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폐왕자 길들이기 (35)화 (35/123)

35화

기한은 1년. 아니, 그보다는 서두르는 편이 낫겠지. 여주인공이 없어졌다 한들 남주인공이 이 나라를 침략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으니까. 하지만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지?

어느 날 갑자기 이름 없는 성을 나가 살자고 해 봤자 예니체 경은 물론이고 아셰라드렌마저 부정적인 반응을 보일 것이다.

고민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이라도 짐을 싸 들고 뛰쳐나가고 싶었다. 경제적인 부담은 없었다. 내게는 전에 왕자가 찾아다 준 금화도 잔뜩 있었다.

사치를 부리며 산다고 해도 우리 세 사람 정도는 거뜬히 먹여 살릴 만한 양이었다. 아, 그런데 성 밖으로 나가려 하지 않는 왕자는 그렇다 치더라도 예니체 경에게는 가족이 있었지. 비록 몰락한 귀족이라고는 하나, 그들은 왕도에 머무르고 있었다.

전쟁이 일어난다면 예니체 경의 가족들도 분명 휘말리게 될 것이었다. 그들에게 미리 왕도에서 멀리 벗어나라고 언질해 줄 수 있다면 좋으련만.

“고, 고기가 다 식었어.”

“…이건 원래 차갑게 먹는 요리예요.”

얼굴 한번 본 적도 없는 예니체 경의 가족에 대해 생각하느라 정신이 팔려, 단호박으로 만든 소스를 과하게 쏟아붓고 있었다. 나는 소스 병을 내려놓고 아셰라드렌과 마주 보았다.

이미 식탁 앞에 앉아 있던 왕자는 턱을 괸 채 나를 묘한 눈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이, 이상해. 다프네는 여기 있는데, 여기 없는 것 같아.”

“죄송해요. 일단 식사부터 할까요?”

“어제부터 자꾸 죄송하대. 다프네는 잘못한 게 없는데.”

짧게 한숨을 쉰 그가 자세를 바로 했다. 그는 뭔가 불만스러운 표정이었으나, 딱히 그 이유를 설명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사실 왕자는 지금 내 상태를 완벽하게 간파하고 있었다.

어쩐지 나는 이 세상과 내가 동떨어져 있다는 듯한 느낌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생을 기억한다는 공통점으로 나를 찾아내 준 레티스. 어쩌면 우리는 머리를 맞대고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아남을 방법을 고민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는 혼자 생각했고, 결단을 내렸고, 새로운 인생을 제대로 살아 보기도 전에 죽어 버렸다. 어쩜 이다지도 허망할 수가 있지. 레티스보다 나이도 많고, 이쪽 세상에 오래 살았던 내가 그녀를 위해 뭐라도 해 줄 수 있는 건 없었을까?

원인 모를 죄책감이 들었다. 무거워진 마음에 속이 뒤틀리는 듯했다. 결국 나는 수저를 놓아 버렸다.

“다프네는 나만을 위한 메이드라면서….”

고개를 푹 숙인 채 에이프런의 레이스만 만지작거리고 있을 때였다. 나 때문에 덩달아 식욕을 잃은 듯한 아셰라드렌이 접시를 슬쩍 밀어냈다.

“왜 나를 보, 보고 있지 않아? 호, 혹시 내가 질린 거야?”

“질렸다뇨, 대체 그런 표현은 어디서 배우신 거예요?”

“모, 몰라. 하지만 나는 지금 다프네가 나를 귀찮아한다는 걸 알아.”

“저 그런 적 없어요. 세상에, 저는 아셰를 평생 모실 생각인걸요.”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셰라드렌은 눈치가 빨랐다. 그는 내가 제가 아닌 다른 사람을 떠올리는 것을 더 이상 용납할 수 없는 듯했다.

하지만 그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나는 어려서부터 수많은 타인들과 교류를 해 왔지만, 왕자의 교류 상대는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에 가까웠다. 이따금씩 충격적인 발언들과 함께 등장하는 유모는 예외였다. 그 인간은 아셰라드렌의 사회성 발달에 기여는커녕 악영향만 주었다.

나는 눈앞의 왕자를 위해서라도, 한순간에 죽어 버린 어린 소녀를 기리는 시간은 이쯤에서 끝내야 했다.

“그, 그럼 앞으로 나한테만 집중해…. 여기 있는 건 나잖아. 레티스는 여기 어, 없어.”

“알겠어요, 죄송해요.”

“죄송하다는 말은 이제 그만.”

나는 왕자의 요구가 정당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한편으로는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비정상적인 환경에서 자라났으니 어쩔 수 없는 걸까. 레티스가 그와 피를 나눈 가족이라는 사실 따위는 왕자에게 조금도 와닿지 않는 모양이었다. 함께 자라지 못했으니 이해는 가지만서도.

한편으론 그의 공감 능력이 걱정되기도 했지만 지금 당장은 뭘 어떻게 할 수도 없겠지. 이름 없는 성 밖으로 나가 새로운 사람들과 맞부딪혀야만 나아질 수 있는 부분이다. 별로 그러고 싶진 않았지만 나는 입꼬리를 올려 미소를 지었다. 아셰라드렌을 안심시킬 필요가 있었다.

“요리가 다 식었네요. 얼른 먹고 치워야겠어요.”

“워, 원래 차가운 고기라면서?”

“아, 맞다.”

“다프네는 바, 바보야.”

“너무해요. 제가 아셰보다 할 줄 아는 게 훨씬 많은데.”

“아냐, 나도 이제 다프네가 하는 일은 다 할 줄 알아.”

“설거지나 청소는 왕자님이 하실 만한 일이 아닌데요….”

“아, 아무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고개를 접시에 처박고 식사를 하시던 분이 말은 잘한다. 그제야 진심으로 웃음이 나왔다. 나는 어느새 제법 능숙하게 칼질을 하는 아셰라드렌을 흐뭇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

예니체 경이 돌아온 것은 오후 나절이 지났을 때였다. 그즈음 나는 거절을 거절하는 왕자의 도움을 받아 예니체 경의 침실과 내 방의 청소를 끝낸 뒤 식탁에 앉아 그림책을 고르고 있었다.

도서관에서 빌렸던 책부터 봐야 하는데, 아셰라드렌이 한사코 예니체 경이 사 왔던 그림책을 읽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탓에 난감하던 차였다. 아무리 봐도 왕자는 키스를 하면 변신이 풀린다는 내용에 꽂혀 있었다.

“어서 오세요. 땀을 많이 흘리시네요.”

“날씨가 많이 덥습니다. 빨래가 잘 마를 것 같네요.”

“그래요? 잘됐다. 안 그래도 슬슬 경의 옷을 빨아야 할 때가 되긴 했거든요.”

“아뇨, 당분간은 그러지 않아도 됩니다. 왕성에서 메이드를 좀 더 보내 준다고 했으니까요.”

분명 예니체 경은 그와 같은 기사를 더 데려오기 위해 왕성에 가지 않았던가? 그의 말을 곧바로 이해하지 못한 나는 기어코 왕자가 가져온 그림책의 모서리를 만지작거리기만 했다.

“공주님의 사고도 있고 하니… 이름 없는 성에 신경을 좀 더 쓰려는 모양입니다. 어젯밤에 있었던 일도 있고.”

“그러고 보니 그 얘기를 듣지 못했네요. 잠시만요, 시원한 아이스티를 한 잔 타 드릴게요.”

“감사합니다.”

나는 왕자에게 그림책을 건네주고 일어났다. 웬일인지 이번에 나를 따라 주방으로 들어오는 이는 예니체 경이었다. 까치발을 들어 찬장을 뒤지고 있으려니 햇빛에 그을린 손이 불쑥 나타났다.

“이 컵을 꺼내시려는 겁니까?”

“네, 감사해요. 그런데 왕자님은요?”

“첫 번째 페이지를 넘어가지 못해 골머리를 앓고 계십니다.”

“…그래도 노력하고 계시네요.”

내가 아셰라드렌이 기특하다는 듯 말하자 예니체 경도 덩달아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저 정도면 장족의 발전이었다. 우리가 왕자에게 그렇게 대단한 것을 바라는 건 아니었으니까.

“저는 사람들이 이름 없는 성을 두려워한다고만 생각했는데, 마냥 그런 것도 아닌가 보더군요. 어제는 정체 모를 괴한이 여럿 나타났습니다. 공주님이 돌아가신 건 왕자님 때문이 아니냐는 헛소리를 지껄이던데.”

“그게 무슨 말씀이죠? 왕자님은 하루 종일 저희랑 같이 있었잖아요.”

“멍청한 작자들이 괜히 왕자님을 탓하는 것일 테지요. 사실 예전에도 괴물의 씨를 말려야 한다느니 하며 성에 불을 지르려는 놈들도 가끔 있었습니다.”

“괴물이라니요. 건국왕 기르시도 왕자님처럼 늑대와 같은 모습으로 전장을 누볐잖아요.”

“천 년도 전의 전설입니다. 다프네 양 말고는 아무도 그런 말을 믿지 않을 겁니다.”

하기야 기르시의 후손인 국왕부터가 제 아들을 유폐시켰으니. 나는 방해가 되지 않으려는 듯 팔짱을 낀 채 구석으로 물러나는 예니체 경과 대화를 이어 나갔다.

“그래서 어제는 어떻게 됐는데요? 저는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어요.”

“되도 않는 소리만 해 대길래 명치 한 대씩 때려 주고 본성의 경비대에게 넘겼습니다. 그 후로는 어떻게 되었는지 모릅니다. 경비대장이 저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요.”

“예니체 경 같은 분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머저리예요. 자, 차가 완성됐어요.”

차가운 컵을 받아 든 기사가 먼저 걸음을 떼었다. 다시 식당으로 나가면서 그는 살짝 웃었다.

“여성에게 그런 말을 듣는 것은 처음입니다.”

“경, 연애해 본 적 없으시죠.”

“…어쨌거나 오늘 밤이면 기사도 몇 명 더 올 겁니다. 부디 왕자님이 놀라시지 않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그분들은 이름 없는 성 안에서 지내실 예정인가요? 방을 미리 치워 둬야 할 것 같아서요.”

“아뇨, 교대로 밤새 성 밖을 지키다 본성의 기사 숙소로 퇴근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메이드들은?”

“그것까지는 잘.”

그렇다면 내 옆의 방들을 미리 치워 둬야 하나. 하지만 접시 대신 그림책에 코를 박고 있는 왕자를 보고 있자니 과연 그럴 여유가 있을까 싶었다. 나는 다시 왕자의 곁으로 가 의자에 앉았다. 그림책에 들어갈 기세로 집중하고 있던 그가 예쁜 보라색 눈만 들어 나를 힐끔 쳐다봤다.

“다프네, 이거 언제 읽어 줄 거야? 계속 기, 기다리고 있는데.”

“지금이요. 어디 보자, 옛날 옛날에….”

내 업무는 왕자를 돌보는 것이지, 메이드들의 숙소를 정리하는 게 아니었다. 남은 시간 정도는 안 그래도 하루 종일 울적했던 나 때문에 불편했을 그를 위해 사용하고 싶었다.

이윽고 나는 또박또박 천천히 그림책을 읽어 주기 시작했다. 왕자는 숲속에서 길을 잃은 동화 속의 공주님을 한 번, 커다란 글자들에 집중하는 나를 한 번씩 번갈아 보며 응응, 하고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동화 내용을 듣고 있기는 한 건지? 내 입술을 열렬히 바라보는 그의 시선을 외면하기가 쉽지 않았다. 나는 하고많은 동화들 중에서 하필이면 이런 내용을 골라 온 예니체 경을 속으로 약간 원망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