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그렇다면 다행이지만요. 미안해요. 걱정이 돼서.”
“아니에요. 고마워요, 언니. 이 세상에서 내가 마음을 툭 터놓고 얘기할 수 있는 상대는 언니밖에 없어요.”
“…그건 저도 그래요. 공주님이라서 만나 뵙기 어려운 게 너무 아쉬울 정도로.”
“아, 그러면 말 좀 편하게 해 주지. 난 진짜 친언니처럼 지내고 싶단 말이에요.”
레티스가 내 양손을 잡으며 말했다. 왠지 모르게 목이 멘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당장은 어렵겠지만, 앞으로 더 많이 그녀를 만날 수 있다면 차차 그렇게 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노력할게요. 난 여기 신분제 사회에 너무 길들여졌어.”
“하긴 언니는 여기서 오래 지냈다고 하니까.”
“그런데 시간 괜찮아요? 저번처럼 또 왕성이 난리가 나는 거 아니에요?”
“이제 슬슬 가려고요. 다음엔 좋은 소식을 들고 방문할게요.”
레티스의 손이 천천히 떨어져 나갔다. 나를 바라보며 활짝 웃는 그녀의 복숭앗빛 눈동자는 새로운 미래에 대한 기대로 반짝거렸다. 소설 속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자신의 길을 찾아내다니, 정말이지 대단한 사람이야.
치료를 한 덕인지 쏟아지는 졸음 속에서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레티스가 문을 닫고 나갔을 때, 나는 이미 나른한 잠에 푹 빠져 있었다.
⋆★⋆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방이 푸른색으로 물든 새벽이었다. 계속 엎드린 채로 잠을 잤더니 목이 뻐근했다. 문득 목이 말랐던 나는 상체만 살짝 일으켜 주위를 더듬거렸다.
“…자, 여기.”
“아, 고마워요.”
그러자 어둠 속에서 누군가 물잔을 내미는 것이 아닌가. 나는 대수롭지 않게 인사를 하고 허겁지겁 물을 마시다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제야 침대 밑에 쪼그려 앉아 있던 아셰라드렌이 보였다.
커다란 몸을 구깃구깃 접어 동그랗게 앉은 그가 내 쪽으로 손을 뻗었다.
“다 마셨으면 줘.”
“아, 아니에요. 제가 할게요.”
“다프네는… 아, 아프잖아. 그러니까 가만히 있어.”
길쭉한 팔이 쑥 튀어나와 내게서 컵을 가져갔다. 둔탁한 물컵이 돌바닥에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뒤로 이어지는 짧은 한숨 소리. 아셰라드렌은 엉거주춤한 자세를 하고 있는 내게 이불을 덮어 주었다.
그것도 머리끝까지. 나는 이불을 목까지 끌어 내려 온몸으로 울적함을 표현하고 있는 왕자를 돌아보았다.
“언제 오셨어요?”
“…….”
“공주님이 가신 뒤에 계속 자느라 몰랐어요. 설마 저 이를 갈진 않았겠죠?”
“아, 아니. 하지만 코는 골던데.”
“거짓말. 진짜요?”
“응…. 거, 거짓말이야.”
이 왕자가 이제는 농담도 할 줄 아네. 나는 입을 비죽 내밀며 왕자를 노려보는 체했다. 그러자 움찔한 그가 내 시선을 피했다.
“다프네한테… 나, 난 너무 쓸모없는 존재인 것 같아.”
“무슨 말씀이세요, 갑자기. 전 그렇게 생각한 적 없어요.”
“하, 하지만 내가 한 짓을 좀 봐. 그, 그래 놓고 예니체 경한테 화만 내고. 그럴 때가 아니었는데.”
왕자가 나를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하는지 알고 있다. 그렇기에 예니체 경이 내게 손도 대지 못하게 했던 이유도 얼추 이해가 간다. 상처가 엄청 심한 건 아니어서 다행이었다만, 마지막엔 나도 왕자가 답답해져 조금 신경질을 내고 말았다.
나라면 왕자의 모든 면을 받아들일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레티스가 왔을 때 왕자를 쫓아 보내듯 한 것이 마음에 걸리기 시작했다.
“왕자님은 잘못하신 거 없어요. 애초에 제가 밖으로 나가자고 고집을 부리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은 생기지 않았을 거예요.”
“…아셰.”
“네?”
“두, 둘만 있을 때는… 그, 그렇게 불러 주겠다고.”
“아, 네. 아셰 님.”
지금 중요한 건 호칭 따위가 아닐 텐데. 아셰라드렌은 묘하게 그 부분에 집착하고 있었다.
“그, 님도 붙이지 않으면 안 돼? 왜, 왠지 멀게 느껴져.”
“하지만 아셰 님은 왕자님이시고….”
“이런 데서 사는데 왕자인 게 무, 무슨 소용이야. 어차피 아바마마께서는 나를 친자식으로도 여기지 않으실 텐데.”
“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 속상하잖아요.”
“하, 하지만 사실인걸.”
틀린 말이 아니었으니 그렇지 않다고 부정할 수도 없었다. 나는 입을 꼭 다문 채 아셰라드렌을 바라보았다. 하룻밤 사이에 부슬부슬해진 은발 머리가 꼭 버려진 강아지 같았다. 저렇게 슬픈 듯한 눈을 하고 있으면, 나는 도저히 그를 내버려 둘 수가 없다.
“이리 오세요. 거기서 그렇게 세상 다 잃은 것처럼 앉아 계시지 마시고.”
“괜찮아. 그냥 여기 있을래.”
“안 돼요. 바닥이 차요.”
아셰라드렌이 어쩔 수 없다는 듯 내 쪽으로 다가왔다. 그러고는 안 그래도 좁은 침대에 들어오려 했다. 몸이 불편해서 자리를 내줄 수도 없는데. 나는 한쪽 다리만 겨우 걸쳐 앉은 아셰라드렌을 올려다보았다. 침대 헤드에 상체를 기댄 그가 조심스럽게 내 머리카락을 가져갔다.
“다, 다시는 다프네를 아프게 하지 않을게. 노, 노력할 거야. 난 괴물로 변하는 것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지만….”
“아니죠. 귀엽고 깜찍한 강아지로도 변하실 수 있잖아요. 그리고 이제 빨래도 할 줄 아시고.”
“…서, 설거지도 할 줄 알아. 다프네가 하는 걸 매일 지켜봤으니까.”
“그것 보세요. 아셰는 할 줄 아는 게 많아요. 그러니까 덩치에 안 맞게 꽁한 소리는 이제 그만.”
왕자가 빨래나 설거지를 한다는 건 절대로 자랑할 거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름 없는 성에 유폐된 그는 다른 왕족들과 경우가 다르니까.
어느새 아셰라드렌은 길게 늘어진 내 머리카락을 빙글빙글 돌리며 의미 없는 손장난을 치고 있었다. 기분이 좀 나아졌을까? 나는 미소를 그리며 그의 허벅지를 베개 삼아 누웠다.
아셰라드렌은 움찔하며 움직임을 멈추었다.
“더, 더워.”
“그래요? 전 새벽이라 그런지 좀 쌀쌀한 것 같은데.”
“윽, 다프네. 내 다리는 베개가 아, 아닌데.”
“아, 미안해요. 싫으셨구나.”
“아, 아,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우리의 기묘한 관계를 제재할 만한 이가 없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나는 새삼 내가 왕자를 너무 허물없이 대했구나 싶어 후회했다. 내가 머리를 들고 자세를 바꾸려 하자, 아셰라드렌은 고개를 마구 젓더니 내 머리를 꾹 눌러 제 허벅지를 다시 베게 했다.
워낙 힘이 좋아서 관자놀이가 으스러질 뻔했다. 나는 얼른 그의 손목을 잡아 밀었다.
“아파요. 전 지금 환자란 말이에요.”
“미, 미, 미안해. 일부러 그런 게 아니야.”
“저도 알아요. 음… 아셰?”
그의 이름을 부른 이유는 갑자기 시야가 하얀 연기로 가득 들어찼기 때문이다. 도대체가, 이 상황에서 갑자기 변신을 하게 된 원인은 뭘까? 설마 허벅지? 내가 괜히 그와 가까워지고 싶은 마음에 쓸데없는 짓을 했나?
고민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눈 깜짝할 새 왕자는 부드러운 솜뭉치가 되어 내 머리 밑에 깔려 있었다. 하얗고 따끈따끈한, 새까맣고 축축한 코로 내 뺨을 툭툭 건드리는 솜뭉치.
“…침대가 넓어진 거 하나는 좋네요. 아셰는 밤만 되면 강아지로 변신하더라.”
“끼잉, 낑….”
강아지 왕자가 버티기에는 내 머리 무게가 너무 무거울 것이었다. 나는 고개를 들기가 무섭게 내 품으로 파고드는 아셰라드렌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그는 꼭 얼굴을 보여 주지 않으려는 듯 바짝 세운 꼬리만 살랑살랑 흔들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오늘도 또 자연스럽게 나랑 자려고 하네. 인간일 때도 강아지일 때도 겉은 눈처럼 새하얗기만 하건만, 알고 보면 속은 새카만 게 아닌가 모르겠다.
“하지만 이러면 왕자님의 방을 기껏 치운 의미가 없어요.”
“왕!”
“알았어요. 왕자 말고 아셰.”
내 쇄골에 얼굴을 묻은 그가 헥헥대며 피부를 간질였다. 덩치는 콩알만 해진 주제에 제법 강단 있는 의사 표현이었다.
강아지로 변한 제 모습에 내가 금방 허물어진다는 것을 분명 알고 있을 테지. 왕자는 순수한 바보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능까지 낮은 것은 아니었다.
결국 오늘 밤도 나는 왕자와 잠이 들 테지. 나는 편한 자세를 찾으려 조그만 몸을 꼬물거리는 아셰라드렌은 기꺼이 안아 주었다. 그러고는 이내 색색대는 고른 숨소리를 내쉬는 그와 함께 눈을 감았다.
⋆★⋆
“이상하다. 아침엔 사람으로 돌아오셔야 하잖아요.”
나는 폭신한 베개 위에 강아지를 올려놓았다. 침대맡에 놓인 시계를 확인하니 시간은 벌써 아홉 시. 부상을 입었다는 핑계로 늦잠을 자고 말았다.
“헤헤거리지 마시고요. 말을 해 보세요, 말을.”
배려심이 넘치는 예니체 경은 알아서 식사를 해결한 것인지 나를 찾아오지 않았다. 나는 핑크빛 혀를 내민 채 히히거리며 웃고 있는 아셰라드렌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아니, 웃는 게 아니라 목이 말라서 저러는 건가. 모르겠다. 강아지를 키워 본 적이 있어야지 원.
“방에 물이 없어요. 식당으로 가야 할 것 같은데.”
아셰라드렌이 강아지가 되어 있으니 그냥 나 혼자 중얼대는 것만 같다. 잠옷으로 갈아입기도 힘들어 그대로 입고 잔 블라우스와 치마는 주름이 심하게 생긴 상태였다.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옷을 갈아입을 만큼 힘이 남아돌진 않는다. 나는 으억, 억 하는 소리를 내며 힘겹게 몸을 일으켜 앉았다. 강아지는, 아니 아셰라드렌은 깜짝 놀란 듯 두 발을 들어 내 팔에 매달렸다.
“왕왕! 왕!”
“네네, 아셰도 데려갈게요. 그렇지만 오늘은 직접 걸어요. 전 벽을 짚고 다녀야 할 것 같으니까.”
하지만 막상 아셰라드렌을 침대에서 내려놓고 일어났을 때, 나는 내 몸 상태가 그렇게까지 최악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등에서 따끔따끔한 고통이 느껴지긴 했지만 당분간 침대 생활을 해야 할 수준이라거나 걷지도 못할 만큼 심각한 건 아니었던 것이다.
피를 많이 흘렸던 것 같은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보기보다 상처가 심하지 않았나 보네. 괜히 머쓱해진 나는 헝클어진 머리를 긁적인 뒤 바닥에 서 있는 아셰라드렌을 내려다보았다.
“제가 엄살을 부렸나 봐요. 아니면 약발이 잘 들었거나.”
아셰라드렌은 고개를 갸웃거리는 것으로 반응해 왔다. 새벽에는 잘만 떠들어 대더니. 나는 평소처럼 그를 안으려 허리를 숙이려 했다. 하지만 그는 내 손길을 거부하는 듯 총총거리며 나를 지나쳐 걸어갔다.
그러고는 얼른 문을 열어 달라는 듯 앞발로 문을 벅벅 긁어 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