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폐왕자 길들이기 (50)화 (50/123)

50화

“그래도 될까요? 제가 시르시안 님께 빚을 너무 많이 지는 것 같네요.”

“빚이 아니라 제 죄책감을 탕감하는 겁니다. 그 금화들은 왕자님이 다프네 양에게 남긴 게 아닙니까?”

“남겼다뇨. 그러니까 꼭 돌아가신 분의 유산처럼 들리잖아요.”

“아. 말이 이상했나 봅니다. 아무튼.”

그러니까 여전히 내게 미안해서였구나. 시르시안은 어쩜 사람이 이럴 수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착했다. 보통 이러면 뒤가 구리던데.

하지만 그는 아셰라드렌과 같이 소설에서는 딱 한 줄로 언급되기만 하고 지나가는 엑스트라였다. 오히려 그의 이복 누나인 프리지어가 레티스의 측근이라 비교적 자주 등장했었지.

나는 시르시안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은 어쩔 수 없이 그를 믿어야 했다.

왕성의 수많은 고용인들 사이에서 금화를 지켜 낼 수 있을 거란 보장 따위는 없지 않은가. 리카 때와 같은 경험은 다시는 하고 싶지 않았다.

“제가 금화를 시르시안 님께 맡기면 되는 건가요? 왜 이렇게까지 잘해 주시는지 모르겠지만… 저도 왕자님께 받은 돈을 허무하게 잃고 싶지는 않아서요.”

“글쎄요, 저를 낳아 주신 어머니도 다프네 양과 같은 메이드였기 때문일지도.”

어차피 모두가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으나 시르시안은 굳이 제 출생을 숨기려고 들지 않았다. 우스테 후작이나 프리지어는 눈이 붉던데, 그렇다면 그의 금갈색 눈동자는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것일까.

나는 갑자기 말이 없어진 그를 차분하게 기다려 주었다. 시르시안은 인상을 찡그리며 웃었다.

“저도 우스테 가문에 입적되기 전에는 어느 귀족의 저택에서 일해 왔습니다. 그래서 돈이라는 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알고 있어요.”

“그런 과거가 있으신 줄은 전혀 몰랐어요. 고생하셨겠네요.”

그러나 이제 그는 우스테 후작가의 어엿한 도련님이며 왕실 소속의 기사 중 하나였다. 다만 가문을 물려받을 젊은 귀족들은 보통 기사가 되지 않는다.

시르시안과 같은 서자 출신의 귀족은 후계자가 되기 쉽지 않다. 예외적으로 가능한 경우도 있겠지만, 내가 저택에 있을 때만 해도 차기 후작으로 거론되는 이는 프리지어였다.

“지금은 도련님 소리를 들으며 시중까지 받고 사는데요, 뭐. 고생은 앞으로 다프네 양이 할 겁니다. 마담 린다는 일적으로 꽤 깐깐한 분이라 소문이 자자하거든요.”

“저도 멀리서 뵌 적이 있어요. 빠릿빠릿하게 굴지 않으면 버티기 힘들 것 같더라고요.”

그래도 괜찮다. 철이 들 무렵부터 메이드 생활을 해 왔던 나는 그 어떤 윗사람을 만나도 살아남을 자신이 있었다.

“그보다 금화를 가져올게요. 빨리 맡기고 마음 가볍게 왕성으로 가고 싶어요.”

“은행에는 함께 가야 합니다. 다프네 양의 얼굴을 관리자가 확인해야 하기도 하고, 서명도 필요하니까.”

“어… 하지만 저 내일부터 주방에 나가야 하잖아요.”

“쉬는 날에 성 밖에서 만납시다. 그동안 금화는 제가 맡아 두겠습니다. 누가 훔쳐 갈 거란 걱정은 하지 않아도 좋아요.”

“시르시안 님은 저택에서 출퇴근하시죠? 우스테 후작저의 보안이라면 저도 알고 있으니 상관없어요.”

“망설이지 않아서 좋군요.”

당연하지. 내겐 다른 선택지가 없으니까. 나는 식당에서 기다리겠다는 그를 뒤로하고 내 방으로 돌아가 짐가방을 챙겨 왔다.

전에 세어 봤을 때 금화는 총 167개였다. 시르시안에게 돌려받았을 때도 개수는 변하지 않았었다.

이 정도 돈이면 방이 열 개도 넘는 저택을 사서 집사와 메이드를 고용한다 해도 평생 일하지 않고 놀고먹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당분간 만나지 못할 가방을 소중하게 쓸어 본 뒤 다시 아래층으로 향했다.

“어, 나와 계셨네요?”

시르시안은 식당이 아닌 계단의 끝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멀리서 보니 그도 아셰라드렌이나 예니체 경만큼은 아니지만 키가 크고 어깨가 넓었다.

최근 내 주위 남자들은 죄다 거인처럼 거대하네. 그리고 다들 잘생겼다. 꼭 역하렘 소설 속에 들어온 기분이랄까. 개중 내가 사심이 있는 건 단 하나밖에 없었지만.

“슬슬 가 봐야 할 시간이라서요. 배가 아프다는 핑계로 훈련을 빠져나왔는데, 다들 제가 변비라도 걸린 줄 알 것 같습니다.”

장난스럽게 웃은 시르시안이 내게서 가방을 건네받았다. 그렇다면 훈련장에 금화를 가져가는 건가. 괜히 불안해져 물끄러미 보고 있자니 안심하라는 듯 그가 입을 열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저택에 가방도 가져다 두고 올까 합니다. 다프네 양도 알겠지만 말을 타고 가면 금방이에요.”

“죄송해요, 저 때문에 그렇게까지.”

“이 정도면 어제 있었던 일도 없던 것으로 칠 수 있을까요?”

“…….”

“그것까진 안 되나 봅니다. 그냥 말해 봤어요.”

시르시안은 마지막으로 내게 인사를 남긴 후 성문으로 사라졌다. 그래도 덕분에 배도 부르고 새로운 직장을 얻은 데다 금화까지 맡길 수 있게 되었으니 한결 안심이었다.

혼자 남은 나는 계단에 앉아 잠깐의 휴식을 취했다. 시르시안이 오기 전보다는 훨씬 기분이 나아졌다. 내일부터 새로운 일을 시작하게 되면 울적해할 틈도 없으리라.

나는 엉덩이를 탈탈 털고 일어나 다시금 위층으로 향했다. 얼마 없는 옷이며 메이드복 등을 챙겨야 할 시간이었다.

⋆★⋆

“네가 이름 없는 성에서 일했다던 다프네냐?”

다음 날 이른 아침, 나는 백발이 성성한 노부인 앞에서 고개도 들지 못하고 슬그머니 미소 지었다. 시르시안과 마찬가지로 자택에서 출근한다는 마담 린다는 가장 낮은 급의 메이드보다도 더 이른 시간에 이미 주방에 도착해 있었다.

“네, 마담.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시답잖은 겉치레는 그걸로 되었고.”

그녀는 내 인적 사항이 적힌 서류를 대충 넘겨 보더니 불쑥 내게 주름진 얼굴을 들이밀었다.

“이름 없는 성에 갔던 메이드들은 대다수가 사흘을 채 넘기지 못한 것으로 안다. 너는 그곳에서 꽤 오래 버텼으니 배짱 하나는 두둑하겠구나.”

“…별로 그런 것도 아닙니다. 이름 없는 성의 업무는 어렵지 않았어요.”

“그건 나도 알아! 하지만 여기는 일이 아주 많다. 너는 경력은 길지만 주방은 아예 처음이라지? 바닥 청소부터 돕거라.”

마담 린다는 서류를 내려놓고 말했다. 그런 그녀의 뒤에는 어제 내게 사과를 주었던 젤라가 서 있었다.

“젤라! 가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보여 주려무나. 어제처럼 또 잡담할 생각일랑 말고!”

“네, 마담.”

화들짝 놀란 젤라가 답했다. 나는 마담 린다가 돌아서기 전에 그녀를 붙잡았다.

“실례합니다만, 제가 아직 이름 없는 성에 머물고 있어서요. 주방으로 소속을 옮겼으니 숙소도 바뀌어야 할 텐데, 어떻게 할까요?”

“…어디 보자. 키친 메이드들의 숙소에 빈방이 남아 있던가?”

그녀는 젤라를 향해 물었다. 그러나 젤라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마담. 저번 주에 새로 들어온 메이드들도 있잖아요. 숙소가 완전히 꽉 찼어요.”

“그럼 우선은 이름 없는 성에서 지내야겠구나. 어차피 그쪽엔 아무도 관심이 없어. 네가 머문다고 해도 뭐라 할 이 없을 게다.”

이럴 줄 알았으면 어제 짐 안 챙겼지. 나는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마담 린다는 문득 떠올랐다는 듯 젤라를 쳐다보았다.

“실비아는 오늘도 숙소 밖으로 나오지 않았더냐? 벌써 며칠째인지, 쯧.”

마담 린다가 혀를 차며 인상을 구겼다. 그녀는 출근하지 않는 실비아가 답답하다는 듯 불평했다.

“그 아이가 음식 솜씨 하나는 나쁘지 않았었는데. 레티스 공주님의 입맛을 거의 완벽하게 사로잡았었지, 아마.”

“그러게 말이에요. 공주님과 모르기니아 대공을 맞이하러 갔다 온 후로 사람이 좀 피폐해졌어요. 살도 쭉 빠지고.”

“공주님의 죽음이 그 아이에게 영향을 끼친 게야. 불쌍한 것. 그분이 살아 계셨다면 미래에 전속 요리사가 될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마담 린다는 내가 전에 실비아를 보러 왔을 때, 그녀가 있던 자리를 가리켰다. 그러다 정신을 차리고는 소리쳤다.

“예끼! 젤라, 너 때문에 나까지 시간 낭비를 하고 있잖니!”

“네? 하지만 마담이 먼저 실비아에 대해 말씀하셨잖아요!”

젤라는 억울해하며 되받아쳤지만, 기어코 마담 린다의 꿀밤을 한 대 맞고 말았다. 그러고 보니 나도 신경 쓰여. 나는 금세 자리를 뜨는 마담 젤라를 멀거니 바라보다 실비아에 대해 떠올렸다.

시간이 생기면 실비아를 보러 가야겠다. 잔느도 그렇게 된 참에, 이제 나와 같이 왕성에 들어온 건 실비아밖에 남지 않았다.

“다프네, 네가 주방 소속이 될 줄은 몰랐어. 미리 말해 주지 그랬어?”

어제부로 친분이 생겨서 그런지 젤라는 선뜻 내게 다가왔다. 그녀는 청소 도구함이 있는 곳으로 나를 이끌며 투덜댔다.

“저도 젤라를 만났을 때는 이렇게 될 줄 몰랐는걸요. 어쨌거나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숙소도 같이 쓰면 좋을 텐데. 나, 네가 예쁘고 예의 발라 보여서 마음에 들었거든.”

“왜 그래요, 젤라가 훨씬 예쁘면서.”

나는 별 의미 없는 수다를 이어 가다 긴 빗자루를 받아 들었다. 젤라는 커다란 입으로 깔깔 웃으며 내 옆구리를 팔꿈치로 찍었다.

“뭐래. 그냥 하는 말인 줄 알면서도 기분 좋다? 다음에 나도 이름 없는 성에 데려가 주면 안 돼? 항상 궁금했는데.”

“안 될 거야 없지만 별로 구경할 만한 곳은 아니에요. 그래도 유령이 나오지는 않으니 겁내지 말아 주세요.”

마담 린다가 왜 젤라에게 주의를 줬는지 알겠다. 그녀와 있으니 우스테 후작저에서 활기차게 일하던 나날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아침의 바닥 청소를 시작으로, 나는 감자를 깎고 접시를 닦는 등 어린 메이드들 사이에서 열심히 일했다. 아셰라드렌을 떠올릴 틈은 잠자리에 들기 전밖에 없을 정도로 정신없는 하루하루가 흘러갔다.

그렇게 하루, 이틀, 사흘, 마침내 나흘째가 되던 날이었다.

그날도 아침부터 최선을 다해 물걸레질을 하고 진이 빠져 젤라를 비롯한 메이드들과 옹기종기 모여 점심을 먹고 있는데, 마담 린다가 대뜸 나를 불러냈다.

“네, 마담. 무슨 일이실까요?”

나는 포슬포슬하게 구운 감자를 꿀꺽 삼킨 뒤 물었다. 그녀는 얼른 나가 보라며 문가를 향해 턱짓했다.

“기사님 한 분이 너를 찾더구나. 안절부절못하시던데, 무슨 짓이라도 벌인 건 아니겠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