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폐왕자 길들이기 (23)화 (23/123)

23화

“이불을 여기다 넣어 주세요.”

“뭐, 뭐 하는 거야?!”

군말 없이 내 말을 따른 왕자가 파드득 놀라 물었다. 나는 치마 안에 손을 넣어 허벅지까지 올라오는 스타킹을 벗고 있었다.

“아. 말씀드리는 걸 깜빡했네요. 잠깐 뒤돌아 계세요.”

방에서 옷을 갈아입을 때면, 아셰라드렌은 이제 별말을 하지 않아도 스스로 눈치를 채고 이불 안으로 쏙 들어가고는 했다. 언젠가부터 그에 익숙해진 나는 멋쩍게 움직임을 멈추었다.

왕자는 빨개진 얼굴을 가리며 등을 돌렸다. 그사이 나는 까만 스타킹 두 짝을 모두 벗어 동그랗게 말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러고는 물이 반쯤 차오른 대야 안에 발을 집어넣었다.

“으악, 차가워!”

“…이, 이번엔 뭐 하는 거야?!”

아셰라드렌은 궁금한 것도 많았다. 내가 됐다고 하지도 않았는데, 그는 나를 슬쩍 돌아보더니 치맛자락을 짧게 묶어 드러난 다리에 눈길을 고정시켰다. 나는 그의 주위를 환기시키기 위해 한쪽 발로 물을 뿌렸다.

“말씀드렸잖아요. 빨래를 하고 있는 거예요.”

“나를 저, 젖게 만드는 게 아니고…?”

왕자가 바지에 묻은 물기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내가 코를 판다 해도 흥미로워할 그는 이미 제 신발을 벗어 던질 기세였다.

최근 왕자는 내가 무엇을 하든 나를 따라 하고 싶어 했다. 특히나 집안일을 하면 더욱 그랬다. 설거지를 하면 옆에서 접시를 닦아 주고 싶어 했고, 음식을 덜면 본인이 직접 접시를 나르고 싶어 했다.

어느새 왕자는 허락을 기다리는 충견처럼 말없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주머니에 챙겨 왔던 빨래 비누를 대야에 퐁당 던진 다음 그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도와주실래요? 왕자님만 괜찮다면요.”

“아… 아셰라고 부, 불러야지. 지금은 우리 둘만 있잖아.”

쑥스러워하면서도 할 말은 다 한다. 그는 기다렸다는 듯 신발을 가지런히 모아 둔 뒤 대야 안으로 들어오려고 했다. 그러다 스스로 뭔가를 깨달았는지 내 다리를 한번 쳐다보더니 제 바짓단을 두어 번 접기 시작했다.

“이렇게… 하면 되는 거지?”

“네, 맞아요. 어서 들어오세요. 미끄러우니까 조심하시고요.”

아셰라드렌이 고개를 끄덕이고 대야 안으로 발을 들이밀었다. 바람이 간간이 불어오는 것을 제외하고는 더운 여름이었다. 발등을 덮는 시원함에 그의 표정이 환해졌다.

아셰라드렌은 나를 따라 천천히 이불을 밟기 시작했다.

“재, 재밌다. 하루 종일 할 수 있을 것 같아.”

“어쩌면 왕자님은 저보다 더 메이드 생활이 잘 맞으실지도 모르겠네요.”

“…아셰.”

“네, 아셰 님은요.”

왕자는 은근히 저를 부르는 호칭에 집착하고 있었다. 그는 물이 들어가 부풀어 오른 빨랫감을 꾹꾹 누르며 세상 해맑은 미소를 지었다. 그러다 한 번은 비눗물에 미끄러져 균형을 잃고 뒤로 넘어질 뻔했는데, 내가 제 손을 잡아당기자 아예 내 쪽으로 체중을 실어 버렸다.

대체 나를 얼마나 믿는 건지. 고작해야 그의 어깨까지밖에 오지 않는 나는, 아셰라드렌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기우뚱 옆으로 넘어가 버렸다.

“노, 놀래라.”

“괘, 괜찮아?”

다만 왕자의 순발력 덕에 나는 살아남았다. 그가 바닥으로 엎어지려는 내 어깨를 붙들고 물었다. 나를 받치는 단단한 힘을 느끼며 고개를 들자, 당황한 보랏빛 눈동자가 코앞에 놓여 있었다. 햇살을 받아 유리알처럼 투명하게 반짝이는 눈에는 나를 향한 걱정과, 안도감이 동시에 담겨 있었다.

“…아셰 님이야말로 괜찮으세요?”

“나는… 응, 괜찮아. 다프네가 다치는 줄 알고 까, 깜짝 놀랐어.”

“아셰 님 숨결이 뜨거워요. 땀이 날 것 같아요.”

“아… 미, 미안.”

왕자가 내쉬는 숨이 뺨이며 목 언저리에 닿고 있었다. 몸에 바짝 힘이 들어가면서 갑자기 엄청난 더위가 느껴졌다. 나는 허공에 들린 허리를 의식하며 자세를 고쳐 서려고 했다. 아셰라드렌은 재빨리 눈을 내리깔며 더듬더듬 사과했다.

그러나 그는 곧바로 떨어져 나가지 않았다. 보랏빛 시선은 내 어깨 부근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다프네는… 모, 몸이 너무 작아.”

“…아셰 님이 크신 거겠죠.”

“그리고 부드럽고, 따, 따뜻해. 꼭 크림 같아.”

“여자 몸이 다 그렇죠. 이제 그만 저 좀 일으켜 주세요.”

이쯤에서 우리는 거의 뭐 한 편의 로맨스를 찍고 있었다. 내가 이러려고 빨래를 하려 했나, 괜히 아셰라드렌이 다 큰 남자라는 사실만 깨닫게 되어 어색해졌다. 이제까지는 몸만 큰 어린애로 인식하고 있었는데. 그래서 밤마다 강아지로 변한 그를 껴안고 잘 수 있었던 건데.

“…남은 빨래나 마저 할까요? 이러고 있는 걸 예니체 경에게 들켰다간 아주 난감해지겠어요.”

“왜 난감해져?”

“그야 꼭 연인같이 붙어 있으니까요.”

“연인.”

“서로 사랑하는 사이를 말하는 거예요.”

나는 혼란스러워하는 왕자를 슬쩍 밀어내고 다시 빨래를 밟는 것에 집중했다. 이러다 아셰라드렌에게 반하기라도 하면 어떡하지, 하는 쓸데없는 고민을 지워 내기 위하여.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이미 그에게 좋은 감정을 품고 있었다. 이렇게나 근사한 외모와 훌륭한 체격을 가진 데다 다른 이에게는 눈길 한번 주지 않고 나만 바라보려 하는데, 대체 어떻게 그를 싫어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아직은 사랑놀음 따위를 논할 때가 아니었다. 그러기엔 때가 일러도 너무 일렀다. 아셰라드렌이 왕족이고 내가 평민인 것도 물론 마음에 걸리는 부분 중 하나였다만, 그런 것을 떠나 우리에게는 확실한 미래조차 보장되어 있지 않았다.

까딱 잘못하면 1년 뒤엔 회귀 전처럼 둘 다 개죽음일 텐데, 이 무슨 때아닌 태평한 고민이란 말이냐.

게다가 아셰라드렌은 연인이라는 단어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런 이를 두고 대체 무슨, 왜 나 혼자만 설레고 지랄이야. 나는 정신을 차리고자 양손으로 스스로의 뺨을 후려쳤다.

짜악! 시원스레 갈기는 소리가 공터에 울려 퍼졌다. 그러자 발을 움직이는 것도 잊고 나를 아련하게 응시하는 바람에 나를 시험에 들게 만든 아셰라드렌도 번뜩 정신을 차렸다.

“뭐, 뭐야. 왜 그러는 거야, 갑자기.”

“때로는 아셰 님이 너무 미남이라서 화가 나요.”

“어, 어, 미, 미안해…?”

왕자는 안절부절못하며 곧바로 내 얼굴에 손을 뻗으려 했다. 아직 한참 아이같이 행동해도 외모가 저렇게 잘나면 어쩔 수가 없구나. 나는 한숨을 쉬며 대야 밖으로 빠져나왔다. 슬슬 이불의 물기를 짜고 빨랫줄에 널어야 할 때였다.

“아셰 님도 나오세요. 이 정도 밟았으면 충분한 것 같아요.”

“난 별로 못 밟았는데….”

“제가 많이 밟았으니까 괜찮아요.”

“치….”

이것 봐. 상대는 아직 애라고.

아쉬운 듯 툴툴거리는 그를 보고 있자니 뺨을 다시 때릴 것도 없이 정신이 맑아졌다. 나는 웃음을 터뜨리며 왕자에게 이리 나오라 손짓했다. 아셰라드렌은 대야 중간에 서서 미적미적 발을 옮겼다.

“저기 봐, 레리! 일꾼들이야!”

“살았다! 죽지 않고 돌아갈 수 있겠어!”

바로 그때, 뒤편에서 진짜 어린애들의 목소리가 들려와 나는 움찔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귀족의 색인 푸른빛의 천으로 만든 드레스와 조끼를 입은 여자애와 남자애가 보였다.

아이들은 둘 다 짙은 금발을 가지고 있었고, 손에는 각자 나뭇가지를 하나씩 쥐고 있었다. 남매일까. 나는 왕자를 가리듯 그의 앞에 서서 치맛자락을 풀어 내렸다.

“얘! 너 왕성에서 일하는 메이드니?”

한바탕 모험이라도 끝내고 온 것처럼 아이들의 머리에는 나뭇잎이 붙어 있었다. 그중 양 갈래 머리를 한 여자애가 물었다. 나는 고개를 숙여 답했다.

“그렇습니다, 아가씨. 제가 도와드릴 일이 있을까요?”

“응, 네가 우리를 좀 도와줘. 어쩌다 보니 길을 잃었지 뭐야.”

“어디로 향하고 계셨나요?”

“모르겠어. 처음엔 괴물의 성을 보려고 몰래 빠져나온 건데….”

여자애는 말을 하다 말고 입을 떠억 벌렸다. 내 뒤쪽에 있는 낡고 오래된 이름 없는 성을 이제야 발견한 것이다.

사람들이 찾지 않는 이곳은 기본적으로 관리가 전혀 되어 있지 않은 무성한 숲속에 숨겨져 있었다. 주변에는 키가 크고 숱이 빽빽한 나무들이 잔뜩 늘어서 있어, 어린애들의 눈높이로는 좀처럼 쉽게 찾아낼 수 없었을 것이다.

여자애가 눈만 끔뻑끔뻑 뜬 채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자 이번에는 남자애가 용기 있게 나섰다.

“이, 이봐! 설마 여기가 이름 없는 성이야?”

“그렇습니다, 도련님.”

“세상에! 레리, 우리 그만 돌아가야 하지 않을까?”

내가 답하기가 무섭게 남자애는 여자애의 팔을 잡아당기며 물었다. 겁을 잔뜩 집어먹은 모습이 조금 안쓰러워 보였다. 그러나 레리라고 불린 여자애는 남자애의 손을 쳐 내며 오히려 내게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왔다.

“우, 우리는 게무아 남작 영애들과 내기를 했어. 이름 없는 성에 우리의 이름을 새기고 돌아오면 더는 겁쟁이라 놀리지 않겠대.”

“하지만 이름 없는 성은 외부인의 출입이 금지되어 있는걸요. 여기까지 오셨으니 이만 돌아가셔도 두 분의 용맹함은 충분히 증명이 될 거예요.”

“안 돼! 증명할 거리를 가져오라고 했단 말이야.”

여자애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그 애는 내 뒤의 아셰라드렌을 보더니 잠시 후 나뭇가지를 툭 떨어뜨렸다.

“우, 우와…. 넌 누구야? 잘생겼다….”

“아….”

아이는 이름 없는 성이 선사하는 실체 없는 공포심조차 잊은 듯 아셰라드렌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나 아셰라드렌은 낯선 이와의 마주침 자체에 거부감을 느낀 것 같았다. 그가 작게 앓는 소리를 내며 내 등에 얼굴을 묻었다.

“누, 누구냐니까? 내가 묻잖아!”

“으… 시, 싫어. 다프네… 그만 돌아가자. 응?”

“진정하세요, 아셰 님. 제가 금방 해결해 드릴게요.”

나는 고개를 살짝 돌려 왕자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그가 끙끙대며 내 옷깃을 세게 쥐었다. 여자애는 고작 하인들 따위에게 무시당했다고 생각했는지 금세 씩씩거리기 시작했다.

“둘이 뭐라고 조잘대는 거야? 이름과 소속을 밝혀!”

“저는 이름 없는 성의 다프네입니다, 아가씨. 그리고 이분은….”

“너 말고 저 남자말이야!”

여자애는 내게 관심조차 주지 않았다. 그 애는 화를 내듯 얼굴을 붉히면서도 힐끔힐끔 아셰라드렌을 쳐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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