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폐왕자 길들이기 (37)화 (37/123)

37화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제가 잘못 들었을까요?”

시르시안의 경고를 듣자마자 당황하며 물었다. 이런 전개, 당연하지만 소설 속에선 존재하지 않았다. 대체 왜 이제 와서 왕실이 아셰라드렌을 부르려고 한단 말인가. 국왕에게는 남동생이 있으니 여차하면 왕위는 그쪽으로 넘어갈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건만.

“잘못 듣지 않았습니다. 여기 있는 분들은 이미 소문으로 들어 알고 있을 텐데요.”

“사실이야?”

나는 잔느를 쳐다보았고, 그녀는 저 또한 소식을 듣고 놀랐다는 듯 눈을 크게 뜨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앞서 시르시안에게 한 소리를 따끔하게 들은 탓인지 입을 열려고 하지는 않았다.

“다프네 양, 이라고 했던가요. 전에 한 번 왕성에서 봤던 기억이 납니다만.”

“세탁실에서 뵈었어요. 그때는 제 무례를 넘어가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아닙니다. 이해합니다. 모시는 분에 대해 함부로 떠들고 싶지 않았겠지요.”

나를 향한 시르시안의 눈빛이 퍽 따스했다. 나쁘지는 않은 기분이었다. 그동안 아셰라드렌을 위해 홀로 발 벗고 나서던 노력을 누군가 알아주는 것 같아 조금은 벅차오르기도 했다.

“듣자 하니 이제라도 왕자님을 후계로 삼아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는 것 같습니다. 물론 반대 세력의 입김도 거센 듯합니다만, 왕제(王制)께서 계승을 거부하시겠다는 뜻을 보이시는 바람에.”

남은 설명은 예니체 경에게 들을 수 있었다. 아마 내가 오기 전에 이런 얘기들을 나누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그 역시도 좀처럼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거인 같은 덩치에 괜히 인상까지 써서 겁이 많은 잔느와 리카를 바짝 얼어붙게 한 예니체 경은 한숨을 내쉬며 그나저나, 하고 말을 덧붙였다.

“왕자님께서는 어디에 계십니까? 가장 먼저 그분께 인사를 드려야 한다고 생각했는데요.”

“당분간 나오지 않으실 거예요. 처음 보는 사람들이 갑자기 나타나는 바람에 충격을 받으신 것 같아요.”

“저희들과 잘 어울려 지내고 계셨으니 괜찮을 줄 알았는데….”

“그럴 리가 있겠어요? 예니체 경도 참, 너무 무심하셨어요. 왕자님은 평생 홀로 갇혀 사시던 분이란 걸 잊으셨나요?”

“하지만 최근에는…. 아, 그렇게 노려보지 마십시오. 제가 실수를 했나 봅니다.”

나의 강렬한 시선을 받은 그가 두 손을 들고 사과했다. 예니체 경은 분명 좋은 사람이었지만, 이래서야 어째서 남들에게 미움을 받는지 알 것도 같았다. 분명 윗사람한테 밉보인 걸 거야. 나는 그를 째려보다 말고 고개를 휙 돌렸다.

“다프네 양은 왕자님과 상당히 가깝게 지내나 봅니다.”

“매일 함께 지내며 모시다 보니 그렇게 됐네요.”

“이런, 예니체 경에게 화가 난 걸 저한테 풀진 마십시오.”

“…그렇게 느껴지셨다면 죄송해요.”

시르시안은 이번에도 온화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셰라드렌만큼은 아니었지만 확실히 엄청난 미남이긴 했다. 우스테 후작저에서 일할 때도 메이드들이 매번 그의 발치라도 구경하겠답시고 난리를 쳐 대던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황금빛 벌꿀을 녹여 씌운 듯한 머리칼과 대화를 할 때는 꼭 상대를 마주 보는 금갈색 눈동자는 여인들을 꽤나 설레게 할 만한 요소들이었다. 그러나 메이드들이 그에게 열광하던 것은 비단 외모 때문만은 아니었다.

시르시안은 우스테 가문의 현 가주와 과거 저택에서 일했던 메이드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였다.

“괜찮습니다. 그런데 저도 왕자님을 만나 뵙고 싶기는 하네요. 키가 굉장히 크시던 것밖에는 보질 못해서.”

“저도요! 그치만 얼굴에서 빛이 나시는 것 같았어요. 뭐랄까, 피부는 하얗고 입술은 붉고… 왕비님과 많이 닮으셨던데요?”

잔느는 왕자의 미모에 홀딱 반한 게 틀림없었다. 하기야 나라도 그랬겠다. 나도 아셰라드렌을 처음 봤을 때는 머릿속에 온통 잘생겼다는 말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뻔뻔할 정도로 감정에 솔직한 잔느는 우습기도 하고 귀엽기도 했다. 타고난 성격이 밝은 그녀라면 아셰라드렌과 금방 친해질 가능성도 충분했다.

하지만 일이 이런 식으로 흘러가면 대체 내 계획은 어떻게 되는 걸까. 왕자가 본성으로 가게 될지도 모른다는 건 분명 기뻐해야만 하는 소식이었다. 그러나 레르베 라예트 왕국은 어차피 멸망하게 될 나라였다.

“왕자님이 처음엔 낯을 좀 가리실 거예요. 다들 부담스럽게 굴지 마시고 그분이 먼저 다가올 때까지 기다려 주시는 편이 좋아요.”

“그런데… 조심해야 하는 거 아니야? 왕자님은, 그, 밤마다 변신하신다고….”

“그런 거 아냐. 틈만 나면 변신하셔.”

지레 겁을 먹은 잔느가 크게 숨을 들이켰다. 왕자가 소문과 같은 사팔뜨기에 곱사등이가 아니란 걸 제 눈으로 직접 확인했음에도 두려운 감정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나는 사실만을 말했는걸. 내가 킥킥대며 웃자 예니체 경이 나를 따라 슬쩍 웃었다. 그리고 나는 우리 둘의 모습이 어떨지 깨닫고 다시 정색했다. 예니체 경의 입꼬리도 자연스럽게 아래로 내려갔다.

“대충 인사도 다 나눈 것 같으니 슬슬 나가 보겠습니다. 우스테 경은 저를 따라와 주십시오.”

예니체 경은 온 세상의 불행을 저 혼자 떠맡기라도 한 양 시무룩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내 그는 시르시안을 데리고 식당을 떠났다. 이제 남은 것은 나와 잔느, 아직 서로 통성명도 하지 못한 리카였다.

“우스테 경은 본성으로 퇴근하신다지? 아니다, 자택이 가까우니 그쪽으로 가시려나.”

나도 이제 그만 왕자의 상태를 보러 가고 싶었다. 대화를 끝마치고자 일어나 묻자, 잔느가 답했다.

“모르겠는데. 그런 얘기는 못 들었거든. 난 리카랑 여기 머물러야 한다는 것만 알아.”

“너희 방은 미처 정리하지 못했어. 너희가 온다는 걸 알게 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괜찮아. 우리도 갑자기 통보를 받고 온 거라서.”

“응…. 나도 괜찮아. 구조를 보니까 방이 많은 것 같던데, 아무 데나 써도 되겠지?”

리카는 말을 천천히 하는 편인 듯했다. 나는 그녀를 향해 고개를 끄덕인 뒤 새로운 메이드들에게 손짓했다.

“나랑 예니체 경은 위층에 있는 방을 쓰고 있어. 청소를 못 해서 여기저기 지저분한 곳이 많을 텐데 신경은 쓰지 마. 어차피 왕자님은 잘 돌아다니지도 않으셔.”

“다프네, 네 옆방은 비어 있어? 난 거길 쓸래. 너랑 붙어 있으면 안전하겠지.”

잔느와 리카도 나를 따라 일어섰다. 그들은 아직 낯설게만 느껴지는 이름 없는 성의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나를 졸졸 따라왔다. 계단을 올라 내 방 가까이 다가갔을 즈음 나는 그들을 돌아보았다.

“나는 방에 있을 테니 혹시 내가 필요하면 문을 두드려 줘. 막 들어오면 안 된다?”

“방에 금화라도 숨겨 뒀니? 밤에 혼자 자기 무서운데… 나랑 같이 자 주면 안 돼?”

“그건 좀….”

난감해진 나는 말끝을 흐리며 슬쩍 방으로 도망쳤다. 잔느가 ‘뭐야, 다프네! 너무하잖아!’ 하고 소리치는 것이 들렸지만 다시 나가 볼 마음은 들지 않았다. 생각보다 너무 오래 아셰라드렌을 혼자 두고 말았다. 나는 방문을 닫기가 무섭게 침대 아래를 살폈다.

“…어?”

그러나 왕자는 그곳에 없었다. 분명 아까까지 구급상자 옆에 찰싹 달라붙어 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거기다 그의 옷가지는 여전히 침대 위에 놓여 있었다. 그렇다면 아직 변신이 풀리지 않았다는 말인데.

나는 좁은 방 안을 살피며 왕자가 있을 만한 곳을 뒤져 보았다. 책상 아래, 옷장 안, 혹시 모르니까 천장도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보송보송한 털 뭉치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어, 어떡하지. 어디로 가신 거야.”

그가 내 방에 없는 건 확실했다. 그리고 밖에는 리카와 잔느가 돌아다니고 있었다. 어쩌다 왕자와 마주치기라도 하면 어떻게 하지? 나는 당연히 그가 얌전히 내 방에 틀어박혀 있을 줄 알았다.

“미쳤다, 너무 귀여워. 얘 좀 봐, 리카. 혹시 버려진 강아지를 주워 온 걸까?”

하지만 왕자의 행방을 쫓기 위해 복도로 나온 순간, 나는 잔느에게 사로잡힌 그와 눈이 마주쳐 가슴을 쓸어내렸다. 다행히도 그는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아니, 다행이 아닌가.

공포에 질린 강아지의 애절한 눈이 나를 향하고 있었으니까. 아셰라드렌은 리카에게 두 앞발을 붙잡혀 강제로 만세를 하고 있었다.

“…그건 아닐 거야. 딱 봐도 비싸 보이잖아.”

두 메이드는 바닥에 쪼그려 앉아 아셰라드렌을 두고 열띤 토론을 펼치고 있었다. 리카는 동그란 안경을 슥 들어 올리며 강아지를 요리조리 살폈고, 잔느는 ‘으으으으!’ 하고 참을 수 없다는 듯 행복한 비명을 질러 댔다.

“컹컹! 컹!”

“어머나, 깜짝이야!”

그러나 아셰라드렌이 평소처럼 귀엽게 왕왕, 도 아니고 컹컹하고 사납게 짖어 대자 잔느는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으며 넘어졌다. 가여운 강아지는 그때를 틈타 빠르게 내 앞으로 달려왔다.

“이리 오세요, 왕자님. 대체 어디에 계셨던 거예요?”

그는 끼잉끼잉 울부짖으며 내 발목에 매달렸다. 얼마나 서러웠는지 내 품에 안긴 뒤에도 그는 울음을 멈추지 못했다. 주먹만 한 머리를 연신 들이밀어 어떻게든 내게 더 깊이 안기려고 드는 등을 토닥여 주고 있으려니 두 쌍의 매서운 시선이 날아들었다.

“방금 뭐라고 했어, 다프네? 그 강아지가 왕자님이라고?”

“응? 응. 귀여우시지?”

“응, 엄청! 이 아니라, 지금 농담하는 거지? 그 모습이 어딜 봐서 괴물이야?”

잔느가 손사래를 쳤다. 엉덩이를 털고 일어나 내 곁으로 다가온 그녀는 아셰라드렌에게서 좀처럼 눈을 떼지 못했다.

“쉿, 그런 말 하지 마. 왕자님은 강아지일 때도 말귀를 다 알아들으셔.”

“저, 정말? 죄송해요! 제가 무례하게도….”

잔느는 제게 얼굴도 보여 주지 않는 강아지를 향해 몇 번이고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그러나 아셰라드렌은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어떡하지? 왕자님이 나한테 화가 나셨나 봐.”

“그러실 만도 하지…. 낯을 가리신다고 했잖아.”

그나마 리카는 처음부터 끝까지 신중한 태도를 고수했다. 그래 봤자 왕자는 그들을 거들떠도 보지 않았지만.

아직까지는 시간이 필요하겠지. 나는 메이드들에게 먼저 가 보겠다 눈짓한 뒤 살금살금 왕자를 데리고 방으로 돌아갔다. 그러고는 그가 제일 편해하는 침대에 내려 주려고 했지만, 이불에 발바닥이 닿기가 무섭게 내 품에 휙 뛰어드는 바람에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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