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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왕자 길들이기 (42)화 (42/123)

42화

“죄송해요. 제가 말을 잘 못했어요. 아니, 잘 못했다기보다는 이상하게 했어요.”

“다프네가 하는 말들은 가끔… 너무 어려워서 이해가 잘 가지 않아.”

심하게 가까이 있는 붉은 입술이 조잘대듯 움직였다. 진짜, 왜 이렇게 말을 잘하지? 진작에 잔느와 만나게 해 줬어야 했을까?

왕자를 위한답시고 식당에서 메이드들을 내보냈던 건 괜한 짓이었나 보다. 나는 밀어내도 밀어내지지 않는 벽 같은 어깨를 잡은 손을 놓아 버렸다.

“언젠가 이해가 될 날이 올 거예요. 그런데 저희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요?”

“다프네가 나를 똑바로 봐 줄 때까지.”

“…아셰가 옷을 입으면 똑바로 봐 줄 용의가 생길 듯하네요.”

“요, 용의?”

단 하나의 어려운 단어로 인해 그는 다시 내가 알던 아셰라드렌으로 돌아왔다. 꿈에서 깨어난 것처럼 커다란 눈을 끔뻑인 그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앉았다.

“내가 버, 벗고 있어도 별로 신경 쓰지 않았었잖아. 이상해. 어제부터.”

“자꾸 남자같이 구시니까 그렇잖아요.”

굳이 변명을 해 봤자 말귀를 알아듣지도 못할 것 같아서 대놓고 말했다. 저 얼굴에, 저 몸으로 들이대는데 심장이 남아날 리가 없지 않은가.

나는 침대 주위를 더듬어 그가 아침에 벗어 두었던 허물들을 던졌다.

“…난 처음부터 남자였는데.”

아셰라드렌은 구시렁거리며 의복을 갖춰 입었다. 그러게. 그는 처음부터 남자였다. 나도 충분히 그 사실을 알고 있었건만, 어른이 될 때까지 기다려 달라는 예고를 들은 뒤부터는 도저히 전과 같이 그를 대할 수가 없었다.

“우리, 글공부나 할까요?”

“어? 뭐, 뭐라고?”

“못 들은 척하지 마시고요. 도서관에서 빌린 책의 반납 기한이 얼마 남지 않았단 말이에요.”

“반납… 기한….”

왕자는 심각한 표정으로 내가 한 말을 되풀이했다. 그러다 책상에 있던 책을 가져오자 단번에 화색이 되어 침대 위에 풀썩 올라가 앉았다.

“그림책을 읽어 준다는 거였어? 난 또, 예, 예니체 경의 이름을 외우라는 줄 알고.”

“궁금하시면 가르쳐 드릴 수도 있는데.”

“…돼, 됐어. 난 다프네의 이름만 쓸 줄 알면 돼.”

날더러 얼른 앉으라는 듯 그가 제 옆자리를 두드렸다. 어쩜 이렇게 순수하고 해맑을 수가 있는지. 역시 아직까지는 왕성에서 살게 될 아셰라드렌을 좀처럼 상상하기 어려웠다.

나와 있을 때면 아주 어린애가 따로 없는데. 하지만 이런 모습을 과연 왕성의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그렇다고 이 시점에서 내가 뭘 어떻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나는 복잡한 속마음을 숨기고 그림책을 펼쳤다.

“먼 옛날의 일이었습니다. 어느 나라에 공주 하나가 살고 있었습니다.”

“공주? 다프네?”

“아뇨, 이건 동화일 뿐이잖아요…. 아, 진짜. 일부러 그러시는 거죠? 이제는 농담까지 하시네.”

그러고는 상체를 살짝 숙여 나와 시선을 맞춰 오는 왕자를 보며 헛웃음을 터뜨렸다. 보랏빛 눈을 부드럽게 휘어 웃은 그가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왕자는 시도 때도 없이 나와 붙어 있으려고 했다. 물론 나도 그게 싫은 건 아니었지만….

모르겠다. 어떻게든 되겠지. 이윽고 나는 왕자와 함께 그림 속 세상으로 빠져들었다. 이따금씩 뺨을 간질여오는 은빛 머리칼에도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노력하면서.

⋆★⋆

“…몇 시지?”

그림책을 읽어 준 뒤 잠깐 눈을 붙였다 깨어나니 한밤중이 되어 있었다. 벌떡 일어나 앉은 나는 침대 옆을 더듬어 초를 켰다.

작은 방이 오렌지빛으로 환해졌다. 좁은 침대가 익숙해진 왕자는 커다란 어깨를 구깃구깃 접은 체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또 이렇게 은근슬쩍 그와 같이 자고 말았다. 이러면 대체 아침에 나누었던 진지한 대화는 무슨 소용이란 말이냐.

나는 자책하듯 이마를 때리며 살금살금 바닥으로 내려왔다. 저녁 식사를 거른 탓인지 배 속이 꼬르륵꼬르륵 난리도 아니었다.

“아셰, 일어나 봐요.”

“으….”

“배고프지 않아요? 아니면 말고.”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하며 물었다. 인상을 찡그린 아셰라드렌은 일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혼자라도 식당에 다녀오는 편이 좋겠다. 그렇게 생각하며 벗어 둔 구두를 신으려는 때였다. 단단한 팔이 내 허리를 감쌌다.

“…어디 가?”

“저녁을 먹으려고요. 아마 지금쯤이면 식당에 아무도 없지 않을까요?”

“그럼 나, 나도 갈래.”

눈을 비비며 일어난 그가 내 옆에 앉아 제 신발을 찾았다. 일상과도 같은 자연스러움이 묻어나는 움직임이었다.

까치집이 된 머리가 우뚝 천장 가까이 솟아났다. 나는 멀뚱멀뚱 내 옆에 서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아셰라드렌을 향해 손을 뻗었다.

“새가 와서 둥지를 만들어도 되겠어요.”

“새는 나를 무서워해.”

“네? 왜요?”

“꼭대기 층에 살았을 때… 길 잃은 새가 천장 사이로 날아온 적이 이, 있었어.”

발뒤꿈치를 들고 머리를 정리해 주고 있으려니 아셰라드렌이 얌전히 눈을 감고 고개를 내 쪽으로 기울여 주며 말했다.

비단 새뿐만이 아니라 모든 동물이 저를 두려워한다고, 부서진 벽 뒤에 살던 생쥐들은 물론이고 그것들을 잡아먹기 위해 성을 기어 올라온 구렁이마저 저를 보자마자 까무러쳤다고 말이다.

“그런 얘기는 처음 들었어요. 그러면 아셰는 승마도 못 하겠네요.”

“승마가 뭔데?”

“말을 타는 거예요. 커다랗고 잘 달리는 동물인데, 어디 멀리 나갈 때는 다들 그 동물을 타요.”

“나도 말은 아, 알아. 다프네가 읽어 준 그림책에 나왔었잖아.”

“아, 맞다. 그랬었죠.”

눈을 뜬 아셰라드렌이 뿌듯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다. 이걸 기특하다고 해야 하는 건지.

꼭 머리를 쓰다듬어 주길 바라는 커다란 강아지 같은 시선이었다. 귀여웠지만, 빨리 식당에 가서 식사를 하고 싶었다. 나는 한 걸음 옆으로 떨어져 먼저 방을 나왔다.

“치이….”

“네? 얼른 가요.”

섭섭한 티를 팍팍 내도 소용없다. 그보다 평소처럼 초저녁에 복도의 등에 불을 놓지 않는 바람에 코앞에 있는 아셰라드렌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주위가 어두웠다.

다시 방에 가서 촛불을 가져오는 편이 나을 듯했다. 나는 아셰라드렌의 팔이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부분을 살짝 쳤다.

“아셰, 잠깐만 기다려요.”

“응? 아. 가, 같이 갈래.”

“금방이면 돼요. 잠시만요.”

그러나 그는 당연하다는 듯 내 뒤를 따라왔다. 말해 봤자 입만 아프지. 아셰라드렌을 문 앞에 세워 둔 나는 빠르게 초를 찾아왔다. 그러고는 다시 복도로 나가 가장 가까이에 있는 등에 불을 밝혔다.

“왜 그래요?”

잔느나 리카는 벌써 잠이 들었을까? 그러고 보니 오늘은 예니체 경도 보지 못했다.

나는 한결 환해진 시야에 안도하며 아셰라드렌에게 물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그는 내가 아닌 컴컴한 복도의 뒤쪽을 돌아보고 있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뭐예요, 무섭게.”

“다, 다른 사람들은 다들 어디서 묵고 이, 있어?”

“잔느는 제 옆방을 쓰고 있어요. 리카의 방은 저쪽이에요.”

그의 시선이 내 손끝을 따라 움직였다. 어둠 속에서 보니 성스럽기까지 한 미모였다. 아셰라드렌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작게 미간을 찌푸렸다.

“음….”

“어서 가요. 뭔가 시원한 게 먹고 싶네요.”

하지만 이내 그는 어깨를 으쓱이며 나와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식당에 도착했을 때는 먼저 문을 열어젖히는 적극성을 보이기도 했다.

왕자도 배가 많이 고팠던 모양이지. 나는 그 길로 주방에 들어가 바구니를 뒤적였다.

“다행이다. 예니체 경이 남은 음식을 싹싹 비웠으면 어쩌나 했는데 샌드위치가 좀 남아 있네요.”

“고, 고기는 없지?”

“네, 그건 기대도 안 했어요.”

사실 샌드위치라고 해 봐야 두 조각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잔느와 리카도 여기서 저녁을 먹었을 테니 어쩔 수 없나. 나는 찬장에서 컵을 두 잔 꺼내 우유를 따라 아셰라드렌에게 건네주었다.

“손이 없어서 미안해요. 좀 도와주세요.”

“응, 미안해하지 마.”

“그건 그냥 하는 소리 같은 거예요.”

“아….”

조그맣게 감탄한 그를 데리고 식탁에 앉았다. 한밤중에 둘이서 이러고 있으니까 꼭 위험한 장난이라도 치는 것 같았다.

“저희 한 번도 이 시간에 식당에 온 적은 없지 않아요?”

“처음이야. 왠지 즈, 즐겁다.”

“아셰도 그래요? 실은 저도요.”

“샌드위치도 다른 때보다 더 맛있게 보이고….”

“사실은 다 식어 빠진 건데도 말이에요. 아니, 근데 예니체 경은 대체 저녁을 얼마나 드신 거야.”

우리는 서로를 마주 보며 슬그머니 웃다 동시에 샌드위치를 입에 가져갔다. 점심과 저녁을 거른 탓에 어이가 없을 정도로 맛이 좋았다.

조금만 더 먹고 싶은데, 주방을 뒤져 보면 뭐가 나오지 않을까? 나는 아쉬운 김에 우유가 묻은 윗입술을 혀로 닦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프네 양?”

그리고 때마침 나타난 시르시안과 정면으로 눈이 마주쳤다. 이런. 나는 재빨리 아셰라드렌이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왕자는 어깨를 바짝 굳힌 채 얼어붙어 있었다.

“이 시간에 여기서 뭘 하고 있습니까?”

식당 안으로 들어서는 시르시안에게서 여름밤의 무더위가 그대로 느껴지는 듯했다. 은은한 촛불에 비친 그의 목덜미가 땀으로 번들거렸다.

“늦은 저녁을 먹었어요. 깜빡 잠이 들었거든요.”

“행복한 오후를 보냈나 봅니다. 그런데 이분은?”

“…왕자님이세요. 우스테 경과는 초면이실 거예요.”

함께 일했던 메이드들이 그를 두고 시르시안 님, 시르시안 님 하던 것에 익숙해져 있어 그런지, 정식으로 우스테 경이라 부르는 느낌이 영 어색했다.

나는 아셰라드렌의 신분을 밝히자마자 움찔 놀라며 걸음을 멈추는 시르시안과 어쩔 줄 몰라 하며 나를 올려다보는 보랏빛 눈동자를 번갈아 보았다.

“처음 뵙겠습니다, 왕자님. 저는 시르시안 시슬 라 우스테 기사입니다. 이번에 왕자님의 호위를 맡게 된 영광을….”

“…읏, 다프네. 사, 살려 줘.”

금발의 기사는 스스로를 소개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의자를 밀어뜨리듯 우당탕 몸을 일으킨 아셰라드렌이 내 뒤로 숨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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