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소녀는 오렌지색 리본이 달린 샛노란 보닛을 쓰고 있었다. 마치 피크닉이라도 나온 것 같은 차림새였다. 그녀는 프릴로 가득한 샛노란 원피스를 입고서, 바람에 날리는 은빛 머리칼을 한 손으로 잡으며 예니체 경과 대화하고 있었다.
나는 한눈에 그녀가 이 소설의 여주인공인 레티스임을 알아보았다. 왕자와 똑 닮은 화려하면서도 섬세한 이목구비에, 청순한 복숭앗빛 눈동자. 예니체 경에게 집중하고 있던 그녀는 이제야 우리를 알아본 듯 보석 같은 눈동자를 굴렸다.
“어머나, 귀여운 강아지.”
목소리는 또 얼마나 맑고 높은지. 나는 감탄하며 레티스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입술은 뭘 바른 것 같지도 않은데도 촉촉하고 반들반들하게 윤이 났다. 레티스는 그 예쁜 입술을 벌려 화사하게 웃었다.
“당신이 이름 없는 성의 메이드인가요?”
“…안녕하세요, 공주님.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이름 없는 성 소속의 다프네, 나이는 스물세 살. 지난주까지 라 우스테 후작저에서 일하다 왕성으로 옮겼죠? 후작가가 후원하는 보육원에서 자랐고요.”
공주는 나에 대해 줄줄 꿰고 있다는 양 윙크했다. 불쾌하기보다는 호기심이 일었다. 때는 이른 아침, 원래라면 본성에서 온 메이드가 음식이 든 바구니를 두고 갔을 시간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뭔가 달랐다. 공주를 거의 본 적이 없는 예니체 경이 긴장하고 있는 모습부터가 그랬다. 내가 얼떨떨해하며 고개를 끄덕이자 레티스는 깜빡 잊고 있었다는 듯 바구니를 내밀었다.
“받아요. 안에 뭐가 많이 들었나 봐요? 꽤 묵직하더라고요.”
“왕자님을 비롯한 이름 없는 성의 식구들이 먹을 하루치 끼니가 모두 들어 있거든요.”
“그렇구나. 괜찮으면 잠시 들어갈 수 있을까요? 밖이 많이 덥네요.”
“어… 네, 물론이죠. 하지만 그전에, 국왕 폐하께서는 공주님이 이름 없는 성을 방문하신 걸 알고 계신가요?”
“그럴 리가요.”
공주는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러더니 하얗고 날씬한 손가락을 뻗어 입술에 가져다 댔다.
“알면 난리가 나겠죠. 그치만 상관없어요. 이곳에는 제 오빠가 살고 있잖아요? 동생이 오빠를 보러 오는데 뭐 문제 될 게 있나요.”
“외람된 말씀이지만, 공주님께서 본성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오셨다면 문제가 될 수도 있습니다.”
난감해진 내가 우물쭈물하고 있으려니 예니체 경이 끼어들었다. 그의 위압적인 체격과 겉모습에 살짝 당황한 공주가 도와달라는 듯 나를 쳐다보았다.
“잠깐이면 돼요. 다프네와 할 말이 있어서 그래요. 안 될까요? 응?”
“말씀을… 편하게 해 주세요. 공주님이시잖아요.”
“미안해요, 그건 아무래도 어려워요. 다프네가 나보다 한참은 언니인걸요.”
레티스는 아예 예니체 경을 피해 내 곁으로 달려왔다. 가냘픈 손으로 내 팔을 잡고 어린아이가 응석을 부리는 것처럼 발을 동동 구른다. 나는 어쩔 줄 몰라 하며 예니체 경과 시선을 교환했다. 그러자 레티스를 묘하게 바라보던 그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짧게 끄덕였다.
“아주 잠깐입니다. 누군가 공주님을 찾으러 왔다 들킨다면 그건 저희 책임이 될 테니까요.”
“걱정 말아요. 그런 일은 절대 없어요.”
공주가 낯빛을 환하게 밝혔다. 결국 나는 그녀를 이름 없는 성 내부로 들일 수밖에 없었다. 품에 안긴 왕자가 당황한 듯 나를 올려다보았지만, 공주의 앞에서는 그에게 따로 설명을 할 수도 없었다.
레티스는 보닛을 벗으며 여기저기를 둘러보았다. 왕성과는 전혀 다른 삭막한 분위기에, 창문마다 창살이 나 있어 꼭 감옥 같은 느낌이 드는 내부가 낯설었던 그녀가 침을 꼴깍 삼켰다.
“뭔가 무섭네요. 다프네는 이런 곳에서 사는 거예요?”
“살다 보면 아무렇지도 않게 된답니다.”
“뭐야, 아직 일주일도 안 지났잖아요. 되게 오래 살았던 것처럼 얘기한다?”
이름 없는 성에는 응접실이라고 할 만한 장소가 없었으므로, 나는 피치 못하게 그녀를 식당으로 안내했다. 레티스는 한쪽 팔에는 강아지를, 다른 팔에는 바구니를 든 내가 힘겨워 보였는지 선뜻 입을 열었다.
“그 강아지는 여기서 키우는 거예요? 나도 한번 안아 볼래요.”
“죄송해요, 낯을 많이 가려서요.”
“그래요? 아쉽다. 그럼 조금만 만져 볼래요.”
예니체 경에게 신경질적으로 굴던 모습을 떠올리며 거절했지만 레티스는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하기야 나 같아도 그럴 것 같기는 했다. 하얀 솜뭉치의 치명적인 매력은 나조차도 거부할 수 없었으니까.
“크르릉!”
그러나 왕자는 처음 보는 제 여동생에게마저 마음을 열어 주지 않았다. 레티스가 손을 뻗기가 무섭게 송곳니를 드러낸 그가 펄쩍 뛰어올랐다.
“꺄악!”
레티스는 비명을 질렀고, 왕자는 그대로 바닥에 떨어져 한 바퀴를 구르더니 어디론가 전력 질주해 사라져 버렸다. 높은 위치에서 떨어졌는데 어디 다치지는 않았을까. 왕자가 걱정이 된 나는 그를 쫓아가고 싶었으나 우선은 눈앞의 레티스를 먼저 챙겨야만 했다.
“괜찮으세요, 공주님? 물리지는 않으셨나요?”
“…물리지 않았어요. 그런데 보기보다 사납네요. 다프네한테 안겨 있을 땐 얌전해 보였는데.”
“예니체 경도 싫어하더라고요. 어쩔 수 없죠.”
왕자의 정체를 알아보지 못한 공주가 잠시 침묵했다. 대화가 뚝 끊긴 것을 눈치챈 나는 그녀를 쳐다보았다. 식탁 앞에 앉은 공주는 망설이듯 내 시선을 피하며 입을 열었다 닫았다 하길 반복했다.
그러다 내가 차라도 한 잔 대접해야 할까 싶어 말을 걸려는 찰나, 무언가를 단단히 결심한 듯 비장하게 고개를 치켜들었다.
“한마디만 할게요.”
“네? 네.”
“떡볶이.”
“…….”
아무래도 공주님인데 너무 아무것도 없이 앉아 있었나. 그런 생각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그때 나는 깨달았다. 아, 쓸데없는 고민 했구나.
공주는 아주 단도직입적인 사람이었다. 아니, 공주가 아니라 공주 안에 깃든 ‘빙의자’는.
“이 세계에서 떡볶이를 아는 사람을 만날 줄은 몰랐어요. 실비아에게 듣자마자 알게 됐죠. 다프네는 꼭 실비아나 다른 요리사들은 모르는 요리를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말했다면서요?”
흥분한 레티스가 말을 쏟아 냈다. 혈색이 돌기 시작한 그녀의 뺨이 핑크빛으로 물들었다. 나를 만났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반가워서, 벅차오른 그녀의 목소리는 주체할 수 없이 떨려 오고 있었다.
레티스는 벌떡 일어나 상체를 숙였다. 매끄러운 손이 내 손을 잡아당겼다.
“저는 로맨스 소설을 정말 많이 읽었어요. 정말, 정말 많이요. 그래서 혹시 이런 일이 있지는 않을까 기대하기도 했어요. 하지만 실제로 겪어 보니 꿈만 같네요.”
“아….”
“반가워요, 언니. 제 진짜 이름은 ‘문세나’예요.”
“이름이 예쁘네요. 그런데 어떡하죠…. 저는 제 예전 이름을 기억하고 있지 않아요.”
나는 착잡하게 답했다. <공주는 꺾이지 않는다>에 환생해 산 지 어언 23년, 전생의 정체성보다는 다프네로서의 정체성이 또렷한 탓이다. 레티스는 흠칫 놀라며 내 손을 놓았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언니는 빙의한 지 얼마나 됐는데요?”
“아주 오래됐어요. 이걸 빙의라고 할 수 있다면요.”
“저는 얼마 되지 않았어요. ‘레티스’로서의 기억이 점점 섞여 들고 있긴 하지만요. 혹시 제가 얼마 전에 낙마 사고를 당했다는 소식 들었어요?”
“들었어요. 왕성이 난리가 났었다고 하던데요.”
그녀는 길게 숨을 내쉬며 자리에 앉았다. 겉보기에 레티스의 몸은 아무런 이상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로맨스 소설들이 죄다 그렇듯이, 아마 ‘진짜’ 레티스는 그때 죽음을 맞이했을 것이다. 그리고 텅 빈 몸에 ‘문세나’의 영혼이 들어와 안착했으리라.
이럴 수가, 레티스야말로 진정한 로맨스 소설의 여주인공 같지 않은가. 그녀는 비밀을 이야기하듯 목소리를 낮추어 소곤거렸다.
“그럼 언니는, 우리가 들어온 소설이 무슨 내용인지도 알고 있어요?”
“물론이죠. 1년 뒤에 나라가 망하는 소설이잖아요. 그리고 공주님은 세스나 제국으로 넘어갈 예정이고요.”
“신기하지 않아요? 지금은 이렇게나 평화로운데.”
레티스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시원시원한 말투나 활기찬 표정은 소설로만 읽었던 여주인공과는 확연한 괴리감이 있었다. 그녀는 왕자를 꼭 닮은 기다란 눈매를 찡그렸다.
“언니한테만 말하는 거지만 저, 소설이 그대로 흘러가게 내버려 둘 생각 없어요. 세스나의 황제는 책으로 읽었을 때나 근사했지, 실제로는 그냥 대량 학살범이잖아요. 우리 왕국도 예고도 없이 침략해서 들어오고. 완전 또라이야.”
“공주님, 저 질문 하나만 해도 될까요?”
“뭔데요?”
레티스가 나를 만나 반가워하는 것처럼, 나 역시도 그녀의 존재를 알게 되어 기쁨이 넘쳐흘렀다. 머나먼 타지에서 같은 나라 사람을 만나는 게 이런 기분일까? 그리운 감정에 젖어 든 나는 레티스가 눈앞에서 사라질세라 열심히 그녀를 훔쳐보았다. 그녀의 얼굴은 왕자의 얼굴처럼 완벽한 내 취향이었다.
“공주님은 레티스…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하셨잖아요. 혹시 정확한 기간을 알 수 있을까요?”
“아, 어렵지 않죠. 낙마 사고를 당한 지 하루 만에 눈을 떴다고 했으니까, 5일쯤 됐을 거예요.”
그 말을 들은 순간, 아직 와닿지는 않았으나 뭔가 아귀가 맞아떨어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회귀한 내가 다시금 이름 없는 성의 메이드가 된 것 또한 오늘로 마침 5일째였기 때문이다.
어쩌면 세계는 진정한 여주인공의 등장을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문세나’의 영혼이 레티스의 몸에 깃든 순간, 이 세계는 태엽을 감아 다시 시작하게 된 것일지도.
만약 그렇다면 나는 당당하게 자신의 포부를 밝힌 레티스에게 최선을 다해 협력할 필요가 있었다. 여주인공인 그녀가 소설의 전개를 바꿀 수만 있다면, 왕자가 죽는 일은 없어질 테니까.
“그렇구나. 아직 여기가 많이 낯설겠어요. 혹시 제가 도와드릴 일이 있다면 언제든 말씀해 주세요.”
“정말요? 새벽에 시녀들 몰래 빠져나온 보람이 있네요!”
“…그래도 괜찮은 거예요? 나중에 큰일 나는 거 아니에요?”
“몰라요. 내가 공주인데 뭐 어떡할 거야.”
레티스는 킥킥거리며 어깨를 으쓱였다. 하지만 그때, 왕성에서 비상사태일 때만 울려 퍼지는 뿔 나팔 소리가 들려와 우리는 서로를 마주 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우리는 한마음 한뜻으로 중얼거렸다. 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