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폐왕자 길들이기 (54)화 (54/123)

54화

“실비아! 실비아! 너 아직 여기에 있니?”

환자를 저런 식으로 우렁차게 불러 대다니, 역시 젤라다운 행동이었다. 나는 학을 떼며 짐 가방을 내려놓고 그녀를 따라갔다.

내가 실비아였다면 절대로 젤라가 반갑지 않을 것이었다.

“쟤 아직 있다. 이리 와 봐.”

방 안을 확인한 젤라가 내게 손짓했다. 내가 이름 없는 성에서 썼던 방만 한 크기에 좁은 침대가 네 개, 그중 가장 안쪽에 있는 침대만 비어 있지 않았다.

나는 반가운 마음에 실비아를 향해 빠르게 걸어갔다. 그녀는 침대 헤드에 기대어 앉아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우리가 왔는데도 전혀 신경 쓰는 눈치가 아니었다.

“실비아…. 너 괜찮은 거야?”

나는 제일 처음 눈에 들어오는 그녀의 앙상한 손목뼈를 보고 놀랐다. 원체 먹는 것을 좋아하던 실비아는 원래 통통하게 살이 찐 체형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그녀는 어떤가. 정말 무슨 병에 걸리기라도 한 것처럼 비쩍 말라 퀭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먼 산을 보기만을 반복하던 그녀는 나와 젤라가 제 시야를 막아설 즈음에야 우리를 올려다보았다.

활기차게 반짝이곤 했던 실비아의 눈동자가 반쯤 죽어 있었다. 버석해 보이는 마른 입술이 느릿하게 움직였다.

“다프네…?”

“세상에, 너 아프다며. 의사에게 가 보기는 했니?”

“아, 다프네. 나 어떡해. 어떡하면 좋아.”

그녀는 나를 알아보자마자 눈물을 터뜨렸다. 당황한 내가 젤라와 시선을 교환하고 있으려니, 실비아가 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레티스 공주님이 돌아가신 뒤로… 나 아무것도 못 하고 있어. 너도 이런 내가 한심하지? 응?”

“아니야. 충분히 그럴만해. 공주님께서 너를 아끼셨다며.”

“흑, 나 아직도 믿어지지가 않아. 공주님이 그렇게….”

나는 실비아의 침대에 앉아 그녀를 다독여 주었다. 대체 어떻게 하면 사람이 고작 며칠 사이에 이렇게나 살이 빠질 수 있는지 모르겠다.

풍성했던 곱슬머리도 눈에 띄게 숱이 줄어 있고, 내 품 안에 들어온 그녀의 체구는 가냘프다 싶을 정도였다. 짧게나마 아셰라드렌을 잃을 뻔한 경험이 있던 나는 비슷한 상실을 겪은 실비아의 심정을 이해할 것도 같았다.

“미안해요, 젤라. 잠시 자리를 비켜 줄 수 있겠어요?”

“뭐? 그래, 그러지 뭐. 하지만 서둘러야 해. 마담 린다께 들키기 전에 주방으로 돌아가 봐야 하잖아.”

“네, 그렇게 할게요.”

젤라는 얼떨떨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우리를 위해 자리를 비켜 주었다. 나는 젤라가 사라지기 무섭게 오열하기 시작하는 실비아를 꼭 끌어안아 주었다.

역시 한날한시에 왕성에 같이 들어와 교육을 받았던 정이 남아 있기 때문일까. 나와 둘만 남게 된 실비아는 솔직하게 제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나 아직도 잊을 수가 없어. 공주님이, 공주님이 돌아가셨던 순간 말이야.”

“사고였다며. 충격이 컸겠다. 공주님은 너를 따로 지목해 데려가실 정도로 아꼈다고 하고….”

“매번 요상한 음식을 만들어 달라고 요청하시곤 했어. 마담 린다께서도 어려워하시는 걸 내가 해낸다고, 나랑 친하게 지내고 싶으시다고….”

실비아는 훌쩍훌쩍 눈물을 닦아 내며 나를 바라보았다. 볼이 움푹해진 그녀가 뒤를 슬쩍 돌아보며 말했다.

“만약 모르기니아의 대공과 결혼하시게 된다면, 그래서 왕성을 나가야 한다면, 꼭 나를 데려가고 싶다고 하셨는데.”

“…응. 그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공주님께 넌 분명 큰 의지가 될 수 있었을 텐데.”

날 때부터 전생의 기억을 가졌을 뿐, 이 세계에서의 삶에 익숙해진 나는 딱히 전생의 음식이 먹고 싶거나 한 적이 없었다. 애초에 그럴 만한 여유도 없었다고나 할까. 고아원에서 나오는 식사나 조악한 잠자리로도 감사해야 할 처지였다.

그러나 빙의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레티스는 나와 출발선이 달랐다. 왕족이 된 그녀는 누릴 수 있는 것들이 많았다. 다만 레티스는 너무나 어렸고, 소설 속의 세상에 적응할 시간도 턱없이 부족했다.

과연 누가 새로운 삶을 곧바로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나는 레티스가 실비아를 만나고 얼마나 행복했을지 가늠도 할 수 없었다. 이제는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기억 속의 음식을 재현해 내는 실비아는 레티스에게 있어 너무나도 소중한 존재였으리라.

“…그거, 사고가 아니야.”

나는 잠시 더 이상 만날 수 없는 레티스에 대해 생각하며 울적해하다가 침묵을 뚫고 들려온 실비아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뭐라고?”

“사고가 아니라고. 대외적으로는 그렇게 알려졌겠지만….”

“아니면 뭔데? 실비아, 네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 알고 있는 거야?”

그녀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을 하고 나를 들여다보았다. 내가 고개를 저으며 다시금 물어도 실비아는 제 입장을 번복하지 않았다.

“처음엔 너무 무서워서, 나도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고 했어. 하지만, 하지만….”

“모르기니아 대공을 제외하고는 그때 공주님의 곁에 아무도 없었다며. 공주님이 그렇게 되셨을 때 대공은 이미 다른 사람들이랑 있었다고….”

“아니야! 그날 난 개인적으로 공주님이 부탁하신 음식을 만들다 그분을 찾으러 갔었어. 오르막길을 걷다 대공과 만나기도 했었는걸.”

메이드들은 있는 듯 없는 듯한 존재였다. 그래서 우리들은 귀족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은 정보를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다. 실비아는 본디 요리사였지만, 왕성에 들어와서는 줄곧 메이드복을 입어 왔다.

공주의 원정을 따라간 메이드들은 최소 수십 명은 되었을 터였다. 그중 실비아가 남몰래 움직였다 해서 누군가의 눈에 들어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돌부리도 많고 울창한 산속이었어. 그래서 아마 그자는 나를 보지 못했을 거라 생각해. 하지만 나는 봤어. 나는… 누군가 공주님을 밀치던 걸 봤단 말이야!”

“쉿, 실비아. 목소리를 낮춰. 누가 들으면 어떡하려고 그래.”

나는 화들짝 놀라 그녀를 진정시키려 했다. 레티스의 죽음은 이미 다 끝난 과거의 일이고, 그녀의 장례는 이미 옛적에 치러졌다.

사건이 있었던 날, 실비아가 곧바로 그녀가 목격한 것을 보고했다면 또 모를까. 지금 그녀의 발언은 너무도 위험했다. 심지어 그녀의 말에 따르면 레티스가 죽는 모습을 본 것은 실비아 하나밖에 없지 않은가.

이제 와서 괜히 그날에 대한 증언을 했다간 실비아의 목숨이 노려질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나도 레티스의 사고사를 줄곧 의심스러워했었다. 이 일을 어떻게 하면 좋지.

“그래서 그자가 누군지… 너는 똑똑히 본 거야? 장담할 수도 있는 거지? 나, 네가 왜 여태껏 홀로 끙끙 앓았는지 이제야 알겠어.”

나는 실비아가 안타까워 길게 한숨을 쉬었다. 오죽했으면 이렇게 피골이 상접할 때까지 혼자 틀어박혀 있었을까. 이제까지 나는 내 주위에 일어난 사건들만으로도 벅차 먼저 실비아를 찾아갈 틈을 만들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가 이런 고통을 겪고 있었을 줄이야.

나는 실비아에게 미안했다. 그리고 언젠가부터 굳이 떠올리지 않으려고 애썼던 레티스에게도 미안했다.

“봤어. 그 사람, 공주님을 그렇게 만든 뒤에도 아무렇지 않은 얼굴이어서… 얼마나 무서웠는지 몰라. 난, 난 그 길로 오금이 저려서 정신없이 도망쳤어.”

“그랬구나. 봐서는 안 될 걸 보는 바람에…. 네가 얼마나 힘들었을지 상상도 되질 않아.”

“흑, 다프네. 너라도 알아줘서 다행이야. 도저히 누구에게도 말할 수가 없었어.”

내 옷자락을 부여잡은 그녀가 정신없이 울었다. 지금 그녀에게 필요한 건 범인이 누구냐는 다그침보다 따뜻한 위로와 포옹이었다.

“말해 줘서 고마워. 이참에 나도 뭐 하나 알려 줄게. 오늘부로 난 왕성에서 살게 됐어. 너도 왕자님이 왕성으로 오신 걸 알고 있겠지?”

“응, 다른 애들이 밤에 떠드는 걸 들었어.”

“그렇다면 얘기가 빠르겠다. 나 조금 전까지 프리지어 님이랑 있었어. 우스테 후작가의 영애 말이야.”

“다, 다프네, 너 설마 그분에게 내가 한 말을 전하려는 건 아니겠지?”

“왜 아니겠어? 아니면, 내가 침묵하길 바라?”

일단 한번 세상에 알려지면 돌이킬 수 없는 사건이 될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모르쇠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홀로 외롭게 쓸쓸히 죽어 갔을 레티스를 위해서라도, 어떻게든 사실을 밝혀야 한다고. 그러나 실비아는 나와는 입장이 달랐다.

“절대 안 돼, 절대로. 하필이면 우스테의 아가씨라니…. 그분은 공주님을 싫어하셨어. 말해 봤자 우리에게 불똥이 튈 게 뻔해. 입막음 당할 거라고.”

“무슨 소리야? 프리지어 님이 그럴 리가….”

소설에 나오는 프리지어는 레티스를 아꼈다. 얼마나 아꼈냐 하면, 이건 거의 뭐 사랑이 아닌가 싶을 수준이었다. 어려서부터 함께 자랐던 그들은 자매와도 같은 우애를 과시하곤 했다.

세르시 제국으로 끌려간 레티스가 초반에는 틈만 나면 프리지어를 그리워했다는 묘사가 나올 정도였다. 그녀는 유모나 국왕 부부보다도 프리지어를 보고 싶어 했다.

그리고 그건 프리지어도 마찬가지여서, 그녀는 남주인공을 피해 골방에 숨어 있던 레티스를 지키려다 죽음을 맞이했다.

“정말이야! 내 눈으로 직접 봤으니 틀림없어. 그리고 공주님을 죽인 게 바로 그분과….”

실비아는 답답하다는 듯 소리쳤다. 공주님을 죽인 게 바로 프리지어라고? 설마, 그럴 리가 있을까. 나는 초조하게 그녀의 뒷말을 기다렸다. 그분과, 그다음은 뭐지?

프리지어와 다른 누군가가 합심해 레티스를 죽였단 말인가? 하지만 아까 실비아는 그 사람, 이라고 했지 그 사람들, 이라고 하지 않았다.

“아니, 얘들아! 너네 하루 종일 떠들어 댈 거야? 더 이상은 안 돼. 얼른 나와, 다프네!”

이어질 다음 말에 잔뜩 긴장해 있던 차에, 갑자기 등장한 큰 소리 때문에 맥이 확 풀렸다. 방문을 벌컥 열고 들어온 젤라가 성큼성큼 다가와 나와 실비아를 떼어 놓았다. 나는 다급하게 실비아를 쳐다보았지만, 그녀는 나를 외면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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