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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왕자 길들이기 (28)화 (28/123)

28화

“뭐야, 왜 갑자기 성숙한 척하세요. 강아지일 땐 항상 저한테 안겨 계셨잖아요.”

“…….”

복도를 걷는 아셰라드렌은 왠지 모르게 신이 나 보였다. 폴짝폴짝 네 발을 열심히 휘적이다 가끔은 나를 돌아보기도 했다. 마치 내가 저를 잘 따라오고 있는지 확인하려는 듯한 모습이었다.

작고 용맹한 하얀 강아지는 식당에 다다를 때까지도 절대로 걸음을 멈추는 법이 없었다.

“그나저나 이게 뭐죠?”

식당에 들어선 나는 조용한 공간에 놓여 있는 종이 한 장을 발견했다. 그 옆에는 오늘분의 식량이 든 바구니도 함께 있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바구니를 덮은 천이 손도 대지 않은 듯 멀쩡했던 것이다.

나는 종이에 적힌 정갈한 필체를 향해 시선을 내렸다. 예니체 경이 쓴 것이었다.

“…예니체 경이 오늘부터 휴가라네요?”

여전히 강아지는 묵묵부답이었지만 나는 그에게 내용을 알려 주기 위해 말했다. ‘다프네 양에게’로 시작하는 종이에는 예니체 경이 오늘부로 이틀간 휴가를 다녀오겠다는 편지가 적혀 있었다.

“‘부상을 입은 다프네 양을 홀로 두고 가는 것이 마음에 걸리기는 합니다만, 실은 지난달에도 휴가를 쓰지 못했습니다….’”

이름 없는 성에 근무하는 고용인들은 원래 한 달에 이틀씩 휴가를 받는다. 하지만 지난달의 예니체 경은 새로 온 메이드가 사흘 만에 도망쳐 버리는 바람에 꼼짝없이 성에 남아 있어야 했다고 한다.

그는 나 같은 고아가 아니기 때문에 그를 기다리는 가족이 있다. 같이 일하는 고용인이 아프다고 해서 휴가를 두 번이나 건너뛸 수는 없는 노릇이었을 것이다.

나는 음, 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했다. 예니체 경도 바깥에서의 생활이 있을 테니까.

“무리하지 말고 당분간 청소나 빨래는 내버려 두라고 하네요. 어차피 누가 와서 확인할 것도 아닌데.”

“왕!”

“그런데 아까부터 왜 이렇게 신나셨대. 설마 예니체 경이 휴가라서 그런 거예요?”

“왕!”

아셰라드렌은 씩씩하게 답했다. 강아지는 코가 좋다. 아마 그는 아침 일찍 예니체 경이 이름 없는 성을 나서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나한테 친하게 구는 것만큼 예니체 경한테도 친절하게 대해 주지…. 대체 예니체 경이 왕자에게 뭘 잘못했냔 말이다. 그 역시도 귀여운 왕자의 모습을 나 못지않게 애정하는데.

“그럼 오늘부터 이 성에는 저희 둘밖에 없네요. 강아지 아셰와 인간 다프네.”

원반던지기라도 하면서 놀아야 하는 걸까. 회귀 전에도 예니체 경이 휴가를 받아 아셰라드렌과 둘만 남았던 적이 더러 있었지만 그때는 그와 조금의 교류조차 하지 않았다.

나는 평소대로 복도를 쓸고 닦고 방을 정리한 뒤, 아셰라드렌의 끼니를 챙겨 주는 것을 제외하고는 방에 틀어박혀 로맨스 소설을 읽었다. 그러고 보니 가을에는 낙엽을 주워 아셰라드렌의 식사 옆에 놓아 준 적도 있었던 것 같고.

“우선 아침부터 먹어야겠어요. 이 냄새는 초콜릿 파이 같은데….”

“왕! 왕!”

“그런데 강아지는 초콜릿을 먹으면 안 되는 거 아시죠? 빨리 인간으로 돌아오지 않으시면 드릴 수 없어요.”

“…….”

하얀 귀가 축 처졌다. 나는 강아지가 저렇게 심각한 표정을 할 수 있는지 처음 알았다. 아셰라드렌은 끙끙대는 소리를 내며 뭔가를 열심히 노력하는 듯 보였다.

“식사는 또 어떻게 하면 좋아. 왕자님이시니 바닥에 드릴 수도 없고…. 아, 식탁 위에 올라가서 드실래요?”

다행히도 오늘의 아침은 간을 별로 하지 않은 닭고기였다. 이 정도는 강아지도 먹을 수 있겠지? 어쨌거나 왕자는 보통 강아지가 아니니까.

나는 느긋하게 주방으로 가서 접시 두 개를 가져왔다. 그런 다음 왕자에게는 닭고기와 삶은 브로콜리를 덜어 주었다. 왠지 버터를 잔뜩 넣은 빵은 주면 안 될 것 같았다. 그건 아셰라드렌이 사람으로 돌아왔을 때나 나눠 줘야지.

식사 준비를 마친 뒤에는 아셰라드렌의 배에 손을 넣어 그를 번쩍 들어 올렸다. 허공에 들린 그가 헤드뱅잉을 하며 반항했지만 식탁 위에 올려 주니 금세 코를 킁킁대며 닭고기의 냄새를 맡았다.

그도 배가 고프긴 했던 모양이다. 아셰라드렌은 별다른 불만 없이 고기를 짭짭대며 먹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강아지일 때 밥 먹는 소리 왜 저렇게 귀여워.

“다 드시고 나면 입을 닦아야겠어요. 털에 왜 이렇게 묻히고 드세요? 이제 포크랑 나이프 쓰는 방법도 배웠잖아요.”

“…끼잉.”

“농담이에요. 강아지 발로 어떻게 고기를 잘라먹어요.”

“…….”

닭고기의 기름 때문인지 입가의 하얀 털이 번들거렸다. 털 사이로 보이는 입술은 살짝 웃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어제 있던 귀족 아이들과의 소동을 잊어버릴 만큼 평화롭고 한적한 아침이었다. 그건 그렇고, 그 아이들을 그 후에 어떻게 되었을까? 부디 아무도 이름 없는 성에 새삼스러운 관심을 가지지 말아야 할 텐데.

“이제 뭐 할까요? 지금 상태론 글공부를 할 수도 없고.”

빈 접시를 옆에 모아 둔 뒤 식탁에 턱을 괴었다. 아셰라드렌은 동그란 눈을 깜빡거리며 나를 쳐다보더니, 이내 기름이 묻은 혀로 내 얼굴을 싹싹 핥기 시작했다.

“앗, 그만. 그만하세요. 강아지의 본능이야 뭐야.”

기분이 좋은 건 알겠는데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지 않나? 나는 그를 밀어냈지만 그 쪼끄만 게 어디서 힘이 솟아났는지 좀처럼 밀려나지 않았다. 아셰라드렌은 아예 앞발로 내 손을 붙잡고 제 얼굴을 마구 들이밀었다.

꼬리가 날아갈 듯 붕붕거렸다. 결국 나는 그를 훌쩍 안아 들고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다시 방으로 돌아가요. 낮잠이나 자는 게 좋겠어요.”

아셰라드렌을 데리고 식당을 나섰다. 복도에 발을 딛기가 무섭게 그가 몸을 마구 비틀어 댔다. 이번에도 알아서 걷겠다는 거지? 이제 이 정도 의사 표현은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그를 내려 주자 하얀 털 뭉치는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고 내 주위를 빙글빙글 돌았다. 그러더니 쪼르르 앞으로 달려갔다. 헛웃음이 절로 흘러나왔다.

“아니, 진짜 사람 아니고 강아지 같아요…. 저기요, 어디 가세요?”

아셰라드렌은 자연스럽게 내 방을 지나쳐 갔다. 그를 쫓아가던 나는 복도 끝에서 속도를 늦추고 폴짝폴짝 뛰는 솜뭉치를 바라보며 또 한 번 웃음을 터뜨렸다. 이제껏 저렇게나 활발한 그의 모습을 본 적이 있던가?

붕대를 갈아 줄 때가 됐는지 등이 슬슬 쓰라리긴 했지만, 나는 왕자의 장단을 맞춰 주기로 했다. 아셰라드렌은 면봉 같은 발로 문을 벅벅 긁어 댔다.

“열어 달라구요?”

“왕!”

“여기 뭐가 있길래….”

나는 말도 채 끝내지 못했다. 아셰라드렌이 그 먼지 구덩이 속으로 쏜살같이 달려 나간 탓이다. 그러고 보니 이 방은 아셰라드렌이 예니체 경을 피해 숨어 있던 곳이 아니던가. 나는 먼지를 풀풀 일으키며 주위를 돌아다니는 그를 더 이상 참아 줄 수 없었다.

“자꾸 이러시면 목욕을 하는 수밖에 없어요! 어차피 오늘 안에는 사람으로 돌아오실 것 같지도 않으니까, 비누로 벅벅 문질러 닦아 드릴 거예요.”

나는 허리에 손을 올린 채 그에게 경고했다. 그러자 아셰라드렌의 움직임이 조금씩 느려졌다. 흰자가 드러나도록 나를 힐끗대며 내 눈치를 보고 있는 것이다. 아침 내내 방방거리며 흔들던 꼬리가 스르륵 아래로 내려갔다.

아셰라드렌은 슬금슬금 나를 쳐다보며 구석으로 향했다. 그러고는 원래의 색을 알아볼 수조차 없는 빛바랜 커튼 사이로 사라졌다.

“…아셰 님, 아셰 님?”

하지만 그는 금세 나타났다. 입에 둥그런 금화를 하나 물고서.

놀란 내가 그에게 다가가자, 아셰라드렌은 고개를 팩 돌리며 뭐라 뭐라 궁시렁거렸다. 물론, 무슨 소리인지는 알 수 없었다.

“아니, 그거 여기 더 있었어요? 그래서 저를 여기 끌고 온 거예요?”

“…….”

하여튼 고집 하나는 알아줘야 한다니까. 나는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네네, 알겠어요. 아셰 님 말고 그냥 아셰.”

“왕!”

그제야 왕자가 금화를 내 발치에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먼지 구덩이 속에 철퍼덕 주저앉아 다시금 꼬리를 흔들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우리 주위에 먼지바람이 일었고…. 나는 기겁하며 금화와 함께 그를 주워 들었다.

아셰라드렌은 컹컹거리며 자꾸만 뒤를 돌아보았다.

“커튼 뒤에 뭐가 있길래…. 헉.”

솔직히 이쯤 되니 기대를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설마 하는 마음에 발끝으로만 커튼을 슬쩍 걷어 젖히자, 그 안에 가려진 지저분함의 끝판왕인 상자가 보였다. 그러나 그 상자 안에는 금화가 가득했다. 뿌옇게 먼지가 가라앉아 있긴 했지만.

“이, 이거….”

“왕!”

“이거 다 금화예요? 세상에, 이 정도로 있으면 성도 한 채 살 수 있겠다.”

“왕!”

“아셰, 이걸 보여 주려고 여기까지 왔던 거예요?”

더 이상 그는 왕왕대지 않았다. 헤헤 웃으며 내 볼에 제 머리를 비비느라 바빴다. 하지만 금화 상자에 시선을 빼앗긴 나는 그가 어디서 묻혀 온 검댕 자국을 내 얼굴에 마구 칠해 대는 것도 몰랐다.

어차피 아무도 없다는 걸 알았지만, 재빨리 주위를 살핀 나는 금화 상자를 닫아 얼른 옆구리에 끼웠다. 한 손에는 강아지, 한 손에는 금화 상자.

“진짜, 최고예요. 저 감동했어요….”

이름 없는 성에서 한 달 동안 일하면 은화 삼십 개를 봉급으로 받는다. 은화는 백 개가 모여야 금화 한 개가 된다. 전에 받아 둔 금화 한 개도 내 석 달 치 월급이었는데….

이쯤에서 나는 아셰라드렌의 정수리에 뽀뽀를 마구 갈겨 주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머리털에서 쿰쿰한 냄새가 난다는 건 한참이 지나서야 알게 된 사실이었다.

“우리 일단 여기서 나가요. 씻어야겠어요.”

기쁜 건 기쁜 거고 더러운 건 더러운 거였다. 엄청난 양의 금화들로 떵떵거리며 살 수 있을 미래를 그려 보던 나는 현실로 돌아와 매정하게 발걸음을 돌렸다.

한 번만 넘어가 달라는 듯 아셰라드렌이 끼잉끼잉 우는 소리를 냈지만, 내 발길은 그대로 곧장 욕실을 향했다. 나는 금화를 선반에 올려놓은 뒤 아셰라드렌을 욕조에 집어넣었다.

강아지는 구슬픈 눈을 하고 나를 바라보았다. 물론, 선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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