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다 됐다. 어, 어때?”
“등이 좀 끈적끈적하고 붕대가 엉성해서 흘러내릴 것 같지만 그런대로 훌륭하세요.”
“…자, 잘했다는 뜻이지?”
아셰라드렌은 본인의 업적에 만족하는 눈치였다. 그러니까 나는 별로 만족스럽지 못해도 그런 척하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솔직히 이 정도면 그로선 최선을 다한 것이다. 나는 말려 올라간 상의를 끌어 내리며 천천히 몸을 일으켜 앉았다.
“고마워요. 아셰는 못하는 게 없는 것 같아요.”
“그, 그런 건 아냐. 내가 못 하는 게 얼마나 많은데.”
“이건 그냥 해 본 말이에요. 실제로 그렇다는 뜻이 아니라.”
“아….”
아셰라드렌은 내 말을 과연 좋게 받아들여야 할지 가늠할 수 없는 듯했다. 의미 모를 감탄사를 내뱉은 그가 주섬주섬 어질러진 약통들을 정리하는 나를 바라보았다.
문득 그 시선을 느낀 내가 그를 바라봤을 때, 아셰라드렌은 입가에 호선을 그리며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나를 치료해 준 뿌듯함에 여전히 도취되어 있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아셰는 할 수 있는 게 많아요.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나, 나도.”
그리고 내가 이렇게 저를 치켜세워 주자 갑자기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며 자신 있게 말했다. 역시 예니체 경도 없는 조용한 성에서 벌거벗은 그와 한 침대에 있다는 걸 신경 쓰는 사람은 나밖에 없는 것 같았다. 왕자는 이다지도 해맑게 기뻐하고 있으니.
“그래서 저는 또 이렇게도 생각해요. 아셰는 이제 혼자 자는 것도 할 수 있다고.”
“…….”
“아래층에 내려오신 지도 벌써 며칠이 지났어요. 슬슬 새로운 침실에 적응하셔야 할 때예요.”
“왜… 그래야 하는지 잘 모, 모르겠어. 그동안 나랑 같이 자, 잘만 잤잖아.”
이걸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좋을까. 신분 차이를 떠나 우리는 다 큰 남자와 여자였다. 아셰라드렌이 줄곧 아기 강아지의 모습을 하고 있을 때는 외면이 가능했지만, 벌써 몇 번이나 아슬아슬하게 아래만 가리고 있는 그와 마주치려니 정신이 번쩍 드는 것이다.
물론 왕자의 사정은 딱하고 가엽지만, 그리고 오랜 기간 유폐되어 외로움을 많이 타는 것도 알지만, 앞으로를 생각하면 더 이상은 이런 식으로 밤을 보내서는 안 된다고.
우리는 영원히 이름 없는 성에 고립되어 살지만은 않을 텐데, 우리가 아닌 다른 사람들이 왕자와 메이드가 한 침대에 드는 것을 보고 뭐라고 생각할 것인지.
비단 나뿐만이 아닌 아셰라드렌을 위해서도 슬슬 결단을 내려야 할 때였다. 나는 눈꼬리를 추욱 늘어뜨린 채 내 소매를 잡는 왕자의 헐벗은 상반신을 외면하려 애썼다.
“침실에 데려다드릴까요? 저랑은 아침에 또 만날 수 있잖아요.”
“시, 싫어. 지금도 계속 만나고 싶은데….”
“저를 너무 좋아하시네요. 저도 아셰가 좋지만, 가끔은 온전한 제 시간도 필요해요.”
“오, 온전한?”
“혼자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말이에요. 제가 아무리 아셰를 위한 메이드라고 해도 휴식 시간 정도는 가질 수 있잖아요.”
“다프네는 나랑 있는 게… 시, 싫구나.”
“아뇨! 전혀 그렇지는 않아요.”
“그러면 왜?”
왕자는 조금도 우리가 같이 자면 안 되는 이유를 이해하고 있지 않았다. 어린아이의 시선에 맞추어 설명하기란 너무도 어려운 일이었다. 이걸 어떻게 알려 줘야 왕자가 순순히 납득할지 모르겠다. 나는 머리를 열심히 굴려 그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하면서 침실로 보낼 방법을 고민했다.
하지만 답은 좀처럼 쉽게 나오지 않았다. 나는 애견 전문가나 유치원 선생님이 아니었다. 평생 해 본 일이라고는 저택을 청소하는 일이지, 아이를 돌보는 유모 역할은 맡아 본 적도 없었다.
“다프네도 제대로 말 모, 못 하면서.”
“…죄송해요. 그래도 언제까지고 이럴 수는….”
“어, 억지 부리지 마. 싫은 것도 아니라면서 자꾸 가라고 하다니.”
이쯤에서 그의 기분은 곤두박질치고도 남은 상태였다. 고집을 부리듯 그는 내 소매를 꽉 잡은 채 놓으려 하지 않았다. 나밖에 모르는 왕자를 두고 내가 너무 서둘렀을까. 지금 당장 급한 일인가 묻는다면 그런 건 또 아니었는데.
결국 나는 한 발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대부분의 일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그가 오늘 밤만큼은 강하게 나오고 있으니.
“좋아요. 그럼 오늘까지는 같이 자요. 단, 아셰가 강아지로 변할 수 있다면요.”
“…침대가 좁아서 그런 거야?”
아셰라드렌은 의심스럽다는 듯 눈매를 가늘게 좁히며 물었다. 그러고 보니 낮에 나더러 저가 강아지일 때만 좋아하는 게 아니냐고 따졌었지. 나는 그가 또 멋대로 착각을 할까 싶어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지금의 당신은 한 침대에 눕기엔 너무 커요.”
“그런 거라면야.”
왕자의 표정이 한결 밝아졌다. 그는 다시 몸집을 작게 만드는 데 집중하려는 듯 천천히 눈을 감았다. 같이 자자는 말이 저렇게 좋아할 일인지. 자꾸만 올라가는 입꼬리를 감추지 못하는 모습에 나까지 피식피식 웃음이 나오려 했다.
이런 식으로 왕자에게 말려서는 안 되는데. 하지만 꼭대기 층에서 매일같이 홀로 몸을 말고 잠들었을 그를 상상하면 괜히 가여운 마음이 든다. 물론 내 상상 속에서의 그는 새까만 포도알을 닮은 발바닥을 가진 새끼 강아지였다.
“…이, 이상하다.”
“뭐가요?”
“아, 아까는 잘됐는데… 생각만 해도 변할 수 이, 있었는데.”
“아직 완벽하게 능력을 다룰 수 있는 건 아닌가 봐요.”
“기, 기다려 봐. 할 수 있어.”
하지만 할 수 없었다. 그는 끄응, 하고 다시금 눈을 질끈 감아 보았지만 특유의 하얗게 피어오르는 연기도 생겨나지 않았다. 한참 동안 끙끙대던 그가 게슴츠레 눈을 떴을 때, 나는 웃음을 참으며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가, 강아지가 되지 않으면, 다프네는 나랑 자지 않을 거야?”
왕자는 소심하게 물었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이었다. 동정심을 자극하는 말투와 눈빛.
나는 한숨을 쉬며 그의 손을 토닥여 주었다.
“오늘까지는 괜찮다고 했잖아요. 그래도 옷은 입어 주세요. 가만 보면 아셰는 내 앞에서 다 벗고 있어도 아무렇지 않아 하는 것 같아.”
“그, 그런 거 아냐. 나도 부, 부끄러운데?”
처음에나 그랬지, 지금은 별로 그렇지도 않은 것 같은데. 새삼스러운 지적에 뺨을 붉힌 그가 파드득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내가 주워 온 그의 옷가지들은 책상에 놓여 있었다. 난감해진 왕자가 눈만 도로록 굴려 대기에 나는 그를 위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여기요, 입으세요.”
나는 익숙하게 옷을 건넨 뒤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그러고 보면 사람인 그와 한 침대에 있는 건 아침에나 경험했지, 밤에 그런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매일 밤 작은 강아지가 되어 내 베개며 몸 위에 올라와 잠을 청하던 그였건만.
게다가 아셰라드렌이 강아지일 때면 나는 조금의 거리낌도 없었다. 하지만 오늘은 심히 꺼려지는군.
성 안에 우리 둘밖에 없기 때문일까. 새삼 그가 평소와는 다르게 느껴졌다.
“다 입었어. 이, 이제 잘래.”
침대가 좁다는 말이 마음에 걸렸는지, 왕자는 옷을 다 입은 뒤 벽에 바짝 붙어 나를 기다렸다. 이불을 눈 아래까지 끌어 올리는 바람에 늘씬한 발목이 훤히 드러나 있었다.
저러고 있으니까 진짜로 꺼려지잖아. 차라리 내가 아셰라드렌의 방에 가서 자는 게 낫지 않나 싶은 생각까지 든다. 하지만 그렇게 했다간 그가 진짜로 울어 버릴지도 모르니까.
“…그래요. 저도 잘래요.”
“으응.”
“어색하네요.”
“시, 싫은 건 아니지? 내, 내가 너무 커서….”
왕자와 나는 1인용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미리 불을 꺼서 다행이었다.
나는 왕자의 소심한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눈을 감아 버렸다. 간간이 들려오는 빗줄기에만 온 정신을 집중하면서.
그러자 이내 졸음이 쏟아져 왔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아침이었다.
⋆★⋆
그러니까 이런 걱정 때문에 그와 자고 싶지 않았던 건데.
눈을 뜨자마자 시야에 들어오는 건 모공 한 점 보이지 않는 매끄럽고 하얀 살결과 미동 하나 없는 은빛 속눈썹이었다.
언제부터 이런 자세로 자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왕자와 나는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아셰. 일어나요, 아셰.”
단잠에 빠진 그는 내가 제 몸을 흔들어도 끄떡하지 않았다. 이따금씩 미간을 찌푸리긴 했지만 눈을 뜨진 못했다. 흐트러진 은빛 머리칼과 살짝 벌어진 붉은 입술. 나는 이른 아침의 왕자가 선사하는 아름다움에 눈을 떼지 못했다.
“아셰. 아셰?”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였다. 왕자의 팔이 나를 끌어안고 있는 탓에 나는 어떻게든 그를 깨워야만 했다. 힘도 좋아서 꼼짝도 못 하겠다.
분명 같은 시간에 누웠는데 어째서 그만 일어나지 못하는 것인지? 나는 왕자의 팔을 열심히 밀어내다 제풀에 지쳐 포기했다. 그냥 미모 감상이나 해야 할 듯싶었다.
똑똑.
“…….”
똑똑.
“…네? 누구세요?”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노크 소리가 들려와 나는 진심으로 당황했다. 오늘은 예니체 경의 휴가 이틀째였다. 아직 이름 없는 성에는 왕자와 나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어야 하는데.
혹시 레티스가 찾아왔을까? 그녀는 다음번의 방문이 언제일 것이라고 정확히 말하지 않았다.
“잠시만요! 나갈게요.”
문밖에서는 아무런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하지만 한번 레티스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나는 온 힘을 다해 아셰라드렌의 팔을 밀어냈다. 이번에도 별 소용은 없었다.
그렇다면 침대 아래쪽으로 꾸물꾸물 기어 내려가는 편이 좋을까. 고민하던 찰나였다. 아셰라드렌의 눈이 스르륵 뜨였다.
“어디 가….”
눈이 부신 듯 보랏빛 눈동자를 찡그린 그가 칭얼거렸다. 그러고는 내게 안기려는 것처럼 고개를 숙여 내 품으로 파고들었다. 아직 비몽사몽 한 왕자는 현재 본인의 상태가 강아지가 아니라 사람이라는 것을 자각하지 못한 게 틀림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