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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왕자 길들이기 (44)화 (44/123)

44화

“저리 비켜!”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금화를 줍지 못했다. 처음 보는 매서운 얼굴로 금화를 낚아챈 리카가 나를 밀어내고 일어섰기 때문이다.

“리, 리카.”

“이, 이럴 줄 알았어. 역시 이곳은 괴물이 잠들어 있는 성이야…. 빠, 빨리 나가야 해. 빨리 나가야 한다고!”

나는 리카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그녀와 알게 된 지는 고작 이틀밖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모습을 예상하지는 못했다.

표독스럽게 소리치는 그녀를 보는 기분이 묘했다. 그제야 내 주위에 여러 개나 떨어진 금화들이 눈에 들어왔다.

“너 설마 낮에도 이거 때문에….”

“비키라고 했지!”

리카가 들고 있던 것이 내가 금화들을 모아 두었던 짐가방이었다는 걸, 나는 그녀에게서 머리를 한 대 후려갈겨 맞은 뒤에야 깨달았다.

그러나 리카도 마냥 악인은 되지 못했는지 순간적으로 미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래 봤자 호시탐탐 기회를 노려 아무도 없는 방에 침입한 도둑에 불과했지만.

“아아악! 아아아악!”

짐가방에 맞은 충격으로 인해 얼얼한 머리를 문지를 새도 없었다. 나와 아셰라드렌을 피해 도망가려던 리카가 다시금 바닥에 엎어졌다.

이번에는 혼자 넘어진 것이 아니었다.

…컹! 컹!

작고 소중한 강아지였을 때와는 차원이 다른 울부짖음에 내 배 속까지 진동하는 듯했다. 늑대가 두툼한 한쪽 발로 리카를 짓누르고 있었다.

내가 리카에게서 눈을 잠깐 떼고 있던 사이, 그녀는 늑대와 닿기만 했을 뿐인데도 차마 보기 힘들 정도로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끼기긱, 끼긱. 피가 묻은 손톱이 바닥을 애처롭게 긁었다.

“수, 숨 막혀…. 사, 살려….”

“아, 안 돼요! 아셰, 그러다 죽겠어요!”

나는 어지러움을 참고 일어나 아셰라드렌의 꼬리를 품에 껴안았다. 리카는 예니체 경과 같이 단련된 기사가 아니었다.

지금 그녀의 배는 장기가 눌리기라도 한 것처럼 기이하게 납작해져 있었다. 발톱에 긁힌 머리는 산발이 되어 풀어 헤쳐져 있었고, 금이 간 안경에는 머리로부터 흘러내린 피가 잔뜩 묻어 있었다.

“쉬이, 착하지. 제발 부탁이에요. 저는 괜찮으니까 리카를 놓아줘요.”

“…….”

길고 풍성한 꼬리가 움찔거렸다. 그는 아무런 미동도 하지 않았지만, 내게는 그가 꼭 고민을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사람을 죽이는 건 절대로 안 돼. 나는 부디 아셰라드렌이 언제까지나 순수한 왕자로 남길 바랐다.

“무슨 일 있어? 밖이 자꾸 시끄럽….”

하지만 설상가상으로 잠옷 차림의 잔느까지 나타나는 바람에 상황은 내가 바라는 대로 흘러가지 못했다.

아침까지만 해도 저도 강아지 왕자와 친해지고 싶다며 장난스레 나를 비난하던 잔느는 리카보다도 더 크고 우렁차게 비명을 질러 댔다.

“꺄아아아! 이, 이게 대체 뭐야!”

“조용히 해! 너까지 그러지 말란 말이야!”

나는 정신이 없었다. 아셰라드렌을 말려야 했고, 리카를 살려야 했으며, 잔느를 당장이라도 방에 돌려보내야 했다.

다만 머릿속으로 세운 계획이 간단히 실현되지는 않았다. 공연히 화가 난 나는 잔느에게 소리치며 아셰라드렌의 꼬리를 힘껏 잡아당겼다.

“어서 방으로 들어가! 왕자님은 너를 해치지 않으실 테니까!”

“그, 그게 왕자님이라고? 하지만 아까는 저렇게 크지 않았잖아!”

“궁금한 건 나중에 알려 줄게. 그러니까 지금은….”

“엄마, 나 어떡해! 이래서 이름 없는 성에 오기 싫었던 건데!”

미끄러지듯 벽을 타고 주저앉은 잔느가 엉엉 울음을 터뜨렸다. 하아, 이걸 어디서부터 정리해야 하지.

아찔한 현실에 피곤이 급격히 몰려왔다. 우선은 가장 심각한 꼴을 하고 있는 리카부터 해결해야 할 듯싶었다.

“…아셰, 이제 그만해요. 제발.”

꼬리를 붙잡는 정도로는 해결이 될 것 같지 않았다. 나는 아셰의 길고 커다란 몸을 쓰다듬으며 걸음을 내디뎠다.

금방이라도 리카의 목을 물어뜯을 것처럼 날카로운 이빨이 눈에 들어왔다. 자칫 베이기라도 한다면 나도 피투성이가 될지도 모르겠어. 턱이 달달 떨려 왔다.

그러나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아셰라드렌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쿵쿵대는 심장이 목구멍 밖으로 튀어 나올 기세로 뛰고 있었다.

그르릉….

늑대로 변한 왕자가 뾰족한 귀를 뒤로 늘어뜨렸다. 그러더니 간지럽다는 듯 내게 머리를 비비기 시작했다.

조금은 진정했을까. 푹신한 하얀 털에 얼굴을 묻고 있자니 아주 천천히 뒤로 물러나는 움직임이 느껴졌다.

마침내 아셰라드렌이 리카를 놓아준 것이다.

“잘했어요. 고마워요.”

전부터 생각한 거지만 아셰라드렌은 솜사탕을 닮은 강아지의 모습을 하고 있어도, 이깟 낡고 오래된 성 따위는 박살 내 버릴 듯한 짐승의 모습을 하고 있어도 최소한 말은 통해서 다행이었다.

나는 짧게나마 한숨을 돌렸다. 그러다 이내 리카의 상태를 살피기 위해 아셰라드렌에게서 살짝 떨어져 나왔다.

“으흑, 흑! 진짜… 내가 왜 이런 일을 겪어야 하는데….”

리카는 바닥을 엉금엉금 기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손에 들린 짐가방은 놓지 않은 채였다.

절그럭, 절그럭. 바닥에 핏물이 배어 나올 때마다 가방 안에 든 금화가 제멋대로 부딪쳐 소리를 만들어 냈다.

“…리카, 내 돈 내놔.”

나는 리카의 앞을 막아섰다. 다친 건 다친 거고, 금화는 내 것이었다. 아셰라드렌이 나를 위해 먼지를 뒤집어써 가며 찾아 준 소중한 보물인 것을.

“싫어! 너도 어차피 어디선가 훔친 돈 아니야?”

“아냐, 이건 왕자님이….”

“빌어먹을 왕자님, 왕자님 소리 좀 그만해! 저게 무슨 왕자야? 사람이 아니잖아!”

“리카!”

“저 괴물이 나를 죽일 뻔했다고! 나를 찢어발기려고 했단 말이야!”

“먼저 내 방에 몰래 들어간 건 너잖아. 뻔뻔한 것도 유분수지.”

제 잘못을 끝까지 인정하지 않으려 하는 그녀 때문에 치가 떨렸다. 혹시 리카는 손버릇이 나빠 이름 없는 성으로 차출된 것일까.

나는 혐오스러운 시선으로 그녀를 내려다보다 허리를 숙였다. 밉살맞다고 해도 이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일어설 수는 있겠어?”

“…끝까지 착한 척하기는. 저 괴물이 네 말을 듣는 걸 보니 넌 마녀가 틀림없어.”

“그 꼴을 하고 유일하게 널 살려 줄 수 있는 나한테 헛소리를 퍼붓네.”

“…닥, 쳐.”

한쪽 입꼬리를 올려 억지 미소를 지은 리카가 다 깨진 안경을 벗어 던졌다. 하필이면 내 쪽으로 던진 탓에 나는 움찔 눈을 감았다 떴다.

“리카! 어디 가!”

“당연히 이 지옥 같은 곳을 벗어나야지!”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녀는 내 앞에서 사라져 있었다. 뒤를 돌아보자 허겁지겁 계단을 내려가는 뒷모습이 보였다.

어쩌자고 저러는 거야? 어차피 밖에는 예니체 경과 시르시안이 있을 텐데….

그러나 리카의 생각은 거기까지 닿지 못한 듯했다. 그녀는 휘청대며 계단을 내려갔다.

그러고는, 쿵.

발을 헛디딘 것을 마지막으로 내 시야에서 다시금 사라졌다.

“…리카?”

이게 뭐야. 내가 대체 뭘 본 거지? 나는 속으로 끊임없이 중얼거렸다. 더 이상은 걸음을 뗄 수가 없었다. 계단에서 떨어진 리카를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다프네 양!”

성 안의 소란을 듣고 온 예니체 경이 나를 발견했을 때, 상황은 이미 끝나 있었다. 다리가 풀린 나는 꼼짝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앉아 아래층에서 나를 올려다보는 그를 마주했다.

그런 내 곁에는 변신이 풀리지 않은 아셰라드렌이 있었다. 그는 커다란 몸으로 내 뒤를 받친 채 이따금씩 주둥이를 들이밀며 끼이잉, 하고 작게 울부짖었다.

“…왕자님도 함께 계시는군요. 그런데 이건….”

“…리, 리카예요. 계단에서 혼자 넘어지더니 일어나질 못하고 있어요.”

깊은 잠이 든 것처럼 움직임이 없는 리카의 주위에는 붉은 피와 금화들이 놓여 있었다. 계단을 오르려고 하던 예니체 경이 군화에 묻은 핏자국을 보고 인상을 썼다.

“왕성에서 사람을 불러와야겠습니다, 우스테 경.”

“아, 네.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시르시안도 같이 있었나? 계단에 가려져 있었는지 나는 그를 보지 못했다. 그러나 이내 고개를 불쑥 내민 그의 시선이 잠시 내게 머물렀다.

아니, 내가 아니라 내 뒤에 있는 아셰라드렌이었겠지. 하지만 시르시안은 리카나 잔느처럼 거대한 짐승을 보고도 겁을 먹은 눈치는 아니었다.

“예니체 경은 다프네 양을 안심시켜 주십시오. 충격이 심해 보입니다.”

기사들은 어렴풋이 들리는 짧은 대화를 주고받았다. 시르시안은 금세 자리를 떴다. 등을 받치고 있는 뜨거운 체온이 꿈틀거렸다.

나는 고개를 뒤로 젖혔다. 새하얀 털이 시야에 가득 들어찼다.

“많이 놀랐겠습니다.”

잠시 후, 위층으로 올라온 예니체 경이 내게 말을 걸어 왔다. 나는 다시 고개를 바로 하려 했으나 굳은살이 박인 손바닥이 눈가를 덮었다.

“그러고 있어도 됩니다. 지금 다프네 양에게 필요한 건 휴식입니다.”

“…리카는 죽었나요?”

“바닥으로 추락하면서 난간에 머리를 잘못 부딪친 것 같았습니다.”

“…세상에.”

그의 말을 듣고 당장이라도 토할 것 같아 나는 예니체 경의 손을 밀어내려고 애썼다. 변기를 붙잡고 속에 있는 모든 것을 게워 내야만 상태가 좀 나아질 듯싶었다.

그러나 예니체 경은 뜬금없이 내 얼굴 앞에 손바닥을 들이밀며 말했다.

“여기다 토해도 됩니다.”

“아뇨, 그건 좀 그렇죠. 아무래도.”

“급하면 어쩔 수 없으니까요. 별로 더럽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가 더럽다고 생각하는데요?”

웃음기 하나 없는 무뚝뚝한 얼굴이 고개를 저었다. 예니체 경이 조금만 더 빨리 와 주었더라면 리카는 죽지 않을 수 있었을까.

그녀는 남의 물건을 훔친 도둑이었지만, 그렇다고 죽을 필요까지는 없었다. 예니체 경의 뒤로 언뜻 보이는 리카가 지금은 시체라니.

구역질이 났다. 아셰라드렌은 괜찮은지 살펴야 하는데, 도저히 그럴 정신이 나질 않았다.

나는 언제나 아셰라드렌이 1순위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이런 일이 닥치니 내 몸 하나도 제대로 간수하질 못하고 있었다.

그런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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