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무슨 일이야, 리카. 방 정리는 다 끝냈어?”
문을 닫고 길게 숨을 내쉬었을 때, 마침 이쪽으로 걸어오는 리카와 마주쳤다. 아셰라드렌의 말에 따르면 그녀는 계속 복도를 서성거리고 있었을 것이다.
“응…. 방금 마친 참이야.”
“잔느는?”
“안 그래도 가 보려고 했어. 같이 갈래?”
하지만 리카는 이제야 제 방에서 나온 것처럼 반응했다. 낯선 장소를 우왕좌왕하고 있던 것을 굳이 알려 주고 싶진 않았던 걸까.
우리는 아직 서로에 대해 잘 모르는 사이였으니 충분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녀가 사실대로 말했다면 나는 예의상 복도에서 뭘 하고 있었냐고 물어야 했을 테고, 그렇지 않아 어색한 사이에 괜히 대화를 길고 자세하게 나누어야 했을 테니까.
“잔느는 내 옆방을 쓴다고 했었지? 넌 어느 방을 골랐어?”
“…나는 계단과 가장 가까운 방을 골랐어.”
“그랬구나. 그런데 얘가 왜 대답이 없지. 설마 방에 없나?”
나는 잔느가 있을 방을 두드리며 중얼거렸다. 그러나 안은 조용했다. 설마 하고 문고리를 돌려 보니 그녀는 제가 챙겨 온 담요를 덮고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도로롱, 도로롱. 잔느가 코를 고는 소리가 복도까지 들려왔다. 무섭다 어떻다 제일 난리더니 저 태평하기 그지없는 모습은 대체 뭔지.
“…잔느가 피곤했나 보네.”
“그러게….”
“너는 피곤하지 않아?”
“잘 모르겠어. …먼지를 많이 뒤집어쓴 것 같아서, 일단은 씻으려고.”
리카는 느릿느릿하게 말했다. 그렇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인 나는 그 이상 대화를 이어 나갈 만한 주제를 찾지 못했다. 아셰라드렌 때문에 기가 빨렸기 때문일 것이다.
그냥 적당히 인사하고 나도 방으로 돌아갈까. 하지만 내 방에는 아셰라드렌이 있는데.
“…아까.”
“응?”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찰나, 습관인 양 안경을 치켜올린 리카가 운을 떼었다.
“그 강아지를 보고 왕자님이라고 했지.”
“응, 맞아. 보고도 믿기 힘들지?”
“그렇지만 네가 농담을 하는 건 아닐 테니까.”
하지만 그녀도 아셰라드렌이 신기한 것은 마찬가지인 듯 보였다. 리카는 왕자가 있을 내 방을 힐끔 쳐다봤다.
“지금 저 방에 계셔? 그 강아지… 아니, 왕자님께서 말이야.”
“응, 지금은 강아지가 아니지만. 다시 사람으로 돌아오셨어.”
“…다들 그분을 두고 무시무시한 짐승의 모습을 하고 계신다고 하던데. 실상은 그렇지 않았구나.”
“글쎄, 어떨까? 왕자님은 여러 모습을 가지고 계셔. 그래도 대부분은 귀엽고 깜찍하신 것 같아.”
나는 웃으며 말했다. 거대한 늑대의 형상을 한 아셰라드렌을 굳이 지금 알려 줘서 두렵게 만들 필요는 없겠지. 리카가 이름 없는 성에 머무는 동안 나는 이왕이면 그의 인상이 좋게 남기를 바랐다.
“잔느같이 푼수처럼 굴고 싶지는 않지만, 잠깐 봤을 때 굉장한 미남이셔서 놀랐어. …아직 잘은 모르겠지만 성격이 나쁘신 것 같지도 않고.”
“왕자님이 얼마나 순하신데. 시간을 두고 천천히 다가간다면 분명 네게도 상냥하게 대해 주실 거야.”
“…다프네는 꼭 왕자님이 진짜 강아지인 것처럼 얘기하네.”
“어머, 일부러 그러려던 건 아니었는데.”
아셰라드렌과 함께 보냈던 시간의 반절은 그가 강아지였기에, 아무래도 내겐 그 모습이 가장 익숙해진 모양이다. 리카는 처음으로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물었다.
“그런데 메이드의 방에 왕자님이 머무르신다니. 그래도 괜찮은 거야?”
“원래는 안 되지. 나도 알고 있어.”
“혹시 둘이… 잠도 같이 자는 건 아니지? 이제까지 폐왕자셨다 해도 그분은 왕족이신데.”
“무, 물론이지. 주무실 시간이 되면 돌아가셔.”
거짓말을 하는 얼굴 위로 열이 몰렸다. 아셰라드렌과 나는 남들이 보기에 충분히 의심스러울 만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예니체 경은 우리가 아침에 함께 있는 것을 보고도 입을 다물었지만, 잔느와 리카는 아마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조심해야겠는걸. 과연 나만 조심한다고 해결될 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밤에는 혼자 주무신다는 거지?”
재차 확인하듯 리카가 물었다. 나는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고, 그녀는 만족한 듯 보였다.
“혹시나 싶어서 물어봤어. 기분이 상하지는 않았기를 바라.”
“그럴 리가 있나. 그나저나 나도 슬슬 잘 준비를 해야겠어.”
“시간이 늦기는 했지.”
검은 창살이 빽빽하게 난 창문 밖은 어둠이었다. 은색 후춧가루를 뿌린 듯한 밤하늘을 동시에 내다본 우리는 서로를 향해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먼저 가 볼게. 욕실이 어디에 있는지는 알고 있지?”
“아까 방 청소를 하면서 확인했어.”
“아침은 식당에서 먹어. 예니체 경도 같이.”
“…메이드가 기사와 겸상을 한다고?”
왕자와도 함께 먹는다는 건 말하지 않는 편이 좋겠다. 이름 없는 성에서는 당연한 상식이, 외부에서 온 이에게는 당연하지 않았다.
리카의 얼떨떨해하는 표정이 견디기 힘들었던 나는 발걸음을 돌리며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항상 그러는 건 아니야. 가끔만 그래. 아무튼, 잘 자.”
“그래, 너도.”
리카의 마지막 목소리마저 떨떠름하게 들려왔다. 나는 악, 하고 소리치고 싶은 심정을 애써 참아 내며 서둘러 내 방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폭신한 이불에 둘러싸여 새근새근 숨을 내쉬며 잠이 든 아셰라드렌을 보고 이마를 쳤다. 상황이 여의치 못하니, 오늘 밤부터는 정말로 그의 방으로 돌아가 달라고 말할 생각이었는데.
“아셰. 아셰?”
“으응….”
그러나 행복한 꿈이라도 꾸고 있는지 그림 같은 미소를 짓고 있는 그를 차마 깨울 수가 없었다. 어쩜 난 아셰라드렌에게 이렇게나 물러 터졌을까.
나는 한숨을 쉬며 잠옷으로 갈아입었다. 왕자는 내가 누울 만한 공간을 절묘하게 만들어 두고 자고 있었다.
“오늘만이에요. 정말로 오늘만.”
나는 옆으로 누워 아셰라드렌을 바라보며 속삭였다. 그러다 때마침 몸부림을 치기 시작한 그의 팔에 끌어당겨져 숨을 참았다.
홀로 태평하게 뛰고 있는 그의 심장 박동이 평온했다. 꼭 자장가 같네. 부디 점점 커져 가는 내 심장 소리를 그가 듣지 않길 바라며, 나는 눈을 감았다.
그러자 이제는 익숙해진 비누 향이 자꾸만 코끝을 간질였다. 뺨에 닿은 단단한 가슴팍과 조금 뜨겁다 싶은 체온, 허리에 닿아 있는 손길까지.
이상하게 잠이 오지 않는 밤이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고뇌를 떨쳐 내기가 힘겨운 밤.
⋆★⋆
“…어나. 일어나. 다프네.”
딱히 늦게 잠자리에 든 것도 아니었는데, 새벽까지 깨어 있던 탓에 늦잠을 자고 말았다. 이름 없는 성의 느슨한 생활이 나를 게으르게 만들고 있었다.
거기다 눈을 뜨자마자 사랑스럽게 웃고 있는 아셰라드렌이라니. 나는 반쯤 떴던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어, 얼굴이 너무 가까워요.”
“그런가? 그렇지만 자, 자세히 보고 싶어서.”
“왜 그러세요, 느끼하게.”
왕자에게 아침에 퉁퉁 부은 얼굴을 별로 보여 주고 싶진 않았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오늘따라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왕자가 앉아 있던 방향의 반대쪽으로 몸을 틀어 일어났다.
“언제 일어나셨어요?”
“하, 한참 전에. 다프네를 구경하느라 시간이 가는 줄도 몰랐어.”
“…보지 마세요. 저 옷 갈아입을 거예요.”
“머리 길다. 만져 봐도 돼?”
“갑자기요?”
내가 머리를 풀고 있는 걸 처음 보는 것도 아닐 텐데. 나는 도망치듯 침대에서 슬금슬금 벗어나 아셰라드렌을 흘겨보았다.
금세 삐친 그가 입술을 샐쭉 내밀었다. 구겨진 셔츠와 헝클어진 머리카락. 누가 봐도 그는 내 방에서 밤을 보낸 모습을 하고 있었다.
“옷장에 아셰의 옷이 있어서 다행이에요. 그 꼴로 나갔다간 무슨 의심을 살지.”
“다프네야말로 가, 갑자기 왜 그래? 나랑 자꾸 거리를 두려고 하고.”
“당분간은 그렇게 하는 편이 좋아요. 어제도 리카가 왕자님이랑 동침하는 건 아니냐고 묻던걸요.”
“도, 동침.”
“같이 자는 거 말이에요.”
“맞잖아. 우리, 동침하잖아.”
그렇게 말하는 아셰라드렌의 눈빛이 해맑았다. 그게 뭐 대수냐는 듯.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그가 입을 새로운 셔츠를 꺼냈다.
“남들한테는 그런 말 하면 안 돼요. 큰일 나요.”
“난 남들이랑 말 아, 안 해.”
“그것도 큰일인데….”
잠옷을 벗으려는 시늉을 할 때쯤에야 아셰라드렌이 허둥지둥 내게서 몸을 돌렸다. 칸막이처럼 열어 둔 옷장 사이로 약간 마른 듯한 헐벗은 등이 보였다.
마냥 어린애 취급을 받기에는 너무 넓고 커다란 등이었다. 그는 내가 건네준 셔츠에 팔을 끼우며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바, 밖이 계속 시끄러워. 새로 왔다는 사람들… 대체 언제쯤 돌아가?”
“그 사람들이 돌아갈 때쯤이면 저희도 이름 없는 성을 나갈지도 몰라요.”
성의 인원이 보충되었다는 것을 미리 알려 주지 않는 바람에 어제는 그가 많이 괴로워했었지. 이번에는 그런 실수를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나는 드레스의 허리끈을 묶었다.
그러고는 책상 앞에 있던 의자를 끌어와 앉은 뒤 스타킹을 신으려고 하는데, 문득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들었다. 이제는 부끄럽지도 않은 건지, 아셰라드렌이 나를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언제부터 보고 계셨어요?”
“…의, 의자에 앉을 때부터.”
“아셰도 남자는 남자네요. 조심해야겠어요.”
“그럼 내가 나, 남자지. 여, 여자야?”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니라… 아니에요, 됐어요.”
키스 타령을 할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어이가 없어진 나는 픽 웃으며 스타킹을 마저 신었다. 그런 다음 다시 아셰라드렌을 보자 그는 빨개진 제 얼굴을 한 손으로 가리고 있었다.
언제는 기다려 달라더니, 본인이 더 못 기다리는 것 같네. 왠지 놀려 주고 싶어지는군.
“맨다리 구경 실컷 하셨으면 아까 하던 얘기 계속할게요.”
“아, 응. …응?”
마지막으로 구두를 신은 뒤 머리를 묶기 시작했다. 넋이 나간 얼굴로 나를 보고 있던 아셰라드렌은 커다랗게 뜬 눈을 깜빡이며 되물었다.
“다프네가 무, 무슨 얘기를 해, 했더라.”
“…진짜 안 되겠네요. 저희 앞으로 같이 못 자겠어요.”
“그, 그건 싫어.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삽시간에 어두워진 낯빛으로 물은 그의 눈꼬리에 붉은 기가 어렸다. 매번 저런 식이니까 내가 왕자를 거부하질 못하지.
하지만 더 이상은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어젯밤 리카의 반응을 되새기며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