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폐왕자 길들이기 (16)화 (16/123)

16화

“손에 그건 뭔가요?”

“아. 왕자님이 좋아하실 것 같아서.”

예니체 경은 강아지풀을 살랑살랑 흔들며 말했다. 나는 당황해서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왕자님은 강아지풀보다 스타킹 공을 더 좋아하시는데!

“점심 먹을 시간이 다 됐는데 다프네 양이 오질 않아서요. 저라도 왕자님을 모셔다 함께 식사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예니체 경은 변명하듯 주절주절 말을 쏟아 놓았다. 가만히 듣고 있자니 그가 말을 이었다.

“그런데 왕자님이 어디 계시는지 알 수 없지 뭡니까. 여기저기를 뒤져 보다 여기서 왕자님을 만났습니다만, 저를 보자마자 소리를 지르시더니 강아지로 변신하시더군요.”

“저번처럼 커다랗게 변하지는 않으셨나 보네요.”

“네, 다행히도. 그런데 침대 밑에 들어가서 나오질 않으십니다.”

“그래서 밖에 나가 강아지풀을 꺾어 오셨나요?”

“네.”

그는 당당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별 소득은 없었던 모양이다.

“다프네 양이 화를 낼 거라 말씀드려도 묵묵부답이셨습니다. 저기, 왕자님의 허물입니다.”

그제야 내 눈에 한쪽 구석에 버려진 왕자의 옷가지들이 들어왔다. 그리고 그곳에서부터 이어진 손톱만 한 발자국들도. 그 발자국들은 쭉 이어져 예니체 경이 있는 침대 부근에서 끊겨 있었다.

이 남자들이 대체 얼마나 많은 빨랫감들을 내게 선사하려는 건지 모르겠군. 나는 한숨을 쉬며 무릎을 굽혔다. 허리를 숙여 침대 아래를 확인하자 과연 축 처진 하얀 꼬리와 동그랗게 말린 작은 몸이 보였다.

“왕자님.”

“…켕!”

내가 왕자를 불렀을 때, 그는 나를 돌아보지 않았다. 하지만 바닥에 달라붙어 있다시피 했던 꼬리가 바짝 위로 솟아올랐다. 왕자는 헬리콥터같이 옆으로 마구 흔들리는 꼬리까지는 숨기지 못했다.

그 모습에 갑갑했던 마음이 스르르 풀렸다. 나는 절로 올라가는 입꼬리를 내리려 애쓰며 다시 한번 그를 불러 보았다.

“왕자님, 거기서 뭐 하세요? 바퀴벌레들이랑 친구 하시려고요?”

“……!”

왕자가 충격에 빠진 얼굴로 나를 돌아보았다. 작고 새카만 콧잔등 아래 자리 잡은 주둥이가 활짝 벌어져 있었다. 그는 낑낑대는 소리를 내며 앞발을 사용해 제 얼굴을 가리려 들었다.

귀여웠지만, 그보다 먼저 내 눈에 들어온 것은 회색빛으로 물든 앞발이었다. 나는 좀 더 낮게 몸을 낮춰 침대 아래로 손을 집어넣었다.

“이리 오세요. 예니체 경이 무서워서 숨으신 거죠?”

“…저는 무섭지 않습니다.”

“그치만 무섭게 생겼잖아요. 제가 저리 가라고 할게요. 그러니까 이제 그만 나와 주세요.”

“저리 가라뇨.”

회귀 전에 알았던 예니체 경은 분명 저런 성격이 아니었건만. 왕자와 본격적으로 알고 지내기 시작한 후부터 예니체 경은 하루에 한 번씩은 시무룩해지는 것 같았다.

나는 바닥을 짚고 있던 손으로 예니체 경을 슬쩍슬쩍 밀어냈다. 멀뚱멀뚱 나를 보던 그가 뒤늦게 뒤로 밀려나는 시늉을 했다.

“보세요, 왕자님. 제가 예니체 경을 물리쳤어요.”

그러자 왕자가 하얀 털 속에 감춰진 동그란 눈을 말똥말똥하게 뜨고 나를 쳐다봤다. 뭐라 표현할 수 없는 나를 향한 신뢰감이 느껴졌다. 이 왕자, 확실히 나를 의지하고 있구나.

그렇게 믿을 수 있었던 것은 왕자가 슬금슬금 내 손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덩치가 워낙 작은 탓에 아장아장 걷는 것처럼 보이는 그가 포슬포슬한 털을 내 손바닥에 비볐다.

나는 조심스럽게 왕자의 엉덩이를 감싸 내 쪽으로 밀었다.

“왕!”

“네, 왕자님. 왕자님이 다음 대 왕이 되실 분이죠.”

“정확히는 그렇지 않습니다. 국왕 폐하께서는 공주님을 다음 대 후계자로….”

“예니체 경, 조용히 하세요.”

“네.”

침대 밖으로 왕자를 빼낸 후에는 식은 죽 먹기였다. 나는 두 손을 합친 것보다 겨우 큰 그를 품에 안아 들고 일어났다. 등을 쓰다듬어 주자 왕자가 떨리는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는 여전히 겁을 먹은 상태였다. 예니체 경을 경계하듯 흘끗거린 그가 내 팔에 얼굴을 묻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어머, 세상에. 너무 귀엽다…. 이게 아니라, 두 분 다 어떡하실 거예요. 이 꼴로 어떻게 점심을 먹겠어요? 모처럼 스콘도 받아 왔는데. 라즈베리가 콕콕 박혀 있는 거라고요.”

“그 말을 들으니 배가 고파지는군요.”

“예니체 경은 항상 배가 고프시잖아요.”

기사는 그러고 보니 그랬던 것 같다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나는 그런 그를 두고 복도로 나왔다. 장소가 바뀐 것을 알아챘는지 왕자가 얼굴을 들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안심하세요. 제가 곁에 있잖아요.”

아까 본성에 가기 전에 금은보화 어쩌고 하더니, 왕자는 정말로 보물찾기라도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런 게 아니라면 복도 끝에 있는 방에서 발견될 리가 없다.

아무래도 하루빨리 글을 읽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또 이렇게 더럽혀져 있으면 곤란하니까.

“왕! 왕! 크르릉!”

왕자와 함께 복도를 걷던 나는 그가 갑자기 열심히 짖어 대는 것을 보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어느 정도의 거리를 벌려 우리를 따라오고 있는 예니체 경이 걸음을 멈추고 급히 딴청을 부렸다.

“왜 그러세요? 그냥 예니체 경일 뿐이잖아요. 예니체 경은 해를 끼치지 않아요.”

“…그러게 말입니다. 어쩌다 이렇게 미운털이 박혔을까요?”

“이렇게 귀엽고 깜찍한 왕자님을 두고 괴물이라고 해서 그런 게 아닐까요?”

그거 말고는 모르겠는데. 내가 어깨를 으쓱이며 묻자 왕자가 털을 바짝 세우고 짖어 댔다. 새삼 개 같은 모습이었다. 개였지만.

“그 말은 취소하겠습니다. 어떻게 하면 용서받을 수 있을지….”

“왕자님이 다시 사람으로 변하면 여쭤보도록 해요. 그건 그렇고 이를 어쩐다? 두 분 다 식사 전에 좀 씻으셔야 할 것 같은데요.”

“제가 왕자님을 데리고 씻을까요? 그러면서 친해지는 것도.”

“컹컹!”

귀엽게 왕왕대는 것도 아니고 묵직하게 컹컹 소리를 내는 걸 보니 그건 안 될 말씀이었다. 강아지로 변한 왕자와는 대화가 불가능했지만, 이제는 대충 좋고 싫고 정도는 알아챌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조용히 고개를 젓자 예니체 경은 더할 나위 없이 시무룩해져서는 마침 옆에 있던 제 침실의 문고리를 돌렸다.

“그럼 저 혼자라도 씻고 오겠습니다. 식당에서 뵙죠.”

왕자가 시도 때도 없이 강아지로 변했다, 사람으로 변했다 해서 그런가. 이제는 예니체 경한테도 꼬리나 귀가 달려 있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그것도 땅으로 꺼질 듯 축 처진 모습으로.

“왕자님은 어떻게 하시겠어요? 제가 씻겨 드릴까요?”

“왕왕!”

말이 통하질 않으니 좋다는 건지 싫다는 건지 모르겠다. 하지만 아마 싫다는 뜻이겠지. 그렇게 판단한 순간, 내 배 속에서 꼬르륵하는 소리가 났다. 왕성까지 다녀오느라 에너지를 다 쓴 듯했다. 나는 왕자를 데리고 욕실로 들어갔다.

“예니체 경의 방에는 욕실이 딸려 있지만, 제 방은 그렇지 않아요. 여긴 제가 매일매일 몸을 씻는 곳이에요.”

“…….”

“우선 욕조에 물을 받아 드릴 테니 그동안 사람으로 변하시면 혼자 씻으세요. 그게 아니면 제가 도와드리고요.”

강아지가 혼자 비누칠을 할 수는 없으니까. 사실은 물에 빠진 생쥐 꼴을 한 강아지 상태의 왕자를 보고 싶은 것이었지만.

나는 왕자를 바닥에 내려놓은 뒤 물을 받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욕조가 깊어 그가 사람으로 되돌아오지 않는다면 내 도움 없이는 절대로 씻지 못할 듯싶었다.

우리는 한동안 물이 차오르길 기다렸다. 뿌옇게 일어난 김이 시야를 가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왕자는 바닥에 채 마르지 않은 물기를 앞발로 톡톡 건드리기만 할 뿐, 딱히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올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나는 왕자를 얼른 안아 들었다.

“그냥 제가 씻겨 드릴게요.”

“왕!”

“왜요? 깨끗하신 걸 좋아하잖아요.”

그리고 당연하게도 왕자는 반항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별 소용은 없었다. 강아지일 때의 왕자는 하찮았다.

나는 수도꼭지를 잠그고 물의 온도를 잰 다음 왕자를 욕조에 쑥 집어넣었다. 그는 다리를 버둥거리며 밖으로 나가려고 욕조 벽을 긁어 대며 우는 소리를 냈다. 그리고 나는 시커메진 그의 몸에 물을 끼얹었다.

“께겡! 껭!”

“잠시만요, 비누칠 좀.”

“껭! …시, 싫어! 싫어!”

안 그래도 자그마한 몸이 물에 젖어 한층 더 작아졌을 때, 구름 같은 연기가 뿜어져 나와 나는 움찔 비누를 잡으려던 손을 거두었다. 그와 동시에 기다란 팔이 쑥 튀어나와 내 손목을 잡아 쥐었다.

“시, 싫다고… 계속 그랬잖아. 그런데 나한테 왜, 왜 이래.”

“모, 몰랐어요. 계속 깽깽거리기만 하셨잖아요.”

“언제는 내 말을 알아듣는 척하더니!”

나는 왕자가 이렇게까지 억울해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은빛 눈썹을 잔뜩 찌푸린 채 나를 노려보는 그의 머리칼은 물기를 흠뻑 머금어 뺨이며 어깨에 달라붙어 있었다.

열이 올랐는지 울긋불긋해진 가슴팍과 무의식적으로 내 손목을 꽉 쥐고 있는 손등, 그 위로 튀어나온 새파란 핏줄. 나는 새삼 완연한 성인의 몸을 가지고 있는 왕자를 직전까지 너무도 아기처럼 대하고 있었음을 자각했다.

“왕자님은… 그, 스스로 변하는 걸 조절할 수 없으신가요? 강아지일 때 씻으면 편하잖아요. 물도 적게 쓸 수 있고.”

“모, 못 해! 그런 걸 할 수 있었으면 지, 진작에 했지.”

“그러시구나.”

시선을 천장으로 고정시킨 채 나는 답했다. 얼마나 정신이 없었는지 왕자는 제 하체를 가리는 것도 깜빡 잊고 있었다.

내가 들어갔을 땐 딱 맞았던 욕조의 크기가, 왕자에게는 상당히 좁아 보였다. 화가 난 듯 씩씩거리며 상체를 살짝 내밀고 있던 그가 한 박자 늦게 손에 힘을 풀었다.

“호, 혼자 씻는 건 할 수 있어. 이제까지 호, 혼자 잘만 씻었는데, 왜 갑자기….”

“네? 왕자님은 강아지일 때도 혼자 털에 비누칠하고 그러세요?”

“그, 그건 아니지만.”

왕자는 말주변이 없었다. 그는 입술을 오물거리다 불만을 토하다 그제야 제 상태를 깨달은 듯 흠칫 어깨를 굳혔다. 파드득 욕조 안으로 손을 집어넣은 그가 눈을 질끈 감았다.

“알아서 씨, 씻을게! 어서 나가!”

“알았어요. 갈아입을 옷은 밖에 둘 테니까, 얼른 씻고 식당으로 오세요.”

그동안 나는 점심 준비를 해야지. 내가 순순히 일어서자 왕자는 실눈을 떠 나를 쳐다봤다. 하지만 나와 시선이 마주치기가 무섭게 흣, 하는 소리를 내며 무릎을 세워 고개를 파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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