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왜 그래요, 아셰. 많이 무서웠나요?”
오들오들 떨고 있는 작디작은 등을 쓰다듬어 주며 물었다. 왕성에 가면 지금보다 수십 배는 더 많은 사람들을 매일같이 마주쳐야 하는데, 과연 아셰라드렌이 적응이나 할까 걱정스러웠다.
“그래도 이제는 괜찮아요. 제가 당신의 곁에 있잖아요.”
“…….”
왕자는 꼭 물가에 내놓은 아이 같았다. 내가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아무것도 하지 못할 아이.
그러나 왕국은 이제 겨우 제 이름을 쓰는 법이나 배우기 시작한 왕자의 세계를 뒤바꾸려 하고 있었다. 19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그의 존재 자체를 부정했던 주제에.
기가 막히는 결정이었다. 아셰라드렌은 왕자로서 배워야 할 기본적인 지식도 배우지 못했다. 그런 그를 어떻게 지금 당장 후계자로 내세우겠다는 건지.
“저 좀 봐 줘요. 예쁜 얼굴이 보고 싶어요.”
모르겠다. 지금은 아무런 생각도 할 수가 없다. 나는 그가 고개를 들어 주기만을 기다리며 동글동글한 뒤통수를 내려다보았다.
아셰라드렌과 평생 함께할 돈은 충분히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그를 세상 밖으로 데려갈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래서 차차 이름 없는 성 주변부터 시작해 그의 생활 반경을 넓혀 볼 예정이었다. 나를 태우고 성 밖의 공터를 달려 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은 이를 위한 첫 번째 발판이었다.
하지만 나의 계획은 시작도 되기 전에 방해를 받고 있었다. 아셰라드렌이 이대로 왕성에 가게 된다면 내가 그와 도피 생활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은 현저히 낮아지게 될 것이었다.
“엇, 진정이 좀 되셨나요? 이제야 저를 봐 주시네요.”
레티스가 죽은 뒤에야 아셰라드렌에게 신경을 쓰기 시작하다니, 과연 1년 뒤에 망할 왕국답다. 혀를 차며 그의 뒷덜미를 살살 긁어 주고 있을 때였다.
강아지가 되어도 변하지 않는 신비로운 보랏빛 눈동자가 나를 올려다보았다. 왕자는 동그란 눈을 깜빡이며 조용히 내 팔 위로 제 앞발을 얹었다.
새하얀 털에 가려진 눈동자가 축축했다. 이 자그마한 생명체는 무려 19년씩이나 버려진 채 살아왔다.
지금 당장 왕자를 주머니에 넣고 어디론가 도망치고 싶은 충동이 든다. 복잡한 심정을 견딜 수 없던 나는 고개를 숙여 까만 콧잔등에 입을 맞추었다.
펑!
“뭐, 뭐, 뭐 하는 거야…? 바, 방금, 다프네가 나한테 키, 키스한 거야…?”
그러자 희뿌연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올라 시야를 가렸다. 연기가 사라지려 할 때쯤 나타난 것은 잘 익은 토마토처럼 붉어진 얼굴을 양손으로 가린 희대의 미소년이었다.
아셰라드렌은 벌어진 손가락 사이로 나를 바라보며 더듬더듬 물었다. 알몸인 상태로 내 허벅지 위에 올라앉은 건 전혀 자각하지 못한 채였다.
“무거워요. 우선 내려와서 얘기해요.”
“아, 미, 미안.”
나는 재빨리 이불을 끌어다 그의 아래를 덮어 주었다. 아셰라드렌은 엉덩이만 움직여 침대 안쪽에 자리를 잡았다.
이불 속에 숨겨진 주체할 수 없는 긴 다리가 내 허벅지를 툭 건드렸다. 긴장한 듯 목울대를 오르내린 그가 나를 힐끔힐끔 쳐다봤다.
“시, 심장이 터지는 줄 알았어….”
“저는 아셰가 다른 메이드들한테 붙잡혀 충격에 빠져 있는 줄 알았는데요.”
“응…. 하지만 다프네가 금방 와서 구, 구해 줬으니까.”
“계속 방에 계실 거라고 생각했어요. 아까는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미, 미안해. 다프네가 오질 않아서, 찾으러 가려고 했어.”
“제가 처음 보는 사람들이랑 있는 걸 아시면서요?”
문득 회귀 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도 그랬었지. 아셰라드렌은 내가 제 식사를 꾸준히 챙겨 주었다는 이유만으로 나를 구해 주기 위해 이름 없는 성을 빠져나왔었다.
낯선 이들에 대한 거부감이 컸을 텐데, 그럼에도 용기를 내 나를 만나러 오려고 했다는 사실 자체가 아주 기특했다.
그가 지금 강아지였다면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작은 코에 쉴 새 없이 뽀뽀를 퍼부어 주었을 텐데.
“모르는 사람들은 무, 무섭지만 그래도 다프네가 더 중요하니까.”
“…감동했어요. 아셰는 정말 멋진 분이에요.”
“다프네는 항상 나한테 조, 좋은 말만 해 줘….”
왕자는 좀처럼 수줍음을 떨쳐 내지 못했다. 뺨은 여전히 붉었고, 강아지일 때부터 촉촉했던 눈시울 역시 물기가 어려 있었다.
그는 나를 마주 보며 조심스럽게 입술을 벌렸다.
“나한테 키, 키스도 해 주고….”
“엄밀히 말씀드리자면 그건 키스가 아니었지만요.”
“무슨 소리야…?”
“아셰가 읽었던 동화 속에 나오는 입맞춤과는 달라요. 아셰는 왕자님이지만, 저는 공주님이 아니잖아요?”
나는 아셰라드렌의 이해를 돕기 위해 간단히 설명했다. 사실은 나 역시도 그의 운명의 반려가 꼭 공주씩이나 되는 신분이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다만 건국왕 기르시의 반려는 망국의 공주였다. 그 점을 망각해서는 안 됐다.
게다가 왕자는 아직 세상을 모르고, 아는 여자라고는 나밖에 없었다. 왕자가 동화 속의 공주에 나를 대입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이치였다.
그러나 나만큼은 왕자의 믿음을 곧이곧대로 받아 주어서는 안 됐다. 그의 반려는 내가 아닐 수도 있으니.
“다프네가 나, 나만의 공주님일 수도 있잖아…. 따, 딱 잘라 그렇게 말하지 마. 그건 상처야.”
“미안해요. 아셰를 슬프게 하려고 한 말은 아니었어요.”
“괜찮아. 나도 그게 제대로 된 키, 키스가 아니란 건 알고 있으니까.”
다행히도 그는 내 뜻을 알아주었다. 처음에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펜이며 검 한번 잡아 본 적 없는 길고 곧은 손가락들을 꼼지락거리며, 아셰라드렌이 내 입술을 빤히 쳐다보았을 때.
“그, 그러니까 확인해 보지 않을래? 다프네가 나의 공주님인지, 아, 아닌지.”
“아뇨, 그건 좀.”
역시나 그가 마냥 순수하기만 한 소년은 아니라는 사실을 직감했다. 겉은 저렇게 희고 곱기만 한데.
“그, 그렇게 빨리 거절하지 않아도 되잖아.”
“죄송해요. 그치만 매일 밤 배에 올려놓고 잤던 강아지와 키스를 한다고 상상했더니….”
“지금은 강아지가 아닌데.”
“그게 더 문제예요. 거기다 아셰는 아직 미성년자잖아요. 저는 왕국의 법을 어기지 않는 선량한 국민이라고요.”
키스는 무조건 사랑하는 사이에서만 해야 한다고 여길 만큼 보수적인 타입은 아니었다. 그러나 아직은 어린 데다, 시시때때로 동정심을 유발해 대는 왕자와 그런 짓을 했다가는 우리의 관계가 어떻게 변할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아셰라드렌에게 목숨을 구원받은 대가로 그에게 은혜를 갚고 싶은 것뿐이다. 그와 사랑하는 사이가 되고 싶다는 생각까지는….
과연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나? 나는 스스로의 양심에 대고 물었다.
키가 크고 아름다운, 나만을 바라보는 폐왕자는 분명 언제 사랑의 감정을 느껴도 이상할 게 없는 존재였다.
찰싹!
“그래도 그러면 안 돼!”
그러니 더욱 내가 정신을 차려야 했다. 나는 아셰라드렌이 화들짝 놀라는 것도 상관하지 않고 내 뺨을 한 대 갈겼다.
레티스가 살아 있었을 때라면 또 모를까, 이제는 아셰라드렌이 언제 왕성에 불려 갈지 모르게 되었는데.
이 와중에 왕자와 연인 관계로 발전했다가는 얼마나 큰 시련이 우리 앞에 닥쳐올지 벌써부터 그림이 그려졌다.
아니, 다 떠나서 왕자는 아직 성인도 아니었다. 그런 상대를 두고 두근거리려고 하다니. 왕자는 몰라도 나는 그래서는 안 되는 거잖아.
“왜, 왜 그러는 거야? 아, 알았어. 키스하자고 하지 않을게. 응?”
나의 격한 행동을 목격한 그가 급히 입을 열었다. 새로 온 사람들을 마주쳤을 때보다 더 충격받은 듯한 눈치였다.
“그래요. 다시는 그러지 말아요. 저를 범죄자로 만드시려고.”
“그, 그런 적 없어. 다프네는 내 나이가 마음에 걸렸구나.”
“굳이 따지자면 아셰의 신분도 마음에 걸려요. 아셰가 아는 여자가 저밖에 없는 것도 마음에 걸리고요.”
그러니까 우리는 안 된다. 이참에 못 박아 두는 편이 좋겠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아셰라드렌이 여느 때보다 진중한 눈을 하고 말했다.
“알겠어…. 그, 그럼 다프네가 기다려 줘. 내가 어른이 될 때까지.”
“어째서 결론이 그렇게 났을까요?”
“내년 봄이면 나도 성년이야. 예니체 경과 바, 바람피우지 말고 기다리도록 해.”
“네? 예니체 경이 여기서 갑자기 왜 나와요?”
나는 물었지만, 아셰라드렌은 답하지 않았다. 널찍한 어깨를 기울여 바닥에 떨어진 제 옷을 줍는 데 집중할 뿐.
내 머릿속은 의문으로 가득 찼다. 분명히 내 쪽에선 확실한 거절의 의사를 내보였는데?
“그, 그보다 아까부터 밖에서 누가 왔다 갔다 하고 있는데… 나가 보지 않아도 괜찮아?”
“나가 봐야죠. 이 얘기는 나중에 다시 해요. 아셰가 제 말을 이해하지 못한 것 같으니까요.”
“이해했어. 난 내 말을 하, 한 것뿐이야.”
왕자는 가지런한 치아를 내보이며 웃었다. 늘씬하게 접힌 눈꼬리와 단추를 채 잠그지 않아 드러난 탄탄한 가슴팍이 평소보다 더 눈에 들어왔다.
이러면 안 된다니까. 나는 더 이상 전과 같이 왕자의 미모를 대뜸 찬양할 수 없게 되었음을 깨달았다. 그와 단둘이서 같은 공간에 있는 것도, 갑자기 심하게 의식이 되기 시작했다.
“기다려 줘. 어른이 될 때까지.”
나긋한 목소리가 귓가를 맴도는 듯했다. 나는 그에게서 도망치듯 방문을 열고 나왔다. 세스나 제국이 왕국을 침공하기까지는 대략 1년이, 아셰라드렌이 성년이 되는 날까지는 대략 8개월의 시간이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