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무슨 정신으로 잠이 들었는지 모르겠다. 화는 나는데, 화풀이를 할 곳도 없어 침대에 엎드려 씩씩대기만을 서너 시간.
동이 틀 무렵에야 억지로 눈을 감았다. 일어났을 때는 해가 중천에 떠 있었고, 나는 잠을 자면서 흘린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흑, 예니체 경은 왜 또 없어.”
찝찝해진 옷을 갈아입고 자시고 간에, 나는 문을 벌컥 열고 맞은편에 있는 예니체 경의 방을 찾았다. 그러나 예의도 없이 그의 침실 안을 살펴봐도 인기척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지금 시간이라면 성 밖을 지키고 있을 수도 있겠지만, 그게 아니라는 것쯤은 굳이 확인해 보지 않아도 알았다. 그의 이부자리는 내가 마지막으로 정리해 둔 그대로였다. 그는 이곳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이제 이름 없는 성에는 아셰라드렌도 없고, 예니체 경도 없고, 고작 며칠 전에 새로 왔던 고용인들도 없다. 갑자기 엄청난 외로움이 몰려왔다.
이 어두컴컴하고 음산한 성에 나 혼자밖에 남아 있지 않다니.
“무서워….”
아셰라드렌이 아래층으로 내려온 후에는 그래도 나름대로 활기를 띠던 성이었다. 여태까지 어떻게 이런 곳에서 지내왔었지?
나는 예니체 경의 방앞에 몸을 웅크리고 앉아 훌쩍거렸다. 차라리 할 일을 찾는 편이 좋을까. 이렇게 울적하게 있어 봤자 계속 착잡한 미래만을 그리게 될 뿐이었다.
내가 아셰라드렌을 데리고 왕성을 나가지 못할 경우라든지, 결국 전쟁이 일어나 회귀 전처럼 그가 죽게 될 경우라든지.
다만 상상 속에서의 나는 회귀 전과 달리 죽지 않고 살아 있었다. 만약 아셰라드렌을 구해 내지 못한다고 해도 나는 한 번 더 죽을 생각 따위 추호도 없었다.
“악! 바, 바퀴벌레! …하필이면!”
그렇게 청승을 부리며 앉아 있다 벌떡 일어난 건 때마침 내 옆을 지나가는 새카만 벌레 한 마리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며칠 동안 청소를 하지 않았었지. 그러나 돌아오지 않을 왕자를 기다리며 복도를 쓸고 닦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휘청휘청 방으로 돌아가 리카의 핏자국으로 인해 얼룩덜룩해진 짐가방을 노려보았다. 그나마 남는 짐가방이 하나 더 있길 망정이지. 그 길로 당장에 옷장을 뒤져 새로운 가방에 금화를 옮겨 담았다.
혹시 피가 묻은 금화가 남아 있나 꼼꼼히 가방 안을 확인하던 차였다. 문득 배 속이 꼬르륵거리며 불편한 기분을 선사했다. 어젯밤에 그런 일을 겪었는데도 배는 고프다는 게 어이가 없고 화가 났다.
“…현실은 소설이랑 다르네. 달라도 너무 달라.”
나는 쿵쿵대며 새 옷을 가지고 일어나 욕실로 직행했다. 그러고는 빠르게 땀에 젖은 몸을 씻어 낸 뒤 검은 드레스와 에이프런 차림으로 돌아왔다.
그나저나 아셰라드렌은 그렇다 쳐도, 어째서 예니체 경은 돌아오지 않지? 그도 오늘부로 새로운 자리로 이동하게 된 걸까?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아래층으로 내려가 성문 밖을 둘러보았다. 역시나 예니체 경은 없었고, 아침마다 놓여 있던 바구니도 없었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왕자님이 더 이상 계시지 않는데 뭐 하러 수고를 들여 음식을 준비해 주겠어.
주린 배를 붙잡고 한숨을 쉬다 간밤의 흔적이 남은 길가를 바라보았다. 아셰라드렌을 끌고 갔던 수레의 바퀴 자국이 푹 파여 남아 있었다.
“이쯤에서 슬슬 난동을 부리셨나 보네.”
시르시안은 나더러 이름 없는 성에 남아 있으라고 말했지만, 그렇다고 종일 쫄쫄 굶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덜 마른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길을 따라 걸었다.
왕성의 주방으로 향할 요량이었는데, 불에 타다 만 나무 조각이며 끊어진 밧줄 여러 개가 보여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말이 모셔간다는 거지, 이 정도면 납치 아닌가.
한참을 걷고 걸어 왕성에 도착했을 때, 내 머릿속은 온통 ‘아셰라드렌은 지금쯤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 하는 의문으로 가득 차 있었다.
어제 봤던 귀족들이 입었던 옷보다 더 좋은 옷을 입고, 더 좋은 음식을 먹고, 더 좋은 방에서 그들의 인사를 받고 있을까.
그렇다면 겁에 질려 벌벌 떨고 있지는 않을까. 아니면 펑! 하고 사랑스러운 강아지로 변해 예쁨을 받고 있을 수도 있었다.
“실례합니다. 혹시 실비아를 만날 수 있을까요?”
점심시간이 한참 지난 때였기에, 나는 주방에 가서 지나가는 메이드를 붙잡고 물었다. 고용인들의 식사 시간에 맞추어 갔다면 굳이 이럴 필요는 없었을 테지만, 저녁 식사를 먹을 때까지 기다리는 건 아무래도 무리였다.
“실비아? 그 애는 없어.”
“네? 없다니, 그게 무슨 말인가요?”
사과가 가득한 바구니를 들고 있던 메이드는 바쁜 와중에 내게 잡혀 짜증이 났는지 인상을 쓰고 말했다.
“나도 자세히는 몰라. 병가를 낸 지 며칠이나 됐더라? 덕분에 나까지 이렇게 고생 중이잖아.”
메이드는 원래 저는 짐이나 옮겨야 할 위치가 아니라며 투덜거리다 불쑥 나를 보고 물었다.
“그런데 너는 어디 소속이니? 이 시간에 한가롭게 돌아다니기나 하고.”
“…이름 없는 성에서 일하고 있어요. 다프네라고 해요.”
“어머나, 세상에. 정말로? 그럼 어젯밤의 사건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겠구나?”
척 보기에도 나보다 몇 살은 많아 보여서 그런지 그녀는 자연스럽게 말을 놓고 있었다. 왠지 대화가 길어질 것 같아 나는 어색한 웃음으로 얼버무렸다.
“사건이랄 것까지야 있나요. 그보다 저, 아직 한 끼도 먹질 못해서요. 혹시 먹고 남은 음식을 얻을 수 있나요?”
“그러고 보니 새벽에 마담 린다가 이제 이름 없는 성의 식사를 준비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셨었지. 그런데 설마 너, 아직도 성에 남아 있는 거야?”
메이드는 쯧쯧 혀를 차며 내게 사과 한 알을 내밀었다. 그러고는 궁금한 게 많다는 듯 다시 입을 열려는데, 마침 우리 옆을 지나가던 일꾼 하나가 그녀와 부딪혔다.
“아, 미안. 젤라. 너 괜찮아?”
“아프잖아! 그러게 내가 누누이 조심 좀 하라고 말했지!”
“미안하다니까. 그런데 길을 막고 있던 건 너야.”
일꾼은 실없이 웃으며 들고 있던 포대 자루를 추켜 올렸다. 그러자 기울어진 자루에서 오렌지 두어 개가 툭 투둑 바닥에 떨어졌다.
“잘됐다. 다프네라고 했지? 너 그것도 챙겨 가.”
손이 자유로운 내가 오렌지를 줍자 메이드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일꾼이 네가 무슨 권리로, 하고 핀잔을 주려는 찰나 메이드가 그의 무릎 뒤를 발로 밀었다.
“너는 가서 네 할 일이나 해. 얘, 아직 아침도 못 먹었대.”
“진짜? 안됐다, 예쁜아. 너 어디 소속인데 그래? 혹시 네 선배가 식사할 시간도 안 줬….”
“예끼, 이놈들! 언제부터 노닥거리고 있었던 게야!”
메이드며 일꾼까지 내게 호기심을 드러내기 시작했을 때였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냄비 사이를 지나다니던 하얀 모자를 쓴 노부인이 우리를 보고 소리쳤다.
메이드는 파드득 놀라며 나를 제 몸으로 가렸다.
“그만 가 봐. 마담 린다는 고용인들이 딴짓하는 걸 내버려 두질 못하시거든.”
“감사합니다. 잘 먹을게요.”
“그래그래, 고마우면 다음에 와서 왕자님 얘기나 좀 해 줘. 듣자 하니 왕성에 오셨다며? 새벽에 뭐가 부서지는 소리가 나서 깜짝 놀랐는데, 혹시 왕자님과 관련 있는 건….”
“젤라! 너 이리 와 보거라! 거기는 또 누구지?”
“얼른 가 봐! 얼른!”
노부인의 호령이 떨어지자 젤라는 나를 재촉했다. 마실 것이나 빵도 좀 얻으려고 했는데, 계속 여기 있다간 나까지 혼쭐이 날 것 같았다.
나는 헐레벌떡 움직이기 시작하는 그들과 덩달아 걸음을 빨리해 주방을 나섰다. 그냥 저녁에 다시 와서 슬쩍 이들 사이에 끼여 식사를 하는 편이 낫겠다.
그렇게 판단한 나는 이름 없는 성으로 돌아가 과일로 대충 배를 채웠다. 그러고 나니 또 식사를 할 때면 항상 옆에 붙어 있던 작고 귀여운 강아지 한 마리가 생각나 울적해졌다.
“흑….”
아까는 울먹이기만 했다면, 이번에는 진짜로 눈물이 흘러나왔다. 나는 한동안 식탁에 엎드려 펑펑 울기만 했다. 이대로 아셰라드렌과 더 이상 만날 수 없게 된다면 어떻게 하지.
잠시 잊고 있었다. 그는 내가 감히 먼저 다가설 수조차 없는 높은 신분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왕성을 돌아다니다 보면 발에 채는 게 메이드인데, 그중 하나일 뿐인 내가 어떻게 왕자와 개인적인 만남을 가질 수 있겠는가.
나는 눈이 팅팅 부을 때까지 눈물을 짜 대다 코가 막혀 일어났다. 열이 오른 머리가 지끈거렸다.
어차피 아무도 없는데, 차가운 물을 받아 몸을 담그기나 해야겠다. 그러다 보면 머리도 차갑게 식어 내려 좋은 생각이 떠오를지도 모르니까.
“역시 과일로는 부족했어.”
욕조에 물을 받고 옷을 벗으며 나는 혼자 중얼거렸다. 열심히 울어 대는 데 기력을 소모했는지 배 속이 또 꼬르륵꼬르륵 아우성이었다.
하긴 어제도 저녁을 충분히 먹지 못했지. 아셰라드렌과 한밤중에 몰래 내려와 먹었던 샌드위치가 떠올라 나는 힘없이 무릎에 고개를 파묻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다음 날 우리가 이렇게 헤어지게 될 줄은 몰랐는데. 욕조에 반쯤 차오른 물이 내가 원했던 온도보다 더 차가워서, 나는 또 몸을 떨며 서럽게 눈물을 흘렸다.
“다프네 양?”
그러다 소리 없이 열린 욕실 문 사이로 금발 머리의 미청년이 불쑥 고개를 들이밀어 까무러치게 놀랐다. 정작 나를 부르던 그 역시도 심하게 놀란 듯 눈 깜짝할 새 문을 닫고 모습을 감추었지만.
“시, 시, 시, 시르시안 님…?”
“…미안합니다. 아무리 찾아봐도 없길래, 혹시나 싶어 와 봤습니다.”
“노, 노크를 하셨어야죠.”
“그것도 미안합니다. 당연히 여기도 아니겠지, 하고 멋대로 결론을 내렸어요.”
민망하게 이게 무슨 일이야. 나는 입만 벙긋거리며 작게 욕설을 내뱉었다. 그러고는 허겁지겁 물을 닦고 옷을 주워 입었다. 서두르느라 에이프런을 물기가 가득한 바닥에 떨어뜨리는 바람에, 드레스만 대충 갖춰 입고 돌돌 말린 스타킹을 챙겨 욕실을 나왔다.
시르시안은 문가 근처의 벽에 기대어 서 있었다. 나는 큼, 하고 헛기침을 해 목을 가다듬은 뒤 입을 열었다.
“죄송해요, 이렇게 빨리 오실 줄은 모르고.”
“식사를 하지 못했을 것 같아 먹을 걸 좀 챙겨 왔습니다. 그보다, 혹시 울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