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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왕자 길들이기 (46)화 (46/123)

46화

“아니, 왜요? 그렇게까지 정색하실 거 있나요?”

심지어 예니체 경은 내가 이름 없는 성에 근무하기도 전부터 있었던 사람인데? 게다가 그는 나 못지않게 왕자를 아꼈다.

휴가를 갔다 왕자를 위해 그림책을 사다 준 것만 해도 그랬다. 늑대로 변한 왕자가 그에게 상처를 입혔을 때에도 왕성에 보고하지 않고 넘어가기도 했고.

“아셰는 예니체 경에게 좀 더 마음을 열어 줄 필요가 있어요.”

그러자 이번에는 그가 케엥, 하는 요상한 소리를 내며 콧바람을 뿜어냈다. 당혹스러웠다.

“정말 너무하시네. 예니체 경이 들으면 울겠어요.”

“…….”

“끝까지 변명도 안 하시고.”

오늘 밤에 있었던 사건으로 인해 나는 세상 사람들에게 질려 버렸다. 원래도 남들과 잘 어울려 다니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전보다 더 학을 떼게 되었다고나 할까.

나는 괜히 심술을 부려 아셰라드렌의 볼을 주욱 잡아당겼다. 하지만 왕자가 싫은 티도 내지 않고 말랑말랑하고 따끈한 제 얼굴을 내주기에 더욱 심통이 났다.

“저한테 하시는 거 반만 해 봐요. 예니체 경이 아셰를 등에 업고 다닐걸요.”

아셰라드렌은 들은 체도 하지 않고 내 손길만을 음미했다. 이러고 있으니까 그가 사람인지 동물인지 구분을 못 하겠다. 대체 언제쯤 변신이 풀려 나와 깊은 대화를 나눠 줄는지.

지금도 문밖에는 리카의 시체가 있고, 그녀의 핏자국이 군데군데 남아 있을 것이다. 왕성으로 돌아간 잔느는 다른 메이드들의 보살핌을 받고 있을까?

현실을 떠올리고 싶지 않아 나는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 시작했다.

“상상해 보세요. 이름 없는 성만큼 고립된 곳은 아니어도, 한적한 숲속에 저택을 한 채 짓고 사는 거예요. 예니체 경은 뗄감을 구해 오고, 저는 맛있는 저녁을 만들고. 아셰는 책을 읽다….”

하지만 말을 잇다 말고 아셰라드렌을 쳐다봐야 했다. 그가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며 머리를 내게 들이밀었기 때문이다.

“왜 그러세요?”

늑대는 문가를 힐끔거렸다. 그러더니 안절부절못하며 꼬리로 바닥을 툭툭 내리쳤다.

“밖에 누가 왔어요? 예니체 경인가요?”

아니면 시르시안일지도. 그렇게 생각한 순간, 내 귀에도 사람들의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나는 엉거주춤 일어나 문가에 다가섰다. 확실히 바깥이 소란스러웠다.

“아셰는 여기 있어요. 제가 나가 볼게요.”

“…….”

“같이 가려구요?”

그러고 보니 왕성에 갔던 시르시안이 슬슬 돌아올 때가 되었지. 사람들을 불러온다고 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새로운 고용인들이 왔을 때만 해도 숨기 바빴던 아셰라드렌이 이번에는 나와 동행하겠다고 해서 놀라웠다.

나는 곁에 선 그의 목덜미를 한 번 쓸어 준 뒤 문을 열었다. 그러고는 난생처음 인파로 북적대는 이름 없는 성을 목격해 잠깐 굳어 버렸다.

“오오, 저기 있군!”

“과연 전설 속의 건국왕과도 같은 듬직한 풍채야!”

가장 먼저 우리를 발견한 이들은 누가 봐도 귀족이었다. 멋들어지게 기른 콧수염과 기름을 발라 넘긴 머리카락, 한여름의 무더위에도 겹겹이 껴입은 얇고 부드러운 고급 천 자락들.

귀족들은 여럿이었고, 대부분이 중년 남자였으나 개중에서 단 한 사람, 눈에 띄게 아름다운 여인이 있었다.

프리지어 우스테. 금발 머리에 차가운 인상을 가진 그녀는 시르시안의 이복 누나이자 레티스의 시녀였다.

“얘야, 이분이 바로 아셰라드렌 왕자님이시더냐?”

아셰라드렌이나 레티스를 처음 봤을 때처럼, 원래도 미인 앞에서는 넋을 놓아 버리는 기질이 있는 나는 프리지어를 뚫어져라 쳐다보다 정신을 차렸다.

“엇, 네. 그, 그렇습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레르베 라예트의 유일한 후계이시며, 천 년의 역사를 뒤로하고 건국왕의 피를 가장 짙게 타고난 왕자님이시여.”

뭔, 뭐. 뭐라고? 나조차도 대체 뭔 소리를 하나 싶었는데 과연 아셰라드렌은 저 귀족의 인사를 어떻게 받아들였을지 모르겠다.

당황한 나는 곧장 아셰라드렌을 바라보았다. 그는 역시나 이빨을 잔뜩 드러낸 채 으르렁대며 낯선 이들을 경계하고 있었다.

“노, 노여움을 내려놓으십시오. 저희는 왕자님이 마땅히 누려야 했던 자리를 되찾아 오는 길입니다.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마침내 성공했습니다.”

“이보게, 유리시 백. 갑자기 그렇게 설명해 봤자 왕자님께서 받아들이시겠는가?”

콧수염이 달린 갈색 머리의 중년이 손을 비비며 알아듣지도 못할 일장 연설을 늘어놓자, 상당히 잘생긴 금발의 중년이 그를 말렸다.

나는 다른 귀족들에 대해선 알지 못해도 프리지어와 금발 중년 귀족만은 곧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그는 프리지어와 시르시안의 아버지인 우스테 후작이었다.

“아, 그렇지. 내 기쁜 마음을 참지 못하고 그만.”

“…처음 뵙겠습니다, 아셰라드렌 왕자님. 얼마 전 레티스 공주님께서 불의의 사고를 당하신 것은 알고 계실까요?”

그렇게 묻고 우스테 후작은 내 쪽을 쳐다보았다. 적어도 그는 지금의 아셰라드렌이 사람의 말을 할 수 없는 상태라는 것을 알고 있는 듯했다.

“네, 알고 계세요.”

그래서 나는 왕자를 대신해 답했다. 주름이 약간 진 것을 제외하고는 시르시안과 거의 흡사하다시피 한 후작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이제 왕국의 미래를 이어 갈 분이 왕자님이시라는 것도 아십니까?”

“그건… 말씀드린 적은 있지만, 아직 제대로 이해하지는 못하셨어요.”

“흠, 충분히 그러실 만도 하지요. 앞으로 차차 받아들이시면 됩니다. 오늘부로 왕자님께서는 왕성에 기거하시게 될 테니까요.”

아셰라드렌은 우스테 후작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있을까? 날카로운 눈매를 번뜩이는 왕자는 언제든지 그들을 쫓아낼 준비가 되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보게나.”

“네?”

“이름이 뭐지?”

“…다프네입니다.”

우스테 후작의 설명을 듣고도 아셰라드렌이 꼼짝도 하지 않자, 그는 아예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려 물었다. 망설이던 나는 짧게 답했고, 후작은 물러서라는 듯 나와 귀족들에게 손짓했다.

“그래, 다프네. 너도 옆으로 나와 있으려무나.”

크르릉! 후작의 명에 따라 걸음을 옮기려는 찰나였다. 불길한 예감이라도 느꼈는지 아셰라드렌이 목울대 안에서부터 깊이 울부짖는 소리를 냈다.

나는 예사롭지 않은 그의 울음소리를 듣고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러고는 아셰라드렌을 돌아보는데, 그제야 귀족들에게 집중하느라 보지 못했던 수십 명의 기사들이 눈에 들어왔다.

예니체 경과 같은 제복을 입은 그들은 복도의 양 끝에 서서 명을 기다리고 있었다.

“실례인 줄은 압니다만, 후작님. 지금 무슨 일을….”

뒤늦게 나도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다시금 아셰라드렌에게 다가가려 했다.

“실례인 줄 알면 가만히 있어.”

하지만 이제껏 입 한번 열지 않고 있던 프리지어가 내 손목을 잡아 그녀가 있는 쪽으로 잡아당기는 것이다. 순간적으로 벌어진 일이라 나는 그녀에게 반항하지도 못했다.

내 손목을 감싼 프리지어의 서늘한 체온이 꼭 수갑처럼 느껴졌다. 그녀의 붉은 눈과 마주친 나는 재빨리 시선을 피했다.

“놀라지 않아도 된다. 그저 왕자님을 왕성에 모셔가려는 것뿐이야.”

프리지어는 나를 좀 더 잡아당겨 벽에 밀착해 속삭였다. 그렇지만 아셰라드렌 하나 때문에 이렇게 많은 기사들을 데려오다니. 대체 이들은 아셰라드렌을 어떤 존재로 생각하고 있는 건가?

“시르시안이 그러더구나. 왕자님께서 사람을 하나 해쳤다고. 우리는 저분을 안전하게 모셔가려는 거야.”

“와, 왕자님이 해치신 게 아니에요. 그건 사고로….”

“그래. 하지만 우리에게도 사고는 일어날 수 있잖아. 안 그래?”

그녀는 나를 다독여 주려는 듯 다정하게 말하며 내 어깨를 쓰다듬었다. 그러나 소름이 끼쳤다. 이들은 아셰라드렌을 위험하기 그지없는 짐승으로 보고 있는 게 분명했다.

아우우우…!

아셰라드렌은 나를 보며 구슬프게 울었다. 그 또한 많이 놀라고 겁을 먹은 것인지 늑대의 모습을 하고 있음에도 어쩔 줄 몰라 했다.

사실 그가 발을 슬쩍 휘두르기만 해도 이 정도의 인원은 죄다 쓸려나갈 확률이 컸다. 그러나 아셰라드렌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어째서인지는 나도 알 수 없었다.

“왕자님, 지금부터 왕성으로 출발하겠습니다.”

우스테 후작이 기사들에게 고갯짓했다. 검은 제복을 입은 그들이 우르르 달려와 준비해 두었던 밧줄을 꺼내 아셰라드렌을 칭칭 감았다.

이런 식으로, 이런 식으로 나의 왕자님을 대하지는 말았으면 좋겠다. 하지만 나는 프리지어를 밀어내지도 못하고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가녀린 한 떨기의 꽃 같은 그녀였으나 의외로 손아귀의 힘이 거셌다.

“놓아주세요, 프리지어 님. 조금만 있으면 왕자님이 사람으로 돌아오실 거예요. 그때 데려가셔도 되잖아요.”

“…어떻게 내 이름을 알고 있니? 그러고 보니 너는 우스테 후작가에서 일했었다고 했지.”

“그 얘기는 나중에 해도….”

되지 않느냐고, 왕자를 저런 식으로 끌고 가는 법이 어디 있느냐고 나는 소리쳤다. 그러나 내 목소리는 아셰라드렌을 질질 끌고 복도를 지나 계단을 내려가는 장정들의 힘찬 구호에 묻혀 사라졌다.

너무하잖아! 화가 나서 눈물이 차올랐다. 한참이 지나서야 프리지어가 나를 놓아주길래, 나는 재빨리 아래층으로 사라진 기사들을 쫓아갔다.

“여기 있었군요. 찾고 있었습니다.”

그새 성문 밖으로 빠져나간 그들을 따라잡기 위해 치맛자락을 걷어 올렸다. 누군가의 커다랗고, 프리지어처럼 서늘한 손이 내 손등을 에워쌌다.

“잠시만요. 비켜 주세요, 시르시안 님.”

“안 됩니다. 다프네 양을 내버려 뒀다간 무슨 난리를 칠지 알 수 없으니까요.”

우스테 후작의 20년 전을 보고 있는 듯한 시르시안이 나를 막아 세웠다. 나를 안타깝게 바라보던 그는 우르르 계단을 내려오는 귀족들을 피해 구석으로 향했다.

“오늘 밤의 소동으로 인해 시일이 좀 앞당겨지긴 했습니다만… 알고 있지 않았습니까. 이런 날이 오리라는 걸.”

“그래도 이건 아니잖아요. 왕자님은 리카를 죽이지 않았어요.”

“저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리카 양을 덮치긴 했지요. 그녀의 갈비뼈가 거의 다 부러져 있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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