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그래서 뭐 어쨌다는 건지. 나는 초조함을 숨기고 그녀의 뒷말을 기다렸다. 프리지어의 숨결이 귓가를 간지럽혔다.
“다시 왕자님과 함께 있어 줘. 거처도 왕성으로 옮기고, 예전처럼 저분의 곁에 있어 주도록 하려무나.”
“…정말, 그래도 되는 건가요?!”
방금 내가 무슨 말을 들은 건지,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 되물었다. 이대로 아셰라드렌과 떨어져 그를 그리워하는 나날들만 계속될 줄 알았는데.
나는 커다랗게 뜬 눈으로 프리지어를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얇고 우아한 눈썹을 까딱이며 입술을 떼었다.
“어쩔 수 없잖니. 이번 나흘 동안 우리가 얼마나 많은 희생을 치러야 했는지 너는 절대 상상할 수도 없을 거야. 내 누누이 왕자님을 모셔온다 해서 일이 술술 풀릴 리는 없을 거라고, 아버지께 말씀을 드렸건만.”
화장을 짙게 하지 않았는데도 그녀의 입술은 붉고 촉촉했다. 한숨을 쉰 프리지어는 꼭 어린아이를 대하듯 왕자를 향해 말을 이었다.
“보세요, 왕자님. 이 프리지어가 왕자님을 위해 다프네를 데려왔답니다. 기억해 주세요.”
“…나, 다프네랑 가, 같이 있어도, 되, 되는 거야?”
아셰라드렌은 소심하게 물었다. 시선은 내게 있으면서도, 프리지어의 말에 따르면 그는 처음으로 그녀에게 반응해 주었다. 아름다운 귀족 여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네. 그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앞으로는 차기 왕세자로서 최선을 다해 교육을 받을 것. 모르는 이들이 찾아왔다 해서 갑자기 변신해 위협하지 않을 것. 그리고 하루에 한 번, 저와 둘만의 티타임을 가져 주실 것.”
“티, 티타임.”
“네, 그렇습니다.”
“…….”
“약속해 주실 수 있나요?”
아셰라드렌이 섣불리 대답하려 하지 않자, 프리지어는 말없이 나를 쳐다보았다. 그건 마치 나를 통하지 않으면 역시 왕자와는 소통할 수 없겠구나, 하고 굳게 믿고 있는 듯한 눈빛이었다.
“왕자님께서는 티타임이 뭔지 모르세요.”
나는 간단히 아셰라드렌을 대변해 주었다. 프리지어는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아아, 그러니? 티타임이란 차를 마시는 시간을 말하는 것이랍니다. 혹시 이름 없는 성에서는 그런 시간을 가져 본 적이 없으신가요.”
“이, 있어. 다프네랑 가, 가끔….”
“좋아요. 그걸 내일부터 저랑 하시는 거예요.”
“…다프네가 아니면 시, 시, 시, 싫은데.”
“그렇다면 왕자님은 계속 감옥에 갇혀 계셔야 할 텐데요. 그렇게나 총애하시는 다프네와도 함께하실 수 없어요.”
당당하게 대꾸하던 아셰라드렌이 입을 꾹 다물었다. 그가 애처로운 눈을 하고 나를 쳐다봤다. 내가 없는 자리에서 누군가와 있어 본 적이 없던 그에게는 프리지어의 제안이 썩 달갑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 알겠어. 그, 그렇게 하, 할게.”
그러나 결국 그는 그녀가 원하는 답을 내어 주어야만 했다. 싫은 기색으로 가득한 억지 대답이었다. 프리지어는 반색하며 나를 잡아 일으켰다.
“지금 당장 어른들께 말씀드려 왕자님을 새로운 방으로 안내해 드리지요. 다프네는 잠시 빌려 가겠습니다. 이 아이도 새로운 거처를 위해 짐을 싸야 할 테니까요.”
“자, 잠시가 어, 얼마나인데…?”
아셰라드렌은 혼란스러워하며 물었다. 다급하게 나를 따라 일어난 그가 철창을 휘어 버릴 기세로 세게 붙들었다. 프리지어는 고작 메이드 하나에 비정상적으로 집착하는 아셰라드렌을 보고도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았다.
“왕자님이 새로운 방에 가실 즈음엔 이 아이도 그 방에서 왕자님을 기다리고 있을 거랍니다.”
“으… 미, 믿어도 되는 건지 모, 모르겠어.”
“어머나, 당연히 믿어 주셔야죠. 말씀드렸잖아요. 어른들이 반대하는 것도 뿌리치고 제가 다프네를 불러왔다고.”
그녀는 꽤 능수능란하게 그를 다루었다. 불안해하는 아셰라드렌이 나를 계속해서 힐끔대기만 하는 것을 보고도 조용히 웃고 있기만 했다.
결국 이번에도 아셰라드렌은 프리지어가 원하는 답을 내어 주었다. 마지막까지 망설이던 그가 더듬더듬 웅얼거렸다.
“아, 알았어. 미, 믿을게. 그, 그러니까….”
“좋아요. 현명한 선택이십니다.”
프리지어는 그 길로 내게 팔짱을 끼고 돌아섰다. 아셰라드렌에게 나중에 보자는 말을 할 기회 따위는 주어지지 않았다.
그가 멈칫거리며 나를 부르려고 하는 것을 보고도, 프리지어가 힘을 주어 나를 끌고 간 탓이다. 그녀는 습기로 가득한 데다 오한이 돋을 만큼 쾌쾌한 감옥에서 빠져나올 때까지 한마디도 입을 열지 않았다.
“저, 실례인 줄은 압니다만.”
나는 철문을 나서자마자 걸음을 멈추었다. 물론 나도 프리지어가 굉장한 권세가의 여식인 건 알고 있었으나, 그럼에도 아까부터 계속 의문이 이는 점이 있었다.
“국왕 폐하께서 직접 왕자님을 감옥에 보내라고 하신 게 아니던가요? 그런데 이렇게 왕자님의 거처를 결정해도 되는지….”
“폐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적은 없어. 그냥 당신 눈앞에서 치우라고 명하셨을 뿐.”
프리지어는 그게 뭐 대수냐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한결 안심한 나는 그녀의 눈치를 보며 뒤로 물러섰다.
“감사드립니다, 프리지어 님. 덕분에 왕자님과 다시….”
“착각하지 마. 나라고 좋아서 이런 결정을 내린 게 아니란다.”
철문 밖에는 그녀의 시녀들이 있었고, 나는 그들의 따가운 눈총을 받으며 슬그머니 침묵해야만 했다. 왕자의 앞이 아닌 지금, 프리지어가 내게 친절할 이유는 없었다. 그녀는 콧대를 치켜들고 인상을 썼다.
“꽉 막힌 노친네들이 답답해서 이러는 거야. 멍청한 왕자를 세워 두고 꼭두각시 인형 놀음이나 하려던 것들. 하나 우린 유폐된 왕자에 대한 정보가 너무도 부족했어.”
“…예상했던 것보다 왕자님을 다루기가 어려웠기 때문인가요?”
“그래. 날뛰는 족족 기둥을 무너뜨리고 벽을 박살 내시는데, 누가 감히 그분을 막아서겠니? 죽고 싶은 게 아니라면 말이야.”
그래서 그들은 다시 내가 필요해진 것일 테지. 이용당하는 처지를 뻔히 알면서도, 나는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런 식이 아니었더라면 내가 아셰라드렌과 마주할 확률은 0에 수렴했을 것이다.
“실제로 지금쯤 생사를 오가고 있는 기사도 더러 있고… 하아, 이제 와서 뭘 어쩌겠니. 너는 어서 가서 짐을 챙겨 와. 왕성에 오면 우리 가문 사람을 찾으려무나.”
귀족 영애와 대화를 해 본 적은 손에 꼽을 만큼 적었다. 나는 서늘한 인상의 미인에게 괜한 트집을 잡히고 싶지 않아 묵묵히 그녀가 늘어놓는 불평을 모두 들어 주었다.
“아버지에게 갈 거야.”
이내 그녀는 제 시녀에게 목적지를 알린 뒤 나를 두고 자리를 떴다. 프리지어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고개를 숙이고 있던 나는 주위에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을 무렵에야 고개를 들었다.
“…나도 서둘러야지.”
그러고는 기쁨에 겨워 이름 없는 성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숨 막히는 더위가 이렇게나 반갑게 느껴지는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
고작해야 드레스 몇 벌이 전부인 짐 가방을 들고 왕성에 도착했을 때, 나는 생각지도 못한 문제에 직면해야 했다. 메이드들은 왕성의 메인 출입구로 오갈 수 없고, 따라서 나는 뒷문을 통과해야 했다.
그리고 뒷문을 지나면 가장 먼저 나오는 곳은 주방이었다. 예니체 경이며 아셰라드렌과 재회를 하느라 깜빡 잊고 있던 나의 원래 일자리.
혹시나 주방 소속의 누군가에게 들켜 복잡한 일이 생기지는 않을까. 조심스레 살금살금 주방 근처를 지나가던 찰나였다.
“뭐야, 다프네! 한참을 찾았잖아. 마담 린다도 노발대발하셨다고!”
평소와 다름없이 할 일은 제쳐 두고 다른 키친 메이드와 잡담을 떨고 있던 젤라가 순식간에 나를 발견해 쫓아왔다.
“미, 미안해요.”
이거 골치 아프게 됐군. 나는 젤라에게 무슨 설명을 해야 하나 빠르게 머리를 굴리며 사과했다. 양손을 허리에 올린 채 씩씩대던 그녀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나를 잡아당겼다.
“그 짐은 또 뭐고? 하여튼, 얌전하게 생겨선 은근히 눈에 띄는 짓만 골라 한다니까. 따라와!”
“어, 어디로 가는데요? 전 따로 가야 할 곳이 있어요.”
“말하나 마나지. 근무 시간 중에 숙소를 옮길 생각을 하다니. 아주 앙큼해. 응?”
젤라는 우리가 가는 곳을 남들에게 들켜서는 안 된다는 양 쉬쉬거리며 걸음을 서둘렀다. 나는 중간중간 그녀를 멈춰 세우려고 했지만, 청소 메이드나 했던 내가 매일같이 묵직한 포대를 나르는 젤라의 힘을 이길 방도는 없었다.
“아… 저기, 젤라. 숙소를 옮기는 건 맞지만, 그게 키친 메이드들의 숙소는 아니에요.”
“뭐래? 잔말 말고 따라와. 마담 린다께 들켰다간 나까지 끝장이야.”
그녀는 기어코 키친 메이드의 숙소에 나를 데려갔다. 그러고는 나를 복도에 세워 둔 채 양옆으로 줄지어 늘어선 방들을 싹싹 뒤지기 시작했다.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침대가 비었다는 소리는 듣지 못했는데 말이지. 혹시 점심시간을 틈타 튀어 버린 메이드가 있나? 마담 린다의 성질을 못 이겨서.”
젤라는 내게도 들릴 만큼 큰 목소리로 혼잣말을 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이 시간대의 숙소는 텅 비어 있다는 점이었다. 나를 위해 저렇게 애써 주는 젤라가 고마웠다. 그러니 더 늦기 전에 사실을 고백해야 했다.
“아니면… 설마 드디어 실비아가 나갔으려나?”
“실비아…. 실비아가 아직 여기에 있나요?”
하지만 젤라의 입에서 반가운 이름이 튀어나와 나는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고 보니 내내 병가를 냈었다고 했었지. 이왕 여기까지 온 거 실비아를 만나 보고 가는 편이 좋을 듯싶었다.
“몰라. 나도 본 지 좀 됐어. 밖에 나오는 법이 있어야지. 맨날 침대 속에 틀어박혀선.”
“레티스 공주님의 유해와 돌아온 뒤로 쭉 아팠다면서요. 젤라, 저는 실비아와 같은 날에 왕성에 들어왔어요.”
“걱정되니? 어쩌면 이미 여기에 없을 수도 있는데.”
젤라는 쯧쯧 혀를 차며 나를 돌아보았다. 그러고는 아마도 실비아가 쓰는 방이지 싶은 곳의 문을 휙 열어젖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