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폐왕자 길들이기 (55)화 (55/123)

55화

“잠깐만요, 젤라. 잠깐이면 돼요.”

“안 돼. 얼른 짐을 정리하고 돌아가 봐야 한단 말이야.”

우리가 얼마나 심각한 대화를 나누었는지 꿈에도 모르는 젤라는 오히려 나를 닦달했다. 나는 조금 신경질이 났지만, 슬슬 아셰라드렌에게 돌아가 봐야 하는 것도 고려해 몸을 일으켰다.

“알았어요…. 실비아, 시간 나는 대로 다시 올게. 그동안 건강히 지내야 해. 식사도 잘 챙겨 먹고.”

“…명심해. 프리지어 님은 절대로 안 돼. 차라리 모르기니아 대공이라면 모를까….”

“뭐? 하지만 내가 무슨 수로.”

모르기니아 대공이 지금쯤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데, 대체 어떻게 그를 찾아가 실비아가 본 것에 대해 설명한단 말인가? 혹시 실비아는 왕국의 귀족들은 믿지 않는 걸까.

나는 망설이며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젤라가 발을 굴렀다.

“얼른 가자. 그리고 실비아, 너! 그렇게 떠들 기운이 있으면 정신 차리고 밖으로 나오란 말이야. 언제까지 우리가 네 업무까지 떠맡아야 해?”

“…미안해.”

젤라는 실비아의 사과를 듣지도 않은 체하며 방을 나섰다. 둘 사이에 끼어 난감해하던 나는 눈물 자국이 말라붙은 실비아의 뺨을 마지막으로 눈에 담았다.

“너희는 무슨 얘기를 하고 있었던 거야? 프리지어 님이니, 모르기니아의 대공이니…. 하나같이 우리가 넘볼 수도 없는 높으신 분들이잖아.”

“별일 아니에요. 아니, 사실은 별일이긴 한데.”

“말해 주기 싫어? 치, 됐어. 우리 같은 메이드들도 비밀 하나쯤은 숨기고 있기 마련이니까.”

복도에 나와 짐 가방을 들고 있자니 젤라가 물었다. 그녀는 토라진 양 볼을 부풀렸지만 꼬치꼬치 캐묻지는 않았다. 나는 젤라의 배려를 새삼 고맙게 느끼며 입을 열었다.

“그보다 실은 저, 키친 메이드의 숙소에 오려던 게 아니었어요.”

“그래. 그런가 보더라. 안 그래도 빈 침대가 하나도 없었어.”

“그걸 일일이 다 확인했어요? 괜히 고생시킨 것 같아 미안하네요.”

“너는 이름 없는 성에서 왔다고 했으니까… 우리들끼리 있을 때 네 얘기가 곧잘 나오곤 했어. 특히 아까, 그 키가 엄청 큰 기사님이 오셨을 때.”

예니체 경을 말하는 거구나. 나는 씁쓸하게 웃었다. 젤라와 수다를 떨 기분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녀는 분명 정이 많고 좋은 사람이었지만, 지금의 내 머릿속은 레티스와 프리지어로 꽉 차 있었다.

소설 속에서는 그렇게나 레티스와 가깝게 지냈던 프리지어가, 어쩌면 그녀의 죽음에 관련되어 있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을 하니 속이 답답해져 왔다.

문세나가 빙의하기 전의 레티스를 알았던 주변 인물들은, 어느 날 갑자기 사람이 뒤바뀐 것처럼 구는 그녀를 대체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틀림없이 그녀의 정체성을 의심하고 불편해했으리라.

하지만 그렇다고 사람을 죽이나? 그것도 일국의 공주씩이나 되는 사람을.

“기사님의 청혼을 받은 거지? 그분, 너를 보자마자 안절부절못하시던데.”

“네?”

“응?”

“아니, 아니에요. 그분은 저랑 같이 이름 없는 성에서 일했던 것뿐이에요.”

“그러니까! 게다가 같은 귀족 출신의 아가씨들과는 어울리지 못하는 망한 집안이라며?”

예니체 경의 집안이 아버지 대부터 보잘것없어졌다는 소리는 나도 익히 들은 바가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잖아요. 하릴없는 소녀들의 망상이란! 딴생각에 빠져 있던 나는 금세 현실로 돌아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부정했다.

“예니체 경과 저는 그런 사이가 아니에요. 저는 왕자님을 다시 모시기 위해 짐을 챙겨 온 거라고요.”

“…정말이야? 가끔 기사들이랑 맺어지는 메이드들이 있길래, 난 너도 그런 경우인 줄 알았지.”

“상상이 과해요. 아무튼, 절대 그런 거 아니에요.”

“뭐가 절대 그런 게 아닙니까?”

젤라와 숙소를 나와 걷다 익숙한 목소리를 듣고 몸을 돌렸다. 기사 치고는 조금 긴 듯한 금발에 웃고 있는 듯한 금갈색의 부드러운 눈매.

그러나 시르시안은 평소와는 달리 썩 기분이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누님의 명을 듣고 다프네 양을 찾으러 다녔습니다. 이름 없는 성에도 없고, 주방에도 없더니 이런 곳에 있었군요.”

“주방에서 오시는 길인가요? 죄송해요, 잠시 아는 메이드를 만나러 갔다 오는 참이에요.”

나는 시르시안의 등장에 바싹 얼어 버린 젤라의 옆구리를 툭툭 치며 답했다. 소설 속에서나 나올 법한 근사한 기사님의 표본을 하고 있는 그를 대면한 젤라는 말없이 눈만 도록도록 굴려 대고 있었다.

대체 또 주방에 가서 무슨 헛소리들을 늘어놓을는지. 상상만 해도 숨이 막혔다.

“괜찮습니다. 덕분에 산책했다 치지요. 그보다 뭐가 절대 아닙니까?”

시르시안은 제 기분을 내색하지 않으려는 듯 웃으며 물었다.

덕분에 산책했다는 건 그냥 예의상으로 하는 소리일까. 내가 그의 진의을 의심하는 사이, 다정한 말투에 홀딱 넘어간 젤라가 흥분해 몸을 약간 들썩였다.

“아까 주방에 다프네를 찾는 기사가 왔었거든요. 혹시 그렇고 그런 사이냐 물었더니 절대 아니라네요.”

“아아, 예니체 경 말입니까? 다프네 양은 참 기사들에게 인기가 많네요. 저도 당신을 찾는답시고 온 사방을 헤매고 다녔습니다만.”

그러는 와중에 여기저기서 뭘 많이 받았는지 그의 손에는 정성스레 수를 놓은 손수건이며 직급이 꽤나 높은 키친 메이드들이나 맛볼 수 있는 간식거리 등이 들려 있었다.

잘생긴 귀족 남자는 좋겠네. 저렇게나 많은 사랑을 받아서.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젤라에게서 한 걸음 떨어져 나왔다.

“인기는 시르시안 님이 있으신 것 같은걸요. 그나저나 왕자님은 어디에 계신가요?”

“프리지어 누님과 함께 계실 겁니다. 누님이 뭐라고 말씀하셨는지, 모처럼 얌전히 계신다던데.”

어차피 아셰라드렌은 변신해 난동을 부릴 기운도 없지 않나. 짐 가방을 고쳐 들며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시르시안이 빈손을 내게 내밀었다.

“이쯤에서 다프네 양은 제가 데려가야겠습니다. 괜찮을까요? 그러니까 이름이….”

“젤라입니다! 물론 괜찮아요. 다프네와 가끔씩 만날 수 있게 허락해 주신다면요.”

“그건 굳이 시르시안 님께 허락받지 않아도 가능해요. 제가 실비아랑 젤라를 꼭 보러 올 테니까요.”

나는 씩씩하게 대답하는 젤라를 향해 말했다. 어차피 실비아와는 레티스에 관해 좀 더 대화를 나눌 필요가 있었으니, 그 참에 젤라와도 만남을 가지면 될 것이 아닌가.

시르시안은 소리를 내어 웃더니 내게서 짐 가방을 반쯤 강제로 가져갔다.

“가시죠, 다프네 양. 더는 늦출 시간도 없습니다.”

나는 젤라와 짧은 눈인사를 나누었다. 그런 다음 긴 다리로 휘적휘적 걸어가는 시르시안의 뒤를 쫓아갔다.

시간이 촉박하다고 한 게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던지 그의 걸음걸이에는 조급함이 느껴졌다. 나는 뛰다시피 다리를 빠르게 놀리며 사과했다.

“죄송해요. 친구가 아파서 상태를 보러 가지 않을 수가 없었어요. 이름 없는 성에 갔다 곧장 돌아오라는 프리지어 님의 말씀을 듣긴 했지만….”

“많이 친한 친구였나 보네요. 제게 사과할 이유는 없습니다. 만약 다프네 양의 부재가 길어지는 바람에 부상자가 생기기라도 한다면, 그 사람에게 용서를 구하십시오.”

“…그런 일은 아마 없을 거예요. 왕자님께서 프리지어 님과 약속하셨거든요.”

시르시안은 그 이상 대화를 이어 나가지 않았다. 대신, 그는 새로운 화젯거리를 꺼냈다.

“아프다는 친구도 주방에서 일하는 메이드인가 보네요. 부엌일을 하다 다친 겁니까?”

“아니요, 그 친구는 다쳤다기보단… 공주님을 잃은 충격이 컸던 모양이에요. 아직까지 일어나지 못하고 있어요.”

“공주님과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었던 것은 아닐 테고.”

“공주님께서 아끼시던 아이였어요. 공주님의 취향에 맞는 요리를 금방 만들어 내고는 해서.”

거기까지만 말하고 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 보니 시르시안은 프리지어와 같은 우스테 후작가의 일원이었다. 실비아가 말하려던 ‘그 사람’은 프리지어 본인이었을까? 아니면 설마.

“시르시안 님은, 공주님의 사고가 있었던 날 왕성에 계셨나요?”

“저요? 저는 그 현장에 있었습니다만.”

“…네? 하지만 그다음 날 이름 없는 성에 오셨잖아요.”

“저뿐만이 아니라 모두가 그다음 날에 돌아왔습니다. 공주님이 살아계셨을 때야 이틀이 넘는 거리였지만, 그렇게 큰일을 겪고 나니 같이 간 시녀들조차 잠깐도 쉬는 시간을 가지려 하지 않더군요. 다들 한뜻으로 공주님의 시체가 상하기 전에 왕성으로… 아, 미안합니다.”

적나라한 표현에 표정이 절로 굳어졌다. 시르시안은 힐끔 나를 돌아보더니 미간에 주름을 만들었다. 저 당당한 태도만 봐서는 시르시안이 레티스의 죽음에 관련이 있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물론 그건 프리지어도 마찬가지였지만….

도대체 ‘그 사람’이 누구인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그날, 그곳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레티스의 시녀들, 기사들. 그리고 메이드들과 일꾼들과 모르기니아 대공, 그의 일행들까지.

다만 실비아의 말로 추측건대 모르기니아 대공은 레티스를 죽이지 않았다. 다음에 실비아를 보게 되면 그때는 정확히 그 사람이 누구냐고 묻기부터 해야겠다. 아까 젤라를 억지로 내보내서라도 정체를 알아냈어야 하는 건데.

답답해진 나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우리는 금박으로 장식한 화려한 크림색 문 앞에 서 있었다.

“이 안에 왕자님과 프리지어 누님이 계실 겁니다. 들어가 보세요.”

“네, 감사해요. 그런데 시르시안 님은 같이 들어가지 않으시나요?”

“누님은 저를 싫어합니다. 잠시만요.”

나를 대신해 문고리를 잡았던 그가 짐 가방을 돌려주며 뜸을 들였다. 왜 그러는 거지? 어서 문을 열지 않고? 그렇게 생각한 순간, 시르시안이 나를 내려다보며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쉬는 날을 제게 내주기로 했던 것 기억합니까?”

“아… 네, 물론이죠. 지금으로서는 과연 언제쯤 휴가를 받을 수 있을지 알 수 없긴 한데.”

“앞으로 저는 예니체 경과 번갈아 가며 왕자님의 호위를 맡을 예정입니다. 그러니 저희 둘의 시간이 맞으면 언제든 가도록 하지요. 다프네 양도 하루 종일 왕자님의 곁에 있는 건 아닐 테니.”

마치 비밀을 나누듯 내 귓가에 속삭인 그가 뒤로 물러나 문을 열어 주었다. 그러자 황금빛 의자에 앉은 눈부시게 아름다운 두 남녀가 나를 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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