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그럴 리가요. 제가 하루 종일 주방에서만 산다는 걸 아시잖아요.”
“알다마다. 농담이었단다. 그렇게 딱딱하게 굴지 말거라.”
뭐야. 70년 평생 농담이라고는 해 본 적도 없으실 것 같은 분이.
나는 억지 미소로 마담 린다에게 답한 뒤 식당을 빠져나갔다. 그러고는 땀을 비 오듯이 흘리고 있는 검은 머리의 기사를 발견해 걸음을 서둘렀다.
“예니체 경…?”
“다프네 양? 깜짝 놀랐습니다. 주방에서 일하고 있을 줄은.”
그럴 의도는 아니었지만, 예니체 경에 대해서는 며칠 동안 깜빡 잊고 살았다. 키친 메이드로서의 나날이 휘몰아치듯 이어진 탓이다.
이름 없는 성에서 나간 며칠 사이, 예니체 경은 잘 챙겨 먹지도 못하고 충분한 수면을 취하지도 못한 것처럼 얼굴이 까칠해져 있었다.
정돈되지 않은 검은 머리칼, 나를 보자마자 아래로 축 처지는 짙은 눈썹. 그는 눈에 띄게 나를 반가워하며 씁쓸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다프네 양에게 상황을 알려 줘야지, 시간이 나는 대로 찾아가야지, 하고 계속 염두에 두고 있었습니다. 하나 우스테 후작께서 왕자님의 호위를 제게 맡기는 바람에.”
“왕자님은 잘 지내고 계신가요? 지금은 어디에 계세요?”
“저, 그게.”
나는 예니체 경이 아셰라드렌을 입에 담자마자 허겁지겁 물었다. 그러다 난감해하는 표정을 보고 뒤늦게 내 상황부터 설명했다.
“그날, 그렇게 헤어지게 된 후로 혼자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망설였어요. 왕자님도 그렇지만 예니체 경은 또 왜 안 돌아오시는 건지, 어쩜 연락 한번 해 주시질 않는지….”
“도저히 그럴 여유가 나지 않았습니다. 미안합니다.”
그는 주인에게 혼이 난 강아지처럼 소심하게 답했다. 다만 몰골을 보아하니 과연 여유가 없었다는 말이 거짓은 아닌 듯했다.
“다프네 양도 알다시피 왕자님은 낯선 이들과 마주하는 걸 극도로 꺼려 하시지 않습니까. 후작께서 새로운 시종들이며 가정 교사를 왕자님께 붙이려고 했습니다만, 그 어떤 시도도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물론 그랬겠지요. 그분께는 천천히, 시간을 두고 다가가야 하는데….”
“왕성에 오게 된 뒤로 왕자님은 다프네 양만을 찾으셨습니다. 하지만 허락되지 않으니 그때부터는 저를 곁에 두려고 하시더군요.”
“예니체 경은 여태까지 쭉 왕자님과 같이 계셨던 건가요?”
그는 긴 한숨을 내쉬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붉게 충혈된 눈이며 초췌한 낯빛만 봐도 그가 어떤 고생을 했는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낯선 장소에 끌려와, 낯선 이들에게 둘러싸인 아셰라드렌은 얼마나 무섭고 두려웠을까? 그나마 예니체 경이 있어 숨통은 트였겠지만 그래 봤자 이름 없는 성에 있던 때에 비하면 왕성에서의 생활은 혼란 그 자체였을 것이다.
나는 극도로 불안해하는 아셰라드렌에게 억지로 다가가 인사하는 귀족들을 머릿속으로 상상해 보았다. 그는 과연 사람의 모습을 유지할 수 있었을까?
“첫날에는 그래도 식사는 하셨습니다. 물론 약간의 소란은 있었습니다만, 결국에는 잠에도 드셨고요. 문제는 그다음 날부터였습니다.”
예니체 경은 떠올리기만 해도 지독하다는 듯 마른세수를 했다.
“깨어나시자마자 다프네 양을 계속 찾는데,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되지 않자 급변하여 난동을 부리셨습니다. 침대 기둥이 부러지고, 온 방 안에는 깃털이 날리고, 그분을 막으려 했던 기사들은 뼈가 부러져 나동그라졌습니다.”
“…늑대로 변하셨던 모양이에요. 기사님들께는 안된 말이지만 역시 왕자님을 그런 식으로 데려간 것 자체가 잘못됐어요.”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나마 제가 얼굴을 보였더니 잠시 얌전해지긴 하셨는데.”
하셨는데. 그다음은 뭐지? 나는 불안한 시선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예니체 경이 같이 걷자는 듯 몸을 틀어 발을 내디뎠다.
“시간이 지나도 변신이 풀리지 않아, 왕자님을 모시려 했던 이들이 점점 겁을 먹기 시작했습니다. 개중에는 도저히 안 되겠다며 꽁무니를 뺀 자도 있었고.”
“이름 없는 성에 있었을 때랑 달라진 게 전혀 없네요. 왕자님은 지금 괜찮으실까요?”
“식음을 전폐하고 으르렁대기만 하시다 결국 지쳐 쓰러지셨습니다. 그사이 기사들이 왕자님을….”
차마 뒷말을 잇지 못하고 그는 또 한 번의 한숨을 내쉬었다. 갑자기 목이 뻐근한 듯 뒷덜미를 주무르던 그가 다시 입을 뗐다.
“또다시 그렇게 날뛰었다간 왕성이 무너지겠다며 지하로 끌고 갔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왕자님을 모셔 왔던 귀족들 사이에서도 대립이 있었던 모양입니다만.”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왕자님을 대체 어디에 데려갔다는 거죠? 지하라니, 그곳엔 감옥밖에 더 있나요?”
“다프네 양이 생각하는 그곳이 맞습니다. 통제가 불가능하니 어쩔 수 없다면서.”
그러곤 예니체 경은 믿을 수 없는 말을 덧붙였다.
“왕자님의 거처를 옮기라 명하신 건 국왕 폐하셨습니다. 누구도 토를 달지 못했지요.”
“이럴 거면 왕자님을 왜 왕성에 데려온 건데요?”
설마 이런 일이 있으리라곤 예상치 못했나? 아셰라드렌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시피해서?
어이가 없어진 나는 걸음을 멈추고 허탈하게 웃음 지었다. 아직까지 제 능력조차 제어하지 못하는 왕자를 다음 국왕으로 삼겠답시고 납치해 와서는, 끝끝내 지하 감옥에 가둬 두다니.
“…왕자님이 불쌍해요. 어째서 그분이 죄인 취급을 당해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게다가 감옥에서도 날뛸까 두려웠는지 저를 간수 대신 세워 놓기까지 해서는.”
“그럼 예니체 경도 감옥에 있다 오신 거예요?”
“그렇습니다. 그러다 여타 귀족들과는 달리 왕자님을 지하에 모시는 것을 반대하셨던 우스테 후작의 명으로 다프네 양을 보러 온 겁니다.”
“잠은 좀 주무셨어요? 예니체 경이야말로 지쳐 쓰러지실 것 같아요.”
나는 힘없이 미소 짓는 그를 향해 물었다. 어째서 얼굴도 모르는 이들의 욕심 때문에 우리가 뿔뿔이 흩어져야 했는지, 예니체 경이 홀로 고생해야 했는지 알 수 없었다.
아셰라드렌이며 예니체 경을 이용해 먹으려고만 하는 귀족들에 혐오감이 들기 시작했다. 더럽고 치사해서 정말.
정작 그들은 지금쯤 손 하나 까닥하지 않고 편안하게 쉬고 있을 텐데.
“괜찮습니다. 아직까지는 버틸 만합니다.”
“별로 안 그래 보이시는데요.”
“그야 나흘째 쪽잠을 잔 것을 제외하고는 제대로 쉰 적이 없으니까요….”
“언제쯤 주무실 수 있는데요? 지금은 왕자님의 곁을 지키지 않아도 되나요?”
“왕자님은 힘이 다 풀리셨는지 이제는 변신도 하질 못하십니다. 역시 그분에게는 다프네 양이 필요해요.”
예니체 경이 다시 걷기 시작했다. 어느새 우리는 주방을 벗어나 있었고, 나는 직감적으로 그가 나를 아셰라드렌에게 데려간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이대로 그들과 함께 왕성을 벗어날 수만 있다면!
그러나 우리가 아래로 내려가면 내려갈수록 예니체 경과 같은 제복을 입은 기사들은 우후죽순으로 늘어났다.
나는 다시금 아직은 때가 아니라며 마음을 접어야만 했다. 이 삼엄한 경비를 뚫고 왕자와 도망가는 것은 기적에 가까웠다.
“…저희를 엄청나게 쳐다보네요. 꼭 무슨 죄를 저지른 것만 같아요.”
나는 까치발을 들어 예니체 경의 귓가에 속삭였다. 어느새 주위가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다. 우리는 왕성에서는 볼 수 없을 법한 튼튼한 철문 앞에 섰다.
“이름 없는 성에서 왔다는 얘기를 듣고 그러는 걸 겁니다. 왕자님을 막으려다 다친 기사들 중 대다수가 저들의 동료라서요.”
“아하, 어쩐지.”
키가 작은 내게 맞추어 고개를 숙여 준 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예니체 경은 철문을 지키고 있던 기사에게 눈짓을 보냈다.
끼기긱.
기사는 힘겹게 문을 열어 우리를 안으로 들여보냈다. 음습한 냄새가 가장 먼저 내 코를 찔렀다.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예니체 경을 따라갔다. 벽에 걸린 횃불 사이의 간격이 넓어 그를 의지하지 않고서는 제대로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왕자님은 제일 안쪽에 갇혀 계십니다. 그쪽 공간이 가장 넓거든요.”
“여기 진짜 별로네요. 이름 없는 성보다 더해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예니체 경은 중간 지점에서 멈춰 섰다. 나는 기다란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을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 컴컴한 어둠 사이에 있어서인지 그의 음성이 전에 없이 선명하게 울렸다.
“왕자님은 사람으로 돌아오신 뒤로 말 한마디 하지 않고 계십니다. 제가 말을 걸어 보아도 외면하셨습니다.”
예니체 경이 있기 때문에 더 이상의 난동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크게 나아진 것은 없었다. 그는 아셰라드렌이 누구와도 소통하지 않으려 하니 나를 데려왔다고 했다.
“그러니 가 보세요. 저는 이쯤에서 자리를 피해 주는 게 나을 것 같아서.”
“그렇네요. 혼자 가 볼게요. 예니체 경은 어디 가서 좀 쉬고 계세요. 진짜 걱정이 돼서 그래요.”
“감사합니다. 하지만….”
“얼른요.”
나는 그에게 돌아가 가슴팍을 밀어냈다. 우린 나름대로 친하니까 이 정도는 할 수 있겠지. 그보다 지하에 내려온 뒤로 내 신경은 온통 어딘가에 있을 아셰라드렌에게만 쏠려 있었다.
나는 더 이상 예니체 경을 보지 않고 서둘러 뛰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이 앞에 아셰라드렌이 있다는 거잖아. 불쌍하게, 이런 말도 안 되는 곳에 갇혀서.
“왕자님!”
거리가 좀 있긴 하지만 이곳에는 아직 예니체 경도 있고, 다른 기사들의 시선도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나는 아셰라드렌이 좋아하지 않는 호칭으로 그를 불러야만 했다.
이름 없는 성의 창문보다도 더 빽빽한 창살이라니. 몇 개의 감옥을 지나쳐 막다른 지점에 다다르자 은은하게 흘러나오는 불빛이 보였다.
저쪽이구나. 나는 새까맣게 빛나는 창살을 붙들고 소리쳤다.
“왕자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