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이상하다, 왜 돌아오시지 않지.”
나는 강아지를 식탁 위에 내려놓은 채 중얼거렸다. 새하얀 털 뭉치는 내가 오른쪽으로 고개를 기울이면 오른쪽으로, 왼쪽으로 고개를 기울이면 왼쪽으로 똑같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말귀는 분명 알아들을 텐데, 왜 저렇게 깜찍한 짓을 할까? 나는 끄아악 소리를 지르며 왕자를 꽉 안아 주고 싶은 충동에 시달렸다. 하지만 그랬다간 그가 저녁 식사 전에도 사람으로 변하지 않을 것 같아서 그만두기로 했다.
“왕자님은 어떻게 변신하시는지 모른다고 하셨죠.”
“왕!”
“그치만 저는 대충 알 것 같아요.”
“왕?”
나는 식탁 위로 턱을 괴었다. 그러고는 까만 콧잔등을 톡 건드렸다. 왕자는 눈을 찡긋하며 뒤로 물러났다, 내가 웃고 있는 모습을 보더니 토도독 하는 발소리를 내며 내 앞으로 돌진했다. 그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눈을 하고 나를 마주 보았다.
강아지일 때의 왕자의 눈동자는 새카맣고 동그랗다. 그러나 불빛 아래서 자세히 보면 보랏빛이 섞여 있음을 알 수 있다. 작디작은 생명체가 주는 신비로운 느낌에 어느샌가 나는 푹 빠져 버렸다.
내가 멍하니 왕자를 쳐다보자, 그는 콧김을 뿜으며 식탁에 엎드렸다.
“확실한 건 아니지만요. 왕자님은 감정이 격해지실 때 몸이 변하시는 것 같아요.”
“…….”
“방금도 제가 왕자님을 껴안은 탓에 그렇게 귀여워지신 것 같고. 그런데 희한하네요. 건국왕 기르시는 날 때부터 늑대 새끼로 변할 수 있었대요. 왕자님 같은 아기 강아지가 아니라.”
“왕왕! 왕!”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왕자는 항의하듯 짖어 댔다. 나는 새하얀 털로 덮인 발을 슬쩍 뒤집어 보았다. 젤리같이 폭신폭신하고 말랑말랑한 발바닥이 꼬물거렸다.
“아니다, 건국왕께서도 어릴 적에는 이런 모습이셨을까요?”
하지만 나는 언젠가 라 우스테 후작저에서 일할 때 건국왕 기르시에 관한 책을 읽은 적이 있었다. 회귀를 겪은 탓에 이제는 가물가물한 기억이 되긴 했지만. 어쨌든, 그 책에는 삽화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책에 그려진 기르시의 어린 시절 모습은 덩치만 작았지 분명 사나운 늑대 새끼였다.
“하지만 왕자님도 엄청 커다랗게 변하셨을 때는…. 에이, 모르겠다. 저녁 준비나 할까요?”
혹시 반신반인의 피가 대를 흘러 내려오다 점점 더 옅어진 탓일까? 나는 호기심을 뒤로하고 왕자를 바닥에 내려 주었다. 그는 아장아장 걸어 나보다 더 빨리 주방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혹시 배가 고프세요? 저녁은 양갈비인데.”
그늘에 재워 둔 저녁 식사에서는 고소한 냄새가 났다. 그 냄새를 왕자도 맡았는지, 아니면 직접 보고 싶기라도 한 건지 그는 앞발을 들어 내 치맛자락을 죽죽 잡아당겼다.
그런데 강아지한테 사람이 먹는 음식을 줘도 되나. 이런 음식은 또 양념이 잔뜩 들어갔을 텐데.
“아, 알겠어요. 알겠어요.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왕!”
왕자는 내가 고민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사람일 적에는 그렇게도 부끄러움이 많더니, 새끼 강아지가 되니 자신감이 솟구치기라도 한 모양이다. 나는 끊임없는 재촉을 이기지 못하고 서둘러 양갈비 하나를 팬에 구웠다.
노릇노릇한 냄새가 주방에 퍼져 나가자, 왕자는 아예 낑낑거리며 우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몰랐는데 그는 응석이 심한 강아지였다.
“뜨거우니까 식혀서 드셔야 해요. 뼈 조심하시고요.”
“끼이잉, 끼잉. 끼잉….”
양갈비 하나를 접시에 옮겨 담은 뒤 바닥에 쪼그려 앉았다. 신이 난 왕자가 내 주위를 한 바퀴 돌더니 눈 깜짝할 새 갈빗대를 물고 도망쳤다. 그래 봤자 다리가 짧아서 멀리 가지는 못 했지만, 전에 본 적 없는 모습에 나는 살짝 당황하고 말았다.
구석진 곳으로 쏙 들어간 그가 어느새 진짜 개가 되어 버린 것처럼 아르릉 대며 고기를 뜯기 시작했다. 저러는 걸 보면 혹시 오늘 안에 다시 사람으로 돌아올 생각은 없는 건가? 나는 헛웃음을 지으며 왕자를 바라보다 다시금 양갈비를 구웠다.
그러다 팬 하나를 더 꺼내 이미 익은 감자를 한 번 더 데우고, 바구니에 든 버터와 향신료를 조금 뿌렸다.
“다녀왔습니다.”
“오셨어요, 예니체 경? 저녁도 다 준비되었답니다.”
마지막으로 샐러드를 소스에 버무려 뒤적일 즈음 예니체 경이 주방에 나타났다. 내 말을 들은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내 그는 뼈만 남은 갈빗대를 앙앙거리며 뜯고 있는 왕자를 발견하더니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왕자님은 왜 저러고 계시는 겁니까?”
“난들 알겠어요. 궁금해도 여쭤볼 수가 없으니.”
왕자는 예니체 경을 보자마자 갈비뼈를 아무 데나 던져두고 내게 달려왔다. 마치 강아지로서의 본능에 푹 빠져 있다 이제야 정신을 차린 것처럼.
하지만 그는 우리가 저녁 식사를 앞에 두고 한동안 기다려도 변신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나는 발치에 앉아 있던 왕자를 들어 내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어떡하죠? 이러다 영영 사람으로 되돌아오지 않는 건….”
“만약 그렇다면 저희가 책임지고 왕자님을 키워 주도록 하지요.”
“그럴까요? 글자를 가르쳐 드리려고 그림책까지 빌려 왔는데.”
“강아지여도 그림책은 읽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결국 우리는 왕자를 빼놓고 저녁을 먹기로 했다. 체구가 작은 그는 좀 전에 먹은 양갈비 하나로 이미 충분했는지 조그맣게 하품을 하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나는 왕자의 머리를 살살 만져 준 뒤 수저를 들었다.
나와 예니체 경이 식사를 하는 동안, 왕자는 아예 무릎 위에 엎드리더니 그대로 잠에 빠져들었다.
“…님, 왕자님. 일어나 보세요.”
혹시 오늘 보물찾기를 하느라 고단했을까. 식사가 끝난 뒤 나는 그를 옆 의자에 옮겨 두고 식탁을 치웠다. 설거지를 마치고 돌아왔을 때도 왕자는 여전히 단잠을 즐기고 있었다. 예니체 경이 몰래몰래 제 털을 쓰다듬는 것마저 깨닫지 못한 듯.
나는 예니체 경을 옆으로 슬쩍 밀어내고 왕자를 깨우려 했다. 그러나 뒤늦게 눈을 한 번 떠 나를 힐긋대는 것이 전부였다.
“어쩔 수 없네요. 오늘도 제가 왕자님과 함께 자야겠어요.”
“오늘도, 라는 건 어제도 그랬다는 말입니까?”
“네. 달리 주무실 곳이 없었잖아요. 꼭대기 층은 더 이상 쓰지 않으시겠다기에.”
“…다프네 양, 왕자님은 이번 겨울이 지나면 성년이 되십니다.”
“음…. 그건 그렇긴 하죠. 아니면 예니체 경이 왕자님을 데려가실래요?”
그 부분에 대해서는 나도 신경이 쓰였었다. 툭 하면 새끼 강아지로 변한다고는 하나, 왕자는 원래 몸은 성인 남성에 가까웠다. 말투나 지능이 어린아이에 가까웠던 탓에 별로 와닿지는 않았지만.
예니체 경은 순간적으로 환한 낯빛이 되어 물었다.
“그렇게 할까요? 왕자님이 싫어하진 않으실는지.”
“싫어하실 것 같긴 하지만 지금은 깊이 잠드셨으니까요.”
나는 예니체 경에게 왕자를 건네주려 했다. 그때였다. 왕자가 감은 눈을 번쩍 뜨더니 그 작고 아담한 덩치로는 절대로 낼 수 없을 것 같은 소리로 짖기 시작했다.
“으르릉…. 컹컹! 컹!”
“까, 깜짝이야! 왜 그러세요, 왕자님?”
왕자가 얼마나 사납게 짖던지, 하마터면 나는 그가 어제 봤던 집채만 한 짐승으로 변하는 줄 알았다. 실제로 그를 잡은 내 손 주위에 뿌연 연기가 슬금슬금 피어오르기도 했다. 식당에서 거대 늑대로 변했다간 살림살이가 다 망가질 텐데.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나는 왕자를 말려야겠다는 일념 하나만으로 그의 눈가를 가리고 팔로 목덜미를 감싸 안았다. 그러자 갑자기 목이 졸린 강아지가 캑캑거리며 발버둥을 쳤다. 어느새 그의 주변을 에워싸던 연기가 사라져 있었다.
“예니체 경…. 왕자님한테 뭐 잘못한 거라도 있으세요?”
“아니요…. 차라리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슬프게 중얼거리는 예니체 경을 두고 식당을 나갔다. 왕자와 예니체 경을 함께 두어서는 안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 판단은 정확했다. 조용한 복도로 나오자마자 왕자는 분홍색 혀를 빼꼼 내밀더니 내 뺨을 핥기 시작했다.
“왕자님, 설마 저랑 주무시려고 큰 그림을 그리신 건 아니죠?”
“왕!”
맞다는 건지, 아니라는 건지.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왕자를 데리고 내 방으로 향했다. 새끼 강아지를 품에 안은 덕인지 온몸에 따뜻한 기운이 감돌았다.
그러고 보니 나도 좀 피곤한 것 같아. 그날 저녁, 나는 둥근 달이 채 뜨기도 전에 왕자와 함께 수마에 빠져들었다.
⋆★⋆
그리고 나는 꿈도 꾸지 않고 깊은 잠을 자다, 왠지 모르게 숨이 막히는 듯한 기분을 느끼며 눈을 떴다. 그건 그렇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왕자가 지겹도록 꿈에 나타났건만, 그를 현실에서 마주하게 된 뒤로는 더는 꿈에서 등장하지 않는다.
“…….”
눈을 조금만 내리면 보이는 건 하얀 털 뭉치. 따끈따끈하고 부드럽고 간지럽다. 그리고 털 뭉치는 내 목에 반원을 그리며 누워 있었다. 비록 내 침대가 넓은 편은 아니라지만, 이 작디작은 몸 하나 정도 누일 공간은 충분하건만.
“와, 왕자님. 왜 하필이면 목에…?”
나는 캑캑대며 왕자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그는 당당하게도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고개를 쳐들고 나를 바라보았다.
“알았다, 어제의 복수를 하시는 거죠? 너무해요.”
너무하니까 뽀뽀 이만 번 해 주고 싶었지만 참았다. 나는 목에서 내려오지 않으려는 왕자를 억지로 밀어낸 다음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침대에 엎드려 딴청을 피웠다.
“사람으로 돌아오시기만 해 봐요. 저도 왕자님의 목에 앉아 버릴 거예요.”
“…켕!”
“농담이에요.”
그래도 아침부터 이렇게 활기찰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한다. 식구가 하나 늘어난 것만으로도 이렇게나 일상이 달라질 수 있다니.
나는 왕자를 향해 방긋 웃으며 엉킨 머리를 빗어 내렸다. 그나저나 왕자는 밤새 한 번도 사람으로 돌아오지 않은 걸까. 설마 진짜로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겠지.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 잠옷을 벗자, 왕자는 파드득 놀라며 이불 속으로 쏙 들어가 몸을 숨겼다. 저러는 걸 보면 사람으로서의 의식은 확실히 깨어 있는데.
“밖에 나갈 시간이에요. 오늘은 본성에서 어떤 음식을 보냈을까요?”
메이드복으로 갈아입은 뒤, 나는 왕자를 품에 안아 들고 물었다. 물론 그는 멍멍 짖어 대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기에 이건 그저 내 혼잣말에 불과했다.
복도를 지나는 동안 나는 쉴 새 없이 왕자를 만져 댔다. 그가 당혹스러운 눈을 하고 나를 올려다보았지만 나는 개의치 않았다. 지금 같은 때가 아니면 언제 또 그를 만족할 때까지 쓰다듬어 보겠는가?
“아유, 귀여워. 아유, 사랑스러워.”
내 손길을 끊임없이 받은 왕자가 점점 납작해져 갔다. 털이 점점 눌리느라 그는 내가 성문까지 도착한 것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뜨거운 햇볕이 잔뜩 내리쬘 즈음이 돼서야 왕자는 고개를 번쩍 들고 어리둥절하게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다 나무 바구니를 든 은발 머리 소녀를 찾아내 바싹 얼어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