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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왕자 길들이기 (49)화 (49/123)

49화

“아뇨, 안 울었는데요.”

“울었는데요. 아무리 봐도 운 것 같은데, 왜 거짓말을 하지?”

내가 빠르게 고개를 저어 답했지만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덧붙였다. 그가 팔짱을 끼며 자세를 바꾸자 금빛 머리칼이 사르륵 옆으로 흘러내렸다.

“다프네 양은 거짓말에는 소질이 없어요. 어제 알아봤습니다.”

“…그래요. 울었습니다.”

“왜죠?”

“왜냐니… 그냥 슬퍼서요.”

“음, 괜히 미안해지려고 하네요.”

미안해지려고 하는 게 아니라 미안해야 하는 거 아닌가. 따지고 보면 그가 우스테 후작에게 나와 아셰라드렌의 관계를 수상쩍게 설명한 탓에 나만 이름 없는 성에 홀로 남게 되었으니까.

시르시안은 겸연쩍다는 듯 턱을 긁으며 내 안색을 살폈다.

“사과하겠습니다. 미안해요.”

“됐어요.”

“처음에 전 다프네 양 같이 왕자님을 생각해 주는 사람이 왕자님의 곁을 지키고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답답한 성에 유폐되어 살기보다는, 왕족으로서 대접을 받는 편이 나을 줄 알았어요.”

“따지고 보면 그게 옳은 말씀이죠. 하다못해 평민들조차 넓은 들판이며 푸른 하늘을 보고 사는데… 왕자님께는 그것조차 허락되지 않았으니까요.”

나는 씁쓸하게 말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아셰라드렌에게 이 세상을 보여 주고 싶었다. 그의 손을 잡고 거리를 걷고, 꽃향기를 맡게 하고, 밤하늘에 수놓아진 별들을 구경하고 싶었다.

“다프네 양만큼 왕자님을 생각해 주는 이도 없을 겁니다. 저도 그분에 대해서는 완전히 잊고 있었기도 했고.”

“이 나라에 사는 모두가 그랬을 텐데요, 뭐.”

하다못해 회귀 전의 나도 그랬었는걸. 이 부분에 대해선 나도 할 말이 없다. 그 누가 왕자의 고독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겠는가. 그와 가장 가까운 사이라고 자부할 수 있는 나조차도 감히 재단하지 못할 감정이었다.

나는 입을 다물고 시르시안과 같이 벽에 기대어 섰다. 아셰라드렌과 매일같이 이 복도를 오고 가던 것이 이제는 먼 옛날 일처럼 느껴졌다.

“부디 왕자님께서 왕성의 생활에 잘 적응하셔야 할 텐데 말입니다.”

“그러게요.”

“일단 시작은 쉽지 않은 것 같아 보였습니다만.”

“그게 무슨 말씀이실까요?”

생각해 보면 우스테 후작저에서 일할 때만 해도 그 저택의 도련님인 시르시안과 이렇게 둘이서 대화할 날이 오게 될 것이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나는 의미 없는 발장난을 치다 고개를 들었다. 잠시 고민하던 시르시안이 내 쪽으로 팔을 내밀었다.

“우선은 식당으로 자리를 옮기는 게 어떨는지. 저도 여기에 오래 머물고 있을 수는 없어서요. 다프네 양이 식사를 하는 것만 보고 또 가야 합니다.”

“아, 네. 그렇게 할게요. 그런데 팔은 왜….”

이거 혹시 그건가. 로맨스 소설에나 나오는 에스코트 같은 거.

내가 귀족으로 태어났다면 당연히 그의 호의를 받아들였겠으나, 메이드인 나를 이런 식으로 대해 준 남자는 이제껏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의 의도를 알고도 설마 싶어 확인차 물었다. 만약 내가 멋대로 착각을 한 것이라면 어떡하지 싶어서.

“다프네 양은 숙녀가 아닙니까. 숙녀와 나란히 걸어가면서 팔짱도 끼지 않는 결례를 범하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그냥, 메이드인데요. 그렇게까지 친절하게 대해 주실 필요는 없어요.”

“제가 친절하고 싶습니다. 개인적으로 미안한 감정도 있고.”

사실 따지고 보면, 왕자도 없는 이름 없는 성에 시르시안이 되돌아올 이유는 없었다. 그럼에도 이렇게까지 해 주는 건 나를 동정하기 때문일까.

어쩌면 내가 우스테 저택에서 일한 적 있다는 걸 알아 친절을 베푸는 것일 수도 있겠다. 시르시안의 의도를 알 수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굳이 거절할 이유도 없었다.

나는 예니체 경 못지않게 탄탄해 보이는 그의 팔에 어색하게 손을 얹었다.

“그렇다면 감사히 받아들일게요. 바쁘신 와중에 부러 와 주신 것도 감사하고요.”

“신경이 쓰여서 일에 집중할 수가 있어야죠. 어제 다프네 양을 그렇게 막아 세운 뒤로 천하의 나쁜 놈이 된 것 같아서.”

아래층에 있는 식당을 향해 걸어가며 시르시안은 과장되게 속상한 표정을 지었다. 이럴 때는 무슨 반응을 해야 하지? 그때 너는 나쁜 놈이 맞았다고, 덥석 인정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이내 시르시안은 난감해하는 나를 보고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금갈색 눈을 찡긋거렸다. 아, 이래서 메이드들이 꺅꺅대는 거구나. 잘생긴 남자가 이렇게 끼를 부려 대기까지 하니, 원.

“그러고 보니 잔느가 그러던데요. 마담 셀라가 시르시안 님께 눈독을 들이고 있다고.”

나는 재빨리 그의 시선을 피하며 말머리를 돌렸다. 다행히도 코앞에 식당이 보였다. 문턱을 밟는 순간 나는 슬그머니 그에게서 거리를 벌렸다.

식탁 위에 기름이 살짝 번진 갈색 봉투가 하나 놓여 있었다. 시르시안은 성큼성큼 걸어와 금세 내 뒤를 따라잡았다.

“제가 중년 여성분들의 애정을 독차지하고 있기는 하지요. 어머니의 손길을 받지 못하고 없이 컸기 때문일까요? 저도 어머니 또래의 분들을 보면 괜히 친절하게 대하고 싶어집니다.”

“시르시안 님은 모두에게 친절하신 것 같던데요. 그런데 저거, 제 몫인가요?”

“네, 구운 가지와 저민 고기를 넣어 만든 샌드위치입니다. 마담 린다가 직접 만들어 주셨지요.”

“…왕성의 주방장 부인 말이시죠. 굉장하네요.”

“네? 뭐가 말입니까?”

빙글 웃은 그가 의자를 빼내 나를 앉힌 다음 저도 옆자리를 차지했다. 성격이 저렇게 서글서글하고 여기저기서 사랑받으면 참 살맛 나겠다.

아셰라드렌이나 예니체 경에게는 받아 보지 못했던 배려에 얼떨떨해하기도 잠시, 나는 봉투에서 샌드위치를 꺼낸 뒤 시르시안에게 양해를 구하고 한 입 베어 물었다.

마담 린다가 메이드가 먹을 식사인 줄은 꿈에도 모르고 정성을 다해 만든 음식은 혀가 사르르 녹을 만큼 맛이 좋았다.

“마음에 드나 봅니다. 그 얼굴을 보니 제 죄책감도 아주 약간은 사그라드는 듯하네요.”

시르시안은 의자에 파묻혀 앉아 아예 턱을 괴고 나를 구경했다. 모든 사람들에게 이런 식으로 대한다면 누가 과연 착각을 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나는 속도를 내어 샌드위치를 씹어 먹기 시작했다.

성에 혼자 남아 있을 때는 외롭고 쓸쓸하기만 했는데, 막상 시르시안을 눈앞에 두고 있으니 최대한 빨리 그를 내보내고 싶은 심정이었다.

“천천히 드십시오. 체하겠습니다.”

“…아, 네. 죄송해요. 배가 고파서 그만.”

“저녁 식사도 같이 챙겨 올 걸 그랬나 봅니다.”

“아니에요, 그때는 제가 왕성에 가서 다른 메이드들과 같이 먹으면 돼요.”

원인 모를 친절은 이 정도로 충분했다. 나는 고개를 내저으며 남은 조각을 삼켰다. 슬슬 한숨을 돌렸다 생각했는지, 시르시안은 새로운 대화 주제를 꺼냈다.

“그나저나 아침에 마담 셀라를 찾아가 봤습니다만.”

내가 이것저것 따질 입장은 아니지만, 그래도 역시 잔느의 빈자리를 대신하는 건 별로 내키지 않는데. 나는 긴장하며 시르시안을 바라보았다.

“당분간은 일손이 부족할 것 같지 않다고 에둘러 거절당했습니다. 원래 그러실 분이 아니신데.”

“저, 예전에 세탁실에서 뵈었을 때 기억나세요?”

“네? 네, 물론입니다.”

“제가 그때 좀, 마담 셀라께 밉보였을 수도 있어요.”

“아아. 그러고 보니 그런 일이 있었지요.”

그제야 깨달았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뜬 그가 별안간 웃음을 터뜨렸다. 뭐야, 하나도 안 웃겨. 하지만 나는 예의상 그를 따라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때는 한 성격 하는 아가씨라고 생각했었습니다. 모시는 분에 대해 쉽게 입을 열지 않으려고 하는 기특한 아가씨라고.”

“감사해요. 제대로 보신 것 같네요.”

“…아무튼, 그래서 다프네 양의 식사도 구하는 김에 마담 린다에게도 부탁해 봤습니다만.”

시르시안은 내 대답을 듣자마자 또 한 번 크게 웃으며 말했다.

“안 그래도 요즘 앓아누운 메이드가 하나 있다고, 환영이라고 하시더군요. 그래서 말인데 다프네 양, 키친 메이드 경력은 있습니까?”

“아니요. 우스테 후작가에 있었을 때는 주로 저택 청소를 도맡았어요.”

“…그렇다면 주방에서 일하는 건 어렵겠네요.”

“아뇨, 그것도 아니에요. 실은 그 앓아누운 메이드와 아는 사이기도 하고요. 시켜만 주시면 뭐든 할게요. 제가 찬물 더운물 가릴 처지인가요.”

어찌 됐든 왕성에 남을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좋다. 하다못해 국왕의 발톱을 잘라 주는 업무라고 해도 맡을 용의가 있다.

나는 의자에서 일어나 시르시안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 때문에 아셰라드렌과 떨어져 있게 됐지만, 그 덕분에 아셰라드렌과 다시 만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지금으로서는 시르시안에게 고마워할 수밖에 없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정말 감사해요.”

“이런. 그 인사는 제가 아니라 마담 린다에게 해 주십시오.”

다시 고개를 들자 나를 따뜻하게 바라보는 금갈색 눈이 보였다. 나와 잠시 시선을 마주하고 있던 그가 드르륵 소리를 내며 의자를 뒤로 끌었다.

“출근은 언제부터 하겠습니까? 마담 린다는 내일 당장이라도 와 달라고 하던데요.”

“그러면 내일 아침부터 갈게요.”

“왕성의 주방은 기사 훈련장과도 가까우니 앞으로도 곧잘 마주치겠군요. 숙소는 계속 이름 없는 성을 쓸 겁니까?”

“그건… 아마 안 되지 않을까요? 주인도 없는 성이니 비워 줘야 할 것 같은데.”

내일 마담 린다에게 물어 메이드들과 함께 쓸 숙소를 알아봐야겠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내 수많은 금화들은 어디에 보관하지? 나는 고민에 빠졌다.

그러자 때마침 시르시안이 입을 열었다.

“메이드들은 보통 여러 명이서 방을 쓰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다프네 양이 갖고 있는 금화들은….”

“저랑 같은 생각을 하고 계셨네요.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어요.”

“우스테 가문이 운영하는 은행에 맡기는 게 어떻겠습니까? 금고를 대여해서 말입니다. 물론, 다프네 양이 아니면 절대로 열지 못하게 하겠습니다. 제가 그 정도 권한은 가지고 있거든요.”

이렇게 일이 술술 풀려도 되는 건지 모르겠다. 시르시안이 내게 꼭 필요한 제안만을 해 주는 게 기뻤지만, 한편으로 나는 어째서 그가 금화를 출처를 묻지 않는지 궁금해졌다.

메이드가 가지고 있기에는 너무나 많은 재산이건만 그는 왜 아무런 질문조차 하지 않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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