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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왕자 길들이기 (21)화 (21/123)

21화

“어, 어떡하죠? 분명 저를 찾는 소리일 거예요.”

“저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얼른 가 보셔야 할 것 같은데요?”

“이렇게 헤어지긴 너무 아쉬운데… 다음에 또 이름 없는 성에 찾아와도 돼요?”

안 될 건 없었지만 공주라는 신분으로는 왕성을 몰래 빠져나오기가 쉽지 않을 것 같은데. 차라리 내가 본성에 자주 들러야 할까?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레티스를 만날 수 있으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고민에 빠진 내가 쉽게 해결안을 내놓지 못하자 답답해진 레티스가 거칠게 보닛을 뒤집어썼다.

“시녀를 매수해서라도 보러 올게요. 알고 보니 저 엄청 부자더라고요? 보석 반지 하나 던져 주면 가능하겠죠?”

“왕족의 시녀들은 죄다 귀족이잖아요. 그게 가능할는지….”

“아이참! 언니는 그냥 그렇다고만 말해 줘요. 로맨스 소설을 보면 죄다 이 정도는 하잖아요?”

그 말을 끝으로 레티스는 서둘러 식당을 빠져나갔다. 정신없는 그녀와의 만남은 그것으로 끝이 났다. 나는 홀로 멍하니 의자에 앉아 자신감으로 가득 찼던 레티스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러나 곧 왕자의 행방을 쫓기 위해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그런데 레티스, 정말로 예뻤지….

혼자 반사판이라도 달고 있는 것처럼 빛이 나던 그녀는 과연 어떤 계획을 세우고 있을까. 막연하게 1년이 지나기 전에 왕자와 탈출이라도 해야겠다 생각하던 나보다는 분명 나은 대안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이쪽은 재산도 지위도 없는 메이드지만, 레티스는 한 나라의 공주니까.

“왕자님! 어디 계세요? 왕자님?”

레티스와의 만남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었지만, 우선은 그녀의 손길을 거부하고 튄 왕자가 먼저였다. 나는 계단을 오르며 구석구석 왕자가 숨을 만한 장소를 찾아다녔다. 그러나 노력이 무색하게도 그를 찾아낸 곳은 내 방이었다.

“왕자님?”

“…으, 아. 가, 갑자기 변해 버려서….”

그는 그리스 신화의 남신처럼 내 이불자락을 휘감고 있었다. 변명하듯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던 그가 내 눈치를 보며 물었다.

“아, 아까 그 여자는 누구야…? 어, 어디서 많이 본 것처럼 새, 생겼던데.”

“그야 그렇겠죠. 왕자님이랑 똑같이 생겼잖아요.”

나는 침대 가장자리에 엉덩이를 대고 앉았다. 강아지 버전의 왕자도 물론 사랑스럽지만, 역시 대화가 통하는 편이 훨씬 낫다고 생각하면서. 그러나 내 설명이 별로 와닿지 않는 듯 왕자는 짧아진 머리를 어색해하며 목덜미만 만지작거렸다.

“레티스 공주님은 왕자님의 친동생이세요. 안타깝게도 오늘은 서로를 알아보지 못하신 것 같지만요.”

하지만 과연 현재의 레티스를 왕자의 진짜 동생이라 할 수 있을까? 나는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복잡해지는 관계성을 굳이 더 떠올리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왕자는 잠시 침묵하다 물었다.

“그럼… 그 애도 나처럼 괴, 괴물인가?”

“…왕자님처럼 변신 능력을 가지고 있느냐고 물으신 거라면 아니에요.”

“그렇구나.”

실망한 그가 고개를 푹 숙였다. 나는 마른 입술을 축이며 그를 바라보다 손을 뻗었다. 왕자가 눈을 들어 나를 쳐다봤다. 나는 왕자의 손등을 간질이며 웃었다.

“세상에 왕자님 같은 존재는 하나뿐이에요. 그러니까 더욱 지켜 주고, 소중히 대해 줘야 하죠. 공주님이 왕자님처럼 변하실 수 없다 해서 아쉬워하지 마세요. 공주님까지 그렇게 귀엽고 사랑스러운 생명체로 변했다간 제가 공주님에게도 푹 빠져 버릴 텐데… 괜찮으시겠어요?”

“그, 그건 싫어. 다프네도 세상에 하, 하나밖에 없는데.”

“그렇죠? 저희는 세상에 단 하나씩밖에 없는 특별한 존재들이라고요.”

늘씬한 손등 위로 혈관이 툭 불거졌다. 왕자는 목이 메는 듯한 얼굴을 했다. 기다란 목에 선명한 목젖이 오르내리고, 그는 살짝 올라간 눈꼬리를 붉히며 천천히 입술을 말아 올렸다.

“다프네가 나를… 소, 소중히 대해 줄 거야?”

“그럼요. 왕자님이 저를 소중히 대해 주셨듯이.”

“내, 내가 그런 적이 있었나…. 아, 아니, 안 그러겠다는 뜻이 아니라.”

“알아요. 왕자님같이 따뜻하신 분이 그러지 않으실 리가 없는걸요.”

회귀 전에도 대화 한번 제대로 해 본 적이 없던 내게 정을 붙인 사람이었다. 안타깝고도 다정한 이 왕자를, 나는 절대로 내버려 둘 수가 없다.

나는 왕자의 손등이 서서히 뒤집히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는 망설이듯 손을 약간 떨다 이내 결심이라도 한 것처럼 내 손을 마주 잡았다. 왕자의 큼직한 손바닥에 비해 한없이 작아 보이는 내 손등.

처음 본 제 동생에 대해, 그는 더 이상 궁금한 점이 없는 것 같았다. 왕자는 입을 열지 않고 맞잡은 내 손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조용해진 공간 속에서는 이불자락이 바스락거리는 소리만이 들려왔다. 우리는 누구도 먼저 일어서는 법이 없이 가만히 그렇게 앉아 있었다.

⋆★⋆

레티스가 방문한 뒤로부터 사흘이 지났다. 처음부터 쉽지 않을 것이라 예상했지만, 역시나 그녀에게선 별다른 연락이 없었다. 기간을 길게 두고 봐야겠지. 우리가 계획하고 있는 것은 이 세계의 운명을 바꾸는 일이었다.

그동안 나는 왕자에게 본격적으로 글공부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물론 나보다는 예니체 경이 학식도 높고 배운 것도 많았으나, 왕자가 한사코 예니체 경에게 배우기를 거부하는 탓에 결국에는 내가 왕족의 스승 역을 맡게 되었다.

“왜 저한테만 모든 걸 허락하시는 걸까요?”

“각인 현상 같은 게 아니겠습니까?”

어차피 아무도 오지 않는 이름 없는 성이니, 예니체 경도 마음만 먹는다면 시간은 충분히 뺄 수 있었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왕자는 예니체 경을 본체만체했고, 결국 기사는 눈물을 머금고 확신했다.

왕자의 관심사는 오로지 처음으로 그에게 친절을 베풀어 준 나뿐인 것 같다고.

“어렵죠? 왕자님의 이름은 철자가 긴 편이라.”

왕자의 본명은 아셰라드렌. 아셰라드렌 니아 칸 레르베 라예트.

여느 날과 같이 오늘도 왕자와 딱 달라붙어 있던 나는 깃펜을 내려놓고 그를 쳐다보았다. 왕자는 멍하니 혼이 빠져나간 듯한 눈을 하고 종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19년간 아무런 지식도 없이 살아왔기로서니, 이렇게까지 공부에 흥미가 없을 줄이야. 나는 그가 최소한, 제 이름을 쓰는 방법 정도는 궁금해할 줄 알았다.

“그런데… 이, 이런 건 왜 배워야 하는 거야?”

“이런 거라뇨. 왕자님의 이름인데요.”

“아, 아무튼.”

“음… 언젠가 서명을 해야 할 날이 올 수도 있으니까요?”

“서명?”

후, 갈 길이 먼 게 아니라 아예 보이질 않는다. 내가 식탁에 엎어져 코를 박자 왕자는 안절부절못하며 소심하게 내 등을 콕콕 찔렀다.

“미, 미안해. 내가 바보라서.”

“…괜찮아요. 왕자님은 바보라도 잘생겼으니까요.”

“…이해가 안 돼서 그래. 어차피 내 이름 따위, 부, 불러 주는 사람 하나 없는데.”

“왕자님의 존함을 감히 함부로 부르는 이는 아무도 없을걸요. 국왕 폐하나, 공주님쯤 되면 모를까.”

“그, 그럴 거면 그냥 몰라도 되지 않아?”

왕자는 가족의 중요성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실은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먼 옛날의, 전생에서는 어렴풋이 나도 부모나 형제가 있었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벌써 20년도 더 된 일이었다. 이곳의 나는 고아인 탓에 성조차 없는 ‘그냥 다프네’였다.

툭 까놓고 말해서 왕자도 그랬다. 이렇게 폐쇄적인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데, 뒤에 붙은 긴 이름들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내가 그냥 메이드 다프네인 것처럼, 왕자도 그냥 왕자 아셰라드렌이었다.

“그것도 그렇네요. 저희 오늘은 이쯤하고 간식이나 먹을까요?”

“하, 하지만 다프네의 이름은 궁금한데.”

“정말요? 기뻐요. 가르쳐 드릴게요.”

이렇게라도 왕자가 글을 깨우칠 수 있다면야. 나는 적극적으로 깃펜을 들고 내 이름을 적어나갔다. 다만 아직 레르베 라예트 왕국의 알파벳조차 완벽하게 외우지 못한 그가 내 이름의 철자를 기억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자, 이거예요. 왕자님보단 간단하죠?”

“으응. 여, 옆에 써 봐도 돼?”

“갑자기 이렇게 열정을 보이시다니 놀랍네요.”

처음부터 이렇게 할 걸 그랬나. 나는 흐뭇하게 웃으며 왕자에게 깃펜을 건네주었다. 그가 서툰 솜씨로 다프네의 이름을 따라 그리는 동안, 나는 빈 찻잔이라도 채울까 싶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 어디 가?”

“네? 주방이요.”

“…같이 갈래.”

왕자가 대번에 깃펜을 놓기에 나는 살짝 당황하며 물었다. 그러고 보니 이틀 전에, 왕자와 나는 그가 사용할 침실 청소를 마쳤었다. 하지만 아직까지 그가 그 침실을 사용한 날은 없었다. 신기하게도 왕자가 밤만 되면 무해하기 그지없는 하얀 강아지로 변해 버린 탓이었다.

어젯밤까지만 해도 오히려 좋다고 생각했건만. 불안한 듯 내 소매를 잡아당기는 왕자를 돌아보며 나는 순간적으로 흠칫하고 말았다.

“왜 그러세요. 갔다 오는 데 1분도 안 걸릴 것 같은데.”

“그, 그런가. 미, 미안. 내가… 귀찮아?”

“아뇨, 그럴 리가요. 왕자님 번거로우실까 봐 그렇죠.”

“버, 번거로우시….”

“음. 오히려 왕자님이 귀찮으실까 봐 그랬다는 뜻이에요. 같이 갈까요?”

삽시간에 어두워지던 왕자의 낯빛이 다시 밝아졌다. 해맑게 고개를 끄덕인 그가 소매를 꼭 잡은 채 나를 따라왔다.

이렇게나 외로움을 많이 타면서, 회귀 전에는 대체 무슨 수로 혼자 꼭대기 층에서 버텨 온 것일까. 나는 미약하게나마 그를 부담스럽다고 생각한 내 자신을 떨쳐 냈다. 고작 이 정도도 받아들이지 못해서야 어떻게 왕자에게 목숨을 구원받았던 은혜를 갚는단 말인가.

나는 왕자를 액세서리처럼 뒤에 매단 채 새로 물을 받은 찻주전자를 끓였다. 그런 다음 찻잎을 준비하려는데, 왕자가 불쑥 얼굴을 내밀어 내 시야를 가렸다.

“하, 핫초코… 먹고 싶은데….”

“그래요? 제 이름을 다 외우시면 상으로 드릴게요.”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왕자는 영원히 글을 깨우치지 못할 테니 어쩔 수 없다. 그는 풀이 죽어 입술을 비죽거렸지만, 영 싫지만은 않은 듯 나를 재촉했다.

“내가 뭔가를 해내면, 하, 핫초코를 먹을 수 있는 거야?”

“맞아요. 그렇게 해야 진전이 생기죠.”

“…….”

왕자는 틀림없이 진전이라는 말도 몰랐다. 그는 잠시 입을 다문 채 뭔가를 곰곰이 생각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 그러면… 내가 만약 내 이름을 쓸 줄 알게 된다면?”

“그때는 핫초코를 두 잔 드릴게요. 왜요, 드디어 공부를 할 마음이 생기셨어요?”

“그, 그런 건 아닌데.”

“아니시구나.”

“다프네가 내 이름을 불러 준다면… 그, 그럴 마음이 생길지도 모르고.”

그는 새침하게 말했지만, 내게는 아직까지 정신 연령이 성숙하지 못한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뻔히 보였다.

하지만 이것도 왕자 나름의 친밀감의 표시나 다름없겠지. 나는 그가 나를 퍽 특별하게 여기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니 그는 특별한 내가 특별하게 제 이름을 불러 줬으면 하는 것이다. 우리는 서로에게 하나밖에 없는 존재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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