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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왕자 길들이기 (41)화 (41/123)

41화

한참 전부터 배가 고팠다는 말이 농담은 아니었는지, 왕자는 닭 다리를 다섯 개나 먹어 치웠다. 가끔 남은 음식이 있으면 신나게 흡입하던 예니체 경이 들으면 땅을 칠 소식이었다.

“슬슬 다시 사람으로 돌아와 주실래요? 글공부를 할 시간이 왔답니다.”

“…끼잉.”

나는 설거지를 마친 뒤 왕자를 데리고 식당을 빠져나갔다. 잔느와 리카는 어디에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아마 본인들 방에 있겠지, 뭐.

이름 없는 성의 메이드는 왕자의 끼니만 챙겨 주면 된다. 그런 곳에 메이드를 둘씩이나 보낸 것은 그냥 보여 주기식이나 마찬가지였다.

“방에 가면 변신해 주시기예요. 못 하는 척하기 없음.”

“…….”

방금은 끼잉 소리라도 내 주더니 이제는 아예 대답도 안 해 주네. 공부는 싫다는 건가.

나는 왕자의 목덜미를 살살 긁어 주며 계단을 올랐다. 그러다 위층에서 우리를 내려다보는 잔느와 눈이 딱 마주쳐 입을 열었다.

“안녕, 잔느. 거기서 뭐 하고 있어?”

“멀리서나마 왕자님을 뵙고 싶어서….”

잔느는 점점 그녀와 가까워져 가는 아셰라드렌을 바라보며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발을 동동 굴렀다. 우리 왕자님이 좀 심하게 귀엽기는 하지.

그녀의 심정을 모르는 것도 아니었기에, 나는 잔느의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러고는 분홍색 혀를 내민 채 내 손길에 심취해 있는 아셰라드렌을 슬쩍 내밀어 주었다.

“……?”

그러자 뭔가 이상을 느낀 왕자가 코를 킁킁대며 눈을 떴다. 그의 목을 만져 주던 손길은 언제부턴가 나 대신 잔느로 바뀌어 있었다.

고작 몇 초쯤 지났을까. 불쌍한 강아지는 깨갱깨갱 우는 소리를 내며 허겁지겁 내 품으로 숨으려 들었다.

“아, 안 되겠다. 내가 만지니까 너무 싫어하시는데?”

울상을 지은 잔느가 손을 거두었다. 아쉬운 눈길이 잠시 아셰라드렌에게 머물렀다.

“그러게. 이런 분을 왕성으로 보내야 한다니.”

“그렇지만 다프네, 네가 자꾸 왕자님을 싸고도니까 그런 것도 있는 것 같아.”

“무슨 소리야?”

“방금 전에 식당에서만 봐도 그렇잖아. 왕자님 식사하셔야 한다고 우리를 내쫓기나 하고.”

“하지만 그건 어제도 말했듯이….”

잔느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내 말을 잘랐다. 그러고는 훈수라도 두려는 듯이 손가락 하나를 쫙 펴 나를 가리켰다.

“너도 왕성에서 일하기 전엔 귀족 가문을 모셨으니 알고 있지 않아? 시중을 드는 메이드는 윗분들이 식사하실 때 얌전히 대기하고 있어야 한다고. 필요하신 일이 있으면 바로바로 다가갈 수 있게 말이야.”

“그렇지만 그 역할은 지금도 내가 충분히 하고 있는걸.”

“봐 봐, 네가 먼저 우리가 왕자님과 가까워질 방법을 막고 있잖아.”

난 어디까지나 아셰라드렌의 성격을 고려해서 내린 판단이었는데. 그러나 밖에서 온 제삼자가 보기에는 과보호로 보인 모양이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잔느의 주장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메이드가 오직 나밖에 없던 시절이라면 몰라도, 지금은 언제든 달려올 수 있는 이들이 두 명이나 더 늘어났다.

“무슨 소린지 알아들었어. 앞으로는 너희가 왕자님과 자주 마주칠 수 있도록 노력해 볼게.”

“그래! 좋은 생각이야. 너 혼자 털이 보송보송한 귀여움의 결정체를 독차지하지 말라고.”

흘겨보듯 나를 바라본 잔느가 웃으며 내 어깨를 슬쩍 밀었다. 그랬구나, 오히려 내가 왕자의 걸림돌이 되고 있었구나. 그가 새로운 이들과의 교류를 쌓을 만한 절호의 기회를, 내가 멋대로 차단하고 있었구나.

나는 속으로 크게 반성했다. 아셰라드렌과 계속 붙어 있으면서 그의 반응만을 살필 게 아니었다는 걸, 잔느의 충고 덕에 뒤늦게 깨닫게 된 것이다.

“그래도 오늘까지만 싸고돌게. 왕자님께도 차차 적응할 시간을 드려야 하니까.”

“다프네, 왕자님이 보기엔 그냥 강아지 같아도 말귀는 다 알아들으신다며? 네 입으로 그랬잖아.”

“아니, 그래도…. 지금도 네가 있는 쪽으로는 고개 한번 들질 않으시잖아.”

“칫, 내일부턴 나도 왕자님이 식사하시는 거 지켜볼래.”

이제 보니 잔느는 아셰라드렌을 완전히 강아지로만 받아들인 것 같았다. 사람으로 돌아왔을 때의 모습을 본 건 찰나에 불과한 탓인가.

그녀는 한동안 여운이 잔뜩 담긴 눈길로 작고 동그란 뒤통수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래도 이름 없는 성에 오게 된 것을 마냥 질색하기보다는 차라리 강아지 왕자에게 푹 빠진 게 나았다.

“그런데 리카는?”

“그러게? 그러고 보니 이참에 여기저기 둘러보겠다고 사라진 뒤로는 보지 못했네.”

“너는 왜 같이 안 둘러보고?”

“굳이 그러고 싶진 않아서. 솔직히 아직까진 나 여기가 좀 무섭다, 얘.”

“하긴, 나도 처음엔 그랬었어. 감옥마냥 창문은 죄다 막혀 있지, 햇빛도 들어오질 않아 어두컴컴하고.”

우리의 대화는 들은 체도 하지 않는 아셰라드렌을 고쳐 안는 순간이었다. 잔느의 뒤편에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말하자마자 나타나는 거 봐. 기사님들은 밖에 계시니까 지금 오고 있는 건 리카 같은데?”

그녀는 벽을 마주 보고 선 탓에 시야가 가려진 나보다 먼저 고개를 돌렸다.

“어머, 그런데 저기 네 방 아니야? 왜 저기서 나오지?”

“길을 잘못 들었나? 여긴 구조가 헷갈리게 되어 있으니까.”

재빨리 내 곁으로 다가온 잔느가 속삭이며 물었다. 리카는 금세 모퉁이를 돌아 우리의 앞에 나타났다.

“…거기서 뭐 하고 있어?”

리카는 우리를 보자마자 어색하게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나도 잔느도, 그녀와는 잘 아는 사이가 아니었기에 우리는 잠시 시선을 주고받았다.

“그냥, 얘기 좀 했지. 그보다 네가 방금 내 방에서 나오는 걸 잔느가 봤다고 하네.”

“아, 미안해. 이 층엔 빈방이 많잖아. 하나하나 둘러보다 보니 실수로 그만….”

리카는 부끄럽다는 듯 우리의 시선을 피했다. 그러자 잔느가 별안간 폭소를 터뜨렸다.

“그럴 수 있지. 실은 나도 어젯밤에 예니체 경의 침실을 열어 버렸거든.”

“뭐? 세상에, 한밤중에 그랬다고?”

“어두워서 그런지 어디가 어딘지 구분이 되질 않더라. 주무시고 계시길 망정이지, 하마터면 서로 민망해질 뻔했어.”

잔느는 리카를 두둔해 주기 위해 시작한 그녀의 일화를 본격적으로 풀기 시작했다. 어느새 나와 리카는 간간이 ‘뭐? 정말?’ 하고 맞장구를 쳐 주며 잔느의 수다 삼매경에 빠져들었다.

“하…. 그래서 내가 보기엔 마담 셀라가 시르시안 님을 남자로 보는 거 같더라고. 그런데 둘이 나이 차이가 엄마와 아들뻘 아니야?”

왕성에 함께 들어왔을 때도 느낀 거지만, 잔느는 말이 많았다. 많아도 너무 많았다.

어쩌다 대화 주제가 이쪽으로 흘러가게 됐더라? 끊임없이 이어지는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주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시간이 한참이나 지나 있었다.

“계속 말하다 보니까 목이 마르네. 내려가서 물이나 마셔야겠다.”

“그렇게 해. 난 방에 가서 좀 쉬어야겠다.”

“뭐? 왜? 어차피 할 것도 없잖아. 이름 없는 성은 심심해서 좋은 곳이라며.”

“난 그 심심함을 혼자 즐기고 싶은 거야. 이따 내려갈 테니까 먼저 가 있어.”

나는 이때다 싶어 잔느로부터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함께 내려가자는 제안을 단호하게 거절당한 그녀가 리카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너는 뭐 할 건데?”

“나도… 혼자 좀 쉬고 싶어. 왕성에서 근무할 때는 이런 날이 없었으니까.”

“그러면 나는 뭐 하라고!”

잔느의 투정은 우리 중 그 누구에게도 들어 먹히지 않았다. 계단 난간을 잡고 징징대는 그녀를 외면한 우리는 잔느에게 또 붙들릴까 싶어 서둘러 서로의 방으로 도망쳐 버렸다.

“아, 괴로웠다. 정말이지 잔느는 너무 시끄럽네요.”

“…….”

나는 방문을 닫자마자 침대로 돌진해 엎어졌다. 어느 순간부터 잔느는 아셰라드렌이 줄곧 우리와 같이 있다는 사실을 아예 망각한 게 틀림없었다.

이따금씩 그가 내 품에서 꼼지락대지 않았더라면 나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을 것이다. 아셰라드렌은 엎드린 내 위로 살금살금 올라와 뒷덜미를 할짝댔다.

“아셰는 또 왜 그래요. 간지럽단 말이에요.”

나는 반사적으로 어깨를 움츠리며 돌아누웠다. 그러면서 아셰라드렌을 번쩍 들어 올렸다. 깃털처럼 가볍고 하찮은 강아지는 허공에 들려 네 다리를 버둥거렸다.

“왕!”

“메이드들이 하는 이야기는 아셰가 듣기에는 너무 지루하죠. 미안해요, 더 빨리 도망쳤어야 하는 건데.”

“…아냐. 다프네가 모처럼 즐거워 보여서, 나도 재, 재밌었어.”

“악!”

이쯤 되면 왕자는 슬슬 제가 변할 때라는 신호를 주는 편이 좋지 않나. 눈 깜짝할 새 커다란 몸에 깔린 나는 숨이 막혀 작은 비명을 내질렀다.

직전까지만 해도 무게감이 거의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가뿐했는데, 사람이 된 아셰라드렌은 꼭 바위에 깔린 듯한 기분을 선사했다.

의도치 않게 왕자가 벗은 모습을 거의 날마다 보는 나는 그가 군살이 전혀 없는 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이렇게 무거운 이유는 어째서인지.

“무, 무거워요. 무거워요.”

“이러고 있으니까… 꼭 처음 다프네 앞에서 변신이 풀렸을 때 같아.”

“갑자기 말은 또 왜 이렇게 술술 잘하신대.”

메이드들의 대화를 조용히 귀담아들은 덕분일까. 리카는 평균보다 말이 느렸고, 잔느는 평균보다 말이 빨랐다. 그사이의 중간값을 마침내 찾아낸 것처럼 아셰라드렌은 조금은 천천히, 그러나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그때도 다프네는… 내 밑에서, 이렇게.”

“무겁다니까요.”

“응, 그치만 다프네는 내가 사람일 땐 이렇게 가까이 붙어 있어 주지 않으니까….”

그야 당연하지. 나도 최소한의 사리 분별은 할 줄 안다. 언급하기도 민망하지만 지금의 그에게는 남녀의 성별을 구분 짓게 하는 무언가가 존재하지 않는가?

차라리 옷이라도 입고 있었다면 덜 민망했을 텐데. 나는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아름다운 얼굴과 함께 내 시야를 가득 채우고 있던 단단한 어깨를 밀어냈다.

“벌써 몇 번이고 말씀드렸지만 저는 범죄자가 되고 싶지 않고….”

“나 아무 짓도 안 했는데.”

“누가 보면 하려는 줄 알겠어요.”

“…뭘 하려는 줄 아는데?”

다른 메이드들 앞에서는 고개조차 들지 못하던 소심한 강아지는 어디로 갔느냔 말이다. 이 왕자는 경계를 푼 상대와 그렇지 않은 상대에 대한 구분이 유별나게 남달랐다.

아셰라드렌은 순진무구한 보랏빛 눈을 내게 맞춰 오며 다시 한번 물었다.

“뭘 하려는 줄 아냐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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