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어려운 부탁은 아니네요. 다시 자리로 돌아갈까요, 아셰라드렌 님?”
“그, 그럴까… 다프네?”
“근데 이렇게 부르는 건 저희 둘만 있을 때만 가능해요. 미리 아셔야 할 것 같아서.”
나는 찻주전자를 챙기며 말했다. 만에 하나 레티스가 소설의 전개를 거스르지 못했을 때, 그래서 결국 내가 왕자를 탈출시키게 됐을 때라면 몰라도 지금은 시기가 적절치 못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제아무리 사람 좋은 예니체 경이라 해도 한낱 평민인 내가 왕족인 아셰라드렌의 이름을 멋대로 부르는 모습을 봤다간 웃는 얼굴로 넘어가지는 못할 것이다. <공주는 꺾이지 않는다>의 세계관은 철저한 신분제 사회였다.
그러나 이쪽의 사정도 모르고, 왕자는 우리 사이에 새로운 특별한 비밀이 하나 더 생겼다고 여기기라도 한 듯 눈을 접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이지 넋을 놓고 바라볼 만한 미소였다.
머리를 자른 후로 그의 미모는 더욱 빛을 발하는 것처럼 보였다. 홀린 듯 그를 쳐다보던 나는 헛기침을 하며 걸음을 옮겼다.
“그러고 보니 슬슬 빨래를 할 때가 됐네요. 글공부는 차를 다 마실 때까지만 해야겠어요.”
왕자는 다시금 종이에 내 이름을 써 내려갔다. 저 커다란 어깨에 힘을 잔뜩 준 채 집중해서 쓰고 있는 것이 그림에 가까운 내 철자라니.
나는 중간중간 그를 확인하며 차를 음미했다. 평화로운 오후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말이다.
“이, 이제 안 보고도 쓸 수 있을 것 같아.”
“벌써요?”
차를 한 잔 비우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왕자는 밝은색 소매에 잉크가 묻은 것도 깨닫지 못한 듯 배시시 웃어 보였다. 그가 내 이름으로 빼곡 채운 종잇장을 자랑스럽게 들이밀었다.
“다, 당연하지. 난 바보지만, 그렇게까지 바보는 아니었어.”
“그러면 안 보고 한번 써 보세요.”
“아….”
왕자의 당당한 태도는 금세 사라졌다. 내가 종이를 가져가자 그는 움찔하며 눈을 도로록 굴렸다. 하지만 아예 빈말을 한 것은 아니었다. 아래에 있던 새로운 종이에, 그는 망설이지 않고 선을 그어 나갔다. 나는 마지막 알파벳을 그린 뒤 내 눈치를 보는 그에게 손뼉을 쳐 주었다.
“잘하셨어요. 약간 틀리긴 했지만요. 그렇게 쓰면 다프네가 아니라 다펜이에요.”
“그, 그래도 거의 똑같지 않아…?”
“그럼 왕자님은 아셰라드렌이 아니라 아셰라드르네인가요?”
“무, 무슨 말도 못 하게 해. 나, 나빴어.”
이내 그는 토라졌다. 그렇지만 이 정도만 해도 장족의 발전이니 여기까지만 하는 게 좋겠다. 내년이면 성년이 될 남자에게 아직까지 이름이나 가르쳐 주고 있다는 생각만 하면 한숨이 나왔지만, 그렇다 해서 많은 것을 바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왕자가 다음 대 국왕이 될 것도 아닌데 뭐.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바깥세상에서 살아가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만 갖출 수 있으면 충분했다.
“내일은 아셰 님의 이름을 외워 보도록 해요. 오늘은 충분히 고생하셨어요.”
“…아셰?”
“이름이 길어서 한번 줄여서 불러 봤어요. 혹시 싫으세요?”
“그, 그럴 리가.”
왕자가 고개를 붕붕 저었다. 그럴 줄 알았다. 저를 애칭으로 불러 주기는커녕, 본명으로도 불러 주는 이 하나 없었으니 분명 좋아할 것이라 생각했다.
왕자는 투명한 보랏빛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나를 쳐다보았다. 왠지 날이 갈수록 점점 더 내 곁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들 것 같은데.
문득 그런 예감을 느끼며, 나는 찻잔을 한쪽 구석에 밀어 넣고 일어섰다.
“아셰 님의 침실에 쓸 이불 빨래를 해야 해요. 따라오실 건가요?”
“응? 응.”
“성 밖에 나갈 건데도요?”
“아… 나, 나는 성 밖에 나가면 안 되는데.”
이번에도 그렇게 말할 줄 알고 물어봤다. 한순간에 사색이 된 그가 급히 나를 올려다봤다. 그 와중에도 나를 놓치지 않으려는 듯 어느샌가 이미 내 치맛자락을 쥐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입을 열었다.
“하지만 이미 나가신 적 있잖아요? 기억나지 않으세요?”
“어, 언제? 그런 적… 어, 없는데?”
그는 시치미를 뚝 떼고 되물었다. 그렇다면 사흘 전에 레티스가 찾아왔을 때를 어떻게 설명할 건데요. 그날 아침 왕자는 쉴 새 없이 저를 쓰다듬는 내 손길에 취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얼떨결에 나와 함께 성문 밖으로 나왔었다.
“그런 적 있는데요? 제 눈을 피하시는 걸 보니 똑똑하게 기억하고 계신 것 같은데요.”
“그치만 그때는… 다프네가 나를 머, 멋대로.”
“멀리 나가는 것도 아니고 바로 바깥이잖아요. 그리고 아셰 님이 나가신다고 해서 당신을 알아볼 사람은 없어요. 저랑 예니체 경만 빼고요.”
“예, 예니체 경이 뭐라고 하지는 않을까? 버, 법을 어겼다고.”
“그때는, 예니체 경의 입을 다물게 해야겠죠….”
“…….”
입가에 대고 바느질하는 시늉을 하자 왕자가 헉, 하고 신음을 삼켰다. 하지만 내가 아는 예니체 경이라면 별말 하지 않을 것이다. 왕자가 그에게 아주 약간의 친절을 베풀기만 한다면야.
“기사님께 먼저 알은체 한 번만 해 보세요. 좋다고 싱글벙글 입 다물고 있을걸요.”
“그, 그렇게 하면서까지… 바, 밖에 나가야 할까…? 들키면 정말로 큰일이 날 거야.”
“어떤 큰일이요?”
“어….”
“거봐요, 말 못 하죠. 그도 그럴 게 전에 나간 적이 있어도 아무 일도 없었으니까.”
단언하는 듯한 내 말투에 왕자는 결국 고집을 꺾었다. 그도 내심 바깥세상이 궁금했으리라. 그나저나 이렇게까지 노력을 기울여야 왕자를 데리고 움직일 수 있다니.
이럴 거면 그냥 안에 있으라고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이 또한 만약의 경우를 대비한 초석 중 하나였다. 그리고 왕자가 애초에 혼자 남아 있으려고 할 것 같지도 않았고.
“그런데 아셰 님은 원래도 밤마다 강아지가 되셨었나요?”
아셰라드렌의 이불이며 시트는 미리 그의 침실 밖에 준비해 두었다. 나는 그것들을 뭉쳐 들고 일어나며 물었다. 덕분에 시야가 약간 가려지긴 했다만 집안일에 있어서 완전히 문외한인 왕자가 도와줘야 할 정도는 아니었다.
나는 분명 그렇게 판단했는데. 기본 상식조차 없지만 그는 어디서 배웠는지 모를 본능적인 상냥함으로 당연하다는 듯 빨랫감을 가져갔다.
“모, 몰라. 그랬던 날도 있고, 아니었던 날도 있고.”
“제가 들어도 됐는데…. 감사해요.”
“그, 그보다 그런 건 왜 물어봐?”
“이상하게 밤에 씻고 나오기만 하면 강아지로 변해 계시니까요?”
민들레 홀씨 같은 꼬리를 붕붕 흔들며 나를 기다리고 있는 그를 볼 때면, 차마 오늘부터는 침실로 가서 혼자 주무시라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것도 하루 이틀이지, 사흘째 그러는 걸 보고 있자니 묘한 의구심이 피어오르더라.
혹시 어쩌면 왕자는 최근 들어 변신 능력을 컨트롤할 수 있게 된 것이 아닐까? 완벽하게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는 스스로 조절할 수 있게 된 것이 아닐까?
“다프네는… 나랑 자는 게 시, 싫은가 봐.”
“푸훕!”
우리는 복도를 걷고 있었고, 성문을 앞에 두고 있을 무렵 아셰라드렌은 폭탄 발언을 내뱉었다. 그리고 본의 아니게 우리의 대화를 엿듣게 된 예니체 경은 물을 마시다 사레가 들려 컥컥거렸다. 나는 무슨, 분수라도 보는 줄 알았다.
“죄, 죄송합니다. 그런데 왕자님께서 여기까지 어쩐 일이신지.”
햇볕이 쨍쨍해 물통을 구비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는 날씨였다. 예니체 경은 입가의 물기를 닦으며 물었다.
그러나 아셰라드렌은 아직 예니체 경을 마주할 마음의 준비를 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왕자는 기사를 못 본 체하며 나를 바라보았다.
“대, 대답해, 다프네. 그, 그런 거야?”
“아뇨, 그런 거 아니에요. 그냥 궁금해서 여쭤본 것뿐이에요.”
나는 그에 대해 자세히 알아야 할 필요가 있었다. 혹시라도 성을 나갔을 때 멋대로 변신해 버리면 곤란하니까. 작은 강아지로 변했을 때는 차라리 낫다. 문제는 거대 짐승 버전이었다. 길 한복판에서 그렇게 변해 버리기라도 했다간 아주아주 큰일이니까.
어쩌면 우리는 문명과 떨어진 생활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어. 레티스를 만난 이후로 틈만 나면 내 상상은 걷잡을 수 없이 흘러가고는 했다. 1년 뒤에 벌어질 미래가 와닿기 시작한 탓이다.
“저는 왕자님이랑 자는 거 좋아해요. 밤마다 제 품 안에서 꼬물거리실 때면 얼마나 가슴이 몽글몽글 따뜻해지는지.”
“으… 다프네는 나를 그냥 가, 강아지로만 아는 것 같아.”
“그럴 리가요. 저는 그냥 강아지한테는 글을 가르치지 않아요.”
예니체 경의 등장으로 인해 내 호칭은 자연스럽게 왕자로 돌아갔다. 아셰라드렌은 아쉬운 티를 대놓고 폴폴 풍기며 눈꼬리를 축 늘어뜨렸다.
그러다 문득 내가 예니체 경에 대해 했던 말이 떠올랐는지 어색하게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봤다.
“…예, 예니체 경.”
“네, 왕자님.”
예니체 경으로서는 처음으로 왕자에게 이름을 불린 것이었다. 이런 상황을 예상치 못한 듯, 기사는 긴장으로 인해 딱딱하게 얼굴을 굳혔다. 무서웠다.
“지금부터 다프네랑 빠, 빠, 빠, 빨래를 할 거야. 지, 지켜보고 이, 있어…!”
“…네! 최선을 다해 지켜 드리겠습니다!”
“아, 아니. 보, 보기만 하라고.”
“네!”
무섭기는 왕자가 매한가지였던지 침을 꿀꺽 삼킨 그가 평소보다 심하게 더듬거렸다. 예니체 경이 격하게 답하자 아셰라드렌은 아예 어깨를 덜덜 떨며 내 옆구리에 찰싹 달라붙었다.
“나, 자, 잘했어?”
“너무너무 잘했어요, 아셰 님.”
나는 근처에 있는 예니체 경에게 들리지 않도록 왕자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제야 아셰라드렌은 입술을 헤 벌려 웃으며 안도했다.
“보세요. 예니체 경도 뭐라고 하지 않죠? 앞으로 이 주위를 돌아다닌다 해도 아셰 님이 말씀하신 큰일은 없을 거예요.”
“그, 그럴까? 그, 그래도 조심하는 편이….”
이름 없는 성의 뒤편에는 내 방만 한 크기의 수돗가와 공터가 있었다. 곳곳에 묶어 둔 빨랫줄과 그 위에 널어 둔 옷자락들도 함께.
왕자가 정신없이 그곳을 구경하는 사이, 나는 나무 주위에 세워 둔 대야를 질질 끌고 왔다. 마침 불어온 바람이 왕자의 짧은 은빛 머리칼을 부드럽게 쓸고 지나갔다.
편안한 옷차림으로 빨랫감을 들고 있는 이 청순한 미소년을 누가 과연 한 나라의 왕족이라고 생각할까. 나는 왕자 몰래 웃으며 대야에 차가운 물을 받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