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예, 예니체 경은 나가. 여, 여긴 다프네의 방이잖아.”
“하지만 왕자님, 다프네 양의 상태를 확인해야 합니다.”
“내, 내가 한다니까? 왜 자꾸 나서는데.”
지금 내가 듣고 있는 날 선 목소리며 말투가 왕자의 것이 맞나.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돌아누우려다 그대로 얼어붙었다. 등 언저리에서 말도 안 되는 고통이 느껴지고 있었다.
“…아으, 미친. 이게 무슨 일이야.”
“이, 일어났어? 다프네, 몸은 좀 어, 어때?”
“끔찍해요. 그런데 빨래는 어떻게 됐는지 혹시 아시는 분?”
나는 엎드린 자세를 유지한 채 물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 그 귀족 아이들은 어떻게 됐을까? 왕자에게 밖에 나가도 별일 없을 거라고 장담했으니 그에 대한 사과도 해야 할 텐데.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슬쩍 고개를 내리자 풀어진 머리칼이 시야를 가렸다. 이름 없는 성에는 남자만 둘이라 그런지 아무도 내 옷을 갈아입혀 주지 않았다. 찝찝했다.
“물에 푹 젖어 대야에 담겨 있던 이불이라면 제가 빨랫줄에 널어놓고 왔습니다.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최고예요, 예니체 경…. 정말 감사해요.”
“그보다 일어나셨으면 왕자님을 좀 말려 주십시오. 다프네 양의 상처에 손도 대지 못하게 하십니다.”
“그래요? 둘이 많이 친해지셨나 보네.”
통증을 참으려 베개에 얼굴을 묻은 채 중얼거렸다. 예니체 경이란 사람이 아예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못 본 체하기 일쑤였던 왕자가 이제는 그와 의사소통을 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놀라웠다.
고통에 흐려진 정신은 나로 하여금 동문서답을 하게 만들었다. 예니체 경은 어이가 없다는 듯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닙니다. 물론, 왕자님이 먼저 제게 말을 걸어 주시는 데에는 벅찰 정도의 감동을 느끼고 있습니다만.”
“다프네는… 나 때문에 다, 다쳤어. 그러니까 내가 돌봐 주는 게 마, 맞아.”
두 남자들이 대체 언제부터 아무래도 좋을 주제에 대해 다투고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나는 등이 아팠다. 내가 끙끙거리는 소리를 내자 아셰라드렌이 구급상자를 달그락거렸다.
“뭐, 뭐부터 하면 돼? 이, 이거? 아니면 이건가.”
“이게 뭔데요?”
“그러니까… 고, 고약한 냄새가 나는 초록색 통?”
“그건 소독을 다 한 뒤에 바르는 약이에요. 우선은 제 옷부터 벗겨 주셔야 할 것 같은데.”
“아….”
아무 통이나 집어 들고 고민하던 그가 잠시 침묵했다. 나를 치료해 주겠답시고 큰소리를 치던 것치고는 아주 소심한 태도였다. 내 그럴 줄 알았지. 솔직히 기대도 안 했다. 역시 이럴 때 의지할 수 있는 건 예니체 경뿐이었다.
“예니체 경.”
“밖에 누가 온 것 같습니다. 사람 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데.”
“갑자기요?”
“네, 잠시 나갔다 오겠습니다.”
대체 뭐 하자는 건가 싶었다. 예니체 경은 벽에 세워 둔 검을 집어 들고 나갔다. 그리고 남은 아셰라드렌은.
“오, 오, 오, 옷을 어, 어떻게 버, 벗겨야 하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아직까지도 허둥지둥하고 있었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러나 왕자가 상식이 부족하다는 건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기에 별로 화가 나지도 않았다. 나는 왕자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냥 제가 알아서 벗을게요. 일어날 수 있게 도와주실래요?”
“…응. 미, 미안해.”
목소리가 침울했다. 커다란 손으로 내 손을 감싼 그가 입꼬리를 아래로 늘어뜨렸다. 아셰라드렌은 엎드린 내 배 아래쪽에 손을 집어넣어 나를 껴안는 듯한 자세로 몸을 일으켜 주었다.
그러자 나는 문득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옷을 벗기는 건 부끄러운데, 이렇게 몸을 턱턱 만지는 건 또 상관없다?
밥을 먹지 않아 배가 홀쭉한 상태인 것에 안심하며, 나는 자연스럽게 내 뒤에 자리를 잡고 앉은 아셰라드렌을 의식했다. 그는 내 손을 꽉 잡아 쥔 채 등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속상해…. 왜 매번 나는 너희들을 아프게 하는 걸까.”
“너희들이라면 예니체 경도 포함해서 말인가요?”
“응…. 그때도 내가 그 사람을 주, 죽일 뻔했잖아.”
“에이, 그러실 분 아니라는 거 알아요.”
길게 늘어진 머리카락을 한쪽으로 넘겼다. 등이 따갑게 느껴지는 이유는 비단 상처뿐만이 아니었다. 부드러운 손가락이 피가 맺힌 살결을 조심스럽게 쓸어내렸다.
뒤를 돌아보자 아셰라드렌이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내 등에 고정된 그의 시선은 좀처럼 떨어져 나가지 않았다.
“나, 난 진짜 위험한 놈인가 봐.”
그렇게 중얼거린 그가 또 한 번 약상자를 달그락거렸다. 인상을 쓴 그가 여러 약통들을 만지작거리기만 반복하기에 나는 입을 열었다.
“방금 그거요. 그게 소독용이에요.”
“이, 이걸 먼저 바르면 되는 거야?”
“네. 음… 잠시 다른 데 좀 보고 계실래요?”
“아.”
무엇보다 먼저 이 찝찝한 드레스를 벗어 던질 필요가 있었다. 나는 목을 살짝 덮는 드레스의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뒤쪽을 확인해 보면 아셰라드렌이 쩔쩔매는 듯한 표정으로 천장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언제부턴가 들려오는 쿵쿵대는 소란스러움도.
문이 벌컥 열린 것은 내가 가슴 쪽의 단추에 손을 올렸을 때였다.
“다프네 언니!”
“…공주님?”
반가운 얼굴이 나타났다. 레티스는 가쁜 숨을 몰아 내쉬며 방 안의 상황을 살폈다. 요리조리 움직이던 그녀의 시선이 멈춘 곳은 내 등과, 곁에 앉아 있는 아셰라드렌이었다.
레티스는 재빨리 눈을 굴리더니 문을 닫고 나갔다.
“미안해, 실례했어요.”
“아, 아니. 잠깐만요!”
그녀의 뒤에 서 있던 예니체 경을 얼핏 본 것도 같다. 나의 마지막 외침을 들었는지 레티스는 금세 문을 열고 또다시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오늘 그녀는 화사한 은빛 머리칼을 틀어 올리고 있었다. 목에 묶은 물빛 코르사주가 가냘픈 체구를 강조해 주는 듯했다.
“…나 들어가도 돼요? 괜히 방해하는 건 아닌가 모르겠어.”
“돼요. 완전 돼요. 어서 들어오세요. 보고 싶었어요.”
내가 레티스를 며칠이나 기다렸던가. 나는 쏟아 내듯 말하며 레티스를 향해 돌아앉으려다 멈칫했다. 아셰라드렌의 손아귀에서 약통이 툭 떨어졌다. 레티스는 허리를 숙여 제 쪽으로 굴러온 약통을 집어 들었다.
“이건 뭐예요? 그쪽은 누구? 나랑 같은 은발인… 설마.”
레티스의 몸에 깃든 영혼은 <공주는 꺾이지 않는다>의 내용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커다랗게 뜨고 아셰라드렌을 바라보았다. 꼭 거울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이리라. 두 사람은 그 정도로 꼭 닮아 있었다. 다른 것이라곤 그저 성별과 차림새뿐이었다.
“오, 오빠예요? 내 오빠? 아, 아셰라드렌?”
“…….”
“맞죠, 언니? 이 사람, 먼 옛날에 유폐되었다던 1왕자 아니에요?”
왕자가 아무런 반응을 하질 않아 답답해진 레티스가 이번에는 내 쪽을 쳐다봤다. 그녀는 처음 아셰라드렌을 만났던 나와 마찬가지로 반짝반짝 빛나는 눈을 그에게서 거두질 못했다.
그러나 아셰라드렌 쪽은 삽시간에 낯빛이 창백해져 가고 있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입술만 초조하게 물어뜯고 있었다. 나와 처음 마주쳤을 때도 엉덩방아를 찧으며 비명을 질렀었지.
나는 그의 주위를 환기시키기 위해 주저하지 않고 허벅지에 올려진 아셰라드렌의 손을 잡았다.
“맞아요, 공주님. 이분이 바로 아셰라드렌 왕자님이세요.”
“우와, 소문이니 뭐니 전부 다 거짓말이네요. 완전 멀쩡해 보이잖아. 아니, 그보다 오빠. 초면에 미안하지만 잠깐 언니 나한테 줘요.”
“…왜?”
그제야 아셰라드렌이 고개를 들었다. 그는 적극적으로 방 안에 들어서는 제 동생을 무척이나 낯설어하며 내 손을 고쳐 쥐는 데 급급해했다.
레티스가 한 걸음씩 다가올 때마다 아셰라드렌은 어깨를 굳히거나 나를 잡은 손아귀에 힘을 주는 등 그녀를 반기지 않는다는 것을 계속해서 수동적으로 표현했다.
“왜긴 왜야. 언니가 다쳤잖아요. 아니면 오빠가 치료해 주시려고?”
“그, 그, 그럴 생각인데.”
“말은 또 왜 그렇게 더듬거려. 오빠는 왕자님이잖아요. 다친 사람 치료하는 방법은 알아요?”
“그, 그러는 너는, 아, 아, 아, 알아?”
아셰라드렌의 뺨이며 목에 식은땀이 배어 나왔다. 그는 레티스와의 만남을 끔찍할 정도로 불편해하면서도 억지로 용기를 쥐어짜 내고 있었다. 평소보다 말을 심하게 더듬는 것이 그 증거였다.
그러나 아셰라드렌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하는 레티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그를 끌어내려고 했다.
그러다 그가 타악, 하고 방을 울리는 소리가 날 정도로 제 손을 매몰차게 쳐 내는 것을 보고 당황했다.
“왜 이래요? 누가 보면 내가 나쁜 짓이라도 하려는 줄 알겠어.”
레티스는 도와달라는 듯 나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나는 지금의 아셰라드렌이 얼마나 불안정한 상태인지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기껏 이름 없는 성을 방문해 준 레티스를 쫓아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지만.
고민하던 나는 일단은 두 사람을 떨어뜨려 놓는 것이 낫겠다고 판단했다. 왕자에게는 미안했지만, 오로지 그의 입장만을 고려해 주기에는 지금 내 상황이 여의치 않기도 했고.
“미안해요. 제가 대신 사과할게요. 그리고 왕자님. 죄송하지만 자리를 비켜 주시겠어요? 레티스 공주님이 저를 치료해 주신다고 하니까….”
“나, 나도 할 수 있, 있는데….”
“알아요. 하지만 배워야 하잖아요. 그러니까 다음에요.”
“…….”
“다음에 제가 다치면, 그때는 꼭 왕자님이 저를 돌봐 주세요.”
“나, 난 더 이상 다프네가 다치지 않았으면 좋겠어.”
왕자는 불만스러워 보였으나, 그렇다고 마냥 고집을 부리지도 않았다. 슬픈 듯 눈을 내리깐 그가 천천히 내 손을 놓았다.
상처라도 받은 것 같은 침통한 분위기였다. 그럼에도 나는 서서히 침대에서 일어나는 아셰라드렌을 붙잡지 않았다. 어쨌거나 그는 약통에 붙어 있는 설명서도 제대로 읽을 줄 몰랐고 지금 당장 차근차근 가르칠 만큼이나 인내심이 남아 있지 못했다.
차마 축 처진 어깨로 방을 나서는 아셰라드렌을 확인하고 싶지는 않았다. 현실적으로 생각하면 내 판단이 맞는데, 괜히 못 할 짓을 저지른 기분이 들었다.
나는 세수를 하듯 얼굴을 거칠게 쓸어내리며 길고 긴 한숨을 쉬었다. 레티스가 돌아가면 곧바로 아셰라드렌을 찾아가는 것이 좋을 듯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