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실례지만 왕자님, 저는 왕자님을 해치러 온 존재가 아닙니다.”
무시.
“예니체 경에게 들었습니다. 왕자님은 예니체 경에게도 마음을 쉽게 열지 않으셨다고.”
무시.
“하지만 진심으로 다가간다면 왕자님도 가끔 한 번씩 슥 쳐다보는 정도는 해 주실 거라고….”
“…….”
“다프네 양, 혹시 제가 무슨 잘못을 했습니까?!”
“아뇨. 갑자기 나오시는 바람에 왕자님이 많이 놀라신 것 말고는요.”
“제 등장 자체가 잘못이었나 봅니다.”
시르시안은 난감하게 웃었다. 하지만 실제로 그의 등장으로 인해 아셰라드렌이 겁에 질린 듯 벌벌 떨고 있었으므로 나는 딱히 부정하지 않았다.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마다 매번 이래서야. 나는 속으로 혀를 찼다.
“제가 나가는 편이 나을까요?!”
시르시안은 체격 차이가 커 숨은 의미랄 것이 전혀 없는 내 뒤의 왕자를 힐끔 쳐다보며 물었다.
“아니에요. 우스테 경도 볼일이 있어 이곳에 들리신 게 아닌가요?”
“물 한 잔만 마시고 가려고 했습니다. 금방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밤에는 퇴근하신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그렇게 하라는 명을 받긴 했습니다만, 괴한은 보통 밤에 나오지 않습니까. 대낮에만 성을 지켜 봤자 무슨 의미가 있을는지.”
그러게나 말이다. 별생각 없이 지나쳤는데 그의 말을 듣고 보니 뭔가 이상했다. 왕실은 아셰라드렌을 진심으로 걱정해 주고 있기나 한 걸까.
“우선 물을 가져올게요.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가, 같이 가.”
“…….”
주방으로 향하는 나를 후다닥 쫓아오는 왕자를 본 시르시안이 침묵했다. 확실히 비정상적인 광경이겠지. 나는 시르시안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굳이 상상하지 않기로 했다.
“아셰, 남들 앞에서 이러시면 안 돼요.”
시르시안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나는 아셰라드렌을 내 쪽으로 끌어당겨 속삭였다. 하지만 그는 조금도 내 뜻을 이해하지 못한 눈치였다.
“어, 어째서? 다프네가 아닌 사람들은 다 무, 무서워.”
“저분은 아셰를 지켜 주기 위해 오셨어요. 나쁜 짓을 할 분이 아니란 말이에요.”
“왜 이제 와서….”
“그야 아셰는 차기 국왕이 될지도 모르는 분이니까요. 공주님이 돌아가신 후로 아셰의 위치는 변했어요.”
“시, 싫어. 왕이 되겠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한 적 없었는걸.”
왕자는 혼란스러운 듯했다. 천장을 한 번 쳐다보고, 나를 한 번 쳐다보고, 마지막으로는 바닥으로 시선을 내리깔았다.
파르르 떨리는 은빛 속눈썹이 안쓰러웠다. 나는 식당 쪽을 쳐다본 뒤 아셰라드렌의 팔을 쓸어내렸다.
“저도 알아요. 저도 아셰랑 이름 없는 성에서 쭉 지내고 싶었어요.”
“다프네도 그렇다면 앞으로도 그렇게 하면 되잖아….”
“그럴 수가 없게 됐어요. 저는 아무런 힘이 없는 메이드인걸요. 그리고 왕실은 아셰가 본성으로 돌아오길 바라고 있고요.”
“아, 안 가면 안 돼?”
빨갛고 예쁜 입술이 떨어지는 순간, 나는 지금이 아셰라드렌을 설득할 기회라는 것을 알았다. 어차피 망할 나라 따위, 그가 계승을 받아 봤자 의미는 없지 않나.
“…아셰도, 왕성에 가고 싶지 않은 건가요?”
“…응. 아바마마를 만나고 싶긴 했지만….”
“했지만, 그다음은요?”
나는 고개를 들어 그의 입술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저를 버린 부모임에도 그들에 대한 그리움은 남아 있는 모양이었다.
답답했다. 그래도 왕자가 원하는 것을 뒤로할 수는 없었다.
“소, 솔직히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걸. 역시 난 다프네랑 있는 게 좋아.”
“정말이에요? 그렇다면.”
그 이상은 말을 잇지 못했다. 우리가 있는 쪽으로 다가오는 인기척을 느꼈기 때문이다. 나는 아셰라드렌의 팔을 놓아준 뒤 컵을 꺼내 물을 따랐다.
“무슨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아니요, 아무 일도 없어요.”
시르시안의 목소리가 꽤 가까이에서 들려왔다. 그를 내버려 둔 채 주방에서 너무 오래 머무르고 있었다.
“나머지 얘기는 방에 가서 해요.”
나는 아셰라드렌에게만 들릴 듯 말 듯 하게 소곤거렸다. 머뭇머뭇 고개를 끄덕인 왕자가 내 뒤에 찰싹 달라붙으려다 멈칫했다.
“우리끼리 있는 게 아니면… 이, 이렇게 가까이 있으면 안 되는 거야?”
“역시 똑똑하세요. 당분간은 그러는 편이 좋을 거예요.”
“…다프네가 그러길 원한다면 어쩔 수 없지.”
시무룩해진 그가 조용히 나와의 거리를 벌렸다. 귀엽고 불쌍했다. 하지만 우리가 이 나라를 버리고 도망칠 수만 있다면!
그때가 되면 왕자는 원하는 만큼 나와 붙어 있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를 독차지할 수 있을….
…….
뭐야, 나 아닌 척하면서 은근히 아셰라드렌을 욕심내고 있었나?
“많이 기다리셨죠. 차가운 물은 아니지만 드세요.”
나는 헐레벌떡 고개를 저으며 식당으로 돌아갔다. 아직 낯선 공간에 홀로 남아 멍하니 서 있던 시르시안은 나를 보고 반색했다.
“감사합니다. 물은 그쪽에서 마실 수 있나 보네요. 다음부터는 제가 직접 하겠습니다.”
“제가 있을 때는 저한테 시키셔도 돼요.”
“다프네 양은 왕자님의 메이드가 아닙니까. 괜히 제가 부려 먹었다간 왕자님의 미움을 살지도 모릅니다.”
장난기가 다분한 금갈색 눈이 내 뒤를 향했다. 그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자 주방 문틈 사이로 시르시안을 경계하듯 노려보는 아셰라드렌의 반쪽 얼굴이 보였다.
또 저런다, 또. 나는 한숨을 쉬며 피식 웃음 지었다. 그 모습을 본 시르시안이 텅 비어 버린 물잔을 내밀며 입꼬리를 올렸다.
“물맛이 꼭 꿀처럼 달콤합니다.”
“목이 많이 마르셨나 보네요.”
“다프네 양이 갖다줘서 그런 것일지도.”
“그럼, 남은 근무 시간도 아무 탈 없이 보내시기를.”
“저런. 저를 쫓아내려고 하는군요.”
나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은 채 웃음기를 유지했다. 시르시안은 식탁에 컵을 내려놓았다.
“먼저 가 보겠습니다. 실례가 많았다고 왕자님께 전해 주십시오.”
“그렇게 할게요.”
“다프네 양도 들어가서 푹 쉬십시오.”
“네.”
“…원래 그렇게 말이 없습니까?”
그런 건 아니지만 우리의 뒤에는 아셰라드렌이 있었다. 나는 왠지 모르게 시르시안이 나와 좀 더 얘기를 나누고 싶어 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러나 가볍게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금발의 기사는 눈썹을 작게 찡그리며 웃더니 이내 식당을 나갔다.
“…다프네.”
아셰라드렌의 입장에서는 아마 시르시안이 방해물로밖에 보이지 않았던 듯하다. 왕자는 기다렸다는 듯 성큼성큼 내 곁으로 다가와 섰다.
그러고는 칭찬이라도 원하는 것처럼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나를 내려다봤다.
“저희도 올라갈까요?”
“아, 아까 하던 얘기는?”
“방에 가서 해요. 혹시 또 누가 올지 모르잖아요.”
장소를 다시 옮기는 데에는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았다. 우리는 몇 개 켜 놓지 않은 등불에 겨우 의지해 어슴푸레한 계단을 올라갔다.
이름 없는 성 밖으로 도망치지 않겠냐는 제안을 받으면 왕자는 과연 무슨 반응을 보일까? 이왕이면 좀 더 천천히 유대감을 쌓은 뒤에 이 말을 하고 싶었는데.
“얘기가 끝나면, 나는 내 방에 가서 자야 해?”
계단을 모두 오른 뒤 리카의 방을 지나칠 무렵이었다. 조용히 내 옆을 걷고 있던 아세라드렌이 물었다.
“글쎄요….”
나는 망설였다. 이 대답으로 인해 앞으로의 미래가 한순간에 결정 날지도 모르는 일이었으므로.
왕자는 기분파까지는 아니었으나 아직까지 유치하고 소심한 데가 있었다.
“다프네가 자고 있는데 키, 키스하고 그러진 않을게. 맹세할 수 있어.”
“그건 당연한 거 아닌가요? 그것도 범죄라고요.”
“치, 뭐만 하면 범죄래….”
“하지만 사실인걸요.”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나는 어디서부터 왕자를 지적해야 할지 알 수 없어 문고리를 잡은 채 그를 흘겨보았다.
“자, 잠깐만.”
그러다 난데없이 그가 내 손 위에 제 손을 겹쳐 와 가만히 눈을 깜빡였다. 아셰라드렌은 급히 숨을 들이켰다.
“안에 누, 누가 있어.”
나는 천천히 문고리를 놓았다. 다시 내려가서 시르시안을 불러와야 할까? 혹시 우리가 방을 착각한 것은 아니겠지?
수많은 상념들이 찰나에 스쳐 지나갔다. 엊그제 예니체 경이 치안에 힘을 써야겠다고 말하던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기사님을 부, 부, 불러와야겠어요.”
옆방의 잔느는 무사할까. 나는 소리를 낮추어 아셰라드렌에게 속삭였다. 그때였다. 우리 중 누구도 잡지 않은 문고리가 천천히 돌아갔다.
“리카!”
“…다프네?”
문이 열린 순간,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그러나 무언가를 챙겨 나오는 리카가 보여 나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극도로 긴장해 힘이 바짝 들어간 어깨가 맥없이 풀렸다.
“왜 여기서 나오는 거야? 너 낮에도 그랬었잖아.”
안도감과 동시에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대체 이 늦은 시간에, 그것도 주인이 없는 방에서 그녀가 뭘 하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나만 해도 이렇게 놀랐는데 나보다 훨씬 새가슴인 아셰라드렌은 또 어땠을지. 나는 리카를 향해 한 걸음 다가섰다.
“대답해. 너, 무슨 첩자야?”
“아, 아니. 난….”
“게다가 손에 들린 건 또 뭐고?”
“다, 다프네… 네 뒤를 좀 봐.”
리카는 허겁지겁 나를 밀어냈다. 그녀의 시선은 나를 향하고 있지 않았다.
크르릉….
낯설지 않은 울음소리였다. 등골이 오싹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든든했다. 나는 리카에게서 떨어져 나와 고개를 돌렸다.
사나운 늑대 한 마리가 아셰라드렌의 찢어진 옷가지를 밟은 채 서 있었다. 주먹보다도 큰 동공이 위협적으로 번뜩였다.
“꺄아아아!”
나를 해칠 리 없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이렇게 무섭게 느껴지는데, 늑대가 된 아셰라드렌을 처음 마주하게 된 리카의 심정은 어땠을까.
그녀는 비명을 지르며 철퍼덕 주저앉았다. 그러고는 아셰라드렌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 채 발버둥을 쳤다.
“사, 살려 주… 살려 주세요! 잘못했어요!”
“진정해. 왕자님이셔.”
나는 리카의 옆에 쪼그려 앉아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바로 그때, 발치에 떨어진 금화 하나를 발견해 그대로 몸을 굳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