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이불을 끝까지 뒤집어쓰고 눈을 감았다. 레티스가 죽었다. 이 세상의 주인공이 사라졌다.
그렇다면 과연 이 세계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
나는 알 수 없었다. 혼란스럽고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내가 회귀를 하게 된 것은 레티스의 몸에 깃든 ‘문세나’ 때문이라고 철석같이 믿었었는데. 그녀의 영혼을 맞이하기 위하여, 거대한 시간의 흐름이 스스로를 되돌린 것일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하지만 정작 그녀가 죽음을 맞이한 뒤에도 세상은 변함없이 유지되고 있었다. 하늘이 무너져 내리거나 땅이 꺼지지도 않았다. 이번에는 시간이 다시 과거로 돌아가는 기적도 일어나지 않았다.
여주인공이 없어진 소설은 대체 어떻게 굴러가는가? 수많은 로맨스 소설을 읽어 봤지만 이런 경우는 난생처음이었다.
“다프네 양,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생각에 빠져 있던 사이 문이 활짝 열렸다. 예니체 경이 아직 사람으로 돌아오지 못한 아셰라드렌과 나란히 서 있었다. 왕자는 나를 보자마자 있는 힘껏 내게 달려왔다. 다리가 짧아 침대 위로 올라오지 못하는 그가 몸을 일으켜 이불을 벅벅 긁어 댔다.
“왕자님이 계속 문 앞에 앉아 계셔서요. 아까부터 짖으셨는데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습니까?”
“아, 네. 죄송해요. 듣지 못했어요.”
정신을 빼고 있다 해도 이제까지 이런 적은 없었는데. 나는 익숙하게 아셰라드렌을 안아 들었다. 왕자의 분홍색 혀가 내 뺨이며 턱을 열심히 핥느라 바빴다.
나는 왠지 모르게 왕자가 나를 위로해 주려고 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정작 죽은 레티스는 내가 아닌 그의 가족이었다.
“왕자님께도 죄송해요. 멋대로 그렇게 가 버리면 안 되는 건데.”
“혈색이 별로 좋지 않습니다. 오늘은 방에서 쉬는 게 어떻습니까?”
“그래도 괜찮을까요? 오후에는 왕자님께 그림책을 읽어 드리기로 했는데….”
“왕! 왕!”
하얀 강아지가 내 품에서 빠져나와 침대 구석에 동그랗게 몸을 말고 엎드렸다. 그러고는 낮잠이라도 즐기려는 것처럼 눈을 감았다. 예니체 경은 왕자를 바라보더니 얼굴을 거칠게 쓸어내리며 몸을 돌렸다.
“괜찮다고 하시는 것 같네요. 저는 다시 보초를 서러 갈 테니 잠깐 눈이라도 붙이십시오.”
“감사해요. 예니체 경도 많이 놀라셨죠.”
“어제까지만 해도 축제니 뭐니 하는 소리를 했으니까요. 그나저나 큰일이군요. 유일한 후계시던 공주님이 돌아가셨으니… 앞으로 어떻게 될는지.”
기사의 시선이 잠깐 쌔근쌔근 숨을 내쉬는 강아지의 등에 닿았다 떨어졌다. 유폐된 왕자는 왕위 계승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다만 국왕에게는 남동생이 하나 있는 것으로 안다. 소설에서는 등장한 적도 없어서 왕실의 가계도로만 확인한 것이 전부였지만.
예니체 경이 방을 나가자 나는 베개를 등받이처럼 만든 후 무릎을 접어 안았다. 이제 다시는 레티스를 볼 수 없다는 사실이 아직도 전혀 와닿지 않았다. 싱글싱글 미소 짓던 해사한 얼굴을 바로 얼마 전에 마주하고 있었건만, 그녀는 지금 싸늘한 시체가 되어 왕성으로 돌아오고 있는 중이었다.
소설의 여주인공이 낭떠러지에서 떨어져 즉사하다니. 솔직히 이런 일이 과연 가능한 건지 의문이다. 정말 누가 밀어 죽인 거 아닐까?
합리적인 의심이 들었다. 여주인공이 사고로 죽는 소설 같은 건, 애초에 개념이 성립되지 않는다. 주인공이 어째서 주인공인데. 이야기를 이끌어가야 할 사람이 죽다니, 대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누군가 의도적으로 그녀를 살해한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하지만 만약 그렇다고 해도 감히 누가 일국의 공주를 죽인단 말인가. 그것도 온 백성들의 사랑을 받으며 자라난 그녀를.
물론 이번에 죽은 공주는 진짜 레티스가 아니었지만.
“…….”
나는 머리를 붙잡고 소리 죽여 울었다. 진짜 레티스는 이미 예전에 죽었다. 그러나 나를 제외하고는 누구도 그 사실을 모른다.
한편으로 나는 레티스의 몸에 깃들어 있던, 나와 같은 세상에서 온 여자아이를 반기느라 진짜 레티스의 죽음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하지 않았었다. 소설 속에서 곧잘 나오는 내용이랍시고 아무렇지 않게 넘어갔지만, 사실은 그것만으로도 이미 너무나 슬픈 일이었다.
진짜 레티스가 언제 죽었는지도 모르는 왕국은 공주를 추모하기 위해 하얀 꽃잎을 날리겠지. 하지만 그 속에 들어 있던 문세나에 대해서는 아무도 알지 못할 것이다. 영원히.
⋆★⋆
이튿날, 편한 옷차림을 벗어 던지고 평소에 입던 검은 드레스를 골랐다. 상체가 딱 달라붙는 복장은 아직 불편한 감이 없잖아 있었으나 그런 것쯤은 충분히 감수할 만한 것이었다.
드레스의 허리끈을 묶고 뒤로 돌았을 때, 왕자는 어느새 사람으로 변해 있었다. 밤새 내 곁을 지켜 준 작은 강아지였다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건장한 체격이었다. 당연하다는 듯 아래만 겨우 가린 채 벽에 기대어 앉은 그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고 있었다.
“이제 아, 안 울어?”
앞머리에 반쯤 가려진 보랏빛 눈매가 따스했다. 그러나 그의 따뜻함은 오직 나만을 위한 것이었다. 왕자는 공주의 죽음에 관해서는 일말의 관심조차 없었다.
“안 울어요. 운다고 공주님이 살아 돌아오시는 게 아니니까요.”
“다프네는, 그 애가 사, 살아났으면 좋겠어?”
“그런 식으로 떠나셔서는 안 되는 분이었는 걸요. 개인적인 친분도 있었다 보니 많이 속상하네요.”
“다프네가 속상하다고 하니까 나도 소, 속상해.”
“공주님은 아셰의 동생이셨어요. 두 분만의 추억이 있으셨더라면 아셰도 분명 슬펐을 거예요.”
“그, 그랬을까.”
내 방에는 다행히도 아셰라드렌의 옷이 몇 벌 준비되어 있었다. 나는 검은 셔츠와 바지를 꺼내 그에게 건네주었다. 그가 셔츠에 팔을 끼우는 것을 확인한 뒤 나는 그에게 등을 보이며 침대 끄트머리에 앉았다.
“살아 계셨다면 언젠가는 아셰랑도 많이 친해졌을걸요. 아셰는 낯을 가리지만… 그래도 다가오는 사람을 밀어내진 않잖아요?”
“그렇지 않아. 그건 다프네여서 그랬던 거야.”
“어떻게 그걸 확신하세요?”
“다프네만큼… 나한테 다정했던 사람은 어, 없었으니까.”
침대 뒤쪽이 푹푹 꺼지는 듯했다. 금세 옷을 입은 아셰라드렌이 무릎걸음으로 다가와 내게 팔을 둘렀다. 나는 강아지일 적의 그를 이런 식으로 안아 준 적이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부드러운 숨결이 목 뒤를 간질였다.
“다프네가 죽으면 나도 주, 죽어 버릴래.”
“갑자기 왜 그런 말씀을 하시고…. 그러지 마세요. 저희 둘 다 벽에 똥칠할 때까지 오래오래 살기로 해요.”
“벼, 벽에 똥칠을 왜 해?”
“나이를 너무 많이 먹게 되면 그런 경우도 가끔 있다나 봐요.”
“그런 짓을 했다간 더, 더럽고 냄새나서 다프네가 싫어할 것 같아.”
생각의 방향이 이상한 쪽으로 튀는 왕자와 함께 있자니 가라앉았던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이걸 좋아해야 하는 건지 싫어해야 하는 건지. 쇄골을 감싼 왕자의 손목을 툭툭 치며 나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아침이나 먹으러 가요. 아셰도 어제 나랑 하루 종일 자느라 아무것도 먹지 못했죠?”
“안 먹어도 괜찮았어. 다프네의 곁에 있어 주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새, 생각했으니까.”
“기특하셔라. 예니체 경에게도 그렇게 상냥하시면 좀 좋아요.”
“사, 상냥한 예니체 경이 어제 우리 식사도 다 머, 먹었을 것 같은데.”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였다. 그나저나 나를 뒤에서 껴안은 왕자가 손을 치우지 않는다. 이 요상한 자세로 복도에 나갔다 예니체 경을 마주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이럴까. 기사는 이제 왕자와 메이드가 매일같이 한 침대에서 동침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곤란했다. 괜한 오해를 사고 싶지는 않았다.
“제 옆으로 오세요. 이렇게 걸을 수는 없잖아요.”
“거, 걸을 수 있는데? 다프네가 넘어지면 내가 잡아 줄게.”
“아뇨, 그런 게 아니라….”
“내가 외로울 때 다프네는 항상 가, 같이 있어 주려고 했어. 나도 그렇게 하는 게 맞아.”
“…그렇게 말씀하시면 더 할 말도 없네요.”
그러니까 이건 그만의 위로 방식이라고, 아셰라드렌은 설명하고 싶은 것 같았다. 이쯤 되니 나는 힘없는 미소만 지을 뿐, 더 이상 떨어지라고 말하기가 힘들었다.
“제가 아셰를 잘못 키운 게 틀림없어요. 시도 때도 없이 들러붙으시다니.”
“맞아. 다프네가 가르쳐 준 거야.”
어이가 없었지만 그의 말이 옳았다. 나는 왕자를 데리고 어기적어기적 식당으로 향했다.
“어제는 감사했어요. 간밤에 별일은 없었죠?”
“사실대로 말씀드리자면 있었습니다. 웬 이상한 놈들이 나타나 쓸데없는 소리를 하는 걸 쫓아냈거든요.”
평소보다 늦게 나온 탓인지 예니체 경은 이미 식사를 마친 뒤였다. 접시를 정리하고 나오려던 그는 내 뒤편에 있는 아셰라드렌을 애써 보지 않은 척하며 답했다.
성의 입구에 있는 바구니를 가져오는 건 내 역할이었는데, 나는 이틀째 그 임무를 수행하지 못하고 있었다. 내일부터는 아침 일찍 나와야겠다.
“당분간 이름 없는 성의 경비를 늘리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이 길로 잠시 왕성에 들릴까 합니다. 제가 돌아오기 전까지 성 밖으로 나오지 마십시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나중에요.”
예니체 경의 시선이 아셰라드렌에게 닿았다 떨어졌다. 필시 왕자와 관련된 일인 것이리라. 나는 의미 모를 불안함을 느끼며 예니체 경을 배웅해 주었다. 그가 자리를 뜬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셰라드렌은 접시를 챙기는 나를 도와주며 물었다.
“겨, 경비를 늘린다는 게 무슨 뜻이야?”
“예니체 경과 같은 기사를 좀 더 데려온다는 뜻이에요. 하지만 과연 그게 가능할지는 모르겠어요.”
국왕은 아셰라드렌에게 최소한의 예산만을 허락했다. 예니체 경이 그 사실을 모를 리는 없었다. 그럼에도 왕성을 찾는다는 건, 이름 없는 성 주위의 치안이 하룻밤 사이에 급격하게 나빠졌기 때문이겠지.
나는 왕자에게 차가운 오리고기를 덜어 주면서도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레티스가 죽은 지금, 나는 다시 아셰라드렌과 예니체 경을 데리고 이름 없는 성을 탈출해야만 한다는 상념에 사로잡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