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폐왕자 길들이기 (36)화 (36/123)

36화

“…성대한 결혼식을 올린 지 1년 뒤, 공주는 왕자를 꼭 닮은 아이를 낳았습니다. 그러나 그 아이는 왕자처럼 고양이로 변하지 않았습니다.”

“조, 좋겠다. 부럽다.”

“어떤 점이 부러우세요?”

“아이는 고양이로 변하지 아, 않았다잖아. 나처럼 갇혀 살지 않아도 되겠지.”

“…만약 변한다 해도 갇혀 살진 않았을 거예요. 공주는 고양이를 좋아하잖아요.”

나는 왕자의 머리를 쓸어 주고 싶은 충동을 느끼며 그림책을 덮었다. 애초에 동화 속의 고양이 왕자가 유폐된 적은 없었지만 아셰라드렌은 왕자와 스스로를 겹쳐 보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런가…. 시, 신기하다. 나도 빨리 저주가 풀렸으면 좋겠어. 그, 그렇게 되면 아바마마도 나를 만나 줄까.”

“저주…라고 하고 싶진 않지만, 운명의 반려를 만나게 되면 어떻게 될지 모르겠네요.”

소설 속의 아셰라드렌은 스무 살의 나이를 넘기지 못하고 죽었다. 회귀 전의 아셰라드렌은 스무 살을 훌쩍 넘기고도 살아남았다. 전쟁의 피해를 받아 나와 함께 목숨을 잃긴 했어도, 소설과는 다르게 좀 더 오래 살다 갔다.

비단 전쟁뿐만이 아니라 아셰라드렌의 남은 수명을 위해서라도 우리는 이름 없는 성을 벗어나야만 했다. 운명의 반려라. 대체 그건 어떻게 찾는 거지. 건국왕 기르시는 스무 살이 되기 하루 전에 그의 반려를 맞이했다.

그러나 기르시는 반려를 만난 뒤에도 변신 능력이 사라지지 않았는데? 애초에 왕자의 능력은 저주가 아니었으니 풀릴 이유도 없지 않나.

“전 왕자님이 강아지로 변하셔서 너무 좋은데.”

“하, 하지만 괴물로 변했을 땐 싫어하잖아.”

“싫어하는 게 아니고 무서워하는 건데요?”

“그, 그게 그거잖아.”

“아니에요. 커다랗게 변하셨을 땐 그 나름대로 폭신폭신한 꼬리를 만지는 맛이 있는걸요. 저번엔 태워 주려고도 하셨잖아요. 아쉬워요. 타 보고 싶었는데.”

“…다, 다음에 태워 줄게. 여, 여기서 변하면 너무 좁을 것 같지만.”

왕자는 수줍게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식당에서 변신했다가 식탁 다 무너뜨릴 일 있나. 나는 싱글싱글 웃으며 제안했다.

“성 밖의 공터를 달려 보고 싶지 않으세요?”

“안 됩니다. 차라리 복도를 달리세요.”

“예니체 경도 왕자님을 타 보고 싶은가 보네요.”

내가 그림책을 읽어 주는 동안 더위를 식히던 예니체 경이 슬쩍 끼어들었다. 그러자 왕자는 대번에 인상을 찌푸렸다.

“시, 싫어. 예니체 경은… 아, 안 태워 줄 거야.”

“왜죠? 섭섭합니다.”

“다프네만… 태워 주고 싶으니까.”

“저는 영원히 왕자님께 미움받을 운명인가 봅니다.”

기사는 시무룩하게 중얼거렸다. 그때였다.

쾅! 쾅! 쾅!

우리는 일제히 식당 밖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예니체 경이 긴가민가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설마 본성에서의 추가 인원이 벌써 도착한 것은 아니겠지요.”

“밤에 온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저는 그렇게 들었습니다만…. 밖에 나갔다 오겠습니다. 혹시 어제와 같은 괴한일지도 모르니 입구 쪽엔 오지 마십시오.”

이제껏 이름 없는 성에 살면서 위협을 당한 적은 없었지만, 예니체 경의 경고를 들으니 괜히 겁이 나려고 했다. 나는 영문을 몰라 하는 왕자를 보며 말했다.

“아까 예니체 경의 말씀은 들으셨죠? 저나 예니체 경 같은 사람이 몇 명 더 온다고 하더라고요.”

“그, 그런 말… 못 들었어, 난.”

“그림책을 보시느라 그랬나 봐요. 불편하시면 제 방에 계셔도 돼요.”

“다프네 방으로 가, 갈게. 날 보면 분명 무서워할 테니까.”

아셰라드렌이 벌떡 일어나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그는 아직 나나 예니체 경을 제외한 이들을 만나 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꼭대기 층에 다시 올라가겠다고 하지 않아서 그나마 다행이려나. 안쓰러울 정도로 몸을 떨기 시작한 왕자가 내 주위를 서성거렸다.

“다프네랑 가, 같이 가면 안 돼? 같이 있고 싶은데.”

“그렇게 해요. 제가 곁에 있어 드릴게요.”

그래도 이건 그가 언젠가는 겪어야 될 일이었다. 왕자에겐 미안하지만 언제까지고 나와 예니체 경하고만 지낼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나는 갈피를 잡지 못하는 크고 창백한 손을 덥석 잡아 주었다.

“왕자님을 보면 다들 반하는 건 아닐까 몰라요. 너무 잘생기셔서.”

“…거, 거짓말하지 마.”

“왜요? 왕자님은 귀엽고 깜찍하고, 아름답고 사랑스럽고….”

“으… 아, 아니잖아. 다프네는 눈이 이, 이상해.”

두서없는 칭찬을 줄줄 내뱉자 왕자의 기분이 한결 나아진 듯 보였다. 그는 종종 칭찬을 들으면 속으론 좋으면서도 겉으론 싫은 척했다. 나는 잡은 손을 살랑살랑 흔들며 복도로 나갔다. 그러고는 때마침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예니체 경을 비롯한 낯선 일행이 시야에 들어와 얼른 손을 빼냈다.

일순 당황한 왕자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러나 그 역시 처음 보는 이들을 발견한 듯 급히 숨을 들이켰다.

“저분이 바로 아셰라드렌 왕자님이십니다.”

사태를 파악하지 못한 예니체 경이 그와 같은 제복 차림을 하고 있는 기사에게 입을 열었다. 그와 동시에 아셰라드렌은 뒷걸음을 치고 있었다. 이렇게 바로 처음 보는 사람들과 마주칠 것이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나는 눈치가 없는 게 분명한 예니체 경을 슬쩍 째려봐 준 뒤 놀라 도망치는 왕자의 뒤를 쫓았다.

“다프네 양? 무슨 일입니까.”

“나중에요!”

예니체 경의 물음에 길게 대답할 여유도 없었다. 왕자는 긴 다리로 쏜살같이 달려가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윽, 아, 시, 싫어. 싫어!”

속도는 굉장했고, 내 방에 거의 다다른 순간 그는 새하얀 연기를 뿜어내며 강아지로 변해 버렸다. 자취를 남기듯 옷가지들을 하나둘씩 떨어뜨린 그가 방문을 정신없이 긁어 댔다. 나는 관자놀이를 타고 흐른 땀을 닦으며 문고리를 돌렸다. 안쓰럽게도 왕자는 끼잉끼잉 울부짖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어쩌면 좋아. 많이 놀라셨구나.”

나는 아셰라드렌을 품에 안아 안심시키지도 못했다. 방이 열리자마자 안으로 쏙 들어간 강아지는 침대 아래로 기어가 더 이상 모습을 보여 주지 않았다.

억지로 그를 꺼냈다간 또 심하게 흥분할지도 몰랐다. 당장은 혼자 진정할 수 있도록 내버려 두는 편이 좋을 듯싶었다. 나는 바닥에 엎드려 언젠가처럼 꼬리를 만 채 오들오들 떨고 있는 솜사탕의 상태를 잠시 지켜보다 몸을 일으켰다.

“다른 사람들이 온다는 걸 좀 더 빨리 알려 드릴 걸 그랬어요.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을 충분히 드렸어야 하는 건데….”

괜히 미안했다. 어쩌면 왕자가 나나 예니체 경이 아닌 새로운 이들도 만나 봤으면 좋겠다는 내 바람 탓에 이런 상황이 벌어진 건 아닐까 하는 자책감도 들었다.

“새로운 분들께 인사는 드려야 할 것 같으니, 저는 잠시 나갔다 올게요. 제 방 쪽으론 아무도 못 오게 할 테니 걱정 마세요.”

“…….”

침대 아래 진 그림자 밖으로 작디작은 발 하나가 불쑥 튀어나왔다. 그러고는 가지 말라는 듯 내 치맛자락을 부여잡았다. 이 와중에 앞발은 또 왜 이렇게 작은 건지. 너무 귀여워서 심장이 아파지려 했다.

당장이라도 그를 꺼내 있는 힘껏 안아 주고 싶다. 나는 보드라운 털로 감싸인 발을 살살 매만졌다.

“잠깐이면 돼요. 금방 돌아올게요.”

“끼이잉….”

“아니면 같이 가시겠어요? …그건 싫으시죠.”

그냥 이대로 여기 왕자와 함께 머무르는 것이 좋을까. 하지만 그건 역시 예의가 아니었다. 안 그래도 인식이 좋지 않은 이름 없는 성인데, 나까지 얼굴 한번 비추지 않았다간 기사며 메이드들이 뒤에서 흉을 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5분 만에 올게요. 기다려 주세요, 아셰.”

결국 나는 왕자의 앞발을 억지로 떼어 냈다. 그가 계속해서 끙끙대는 바람에 자꾸만 마음이 약해지려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방을 나서는 발걸음이 천근만근이었다.

이름 없는 성에는 따로 손님들을 모시는 공간이 없었으므로, 새롭게 보충된 인원들은 식당에 모여 있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과 같이 일하는 게 얼마 만인지. 나는 조용히 식당 안으로 들어섰다.

“다프네!”

“…잔느?”

그러고는 익숙한 얼굴들의 향연에 깜짝 놀랐다. 모두가 내가 아는 이들은 아니었지만, 두 명의 메이드 중 하나는 나와 왕성에 함께 들어왔던 세탁실의 잔느였다. 거기다 예니체 경의 옆에 앉아 있는 기사는 내가 오랜 기간 일해 왔던 우스테 후작가의 도련님인 시르시안이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 얼핏 봤던 기사가 금발을 하고 있었지. 왕자를 따라가느라 정신이 없어 제대로 얼굴을 확인하지 못했었다.

“돌고 돌아 결국 여기로 왔네. 하아, 설마 마담 셀라가 나를 고를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어.”

잔느는 나를 보자마자 푸념을 늘어놓았다. 예상외로 겁에 질린 모습은 아니었다. 그녀는 그저 억울해하며 제 신세를 한탄했다.

“아무래도 난 이름 없는 성과 무슨 인연으로 이어져 있나 봐. 안 그래?”

“그럴지도 모르지. 왕성에서 잘 지낸 것 같아 안심이야.”

“그런데 조금 전에 그분이 정말 왕자님이니? 듣던 얘기랑은 많이 다르던데?”

세상에 잘생긴 남자를 싫어하는 여자는 없다. 잔느는 연둣빛 눈동자를 열심히 깜빡이며 내게 물었다. 대대로 미인들만 배출한다는 우스테 후작 가문도 아셰라드렌의 앞에서는 빛을 잃을 것이다. 잔느는 얼른 말해 보라는 듯 내 팔을 잡아 제 쪽으로 당겼다.

“잔느 양은 성에 오기 전과 후의 태도가 크게 다르네요. 성에 도착했을 때만 해도 들어가기 싫다고 눈물을 보이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내가 입을 열기도 전에 시르시안이 작게 웃으며 대화를 가로챘다. 예니체 경과 같은 무늬의 제복을 입은 그는 식탁에 턱을 괸 채 우리를 주시하고 있었다.

“어머, 그건 리카도 마찬가지였는걸요. 저만 그런 게 아니었어요.”

“왜 나한테 그래…. 그래도 난 너처럼 성문을 붙잡고 버티지는 않았어.”

리카라고 불린 메이드는 나와는 완전히 초면이었다. 나와 같은 갈색 머리를 묶고 동그란 안경을 낀 그녀는 소심하게 잔느를 힐난하며 어깨를 움츠렸다. 그러자 시르시안이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왕실에서 공식적으로 왕자님을 호출하기 전까지 저희는 이름 없는 성의 소속입니다. 더 이상 왕자님께 누가 될 행동은 삼가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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