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이상하다. 오늘은 정말로 이상하네요.”
욕조에 뜨거운 물을 조금 받아 아셰라드렌을 씻겼다. 털이 회색빛으로 변한 강아지에게 물을 끼얹을 때마다 검은 먼지가 빠져나왔다. 나는 혀를 차며 그의 몸에 비누를 마구마구 문질러 댔다.
그런데도 그는 사람으로 변하지 않았다. 이상했다. 저번에는 이쯤 됐을 때 사람으로 돌아왔던 것 같은데.
“하지만 상관없어요. 귀엽기만 하니까.”
비눗물에 푹 젖은 그가 작은 몸을 덜덜 떨었다. 왠지 모르게 가여워서 나는 금방 그를 헹궈 준 뒤 수건으로 감쌌다. 그래도 이제는 닭고기의 기름기도, 복도 끝방의 먼지도 더는 남아 있지 않았다.
나는 새로운 수건을 하나 더 꺼내 선반 위의 금화 상자도 열심히 닦았다. 절대로 놓고 갈 수는 없지. 휴가 때 저 금화로 아셰라드렌의 옷이나 하나 지어 줘야겠다. 성에 있는 그의 옷들은 왕족이 입는 것이라기엔 너무나 단출했다.
“이제 방으로 갈게요. 아셰를 말려 준 뒤엔 저도 씻어야겠어요.”
하지만 씻고 나면 내 붕대는 누가 갈아 주지. 아무래도 아셰라드렌은 하루 종일 강아지 상태일 것 같은데. 나는 머리를 마구 흔들며 물을 뿌려 대는 그를 토닥여 주며 복도를 걸었다. 욕실에 들리기 전과는 달리 주위가 조금 어두워져 있었다.
이름 없는 성에는 창문이 거의 없었다. 있다고 해 봤자 창살이 빼곡하게 채워져 있어 창문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 작은 틈 사이로 보이는 바깥세상은 연회색빛 어둠으로 가득했다.
비가 오고 있는 것이다.
“잠시 밖에 다녀와야겠어요. 아셰는 여기 있어요.”
내가 열심히 빨아 예니체 경이 널어 줬던 세탁물이 여전히 밖에 있었다. 아직 비가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많이 젖어 있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아셰라드렌을 바닥에 내려다 준 뒤 영문을 몰라 하는 그를 두고 성 밖을 향했다.
부슬부슬 내리는 비가 뺨에 톡 떨어졌다. 그래도 빗줄기가 강하지는 않았다. 당연하겠지만 공터에는 사람이 없었다. 나는 예니체 경이 각을 반듯하게 잡아 널어 둔 이불을 빠르게 걷어 품에 안았다.
다시 성으로 들어가 보면 그곳에는 차마 나를 쫓아오지 못하고 발만 동동거리는 강아지가 한 마리 있었다. 문제는 이불에 시야가 가려진 내가 그를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깨갱!”
그래서 나는 그를 실수로 발로 찼다. 절대로 고의는 아니었다. 놀란 나보다 더 놀란 아셰라드렌이 어디에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허겁지겁 이불을 내리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는 벽에 꼭 붙어 한쪽 발을 들어 올린 채 덜덜 떨고 있었다.
“미, 미안해요. 정말로. 혹시 다쳤어요? 지금의 아셰에겐 내가 너무 무거울 텐데… 뼈가 부러진 거 아니에요?”
나는 허둥지둥 사과하며 아셰라드렌의 상태를 살피려 했다. 그는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며 가냘픈 울음소리를 냈다. 세상에, 살인을 해도 이만한 죄책감을 느끼진 않을 것 같았다. 마치 죽을죄를 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작고 소중한 솜사탕의 면봉 같은 앞발을 만져 보려 상체를 숙이다 미끄덩 넘어졌다. 돌부리가 있는 것도 아니고, 바닥이 미끄러운 것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그때, 나는 정말이지 되는 일 하나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괘, 괜찮다니까… 나, 난 그렇게 약하지 아, 않다고.”
그러나 그 생각은 금세 흩어져 사라졌다. 내가 벽에 코를 정면으로 박으려는 찰나 아셰라드렌이 인간으로 돌아왔기 때문이다.
순식간에 가까워지는 꺼끌한 돌벽의 공포에 눈을 질끈 감았던 나는 슬그머니 눈을 떠 아래를 바라보았다. 바닥에 주저앉은 아셰라드렌이 두 팔로 내 허리를 감싸 안고 있었다. 그리고 해맑게 웃으며 나를 바라보는 그 남자.
아니, 남자라기엔 소년에 가까운 느낌을 주는 그가 내가 놓친 이불을 반쯤 뒤집어쓴 채 장난스레 킥킥거렸다.
“그, 그냥 아픈 척 좀 한 것뿐이야. 그렇게까지… 반응할 줄은 몰랐어.”
“하지만 제가 그, 개미 발톱만 한 앞발을 밟아 버렸잖아요.”
“개, 개미 발톱이라니. 아, 아무리 작아도 그거보단 크겠다.”
“일단 놔주세요. 자세가 불편해요.”
“싫어.”
“……?”
오늘의 그는 확실히 이상했다. 전에는 이런 적이 없었는데. 당황한 나는 머릿속이 멍해져 눈만 깜빡거리기 바빴다. 우리 둘 중에서 장난을 치는 쪽은 항상 나라고 생각했건만, 왕자가 먼저 나를 놀리는 날이 올 줄이야.
그것도 이렇게나 빨리. 어쩌면 나는 아셰라드렌에 대해 그렇게까지 잘 알고 있었던 건 아니었나 보다.
“왜 갑자기 말이 없어, 다프네.”
그가 허리를 잡아당기며 물었다. 그러고는 제 허벅지에 나를 앉히더니 방금 발견했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옷이 젖었어…. 머리도.”
“밖에 비가 오는 걸 같이 봤잖아요.”
“왜 자꾸 눈을 피해?”
왜냐니, 그걸 모를 정도로 눈치가 없나? 나는 하얗게 드러난 그의 상반신에 뺨을 기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덕분에 등이 짜르르 아파 와 인상이 써졌다. 아셰라드렌은 지금 우리의 거리가 심하게 가깝다는 것을 전혀 자각하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그는 오히려 내가 이상하다는 듯 열심히 나와 시선을 맞추려 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사람 얼굴을 제대로 쳐다보질 못해 어깨만 겨우 노려보던 것이 전부였던 이가.
“…펴, 평소엔 다프네가 나를 이렇게 자주 안아 주잖아. 별로 다를 것도 없는데, 다프네가 자꾸 이, 이상하게 굴어.”
“그건 아셰가 강아지로 변해 있을 때만이잖아요….”
이렇게 건장할 때는 절대로 먼저 안으려고 한 적 없다. 나는 말을 더듬는 버릇이 좀 사라지려나 싶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 시무룩해져서는 우물쭈물하는 말투를 쓰는 그를 힐끗 곁눈질했다.
아셰라드렌은 뭔가 억울한지 눈가를 살짝 붉히며 투덜거렸다.
“다프네는, 역시 가, 강아지일 때 내 모습만 좋아하는 거야?”
“역시라뇨. 그렇지 않아요. 굳이 따지자면 그때를 가장 선호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지금의 아셰를 꺼려 하는 건,”
“어, 어려운 말 쓰지 말고.”
“…아셰가 어떤 모습이든 상관없어요.”
비가 와서 그런지 분위기는 어색하기만 했다. 그는 슬슬 힘이 빠진 내가 주르륵 제 허벅지에서 미끄러지는 것을 놓치지 않고 나를 고쳐 안았다. 그러니까 이건 강아지일 때의 내가 그를 안는 것과 같은 의미라는 거지. 별다른 뜻이 있는 게 아니라.
하지만 그의 여느 성인 못지않은 체격과 외모 탓에 내 쪽에선 좀처럼 가만히 있기가 쉽지 않았다. 아셰라드렌의 맨살은 묘하게 나보다 뜨거웠고, 그가 잡고 있는 허리 쪽의 손길이 끊임없이 신경 쓰였다.
그냥 오늘 하루 정도는 계속 강아지로 남아 주면 안 됐던 걸까? 내가 넘어지려고 하던 순간 변신하던 걸 보면 그 능력을 아예 통제하지 못하는 것도 아닌 듯한데.
“…다프네를 만나서 기뻐.”
내가 별의별 생각을 다 하고 있는 사이, 아셰라드렌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지. 그가 대뜸 내뱉는 말을 듣고 나는 고개를 들었다. 왕자는 아랫입술을 깨문 채 숨을 크게 들이쉬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터져 나올 듯 축축해진 눈동자는 덤이었다.
이렇게 순수한 소년을 두고 내가 속으로 무슨 소리를 해 댄 건지. 나는 붉게 물든 그의 귓가를 바라보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저도요. 저도 그래요.”
“옷을 입는 것도, 식사를 제대로 하는 것도, 내 이름을 쓰는 것도 다 다프네가 가르쳐 줬어.”
“별것도 아닌걸요.”
“별거야.”
“아, 네.”
겸손하려고 한 말을 진심으로 받아들인 그가 정색했다. 내가 얼떨떨해하며 답하자 잠깐의 침묵 뒤에 입을 열었다.
“다프네는… 여길 그만두면 안 돼. 절대로.”
“그럴 생각 없어요.”
레티스가 남부의 대공인지 뭔지와 결혼하게 되어 왕위에 오른다면 아셰라드렌은 어떻게 될까? 그녀는 아직 제 오빠에 대해 고민한 적 없어 보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영원히 그를 이름 없는 성에 가둬 둘 것 같지는 않았다.
레티스에 대해 자세히 알지는 못해도 나는 그렇게 느꼈다. 그녀는 지금의 왕과 왕비와는 다를 것이라고.
“야, 약속해 줘. 평생 나를 위해 일하겠다고.”
“오…. 노예 계약인가요?”
“아, 아니.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닌데.”
왕족의 종신 메이드직 자리만큼 좋은 자리도 없겠지. 그다지 대단한 환경을 갖추고 태어나지도 못한 내가 출세할 수 있는 방법은 이 길뿐이리라. 나는 잠시 본성에서 화려한 예복을 입고 당당하게 걸어 나가는 아셰라드렌을 상상했다.
왕족만이 사용할 수 있는 보라색 망토를 두른 그는 틀림없이 근사하고 아름다울 것이다. 여주인공이 남주인공을 없애 버린 세상에서 그는 남은 인생을 행복하게 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좋아요, 우선 여기서 저를 놔주시면 약속할게요.”
“왜…? 다프네도 나를 하루 종일 아, 안고 있었잖아.”
“비를 맞고 와서 씻고 싶단 말이에요. 그리고 아셰도 옷 좀 입어요. 지금은 털이 몸을 가려 주는 것도 아니잖아요.”
익숙함이란 무섭다. 처음 아셰라드렌은 내게 나체를 보이자마자 극심하게 부끄러워하며 제 몸을 가리느라 바빴다. 그런데 지금은 이불로 겨우 주요 부위만 아슬아슬하게 감추고 있는 주제에, 누가 보면 의심하기 딱 좋을 자세를 계속해서 유지하려 하고 있었다.
마침 예니체 경이 휴가를 가서 망정이지.
“여, 역시 다프네는 내가 강아지일 때만 좋아하는 것 같아.”
“그런 거 아니에요.”
“그, 그런 거 맞아.”
“아니라니까요.”
“마, 맞다니까. 흥.”
“흥이라뇨.”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아셰라드렌은 입을 비죽 내밀며 나를 슬쩍 밀어냈다. 이때다 싶어 나는 벌떡 일어나 욕실이 있는 위층을 가리켰다.
“그럼 이따 만나요. 옷 좀 입으시고요.”
“…아, 안 그래도 그러려고 했어.”
그는 곧바로 제 선택을 후회하는 듯 내 치맛자락을 잡으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하지만 나는 재빨리 걸어가 그에게서 멀어졌다. 장난은 본인이 먼저 쳤으면서.
아셰라드렌은 손을 뻗어도 잡히지 않는 위치에 선 나를 울먹이며 바라보았다. 정말이지 어린애가 따로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