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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왕자 길들이기 (47)화 (47/123)

47화

“…그럴 리가 있나요? 왕자님께 붙잡힌 뒤에도 리카는 멀쩡히 일어나 계단까지 갔어요.”

“죽기 전에 초인적인 힘을 발휘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듣자 하니 리카 양은 전에 소속되어 있던 예배실에서도 잡음이 많았다고 하던데요. 손버릇이 나쁜 데다 귀족들의 십일조를 훔쳐 가기까지 했다고.”

돈을 향한 리카의 욕망과 집착이 그녀를 움직이게 했을 것이라고, 시르시안은 나를 설득했다. 그렇지만 알 게 뭐야.

나는 그의 손을 몇 번이고 쳐 내려고 했다. 지금 당장 아셰라드렌에게 가서 그를 진정시켜 주고 싶었다.

“그런 건 이제 아무래도 상관없어요. 왕자님을 왕성으로 모셔가는 게 맞나요? 꼭 마물을 잡아가듯이 포박했잖아요.”

“어쩔 수 없었습니다. 이 이상 사람이 죽어 나갔다간 저희도 국왕 폐하께 드릴 말씀이 없으니까요.”

“폐하께서 왕자님을 부르신 게 아니던가요?”

결국 시르시안에게서 벗어나지 못한 내가 반쯤 포기하고 물었다. 그는 내 손을 고쳐 잡으며 아셰라드렌을 비롯한 수많은 행렬이 사라진 성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폐하께서는 왕자님의 본성 귀환을 마지막까지도 반대하셨습니다. 하지만 왕제(王弟)께서 끝까지 승계권을 거부하시는 탓에.”

“그분은 어째서….”

“왕제께서는 이미 옛적에 서부의 공작령을 물려받아 행복하게 살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부인은 날 때부터 몸이 약해 서부의 맑은 공기를 마시며 요양하고 계시지요.”

국왕의 동생은 연약한 제 부인을 깊이 사랑해, 그녀와 멀리 떨어져 있고 싶지 않아 했다. 왕성은 가끔씩 방문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며 웬만하면 서부에 머물고 싶어 했다고.

그러나 과연 그것이 무려 다음 대 왕위라는 어마어마한 자리를 거절할 만한 사유인가 하면, 왕제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렇다고 답했다고 한다.

“거기다 국왕 폐하의 직계 후손인 아셰라드렌 왕자님께서 버젓이 살아 계시는데, 굳이 그분을 배제할 것도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렇게 되었습니다.”

여주인공이 사라진 세상은 완벽하게 내가 알지 못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아직 어린아이들이 보는 그림책조차 제대로 읽지 못하는 아셰라드렌이 다음 대 국왕이 된다니.

심지어 그의 아버지인 현 국왕은 아셰라드렌을 여전히 거부하고 있는데.

“리카 양이 일을 벌이는 바람에 날이 좀 앞당겨지긴 했지만… 이 또한 왕자님의 운명이라고 봐야겠죠.”

나는 이어지는 시르시안의 부드러운 목소리를 들으며 생각에 잠겼다. 그렇다고 아셰라드렌이 왕성에 가서 환영받을 수 있을까?

몇몇 귀족들이 그를 새로운 후계자로 떠받든다고 한들, 그가 왕이 되기도 전에 이 나라는 멸망하게 될 것이다.

아니, 그전에 그가 왕이 된다고 해도 이 나라의 앞날은 그리 밝지만은 않을 것이다. 교육을 받지 못한 탓도 있긴 하지만 어쨌거나 그는 마냥 똑똑한 편은 아니었다.

처음 봤을 땐 제 나이조차 제대로 세질 못해서 손과 발을 동원해 숫자를 세었던 이가, 대체 무슨 수로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들을 돌본다고.

나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시르시안에게 붙잡힌 손등을 바라봤다.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하나 있었다.

“그런데.”

“네, 그런데.”

시르시안은 내 말을 따라 하며 다정한 어투로 되물었다.

“저는 왕자님 소속의 메이드잖아요. 그런데 왜 저는 왕자님과 함께 왕성으로 가지 못하고 있나요?”

“그건 우스테 후작의 뜻이었습니다. 그분은 이미 다프네 양과 왕자님이 아주 친밀한 사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그게 왜…. 그게 무슨 상관이라고….”

제 아버지를 남처럼 얘기하는 시르시안의 뻔뻔한 작태에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이제부터 아셰라드렌을 지지할 귀족들은 벌써부터 나와 왕자를 떼어 놓으려는 작업을 착수 중이었다.

“왕위를 물려받을 분께서 메이드와 도가 지나친 감정을 교류하도록 내버려 둘 리가 있겠습니까?”

“…저희는 딱히 그런 사이가 아닌데요.”

“하지만 매일 밤 한 침대에서 잠자리에 들지요.”

그걸 대체 어떻게. 이름 없는 성에 오래 머물지도 않았던 시르시안이 알고 있을까. 나는 당황한 티를 내지 않으려고 애썼지만, 내 표정에서는 이미 진실이 다 드러난 모양이었다.

시르시안은 눈가를 옅게 찌푸리며 억지 미소를 지었다.

“왕자님이 다프네 양에게 크게 의지한다는 걸, 저는 이름 없는 성에 오자마자 알 수 있었습니다. 이후에 예니체 경에게 슬쩍 떠보듯 물어보니 그렇지 않다고 대답하질 못하더군요.”

그랬다. 예니체 경은 절대로 거짓말을 하지 못하는 남자였다. 거짓말을 해야 한다면 차라리 입을 다물어 버리는 타입이었다.

“그래도 그렇게 사적인 얘기까지는 보고하지 않았습니다. 아마 우스테 후작 입장에서는 비슷한 또래의 여자가 곧 성인을 앞두고 있는 왕자님의 곁에 붙어 있는 것 자체를 신경 쓰고 있을 겁니다.”

“그러면 저는… 혹시, 해고인가요? 더 이상 왕자님의 시중을 들 수 없기 때문에?”

설마, 그럴 리는 없겠지. 일반적으로는 다른 업무를 볼 수 있도록 소속을 옮겨 준다. 하지만 이제까지 이름 없는 성에 단 한 번이라도 소속되었던 메이드들은 하나같이 직장을 잃는 것으로 끝이 났다.

물론 대부분은 밤중에 도망쳐 버리거나 한 탓에 그들 스스로 일을 그만둔 것이나 마찬가지였지만.

“그럴 리가요. 그런 부당한 처사는 제가 용납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시르시안 님이 용납하지 못하신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는 건 아니잖아요.”

“저런.”

“…딱히 나쁘게 말하려는 의도는 아니었어요.”

그냥 현실적으로 말했을 뿐. 나는 재밌다는 듯 웃는 그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숙였다. 나를 잡고 있지 않은 시르시안의 손에는 핏물이 얼룩덜룩 묻은 짐가방이 하나 들려 있었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속상하네요. 나름대로 권력 있는 가문 출신의 서자인데요.”

“아, 죄송….”

“농담입니다. 그리고 참고로 저, 얼마 전에 공식적으로 가문의 호적에 올랐습니다.”

어쩌라고 지금 아무래도 좋을 자랑을 하는 건지. 무슨 반응을 해야 할지 몰라 나는 한참을 망설였다. 그러다 뒤늦게 조그맣게 입을 열었다.

“추, 축하드릴 소식이네요.”

“거짓말하지 마십시오. 그래서 어쩌라고, 하는 얼굴이었지 않습니까.”

“그럴 리가 있나요.”

나는 슬슬 짜증이 났다. 아셰라드렌은 지금쯤 어디에 있을까. 설마 벌써 왕성에 도착했을까? 태어난 이후로 가 본 적도 없는, 낯설기만 한 곳에서 홀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그가 걱정이 되어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우선은 이름 없는 성에 남아 계십시오. 저는 마담 셀라와 친합니다. 다프네 양도 알고 있지요? 세탁실을 통솔하는 분이신데.”

“…네, 알고 있어요. 그분께 저를 소개해 줄 생각이신가요?”

“잔느 양의 자리가 비었으니 그것도 나쁘지 않을 듯합니다. 아니면 혹시 새롭게 일하고 싶은 소속이 있습니까?”

“글쎄요, 지금 당장은 별로 떠오르는 게 없네요. 죄송해요, 저를 위해 힘써 주시겠다는데.”

그래도 왕성에서 아예 나가라는 법은 없구나.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먼발치에서나마 아셰라드렌을 볼 수 있다면, 언젠가는 그에게 다시 한번 왕성을 나가지 않겠느냐고 물을 기회가 찾아올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만약 앞으로 아셰라드렌과 마주할 수조차 없게 된다면, 그때 나는 어떻게 해야 좋을까. 나는 1년이 지나기 전에 왕성을 나가고 싶었다. 이왕이면 아셰라드렌도 함께 데려가고 싶었다.

이기적인 건 알지만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되든 상관없어. 내가 구하고 싶은 건 아셰라드렌 하나밖에 없다. 가능하다면 예니체 경도 데려가고 싶지만, 일이 풀리지 않는다면 그를 포기할 각오도 되어 있다.

눈물을 참기 위해 눈을 질끈 감으려는데, 저 멀리 어디선가 아셰라드렌의 애처로운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왕자님께서 다프네 양을 찾으시나 봅니다.”

“어떻게 아세요?”

“그런 게 아니라면 이렇게 슬프게 울부짖으실 리가 없습니다. 그분과 깊은 유대감을 맺은 상대는 다프네 양밖에 없기도 하고.”

“왕자님께 가 보고 싶어요. 허락해 주세요, 시르시안 님.”

나는 다급하게 시르시안을 올려다보았다. 오늘 밤 이후로 아셰라드렌을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더니 속이 타들어 가듯 답답했다.

그러나 시르시안은 안 된다고 답하는 대신 내 손에 묵직한 짐가방을 들려 주었다. 그러고는 나를 아예 성문의 반대 방향으로 돌려세웠다.

“그렇게 안쓰럽게 쳐다보면 제 마음도 약해집니다. 하지만 안 돼요. 시간도 늦었으니 다프네 양은 그만 올라가 쉬는 게 좋겠습니다.”

“시르시안 님은 처음부터 이러려고 이름 없는 성에 오셨나요? 너무하세요. 정말로 안쓰러운 건 제가 아니라 왕자님이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왕자님은 다프네 양이 아닌 상대와도 유대감을 쌓을 기회를 가져야 합니다.”

그 부분에 있어서는 나도 동의하는 바였다. 잔느가 그랬듯 나는 아셰라드렌을 과하게 싸고도는 감이 없잖아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래도.

“떨어져 있던 금화는 모두 주웠습니다. 거의 다 닦긴 했는데, 아직 피가 묻은 것도 있을 겁니다. 올라가서 확인해 보세요.”

“돈이 중요한 게 아니에요. 저는 왕자님을….”

“돈은 중요합니다. 특히나 지금의 다프네 양 같은 경우에는.”

시르시안은 단호하게 내 말을 잘랐다. 그가 막고 있는 성문을 뛰쳐나가 아셰라드렌을 쫓아갈 수 있는 가능성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열받아. 어느 날 갑자기 다들 들이닥쳐서는.

“내일 중으로 한 번 더 방문하겠습니다. 그동안 푹 쉬도록 하세요.”

“…….”

더 이상 입을 열었다간 욕만 한 바가지 쏟아 낼 것 같아, 나는 말없이 계단을 올랐다. 뒤에 있던 시르시안이 한숨을 쉬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나는 그를 돌아보지 않았다.

위층의 복도에는 창문이 있었다. 나는 급히 계단을 올라가 짐가방을 바닥에 내던졌다. 그런 다음 창살을 양손으로 부여잡고 밖을 내다보았다.

아우우우…!

그러자 희미한 횃불들 사이로 거대한 수레 같은 것에 태워져 울고 있는 아셰라드렌이 보였다. 그래 봤자 이미 성으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자세히 볼 수는 없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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