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폐왕자 길들이기 (33)화 (33/123)

33화

“그런 거 아니에요. 어떻게 왕자님이 안 보일 수가 있겠어요. 죄송해요, 왕자님이 소외감을 느낄 수도 있다는 걸 제가 미처 고려하지 못했네요.”

“와, 왕자 아니야. 아셰.”

“네, 아셰. 죄송해요.”

하지만 사과를 했다고 해서 왕자의 기분이 풀리는 건 아닌 듯했다. 나는 복도에서 미적대기만 하는 그의 손을 흔들었다.

“어서 가요. 예니체 경이 아셰를 위해 선물도 사 왔던데 궁금하지 않으세요?!”

“벼, 별로….”

“궁금한 것 같은데요?! 표정이 밝아졌어요.”

그제야 아셰라드렌은 나를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방에서 새로운 바지를 꺼내 준 뒤 나는 밖에서 기다리고 있겠다고 해도 말리지 않는 걸 보면 예니체 경에 대한 경계심도 아주 조금은 풀린 것 같았다.

다시 식당으로 돌아갔을 때, 예니체 경은 이미 식사를 마친 뒤 몇 잔째인지 모를 주스를 시원하게 들이켜고 있었다. 저렇게 먹어 대는데 대체 살은 어째서 찌지 않는 건지 궁금할 지경이었다. 전부 다 근육으로 가 버리는 건가.

“예니체 경, 아까 왕자님을 위해 뭘 사 왔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아, 네. 맞습니다. 좋아하실지는 모르겠지만.”

기사는 주섬주섬 예의 그 핑크색 리본을 단 뼈다귀를 꺼냈다. 왕자는 일순 좋아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을 했다. 그가 받은 선물은 강아지일 때나 쓰임새가 요긴한 것이었다. 사람일 때도 굳이 씹을 수 있다면야 상관은 없겠지만.

“어때요, 왕자님? 별로인가요?”

“어, 뭐….”

“누군가에게 선물을 받았을 땐 고맙다는 인사를 해야 해요. 예니체 경이 밖에서 왕자님을 생각해 사 오신 거잖아요.”

“고, 고마… 아니, 근데 다, 다들 날 개 취급만 하고!”

결국 왕자의 분노가 폭발했다. 그는 제 앞에 놓인 뼈다귀를 보며 씩씩거렸다. 그러자 예니체 경이 재빨리 새로운 선물을 꺼냈다.

“그렇지 않습니다. 요즘 다프네 양과 글공부를 하시는 걸 보고 그림책도 사 왔거든요. 둘이서 한번 읽어 보세요. 마법에 걸린 고양이가 공주와 사랑에 빠져 이웃 나라의 왕자로 변신하는 내용입니다.”

“줄거리를 전부 말씀하시면 어떻게 해요, 예니체 경.”

“아.”

기사는 나와 마찬가지로 어린아이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좀처럼 갈피를 잡지 못했다. 열심히 떠들어 대던 그가 입을 다물고 아셰라드렌의 눈치를 살폈다. 어느새 왕자는 그림책 속의 근사한 금발 머리의 왕자님이 공주와 입을 맞추는 장면을 펼쳐 놓고 있었다.

“이, 입을 맞추면 변신하는 거야?”

언제 성질을 부렸냐는 듯 아셰라드렌이 그림책을 가리키며 물었다. 저러다가 나한테 입을 맞춰 보자고 하는 건 아니겠지. 한시라도 빨리 이름 없는 성 밖으로 나갈 수 있으면 좋으련만.

아셰라드렌에게는 세상에는 나와 예니체 경 외에도 수없이 많은 사람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배울 필요성이 있었다.

“아무나랑 그런다고 가능한 건 아닐 거예요. 특별한 존재와 입을 맞춰야 할걸요.”

“그건 그, 그렇겠지. 나도 예, 예니체 경이랑 입 맞춘다고 개로 변할 것 같지는 않아.”

“…그걸 어떻게 확신하세요?”

“상상만 해도 토할 것 같으니까.”

“그러셨구나.”

“그러셨구나, 라니요. 다프네 양. 저 상처 받았습니다.”

예니체 경이 시무룩하게 중얼거리자 그 모습을 본 왕자가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그래도 어떻게든 이렇게 도란도란 얘기할 수 있는 분위기가 만들어져서 다행이었다. 나는 바구니에 있던 쿠키를 꺼내 두 남자의 손에 하나씩 쥐여 주며 물었다.

“그런 것보다 다들 어떻게 생각하세요? 공주님께서 모르기니아의 대공과 결혼하시게 되면 왕도에 큰 축제가 열릴 텐데.”

“그런 것보다라니….”

검은 머리를 빡빡 깎은 예니체 경은 좀처럼 회복할 기미를 보이지 않으니 나는 아셰라드렌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는 쿠키에 박힌 초콜릿만 뜯어 먹다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추, 축제가 열려도 나랑은 상관없잖아. 어, 어차피 난 여기서 나갈 수 없으니까.”

“어쩌면 나가실 수 있을지도 모르죠.”

“무, 무슨 소리야?”

“축제 날에는 왕도에 사람들이 몰려들 테니까요. 어차피 이름 없는 성 쪽에는 아무도 오지 않을 텐데… 잠깐 밖에 나가 불꽃놀이를 구경하는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나는 예니체 경에게 허락을 구하는 시선을 보냈다. 얼마 전에 귀족 아이들과 맞닥뜨린 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내 불찰이었다. 하지만 예니체 경이 처음부터 왕자의 주위를 지켜 준다면 지난번과 같은 사고는 일어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멀리 가자는 것도 아니다. 인파에 섞여들어 축제를 즐기자는 것도 아니다. 그저 성 앞에서, 밤하늘을 수놓을 화려한 그림들을 바라보고자 하는 것뿐이다. 안 그래도 그 오랜 세월을 이 좁은 성 안에서만 갇혀 살았는데 그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을까?

“확답은 드릴 수 없습니다. 불꽃놀이라면 성 안에서도 충분히 볼 수 있지 않습니까?”

“안 그래도 작은 창문에, 창살 사이를 비집고 보라는 말씀이세요?”

“그렇게 말하면 저만 나쁜 놈이 되는데요. 모르겠습니다, 혹시나 무슨 일이 생겨 왕자님이 또 저번처럼 거대해진다면….”

예니체 경은 말끝을 흐렸다. 그가 조심스러운 태도를 취하는 것은 절대로 잘못된 것이 아니었다. 내가 흥분하는 바람에 너무 많은 것을 바란 것 같다. 머쓱해진 나는 애꿎은 머리카락만 빙빙 돌려 대며 왕자를 힐끔 쳐다보았다.

그는 펼쳐진 그림책을 소중하게 안은 채 희미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고, 고마워, 다프네. 그래도 이건 예, 예니체 경 말이 맞아. 난 성 밖으로 나가서는 안 돼. 세상 사람들은 나를 싫어하니까….”

“그렇지 않아요. 저는 왕자님을 엄청 좋아하는데요.”

“저도 그렇습니다. 왕자님은 실로 귀여우신 분입니다.”

“개 취급 하, 하지 말라니까.”

귓가를 붉힌 아셰라드렌이 퉁명스레 내뱉었다. 그래도 아까처럼 기분이 나쁜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나는 아쉬웠다. 레티스를 다시 만나게 되면 아셰라드렌을 축제 날만큼은 왕성으로 데려갈 수는 없겠느냐고 꼭 물어봐야지.

지금은 이렇게라도 생각하지 않으면 왕자의 처지가 안타까워 견딜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가족의 행복을 빌어 주는 날마저 이 볼품없는 성에 남아 있어야 한다는 게 속상해서.

“왕자님이 개로 변하셨습니다.”

“그러게요. 개 취급 하지 마시라더니.”

내가 왕자를 멋대로 동정하는 동안, 감정의 동요를 일으킨 그는 펑, 하고 또 연기를 만들어 내며 조그맣게 줄어들었다. 그러고는 부끄러움을 숨기려는 듯 우리를 향해 앙칼지게 컹컹 짖어 댔다.

항상 그랬지만 여전히 뭐라고 하는지는 조금도 알 수 없었다. 예니체 경은 검은 눈을 번뜩이며 재빠르게 왕자에게 뼈다귀를 내어 주었다.

“잘 드시는군요. 뿌듯합니다.”

“그러게요. 저 쌀알 같은 이빨로 열심히 씹어 대시네요.”

기사와 메이드는 뼈다귀를 마구 물어 대는 왕자를 흐뭇하게 지켜보았다. 그러나 이때의 나는 알지 못했다. 이날이 마지막으로 이름 없는 성에서 보낼 수 있었던 행복한 하루였다는 것을.

왜냐하면 강아지로 변한 왕자와 복도를 달리며 청소를 하고, 잠깐의 휴식을 취하기 위해 나타난 예니체 경이 왕자를 안아 들다 발차기를 당했던 다음 날, 우리는 레티스의 부고 소식을 접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

이름 없는 성은 정보가 늦다. 이곳에서 살다 보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같은 건 점차 알 수 없게 되어간다. 어느 귀부인이 불륜으로 파격적인 스캔들을 터뜨렸더라, 같은 소식들은 휴가를 받았을 때라던지 본성에 볼일이 있어 들렀을 때나 내 귀에 겨우 들어오곤 했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달랐다. 왕자의 뒷발에 턱을 걷어차인 예니체 경이 울상을 지은 순간, 우리는 왕족의 탄생, 혹은 죽음이 있을 때만 울린다는 본성 첨탑의 종소리를 들었다.

“무슨… 일이죠? 왠지 불길한데.”

가장 처음 그렇게 말한 것은 나였다. 그리고 예니체 경은 상황을 보러 가겠다며 왕자를 내려놓고 본성으로 향했다. 나는 꼬리를 흔들어 대며 내게 안기려는 아셰라드렌에게 이 종소리의 의미를 알려 주었고, 계단에 쪼그려 앉아 예니체 경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아셰라드렌을 내 무릎 위에 올려놓은 채 손톱만 한 앞발을 만지작거리고 있을 때였다. 한여름의 더위 속을 달려온 기사는 땀을 뚝뚝 떨어뜨리며 앞서 언급된 비보를 전했다.

“공주님이… 낭떠러지에서 떨어지셨다고… 지금 시신을 수습해 돌아오고 있다고….”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소식이었기에 우리는 모두 어안이 벙벙했다. 그때 나는 충격을 받았던가. 머릿속이 새하얘져서는 말도 안 돼, 말도 안 돼, 하고 반복해서 되뇌었던 기억이 난다.

아셰라드렌은 곧이어 눈물을 흘리기 시작하는 내 품에 안겨 들어 나를 위로하려는 듯 살결을 핥아 댔다. 예니체 경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참담하게 고개를 숙였다.

“…모르기니아의 대공과 중간 지점에서 만났었다고 합니다. 둘이서 잠시 인사를 나누던 중, 대공이 먼저 돌아와 시녀들이 공주님을 모시러 갔지만 그때는 이미….”

“사고였나요? 위험한 곳이었어요?”

“저도 자세히는 듣지 못했습니다. 대공이 공주님을 밀어 버린 게 아니냐는 말도 나오고 있던데,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겠지요.”

“아니, 대공이 그럴 이유가…. 그냥 지금 너무 혼란스러워서, 여러 말들이 나오고 있는 것뿐이겠죠?”

솔직히 이런 얘기를 나누면서도 난 레티스가 죽었다는 사실을 전혀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겨우 며칠 전에 그녀를 만나 앞으로의 계획이며 그녀가 그리는 미래를 전해 들은 참이다.

누구보다 주인공다운 결단력으로, 정해진 운명을 벗어나기 위해 발걸음을 내디뎠던 레티스.

희망으로 가득 찬 레티스는 태양처럼 화사하고 사랑스럽게 빛나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그녀가, 아직 이곳에 빙의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그녀가 죽다니.

속이 메스껍고 두통이 일었다. 나는 비틀거리며 일어나 내 방으로 걸어갔다. 아셰라드렌도, 예니체 경도, 아무도 나를 막아서지 않았다.

그저 믿을 수 없는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