맡아 보는 향긋하면서도 우아한 비누 향이 풍겼다. 늘씬한 손가락으로 내 옷자락을 감아쥔 그가 고개를 숙여 저보다 한참은 작은 내 어깨에 얼굴을 파묻었다.
“내가 지, 지하에서 나오면… 다프네가 나를 기,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했잖아. 그런데 왜….”
“왕성이 아직 익숙지 못 해서 길을 헤맸어요. 죄송해요.”
“나, 나빴어…. 보고 싶었는데.”
며칠간의 이별로 인해 아셰라드렌의 애정 결핍은 극에 달해 있었다. 그는 곁에 있던 프리지어의 시선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내게 칭얼거렸다.
커다란 등에 시야가 가려져 프리지어가 무슨 표정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왠지 모르게 그녀가 신경이 쓰였던 나는 아셰라드렌을 슬쩍 밀어내고야 말았다.
“그래도 앞으로는 쭉 함께예요. 프리지어 님 덕분에….”
“다, 다시 예전처럼 할 수 있어? 가, 같이 일어나 아침을 먹고, 글공부를 하고, 청소도 하고.”
영문을 모르는 아셰라드렌은 내 손을 덥석 잡고 물었다. 허여멀건한 안색에 빛이 도는 듯했다. 혹시 프리지어에게 우리가 한 침대에서 잠을 자고는 했다는 걸 말한 건 아니겠지. 순진한 왕자는 그게 뭐가 잘못된 건지도 모를 터였다.
“아마도요. 그보다 식사는 하셨을까요? 허리가 더 얇아지신 것 같아 걱정이에요.”
나는 방문 앞에 뿌리라도 내린 것처럼 서 있는 그를 이끌며 자연스럽게 말머리를 돌렸다. 어쩜 방이 이렇게도 넓은지. 가구라곤 서로를 마주 보고 있는 소파와 벽난로, 가장자리에 세워 둔 피아노밖에 없는 걸 보니 이곳은 응접실용으로 사용하는 공간인 듯했다.
이름 없는 성의 우중충한 분위기에만 익숙해져 있던 나는 따스한 빛이 쏟아져 들어오는 화사한 공간 속에 압도되었다. 아셰라드렌은 대체 어떻게 그를 둘러싼 세계가 이렇게나 달라진 것을 보고도 아무렇지 않을 수 있는 걸까?
난 왠지 숨이 막히고 심장이 두근거렸다. 있어서는 안 될 장소에 발을 내디딘 기분이라고나 할까.
“아직 드시지 않았다. 네가 오기 전에는 물 한 모금도 대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리셨어.”
우스테 후작가의 응접실마저도 이 정도로 화려하게 꾸며져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직 왕실 측에서 환영받지도 못하는 왕자가 사용하는 공간이 이 정도인데, 국왕 부부가 쓰는 방들은 과연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신기해하고 있는 사이, 레티스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답했다. 과연 그녀의 옆에는 손도 대지 않은 다 식어 버린 차가 한 잔 놓여 있었다. 내가 처음 방 안에 들어왔을 때 아셰라드렌이 앉아 있던 자리였다.
“세상에, 왜 그러셨어요. 그렇게까지 하지 않으셔도 저는 왔을 텐데.”
“하, 하지만 난… 네가 아닌 사람들을 믿을 수가 없는걸.”
감옥에서는 심하게 더듬대던 말투가 조금은 안정적으로 바뀐 듯했다. 그러나 그가 이곳에서 내뱉는 말들은 매번 나로 하여금 프리지어의 눈치를 보게 만들었다.
아셰라드렌은 여전히 나와 둘이서 이름 없는 성에서 지냈던 나날들에 머물러 있었다. 이걸 어떻게 하면 좋지. 나는 왕자를 향해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갑자기 다프네를 모, 못 보게 하지를 않나. 이번에도 야, 약속은 했지만, 언제 또 다프네랑 나를 떨어뜨릴지….”
“안심하세요, 왕자님. 제가 있는 한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저는 왕자님과 다프네의 사이에 형성된 깊은 관계성을 이해하고 있답니다.”
불안한 듯 중얼대는 아셰라드렌을 막으며 프리지어가 일어섰다. 제 가슴께에 손을 올린 그녀가 말을 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저 하나는 믿어 주세요. 저만큼은 왕자님께 약속드린 대로 다프네를 불러왔잖아요.”
“그, 그건 그렇긴 한데.”
“그러니 앞으로도 잘 부탁드릴게요. 다음번엔 오늘처럼 다프네가 오지 않았답시고 제가 말을 걸어도 무시하기 없기예요.”
“…그, 그런데 혀, 형성이 뭐야?”
아셰라드렌은 곧바로 프리지어의 부탁을 무시하며 물었다. 순간 그녀는 할 말을 잃은 듯 가만히 눈을 깜빡이기만 했다. 그러다 크게 숨을 들이켜며 애써 침착하게 답했다.
“만들어진, 이라고 하면 이해하기가 쉬울까요.”
“다프네와 나 사이에 만들어진… 과, 관계성.”
“관계성이라는 게 뭔지 또 설명해 드려야 하나 보네요. 음, 관계성이란.”
그렇게 말하고 프리지어는 말문이 막히는지 입을 닫아 버렸다. 당연했다. 나도 그렇지만 그녀도 전문적으로 남을 가르치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지 않았다.
프리지어는 난감한 눈을 하고 나를 쳐다보았다. 도도하고 싸늘해 보이기만 했던 붉은색 눈이 처음으로 귀엽게 느껴졌다.
“조만간 후계 교육을 받으신다고 들었어요. 그때 물어보시면 어떨까요?”
“아… 그, 그럴까? 하지만 내가 할 수 있을지.”
“할 수 있어요. 왜 못 해요. 제가 옆에서 지켜봐 드릴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그, 그렇다면야.”
단순한 성격의 왕자는 내가 은근슬쩍 넘어가려고 하는 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일단 이렇게 정리하면 되려나. 나는 프리지어를 향해 옅게 웃어 보였다.
그러나 그녀는 나를 보지 못한 듯 아셰라드렌에게 집중했다.
“지내기 힘든 곳에서 막 나오셨으니 오늘은 쉬시는 편이 좋겠어요. 식사를 이쪽으로 가져오라 일러두겠습니다. 왕자님께서는 그 뒤에 옆방으로 가시면 돼요.”
“여, 옆방에 뭐가 있는데.”
“아까 보여 드렸잖아요. 왕자님이 쓰실 침실입니다. 다프네의 방은 침실과 이어진 작은 공간에 마련해 두었습니다. 원하시는 만큼 함께 계세요. 이제는 누구도 그것을 방해하지 않을 거랍니다.”
“그… 너, 너는 이제 어디로 가?”
프리지어와 나는 동시에 놀랐다. 아셰라드렌이 내가 아닌 누군가를 궁금해하는 일 따위는 이름 없는 성에서도 없었다. 하다못해 호의를 가지고 접근하는 예니체 경에게도 관심 하나 주지 않던 그가, 프리지어에게 호기심을 보일 줄이야.
나는 순간적으로 묘하게 씁쓸한 감정을 느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아셰라드렌이 조금씩 어른이 되어 가는 것 같기도 해서 기쁘기도 했다.
“너, 가 아니라 프리지어입니다. 제 이름도 몇 번이나 가르쳐 드린 걸로 기억하는데.”
프리지어는 허탈하다는 듯 말했다. 머쓱해진 왕자가 웅얼거렸다.
“아, 응. 프, 프리지어….”
“오늘은 이만 저택으로 돌아가려고 해요. 내일 오후에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그, 그렇구나. 알겠어. 그리고… 오, 오늘은 고마웠어.”
아셰라드렌이 예니체 경에게 저런 표정을 보여 준 적이 있었던가? 잔느나 리카에게는 심지어 끝까지 경계를 풀지 않았었다.
물론 프리지어가 엄청난 친절을 베풀기는 했지만, 꽤나 적극적으로 그녀에게 말하는 아셰라드렌이 내게는 퍽 이질적으로 다가왔다.
왕자의 인사를 받은 프리지어는 뭐 겨우 이런 걸로, 라고 하는 것처럼 입꼬리를 올리며 그에게 고개를 숙이고 나갔다. 그리고 그녀가 나가자마자 왕자는 나를 돌아보며 반색했다.
“이, 이제야 겨우 둘만 남게 됐어.”
“그러네요. 이런 데서 지내는 건 처음이라 아직 어색하긴 하지만요.”
“나, 나도 그래. 그치만 다프네가 곁에 이, 있어 준다면 버틸 수 있을 것 같기도 해.”
프리지어가 나간 뒤로 나는 한결 편안하게 응접실을 둘러보았다. 독특한 무늬가 이어진 바닥이며 척 보기에도 하나 부숴 먹으면 내 10년 치 연봉이 날아갈 듯한 의자에 머리가 다 어질했다.
그러나 태생이 왕족인 아셰라드렌은 뭐가 달라도 다른 건지 나처럼 새로운 공간을 위압적으로 받아들이지는 않는 것 같았다. 지금도 보라, 그는 사방이 황금빛으로 번쩍이는 응접실에서도 나만 바라보고 있었다.
“어디에서든요?”
“응. 가, 감옥이라 해도.”
거긴 내가 싫은데. 새삼 왕성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숲속의 작은 저택을 상상해 보며 묻던 나는 망설임 없이 답하는 아셰라드렌을 보고 상념에 잠겼다.
만약 왕성의 생활에 익숙해진 그가 나중에 가서 이곳을 떠나기 싫다고 하면 어떻게 하지. 원래의 자리를 되찾아야겠다고, 새로운 왕이 되어 이 나라를 다스려 보겠다고 하면.
“…다프네?”
“네?”
프리지어와 가까워진 아셰라드렌을 본 탓인지 괜한 불안감만 갖게 되었다. 나는 고개를 들어 걱정스레 나를 보는 그와 시선을 마주했다.
똑똑.
“실례합니다, 왕자님. 식사를 준비해 왔는데, 어떻게 할까요?”
하지만 바로 그때, 문밖에서 메이드의 목소리가 들려와 그의 신경이 흩어졌다. 아셰라드렌은 안절부절못하며 내 뒤로 쏙 숨어 버렸다.
“어, 어떻게 해?”
“어떡하냐니요…. 프리지어 님이 여기서 식사를 하라고 하셨잖아요. 안으로 들어오라고 하시면 돼요.”
“아, 안으로 드, 드, 드, 들어와…?”
“조금 더 크게요.”
“아, 안으로 드, 들어와.”
하여간 그는 아직까지도 나 없이는 아무것도 못 하는 어린아이였다. 그러나 그게 과연 언제까지 이어질는지.
나는 기분이 좋기도 하고 나쁘기도 한 양가적인 감정에 혼란스러워하며 낑낑대는 아셰라드렌의 손을 힘 있게 잡았다 놓았다.
그는 최소 대여섯 명은 되어 보이는 메이드들이 트레이를 가지고 등장하는 것에 놀라 내 손길을 깨닫지 못한 것 같았다.
“…젤라?”
나는 테이블을 세팅하는 그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기 위해 아셰라드렌과 한 걸음 떨어져 있었다. 그러다 익숙한 푸른 머리를 보고 눈을 크게 떴다. 다른 메이드들 사이에 뒤섞여 있던 젤라가 입을 벙긋거렸다.
“…어?”
그제야 나를 발견한 그녀의 눈이 동그래졌다. 젤라는 내 뒤에 있는 아셰라드렌과 나를 빠르게 훑더니 의미 모를 미소를 지으며 금박을 두른 잔을 놓았다.
다음에 만나면 또 무슨 얘기를 들을지 모르겠군. 나는 창가에 비치는 먼 산을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