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그, 그만해. 방금 저 메이드가 하는 말 못 들었어? 이름 없는 성에서 일한다잖아.”
“그래서 뭐? 난 저 남자가 누군지 알아야겠다고.”
아셰라드렌에게 넋이 나간 여자애와 달리, 남자애는 아직까지 이름 없는 성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여자애가 좀처럼 자리를 뜨려고 하지 않자 남자애는 파란 눈에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았다.
“알면 뭐 하게? 계속 여기 있다 괴물이랑 마주치면 어쩌려고!”
“그건 나도 무섭지만….”
남자애의 닦달에 못 이긴 여자애가 어쩔 수 없이 발걸음을 떼려는 순간이었다. 문득 나는 어깨가 심하게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아셰 님?”
“으….”
눈길을 내리자 옷깃을 쥔 아셰라드렌의 손이 이리저리 떨리는 것이 보였다. 아니,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의 손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 거기다 갑자기 안개라도 낀 것처럼 뿌옇게 흐려져 가는 주변의 공기.
조금씩 희미해져 가는 시야 속에서 아셰라드렌의 손등이 뚝, 뚜둑 하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가 얼굴을 숨긴 내 등에 열감이 퍼져 나갔다.
“뭐야, 쟤 왜 그래?”
뭔가 큰일이 벌어질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달라진 공기의 흐름을 느낀 여자애가 걸음을 멈추고 물었다. 그러나 나는 여자애에게 반응해 줄 여력이 없었다. 아셰라드렌의 상태가 너무도 이상했다. 나는 빠르게 몸을 돌려 그를 가슴에 끌어안았다.
“꺄악! 루카! 방금 봤어? 우리가 괴물을 만났어!”
“봤어, 봤어! 이럴 게 아니라 어른들을 불러오자!”
가능한 한 아이들에게서 아셰라드렌을 가리려고 했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내 품에서 헐떡거리는 그의 입가에 날카로운 송곳니가 삐죽 튀어나왔다. 입고 있는 옷이 금방이라도 터져 버릴 듯 너른 등이 부풀어 올랐다. 그와 동시에 그의 손길이 닿아 있는 내 등허리에 아찔한 고통이 피어올랐다.
나는 더 이상 아이들에게 신경을 쓸 여력이 없었다. 아셰라드렌의 목덜미가 순식간에 하얀 털로 뒤덮여 가고 있었다.
“실례하겠습니다.”
생각해 보면, 회귀 전에도 이따금씩 길을 잘못 들어 찾아오는 귀부인들이며, 장난기 많은 아이들이 이름 없는 성을 방문하곤 했었다. 물론 그건 다섯 손가락 안에 꼽을 수도 있을 만큼 자주 없는 일이었고, 개중에는 나 같은 메이드도 있었다만, 어쨌거나 외부인이 나타날 때면 언제나 예니체 경이 그들을 쫓아내 주고는 했다.
마치 지금처럼.
“기, 기사님이다!”
“기사님, 살려 주세요! 괴물이 저희를 죽이려고 해요!”
아셰라드렌의 기괴한 모습을 목격한 아이들은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은 때마침 영웅처럼 나타난 예니체 경을 보고서 한결 숨이 트인 듯했다.
먼저 울음을 터뜨린 것은 남자애였다. 그 애는 이름 없는 성을 돌아 달려 나온 예니체 경의 허리춤을 붙들고 징징거렸다.
“나, 난 처음부터 가기 싫다고 했는데에! 레리가, 레리가 가겠다고 해서!”
“왜 이제 와서 내 탓이야? 괴물이 나오면 네가 무찔러 주겠다면서!”
저보다 더 겁을 먹은 남자애 덕인지 여자애는 가까스로 침착함을 되찾았다. 레리와 루카는 예니체 경에게 달라붙어 서로를 향해 비난의 화살을 퍼부었다.
“바보, 바보! 루카는 구제 불능이야!”
“시끄러워! 닥쳐! 레리는 못생긴 주제에!”
“너랑 나는 쌍둥이거든?”
아이들은 열심히 서로에게 화를 내다 예니체 경의 시선을 느끼고 입을 다물었다. 한숨을 쉰 예니체 경이 아이들을 이끌었다.
“그만들 하시고 저를 따라오십시오. 이곳에 와서는 안 된다고 어른들이 말씀하지 않았습니까?”
“…했어요. 그치만!”
“그치만 진짜로 괴물이랑 만날 줄은 몰랐단 말이에요!”
드디어 꺼져들 주려는 건지. 나는 왜인지 속에서 천불이 이는 것 같아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러나 아이들은 서로에게 징징대며 좀처럼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나는 세 배는 두꺼워진 왕자의 목덜미를 초조하게 쓸어내렸다. 피부가 만져지지 않고, 털만 복슬복슬했다.
“너 때문이야, 루카. 1분이나 빨리 태어나면 뭐 해? 오빠면서 하나도 미덥지도 않고!”
“내, 내가 미덥지 않다고? 너무해!”
투닥대던 아이들 중 남자애가 갑자기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러더니 몸을 부들부들 떨며 앞에 있던 돌멩이를 하나 쥐었다. 예니체 경이 재빨리 말리려고 했지만, 그때는 이미 남자애가 던진 돌이 내 발목 뒤쪽에 부딪힌 뒤였다.
나는 따끔함을 느끼며 인상을 찌푸렸다. 마침내 인내심이 바닥난 예니체 경이 큰 소리를 냈다.
“그만들 하시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아가씨와 도련님의 성함을 말씀해 주십시오. 오늘 있었던 일을 두 분의 부모님께 알려 드려야겠습니다!”
“그건 안 돼요! 엄마한텐 비밀이란 말이야!”
“맞아! 그랬다간 엉덩이를 맞는단 말이에요!”
잘들 논다. 엉덩이를 맞는 게 무엇보다 두려운 아이들이 어떻게 이름 없는 성에 들어오려고 했는지 모르겠다. 나는 기어코 예니체 경에게 질질 끌려가는 아이들을 바라보다 다시 아셰라드렌의 상태를 확인했다.
그의 뒷머리 위로 뾰족한 두 귀가 솟아올라 있었다. 나는 터져 나오려는 비명을 집어삼켰다.
“예, 예니체 경…?”
놀라 예니체 경을 찾으려 하자 아셰라드렌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짐승으로 변한 왕자의 동공이 번뜩였다. 사나운 눈빛을 하고 있는 그는 더 이상 내가 안고 있기 힘든 머리 크기를 자랑했다. 팔에 들어간 힘이 서서히 풀려 가고 있었다.
“어, 없네. 젠장. 아셰 님, 죄송한데 무서워요.”
물론, 나보다는 귀족 아이들의 안전이 우선이겠지. 나는 예니체 경을 비난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한편으로는 그가 원망스러웠다. 그러나 그 마음도 이내 갈기갈기 찢어져 누더기가 된 옷자락을 물고 있는 아셰라드렌과 눈이 마주치자 금세 사라졌다.
그는 길쭉해진 주둥이로 침을 줄줄 흘리며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아니다, 그냥 내가 그렇게 느끼는 건가. 아무튼, 네 다리로 바닥을 짚고 서 있는 아셰라드렌은 트럭만 하게 컸다.
하지만 생각보다 두렵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가 바짝 세우고 있던 두 귀를 아래로 추욱 늘어뜨린 탓이다.
“끼잉….”
“…그 덩치로 끼잉이라뇨. 안 어울려요.”
“크르릉!”
“아악, 무서워! 울부짖지 마세요!”
말이 안 통해서 모르겠지만 그는 마치 내게 위협을 주지 않으려는 듯 보였다. 시무룩하게 낑낑대던 그가 내 지적을 듣고 다시금 귀를 쫑긋 세웠다. 나는 소리를 지르며 아셰라드렌의 갈기를 끌어안았다. 그가 절대로 나를 공격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역시 감정이 격해지면 변신하나 봐요. 거기에 분노가 더해지면 이렇게 거대해지는 건가?”
“…….”
“아셰 님도 모르세요? 일단 지금까지는 그랬던 것 같은데. 아, 근데 왜 이렇게 등이 따갑지.”
일단 두려운 마음이 사라지자 나는 쉴 새 없이 주절거렸다. 덩치가 커졌어도 아셰라드렌은 여전히 내가 던져 주는 스타킹 공을 좋아하는 강아지, 덩치가 커졌어도 아셰라드렌은 여전히 귀엽고 깜찍한 털 뭉치….
나는 속으로 몇 번이고 되뇌며 왕자의 털에 얼굴을 묻은 채 숨을 들이마셨다. 괜히 긴장할 필요도 없이 그는 아주 얌전했다. 그리고 계속해서 낑낑거리기만 했다.
“왜 그러세요? 안겨 있는 게 불편하신가?”
나는 천천히 그에게서 떨어져 나왔다. 그러면서 뭔가 축축한 느낌에 어깨를 내밀어 등허리를 확인했다. 새까만 옷감이 찢어져 살결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그리고 피가 잔뜩 배어 나와 있었다.
어쩐지 계속 아프더라니. 이렇게까지 피를 많이 흘리고 있었을 줄이야.
“어머, 이거 아셰 님이 그러셨… 아, 괜찮아요. 방에 가서 치료하면 되죠. 전에 예니체 경이 다치셨던 것보다야.”
하지만 아셰라드렌은 별로 괜찮아 보이지 않았다. 짐승의 눈이 슬픔으로 젖어 가는 것을 나는 똑똑히 확인할 수 있었다. 신기했다. 말도 통하지 않는데. 역시 근본이 사람이라 그런가.
“미안하면 말로 사과해 주세요. 다시 사람으로 돌아오셔서.”
왕자가 새까만 콧등으로 나를 툭툭 쳤다. 그러고는 애교를 부리는 것처럼 제 얼굴을 내 어깨에 비비적거렸다.
다만 그의 목적과는 다르게, 힘이 너무 센 탓에 나는 점점 뒤로 밀려나고 있었다. 아직 맨발인 데다 부상까지 입은 내가 휘청거리자 아셰라드렌이 주둥이를 벌리며 당황했다. 그는 두 앞발을 바닥에 떼었다 붙였다 하며 우왕좌왕 어쩔 줄 몰라 했다.
“…큰일 났네. 이렇게 산만 한 덩치까지 귀엽게 보여서.”
나는 그의 머리라도 쓰다듬어 줄까 싶어 손을 뻗었다 다시 내렸다. 등의 상처가 말도 못 하게 아파지고 있었다. 아셰라드렌은 나를 빤히 보더니 무릎을 숙여 털썩 주저앉았다. 어쩌라는 거지.
내 시선을 느낀 그가 제 등을 내 쪽으로 기울였다. 그러더니 ‘아우우우아우’ 하는 요상한 울음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진짜 어쩌라는 거지? 나는 고민했다. 그러자 아셰라드렌이 푸우, 하고 한숨을 쉬며 주둥이로 내 옆구리를 꾹꾹 밀었다.
“설마, 타라고요?”
“…….”
말이 통하지 않아 답답했던 건 그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계속해서 옆구리를 밀어 대기에 나는 커다란 몸 위로 한쪽 다리를 올렸다. 다만 그때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것은 아셰라드렌이 다시 사람으로 돌아오는 타이밍이었다.
“다, 답답해서 죽는 줄 알았네….”
대체 기준이 뭔지 하나도 모르겠다. 왕자가 짐승으로 변한 것은 고작 몇 분에 불과했다. 내가 제 등에 남은 다리를 올리기도 전에 그는 이미 사람으로 돌아와 있었다.
우리 사이를 가르고 있는 허여멀건 연기. 상체를 반쯤 일으킨 채 앉아 중얼거리던 왕자가 이내 어정쩡한 자세를 하고 있는 내 팔을 잡아당겼다. 내가 자연스럽게 왕자의 몸 위로 쓰러진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빠, 빨리 다프네랑 얘기하고 싶다고 생각했어. 그랬더니.”
아셰라드렌의 잔잔한 목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 그의 쇄골이 내 관자놀이에서 웅웅거렸다.
분명히 말하는데, 이곳은 우리 둘밖에 없는 성 안이 아니라 성 밖의 공터였다. 그리고 그는 발가벗은 채 나를 끌어안고 있었다.
매번 변신 능력을 선보였다 돌아올 때면 그는 항상 엄청나게 부끄러워하며 어떻게든 제 몸을 가릴 것을 찾고는 했다. 그런데 어째선지 지금은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을 깨달았다는 양 나를 고쳐 안으며 기뻐하느라 바빠 보였다.
“그, 금방 이렇게 변했어. 시, 신기하다. 전엔 이런 적이 없었는데.”
“그러시구나…. 우선 저희 성으로 빨리 돌아가요.”
“아… 많이 아프지. 미안해, 다프네. 나, 나 때문에.”
“아뇨, 그보다 누가 보면 변태 취급 당하기 십상이니까.”
울먹이는 신파는 나중에 찍는 편이 좋겠다. 나는 왕자의 가슴을 밀어내며 일어나려다 어지러움을 느끼고 주저앉았다. 그리고 그다음엔 어떻게 됐더라.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마 잠깐 정신을 잃었던 모양이다.
다시 눈을 떴을 때 나는 침대에 엎드려 있었고, 왕자와 예니체 경이 말싸움을 벌이는 믿을 수 없는 장면을 목격해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