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하지만 언제까지고 젖은 몸과 벗은 몸으로 시간을 보낼 수는 없었으므로, 나는 빠르게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물이 닿은 붕대는 그냥 풀어서 버렸다. 나중에 약이라도 바르면 되겠지, 뭐. 사실 격하게 움직이지 않는 이상 그렇게 아프지도 않았다.
“여기 계셨네요. 찾고 있었어요.”
어차피 예니체 경도 없으니 나는 머리도 채 말리지 않고 왕자에게 돌아갔다. 차림에 격이 없는 건 그가 더 심하니까 상관없지 않나 싶어서.
“하, 핫초코 만들었어.”
“말도 안 돼. 가르쳐 드린 적 없었잖아요?”
내가 씻는 사이 왕자는 새로운 옷을 꺼내 입고 혼자 주방에 가서 우유를 끓이고 있었던 모양이다. 나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물론 이불 빨래를 시킨 적도 있지만, 청소를 도와주려는 그를 말리지 않은 적도 있지만, 요리를 시킨 적은 없었는데.
아셰라드렌은 양손에 머그잔을 든 채 수줍게 웃었다.
“다프네가 만드는 걸 며, 몇 번 봤잖아. 오늘은 딱히 선물을 받을 만한 일을 하진 않았지만… 괘, 괜찮겠지? 다프네 것도 있으니까.”
“변명이 기시네요. 그냥 아셰가 마시고 싶었던 거면서.”
“아, 아냐. …사실 맞아.”
그는 솔직하게 답했다. 나는 뜨거운 머그잔을 받아 들고 뒤를 돌아보았다. 식당에는 창살이 난 창문이 하나 있는데, 마침 그곳에서 세차게 쏟아지는 빗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지금이 오후인지 저녁인지 시간을 알 수 없을 만큼 바깥은 어두워져 있었다. 아무래도 장대비가 하루 종일 내릴 예정인 듯했다.
“잘하셨어요. 이렇게 비가 오는 날에는 창가에 앉아 뜨거운 걸 마시는 게 최고거든요.”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는 아셰라드렌을 지나쳐 의자를 두 개 끌고 왔다. 그러자 그가 영문을 모른 채 나를 졸졸 따라왔다.
“여기 앉으세요. 우리 창밖 구경이나 해요.”
“뭐 재, 재미있는 거라도 있어?”
“없어요. 그냥 이렇게 멍하니 시간을 보내는 거예요.”
“왜 굳이 그런 짓을…?”
“내키지 않으시면 글공부를 해도 되고요. 예니체 경의 이름을 어떻게 쓰는지 가르쳐 드릴까요?”
아셰라드렌은 두말하지 않고 의자에 앉았다. 그러고는 내가 무슨 말을 할세라 핫초코를 홀짝홀짝 마시기 시작했다. 나는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그를 바라보다 머그잔을 입가에 대었다. 내가 옆에 없다고 욕심을 부렸는지 왕자가 만든 핫초코는 심하게 달았다.
우리는 한동안 말없이 창밖을 구경했다. 정확히는 창밖을 보는 건 나뿐이었고, 아셰라드렌은 창가에 시선을 둔 척 열심히 나를 곁눈질했다.
이렇게 하루 종일 붙어 있으려고 하는 건 강아지의 습성인 것일까. 나는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단내가 풀풀 풍기는 숨을 내뱉었다.
“예니체 경은 지금쯤 뭘 하고 계실까요?”
“모, 몰라. 안 궁금한데.”
“그렇군요.”
이따금씩 내뱉는 대화는 대충 이런 느낌이었다. 중간중간 나는 지난번에 봤던 레티스에 대해서도 물어보았지만 왕자는 제 여동생에 대해 아무런 관심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는 그저 나를 구경하느라 바빠 보였다.
이런 관심, 나쁘지는 않았지만 받아 본 적도 없어서 약간은 부담스러웠다. 얼굴이 뚫릴 것 같았다.
어쨌거나 예니체 경이 없는 첫날은 이런 식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나는 왕자와 서로를 마주 보며 저녁을 먹었고, 설거지를 하려고 할 때에는 그가 극구 말리는 바람에 두 손을 들어야만 했다.
그날 나는 왕자가 그릇을 씻고 닦는 진귀한 풍경을 눈에 담을 수 있었다. 어느 정도 나를 관찰하며 배운 게 있었던지 그는 꽤나 야무진 손길로, 그것도 그릇 하나 깨뜨리지 않고 설거지를 마쳤다.
“제가 했어도 됐는데….”
“안 돼. 다프네는 다쳤으니까.”
“그치만 어느 나라의 왕자님이 설거지를 해요?”
“나 왕자 아, 아니야.”
“맞잖아요. 왜 정체성을 부정하시지.”
“정체성…?”
그는 물에 젖은 손을 바지에 닦으며 물었다. 설명을 잘하는 재주는 없었으므로, 나는 익숙하게 대화 주제를 바꾸었다.
언젠가는 왕자에게 꼭 교사가 붙었으면 좋겠다. 언제까지고 상식도 없이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아, 그 전에 설거지를 하는 방법 같은 건 잊어버렸으면 좋겠고.
“그런데 아까 제가 걷어 온 이불은 어떻게 하셨어요? 그 후로 못 본 것 같은데.”
“내, 내 방에 가져다 뒀어. 그렇게 하는 거 맞지?”
“맞아요. 왕자님 방이라기엔 한 번도 제대로 쓰신 적 없는 것 같지만요.”
나는 때때로 왕자가 진짜 바보는 아니라는 걸 잊어버리는 경향이 있다. 이 와중에도 아셰라드렌이 왕자라는 단어를 꺼내기가 무섭게 호칭을 정정해 주려는 듯 입을 벙긋거려 나는 재빨리 말을 고쳤다.
“…아셰.”
“응.”
그러자 왕자는 기쁜 듯 답했다. 보랏빛 눈이 매끄럽게 휘어졌다.
“말 나온 김에 오늘부터는 혼자 주무시는 게 어때요? 이제 이불도 생겼잖아요.”
“아….”
“아, 가 아니라요. 저는 진지해요. 어느 왕자님이 메이드와 한 침대를 쓰냐구요.”
“가, 강아지일 땐 같이 쓰게 해 주면서.”
그는 진짜 바보가 아닐뿐더러 눈치도 없는 게 아니었다. 어쩌면 진짜로 순수했던 것은 내 쪽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갑자기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대꾸하는 그가 의심스러워졌다. 밤마다 강아지로 변했던 것은 역시 의도를 가지고 한 일이었을까.
그 답은 곧바로 알 수 있었다. 눈 깜짝할 새에 내 시야보다 높이 있던 그는 사라지고, 대신 새하얀 털과 새카만 콧잔등이 널브러진 셔츠 사이로 빼꼼 튀어나와 있었다.
“귀, 귀여워.”
“왕!”
“아니, 이게 아니라. 아셰, 이러지 말아요. 이제 다 들켰어요. 대체 언제부터 이런 식으로 마음대로 변신할 수 있었던 거예요?”
“왕!”
“얼른 사람으로 돌아와서 대답해 줘요.”
하지만 그가 내 부탁을 들어주는 일은 없었다. 사실 그 정도는 이미 예상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오늘 그가 계속해서 강아지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던 이유는 또 무엇인지. 설마 변신 능력을 조절할 수 있는 걸 들키지 않으려고?
“아셰는 진짜 무서운 강아지네요. 털만 하얗고 속은 새카매요.”
“…….”
“그렇게 귀엽게 쳐다봐도 안 돼요. 오늘은 아셰 방에서 자는 거예요.”
“…….”
“…알았어요, 오늘까지는 봐드릴게요.”
아셰라드렌은 무서운 강아지였다. 그 솜털 같은 다리로 토도독 달려와 내게 안겨 들면 나는 절대로 그를 밀어내지 못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그의 옷가지를 집어 들었다. 어느새 왕자는 내 품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왕자님이 이러는 걸 보면 예니체 경이 뭐라고 하실지.”
“왕! 왕!”
“알았어요. 왕자님 말고 아셰. 그리고 예니체 경 얘기는 안 할게요.”
그는 예니체 경이라는 말을 꺼내자마자 눈에 띄게 싫은 티를 냈다. 무서워서 무슨 말을 못 하겠다. 마냥 순하고 착한 줄로만 알았더니 은근히 고집도 세고 성질도 좋지만은 않다.
나는 아셰라드렌을 달래듯 그의 엉덩이를 토닥여 주며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복슬복슬한 털에 가려진 그의 입이 꼭 웃는 것처럼 보였다.
“윽!”
“…끼잉?”
강아지를 침대에 내려놓고, 아무 생각 없이 나도 누우려고 했을 때였다. 등허리의 상처가 이불과 마찰되어 잊고 있던 고통을 불러일으켰다. 나는 급히 몸을 돌려 누웠다. 그러자 아셰라드렌이 낑낑대며 내 얼굴 앞으로 다가왔다.
“아까 씻고 약을 바르는 걸 잊어버렸어요. 너무 아픈데, 어떡하지? 잠깐 다른 데 보고 있어 줄래요?”
다행히도 방 안에 거울이 있었다. 아무래도 상태를 확인해야 할 것 같아 나는 상의를 들추었다. 아픔이 잠깐 가라앉았다고 부상을 너무 만만하게 본 모양이었다. 오늘 특별히 크게 움직인 적도 없는데 등허리의 상처에서는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으으, 하고 앓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인상을 찌푸린 채 거울을 살피던 나는 벽을 마주 보고 있어야 할 아셰라드렌의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그는 나보다 더 심각한 표정을 한 채 이불을 덮고 앉아 있었다.
“…많이 아파? 이리 와 봐.”
“뭐예요? 아까 사람으로 돌아와 달라고 할 때는 듣는 척도 안 하시더니.”
“그, 그런 거 아냐. 못 알아들었어.”
“그렇게 말씀하시는 걸 보니 강아지일 때도 말귀를 잘 알아들으시나 봐요.”
“…아, 아무튼! 얼른 와 봐. 여, 여기 약 있는 거 알아.”
저번에도 저렇게 하루에도 몇 번씩 변신을 해 대다 앓아누운 적이 있지 않았던가. 과연 이 와중에도 그의 걱정부터 하는 게 맞나 고민하다가, 곧 웃옷을 내리고 왕자의 곁으로 다가갔다. 거리가 가까워지자마자 그는 내 허리를 잡아 나를 돌려세웠다.
“미, 미안. 잠깐 볼게.”
“네? 하지만 어제는….”
“약상자는 치, 침대 밑에 있지?”
“그걸 어떻게 아세요?”
뭘 물어볼 틈도 없었다. 아셰라드렌은 나를 가뿐히 들어 침대에 엎드리게 만들었다. 나는 영문도 모른 채 상체를 숙이는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는 기다란 팔을 침대 아래로 쭉 뻗어 구급상자를 꺼냈다. 그러고는 말도 못 붙이게끔 딱딱하게 얼굴을 굳히며 아무 통이나 집어 들었다.
“아, 그건 지혈제예요. 옆에 있는 게 제가 발라야 하는 연고예요.”
“다프네는 가, 가만히 있어. 어제는 그 여자가 와서 아무것도 못 했지만… 오, 오늘은 제대로 치료해 줄게.”
“그 여자라뇨. 아셰의 동생이자 공주님이신데요.”
“이, 이걸 여기다 바르고 붕대를 감으면 되는 거지?”
아셰라드렌은 내 지적을 가볍게 무시했다. 그의 신경은 온통 잡자마자 길게 늘어나 버리는 붕대에 쏠려 있었다. 그는 당황한 티를 내지 않으려고 무던히 노력하는 것 같았다.
아무래도 지금은 입을 다물고 있는 편이 좋겠다. 아셰라드렌은 굉장히 진지했다.
“어제는 못 했지만 오늘은 할 수 있어…. 예, 예니체 경한테 물어봤으니까.”
“세상에, 역시 두 분 제가 안 보는 사이에 많이 친해지셨네요.”
“친하지 않아.”
“그렇게 정색하면서 말씀하실 일인지.”
괜히 입을 열었다. 나는 이불에 얼굴을 묻었다. 치료가 끝나면 방으로 가서 자라고 해야지. 내 침대에 알몸으로 있는 그를 보니 역시 이건 좀 아닌 것 같다는 확신이 든다. 아직 모르는 것이 많아 어리게 느껴질 뿐, 엄연히 따져 보면 아셰라드렌은 성인에 가까운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