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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왕자 길들이기 (52)화 (52/123)

52화

아셰라드렌이 있다는 감옥 안을 내다봤을 때, 처음으로 눈에 들어온 것은 점토처럼 푹 파인 벽이었다. 저게 저런 식으로 될 수도 있는 건가.

그러나 자세히 보니 발톱 자국이 선명했다. 아셰라드렌의 짓인 게 분명했다.

나는 서서히 감옥 안을 둘러보다 눈을 내렸다. 그러자 주위와는 전혀 어울리지도 않는 화려한 수가 놓인 두툼한 이불이 보였다.

이불이 살짝 솟아 있었으니 그 아래 있는 건 아셰라드렌일 것이다. 나는 창살을 양옆으로 밀어내며 큰 목소리를 냈다. 그렇게 하면 창살이 밀려나 나와 그의 사이를 좁힐 수 있을 것만 같아서.

“왕자님! 눈 좀 떠 보세요. 저예요, 제가 왔어요. 다프네가 왔다고요.”

아셰라드렌은 스스로 세상으로부터 단절된 것처럼 보였다. 이불 속에 있는 그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갑자기 얼굴에 열이 몰리며 눈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나는 창살을 쿵쿵 세게 두드렸다. 어떻게든 아셰라드렌의 상태를 확인하고 싶었다.

“왕자님, 왕자님! 아셰! 아셰라드렌!”

“…흣.”

목이 터져라 그를 불렀을 때였다. 들릴 듯 말 듯 작게 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는 철창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그에게 닿을 만한 거리는 아니었다. 그래도 혹시나 싶어서, 나는 창살에 끼인 어깨가 아려 오는 것을 억지로 참아 냈다.

“일어나 봐요, 왕자님! 제발요. 얼굴 좀 보여 주세요….”

“…다, 프네?”

어느덧 내 목소리에는 울음이 섞여 있었고, 눈을 뜬 왕자가 이불을 걷고 나온 것은 한참이 지난 뒤였다. 나흘 내리 식음을 전폐했다는 말이 거짓은 아니었는지 그는 마지막에 봤을 때보다 훨씬 수척해져 있었다.

아셰라드렌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부릅뜨고 나를 쳐다봤다. 이윽고 그의 눈가가 붉어지더니 굵은 눈물방울이 툭 떨어졌다.

“마, 말도 안 돼. 저, 저, 정말 다프네야?”

“네, 왕자님. 정말 다프네예요…. 보고 싶었어요.”

“나, 나도…. 윽, 다시는, 다시는 못 보는 줄 아, 알았어.”

왕자는 아이처럼 울었다. 불안하게 떨리는 눈빛은 좀처럼 내게서 떨어지질 못했다. 조금만 더 가까이 내게 다가와 줬으면 하건만, 그는 나를 빤히 바라보며 계속해서 눈물을 흘리기만 했다.

“무, 무, 무서웠어… 모, 모르는 사람들이 자꾸 차, 찾아와서, 나, 나는 다프네를 불러 달라고 했는데.”

“예니체 경에게 전해 들었어요. 어쩜 다들 그러실 수가 있지? 이해가 안 돼요. 왕자님은 이렇게나 여리신 분인데, 감옥에다 집어넣기나 하고….”

“저 비, 빌어먹을 것을, 다, 당장 자기 눈앞에서 치, 치우라고 말했어.”

“…누가요?”

극도로 쇠약해진 왕자는 이름 없는 성에서 지냈을 때보다 더 심하게 말을 더듬고 있었다. 시야가 흐려진 탓에 나를 보기 힘들었는지, 그는 거칠게 제 눈가를 닦으며 무릎걸음으로 내게 다가왔다.

“아, 아바마마….”

“국왕 폐하를 만나셨구나. 그런데 폐하께서 그런 말씀을….”

믿을 수 없는 언사였다. 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철창 사이로 내밀었던 팔을 빼냈다. 어깨가 너무 아팠다.

그러나 내 손이 채 다 빠져나가기 전에 아셰라드렌이 덥석 나를 붙들었다. 건조하고 딱딱한 손이었다. 이름 없는 성에 있을 때만 해도 곱고 부드럽기만 했었는데.

“사, 상관없었어. 어, 언젠가 아바마마를 만나게 된다면… 더 시, 심한 소리를 들을 줄 알았으니까.”

“그것도 이미 충분히 심한 소리예요. 세상에, 저 너무 속상해요….”

“우, 울지 마. 다프네.”

“왕자님이나 울지 말아요. 대체 이게 뭐야. 손까지 말라서는.”

그쯤에서 나는 슬퍼서 우는 것이 아니라 화가 나서 울고 있었다. 골이 아플 정도로 열이 오르는데도 눈물을 그칠 수가 없었다.

나는 양손으로 왕자의 손을 부여잡았다. 커다랗고 따뜻하기만 했던 손이 이제는 뼈가 툭 불거져 나와 있었다.

“그래도 식사는 꼬박꼬박 챙겨 드셨어야죠. 예쁜 얼굴이 반쪽이 됐잖아요. 옷은 또 왜 그래요? 누가 갈아입혀 준 거예요?”

감옥으로 옮겨질 때만 해도 늑대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길래, 이불을 들추고 나오면 당연히 나체일 줄 알았다.

하지만 그는 제 체격에 꼭 맞는 셔츠에 새파란 조끼까지 차려입고 있었다. 다만 감옥 바닥이 청결치는 못해 군데군데 검댕 같은 것을 묻힌 채였다.

“모, 몰라. 깨어나 보니까 이, 입고 있네.”

“편해 보이지도 않는 옷이네요. 갑갑하지 않으세요?”

“다프네를 보느라… 가, 갑갑한 줄도 몰랐어.”

금실이 수놓아진 푸른 조끼는 그가 전에 입던 복식과는 너무도 달랐다. 움직이기 편한 셔츠만 입던 그가 이제는 어엿한 왕자님 같은 차림을 하고 있었다.

다시 만난 장소며 상황이 이따위라 그렇지, 그게 아니었다면 나도 아셰라드렌의 미모에 감탄을 금치 못했을 것이다. 예민해진 분위기며 불그스름한 눈꼬리가 꼭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왕자는 물기가 맺힌 눈을 접어 웃었다.

“그렇게 웃지 마세요. 제 속도 몰라주시고.”

“다, 다시 보니까 기, 기뻐서.”

그도 내 손을 두 손으로 감쌌다. 그러고는 고개를 숙여 손등에 뺨을 비비적거렸다. 불쌍해 죽겠네. 애정을 갈구하는 버려진 강아지처럼 느껴진다.

“그, 근데 여기는 어, 어떻게 온 거야?”

“예니체 경이 데려와 주셨어요. 왕자님이 식사도 안 하시고, 말도 안 하신다고 해서.”

“그, 그러길 잘했네.”

“잘하긴 뭐가요! 안색이 이렇게 창백하신데.”

“난 워, 원래 하얀데…?”

내가 갑자기 소리를 크게 내자 아셰라드렌은 깜짝 놀라며 대꾸했다. 그걸 대꾸랍시고 한 건진 모르겠지만.

“그 뜻으로 하는 말이 아닌 거 아시잖아요. 그래서 앞으로도 쫄쫄 굶으실 거예요? 계속 늑대로 변신해서 사람들을 위협하고?”

“나 왜 호, 혼나…?”

“잘못하셨으니까 그렇죠. 정말이지, 매일 밤마다 어디서 뭘 하고 계신가, 적응을 잘하고 계신가 걱정했단 말이에요.”

“미, 미안해. 화내지 마. 오, 오늘부터는 잘 챙겨 먹을게. 그러니까… 다프네도 다시 내 곁에 이, 있어 줘.”

그의 부탁은 거절했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나야 당연히 그러고 싶지. 나는 아셰라드렌과 떨어져 있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게 내가 원한다고 해서 될 일인가. 애초에 우스테 후작이 나만 이름 없는 성에 남겨 두고 간 것은 아셰라드렌과 나를 떨어뜨리기 위해서였지 않나.

“응? 마, 말썽 부리지 않을게. 벼, 변신도 하지 아, 않을 거야. 며, 며칠 동안 알게 됐어. 난 화, 화가 나면 커다랗게 변해.”

“…사람들이 무서워하진 않던가요?”

“어, 엄청 무서워하던데. 역시 난 괴, 괴물인가 봐.”

“아뇨. 괴물은 그 사람들이에요. 왕자님은 잘못하신 거 하나도 없다고요. 말썽 좀 부리면 어때요? 아직 어리신데.”

“…아, 안 어려. 난 다 커, 컸다고.”

최근의 전적이 무색하지도 않나. 왕성을 다 때려 부술 것 같아서 지하 감옥에 갇혔다더니만. 말없이 그를 쳐다보기만 했더니 아셰라드렌은 급히 입술을 오물거렸다.

“다프네만 있으면 난… 뭐, 뭐든 할 수 있어.”

역시 왕자는 사랑스럽다. 이런 그를 감옥에 남겨 두고 가야 한다는 사실을 믿고 싶지 않았다. 부디 모두가 왕자에게는 이런 면도 있다는 걸 알아주었으면 했다. 나는 한 손을 들어 대리석같이 매끈한 그의 뺨을 쓸어내렸다.

“저도 그래요. 저도 왕자님만 있으면….”

하지만 말을 끝맺지는 못했다. 또각또각, 예니체 경이 있던 방향에서 구둣발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움찔거리며 재빨리 아셰라드렌을 놓아주었다. 그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나를 쳐다보았다.

“왜….”

아셰라드렌이 창살 밖으로 손을 구겨 넣었을 때였다. 시야가 점점 밝아지더니 횃불을 든 기사가 나타났다. 면회 시간이 끝났으니 돌아가라는 건 아니겠지.

불안한 시선으로 기사를 보던 나는 그 뒤에서 홀연히 모습을 드러내는 프리지어와 눈이 마주쳤다. 조금 전의 구둣발 소리는 그녀의 것이었던 모양이다.

“왕자님이, 너랑은 말을 참 잘하시는구나.”

하얀 레이스가 겹겹이 덧대어진 검붉은 드레스를 입은 프리지어. 긴 금발을 등 뒤로 늘어뜨린 그녀는 새빨간 공단으로 만든 머리띠를 하고 있었다.

새삼 이복동생인 시르시안과는 다른 차가운 인상의 미인이다 싶었다. 시르시안은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따스한 분위기를 풍겼는데. 어쩌면 그건 그가 베푼 과도한 친절을 받은 나만의 착각일 수도 있겠지만.

“…안녕하세요, 프리지어 님.”

“됐어, 일어나지는 마라. 이름 없는 성에서 본 뒤로 처음이지?”

프리지어는 예의를 갖추려 몸을 일으키던 나를 말렸다. 그녀의 시선은 곧바로 아셰라드렌에게 이어졌다.

그러나 왕자는 프리지어의 등장을 완벽하게 무시하고 있었다. 보랏빛 눈동자는 내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아셰라드렌은 끙끙거리며 입술을 마구 씹어 댔다.

“아버지께 너를 불러 달라고 한 건 나야. 아무리 생각해도 왕자님이 가여워서.”

“감사합니다. 프리지어 님의 배려 덕분인 줄은 모르고 있었어요.”

나는 지하 감옥의 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상체를 숙여 인사했다. 다시 몸을 들자 프리지어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주변 환경과는 어울리지도 않게 또각또각 경쾌하게 걸어와 내 옆에 다가섰다. 그러고는 손을 내려 내 어깨를 살며시 짚었다.

“안녕하세요, 왕자님. 어제도 뵈었었죠? 프리지어 라 우스테입니다.”

“…….”

그제야 아셰라드렌이 별수 없다는 듯 그녀를 쳐다봤다. 하지만 이내 흥미를 잃고 나를 다시 바라봤다. 프리지어는 짧게 숨을 내쉬며 내 어깨를 살짝 흔들었다.

“봤니? 나나 아버지가 계속 말을 걸어도 대꾸조차 하지 않으셔. 국왕 폐하가 왔을 때는… 뭐, 그때는 사람이 아니셨으니 넘어가고.”

고개를 조금만 들면, 나를 내려다보는 새빨간 눈동자를 마주할 수 있었다. 프리지어는 흘러내린 내 옆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 주며 눈부신 미소를 지어 보였다.

“지금 보니 확실히 알겠어. 널 이름 없는 성에 두고 온 게 불찰이었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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