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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왕자 길들이기 (32)화 (32/123)

32화

“아셰, 잠깐만 놔줘요. 밖에 누가 왔어요.”

“응, 누구…. 싫어, 관심 없어.”

하지만 나는 아주 많은 관심이 있는데. 아침이라 그런지 평소보다 낮고 거친 목소리를 내는 그는 다시 감은 눈을 뜰 생각이 없는 듯 보였다.

“조금만 더 자자. 난 별로 자지 못했어.”

“왜요? 우리 일찍 잤잖아요.”

“글쎄, 왜였을까….”

잠에 취한 아셰라드렌은 본인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것 같았다. 그에게서 풍겨 오는 비누 냄새가 코를 간질였다. 나는 꽈배기처럼 몸을 배배 꼬아 기어코 그가 인상을 찡그리게 만들었다.

“밖에 누가 있다니까요. 어쩌면 레티스 공주님일지도 몰라요.”

“그런 거면 더 싫은데….”

왕자의 투정을 계속해서 받아 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가 눈가를 비비적대는 사이 나는 재빨리 침대에서 굴러떨어졌다. 쿵! 엉덩방아를 찧긴 했지만 그런대로 참을 만한 수준의 고통이었다.

“늦게 나와서 죄송합니다. 아직 근무복으로 갈아입지도 못한 터라… 어, 예니체 경?”

엉덩이를 열심히 문질러 대며 문을 열자, 나를 반긴 것은 핑크색 리본이 묶인 뼈다귀를 든 예니체 경이었다. 휴가를 나가 이발이라도 한 모양인지, 검은 머리가 이틀 전보다 짧아진 그는 후줄근한 내 차림새를 보더니 급히 헛기침을 했다.

“다프네 양이 걱정되어 하루빨리 돌아왔습니다. 잘 지내고 있었던 것 같아 안심입니다.”

“저 때문에 모처럼의 휴가를 반납하시다니요. 그래도 감사해요.”

나는 그의 말을 듣고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확실히 이번 생에서의 내가 예니체 경과 가까워지긴 한 모양이었다. 게다가 척 보기에도 왕자를 위해 구해 온 것이 분명한 저 선물이라니.

웃음이 나오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는 재빨리 구겨진 치맛자락을 털고 산발이 된 머리를 귀 뒤에 꽂으며 예니체 경을 반갑게 맞이했다.

“오랜만에 바깥 구경은 잘하셨나요? 사복 차림도 잘 어울리세요.”

“별거 없었습니다. 그냥 집에도 들리고…. 그나저나 놀라운 소식이 있습니다만.”

“뭔데요?”

“말이 길어질 것 같은데 여기서 계속 얘기할까요? 이른 아침부터 실례한 것 같아 미안합니다.”

“아, 지금 제 꼴이 말이 아니죠. 얼른 옷을 갈아입고 나갈게요. 식당에서 기다려 주실래요?”

“물론입니다. 그런데 왕자님은 어디에 계신지?”

검은 머리의 기사는 다정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나는 그의 질문에 곧바로 답해 줄 수가 없었다. 왕자는 지금 내 침대에 앉아 내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들켰다간 굉장히 난감해질 사항이었다.

“나, 난 여기에 있어. 예, 예니체 경이 왜 나를 찾아?”

잠에서 완전히 깨어난 왕자는 다시금 말을 더듬고 있었다. 내가 문을 반밖에 열지 않았기에 예니체 경 쪽에서는 왕자를 보지 못했을 것이다. 기사는 내 방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듣자마자 당황한 듯 나를 쳐다보았다.

“선물을… 가지고 와서…. 음, 우선 식당에 가 있겠습니다. 천천히 내려오도록 하십시오.”

“네….”

그가 구태여 설명을 요구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입을 벙긋하지도 못했다. 그러니까 이런 상황을 마주할까 봐 싫었던 거라고. 빠르게 멀어져 가는 예니체 경의 걸음 소리를 뒤로하고 문을 닫은 나는 무슨 일이냐는 듯 순진하게 고개를 갸웃대는 왕자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여태까지 왕자님과 제가 한 침대에서 잤다는 걸 예니체 경이 알고 있었을까요? 몰랐을까요?”

“왜 그, 그렇게 말해? 알고 있으면 아, 안 되는 거야?”

하기야 알고 있었다 해도 크게 문제 될 일은 없으려나. 예니체 경의 입장에서 아셰라드렌은 영원히 갇혀 살아야 할 폐왕자였다. 국왕부터가 왕자에게 관심이 없는데 그의 사생활에 대해 왈가왈부할 이가 어디에 있겠나 싶기도 했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저 일단 머리 좀 빗을게요.”

“으응.”

자연스럽게 따라붙는 시선은 이제 익숙해진 것이었다. 나는 책상에 앉아 머리를 대충 정리한 뒤 하나로 높게 올려 묶었다. 그러는 사이 아셰라드렌은 하품을 쩌억 하며 슬금슬금 내 곁으로 다가왔다.

“다프네는… 목이 얇아.”

“그런가요? 그냥 평범한 것 같은데.”

“아, 아냐. 나나 예니체 경보다 훠, 훨씬 작고 얇아.”

“그건 아무래도 그렇죠. 전 여자잖아요.”

“여, 여자는… 다 그래?”

“네, 아마도. 전에 오셨던 레티스 공주님께서는 목이 사슴처럼 길기까지 하셨잖아요.”

“사, 사슴? 본 적 없어. 동물인 건 아, 아는데.”

내가 앉은 의자의 등받이를 잡은 아셰라드렌이 허리를 숙이며 중얼거렸다. 탁상 거울에 비친 그가 내 목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더니 목울대를 일렁이며 조심스럽게 나를 톡 건드렸다.

“간지러워요. 슬슬 식당으로 가 볼까요?”

나는 의자를 돌려 앉으며 그의 손가락을 쥐었다. 느릿하게 눈을 깜빡인 왕자가 내가 잡은 제 손으로 시선을 옮겼다. 나는 금세 손을 내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만요. 아셰도 머리를 좀 정리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잠깐만 그러고 계세요.”

“나도 가, 간지러워.”

“그래도 참아 주세요. 이왕이면 깔끔한 편이 낫잖아요.”

“차, 참기 힘들어….”

보드라운 머리칼을 매만져 주자 아셰라드렌이 한쪽 눈을 살짝 접었다. 하지만 투덜대는 말과는 다르게 그는 묵묵히 내 손길을 받아들였다.

“잘하시면서 꼭 그러신다. 그나저나 사슴을 본 적 없다고 하셨죠?”

나는 아셰라드렌의 구겨진 셔츠를 털어 준 뒤 물었다. 대강의 정리를 끝낸 우리는 방을 나와 식당으로 향하고 있었다. 밤새 추적추적 내린 비로 인해 복도는 평소보다 습하게 느껴졌다.

“응. 그치만 내가 괴물이 되면 사슴 같은 건 쉽게 물어 주, 죽일 수 있대.”

“누가요? 또 그 유모가요?”

“응.”

“그 유모 아직 살아 있대요? 만나면 진짜 아구창을 날려 버려야지.”

“아, 아구창….”

“아셰 같이 작고 소중한 강아지가 어떻게 사슴을 물어 죽인다고 그래요. 벌레 하나 못 죽일 것 같은 분인데.”

“벌레는 주, 죽일 줄 아는데? 위쪽에 살 때는 자주 주, 죽였는데?”

꼭대기 층에 벌레가 많이 산다는 건 절대로 알고 싶지 않은 정보였다. 나는 아셰라드렌의 말을 조용히 외면했다. 그러는 사이 식당에 앉아 있던 예니체 경이 우리를 보고 일어났다.

“좋은 아침입니다, 왕자님.”

그리고 아셰라드렌은 예니체 경을 조용히 외면했다. 늘 있는 일이라 세 사람 중 누구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다. 나는 식탁 위에 올려진 바구니를 발견하고 물었다. 예니체 경이 일찍 돌아오는 김에 가져온 듯했다.

“경, 식사는 하셨나요?”

“밖에서 먹고 왔습니다. 하지만 베이컨 냄새가 죽여주는군요.”

“그럼 경의 몫도 덜어 드릴게요. 어차피 한 끼 더 드실 배는 남아 있잖아요.”

“감사합니다.”

예니체 경이 음식을 거부하는 일은 본 적이 없었다. 나는 아기 오리처럼 내 뒤를 따르는 왕자를 데리고 주방에 들러 식기를 가져왔다. 그러고는 평소보다 두툼하게 썬 듯한 베이컨과 평소보다 야채가 많이 들어간 듯한 계란 요리, 마찬가지로 평소보다 화려한 재료가 들어간 콥샐러드를 옮겨 담았다.

“오늘은 수박 주스에 복숭아 주스까지 있네요? 맛있겠다.”

“왕성이 벌써부터 축제 분위기인가 봅니다. 어제 공주님이 모르기니아의 대공을 맞이하러 떠나셨다고 하더니만.”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나는 시치미를 뚝 떼고 물었다. 역시 레티스는 굉장했다. 남부 대공과 결혼하겠다는 결심을 하자마자 행동에 옮긴 건가? 만약 이 결혼이 성사된다면 온 나라가 들썩일 것이 틀림없었다. 레티스는 공식적으로 왕실에 단 하나밖에 없는 후계자였으니까.

“공주님께서 대공의 초상화를 보신 뒤에 사랑에 빠진 것 같다던데요. 어머니와 저녁 식사를 할 때 그렇게 들었습니다. 어쩌면 레르베 라예트 왕국과 모르기니아 공국이 한 나라가 될지도 모르겠다고.”

예니체 경은 음식을 듬뿍 담은 접시에서 눈을 떼지 못하며 설명했다. 수박 주스와 복숭아 주스 중 무엇을 마시겠냐고 묻자 그는 둘 다, 라는 명쾌한 해답을 내놓았다.

“대공께서는 그렇게 미남이신가요? 그보다 왕자님은 어느 주스를 마시고 싶으세요?”

“두, 둘 다 먹어 본 적 없어서 모르겠는데… 다프네가 알아서 줘.”

“그러면 왕자님도 둘 다 마셔 보세요.”

컵을 넉넉히 들고 오길 잘했다. 나는 당연하다는 듯 내 옆에 자리를 잡는 왕자에게도 주스를 두 잔 따라 준 다음 냅킨에 싸인 수저를 들었다. 아직 포크와 나이프를 사용하는 것이 미숙한 왕자는 내가 계란 요리를 포크로 간단히 자르는 모습을 열심히 따라 했다.

“모카빛 피부를 가진 키가 큰 사내입니다. 가장 최근에 있던 전쟁에서 저도 본 적 있거든요. 여자깨나 울릴 인상이긴 합니다.”

“잘생겼다는 뜻이네요. 왠지 공주님이랑 잘 어울리실 것 같아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현재 공주님의 신랑감 후보에 오른 왕국의 귀족들보다야.”

예니체 경은 두 번째 아침 식사를 신나게 먹으며 말했다. 입가에 샐러드 소스가 묻은 것은 모르는 눈치였다. 나는 어차피 이어지지도 않았을 레티스의 신랑감들을 떠올려 보다 그의 입가를 가리켰다.

“마스테 공작님은 공주님보다 열두 살이나 많으시죠. 뤼케니아 후작가의 도련님은 솔직히 미남이라고는 절대 말할 수 없고…. 그런데 예니체 경, 입술 밑에 하얀 소스가 묻었어요.”

“이쪽입니까?”

“아뇨, 저쪽.”

“여기요?”

“아니, 자꾸 혀로 날름거리지 마시고 냅킨으로 닦으시라고요.”

이 남자 대체 내가 얼마나 편해진 거야? 어이가 없어진 나는 웃음을 터뜨리며 무릎에 펼쳐 둔 냅킨을 그에게 건네려 했다.

“어머나, 왕자님. 괜찮으세요?”

그러나 때마침 아셰라드렌이 주스를 엎지르는 바람에 옆으로 몸을 돌려 앉았다. 식탁보를 타고 흐른 붉은색 수박 주스가 그의 허벅지를 축축하게 물들이고 있었다. 놀란 왕자는 가엽게도 예쁜 눈꼬리를 추욱 늘어뜨리며 어쩔 줄 몰라 했다.

“미, 미안해. 일부러 그런 게 아니야.”

“저도 알고 있어요. 괜찮아요. 어디 봐요, 옷부터 갈아입으셔야 할 것 같은데.”

“새 옷이 어, 어디 있는지 잘 모르겠는데.”

“제가 알아요. 같이 가 드릴게요. 예니체 경, 먼저 드시고 계세요.”

나는 왕자를 부축하듯 일으켰고, 예니체 경은 난감한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내가 왕자를 데리고 복도로 나왔을 때, 그는 풀이 죽은 얼굴로 내 손을 잡아 쥐었다.

“다프네는 예, 예니체 경이랑 마, 많이 친한가 봐. 계, 계속 웃고 떠들고. 나, 나는 마치 안 보이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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