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폐왕자 길들이기 (15)화 (15/123)

15화

“괜찮습니다, 마담. 바쁜 이를 붙잡아 두는 것이야말로 실례 아니겠습니까.”

더듬더듬 웅얼웅얼 말하는 왕자와 군인 특유의 말투를 가지고 있는 예니체 경과만 소통하다 보니 시르시안의 느긋한 말씨가 새삼 신기하게 느껴졌다. 그는 마담 셀라를 향해 우아한 눈빛을 던진 뒤 나를 보고 웃었다.

“다음에 또 기회가 된다면 그때는 꼭 왕자님에 대해 듣고 싶군요.”

“물론입니다.”

“그나저나 세탁실은 많이 덥네요. 괜찮으시다면 그동안 산책이라도?”

시르시안이 마담에게 묻기에 나는 자연스럽게 뒤로 물러났다. 이윽고 그들은 시야에서 멀어졌고, 나는 꺅꺅대는 메이드들 사이에서 진땀을 빼야만 했다. 근사한 시르시안 님, 우리 같은 평민에게도 친절하신 시르시안 님.

열심히 떠들어 대는 메이드들을 두고 왕자의 새로운 옷들을 받아 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기어코 그 일을 해냈다. 내가 세탁실을 떠나기 전에, 잔느는 내 팔을 붙잡고 물었다.

“다프네, 너 잘 지내는 거 맞지?”

“응, 그럼. 이름 없는 성은 생각보다 그렇게 나쁘지 않아.”

“다행이야…. 나, 우리의 위치가 바뀐 후로 네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어.”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하고 싶지 않았기에 나는 서둘러 잔느에게 인사를 전했다. 빈말이 아니라는 듯 그녀는 짐짓 안절부절못하는 얼굴로 쳐다보았지만 또다시 나를 잡지는 않았다.

나는 왕자의 옷을 잔뜩 챙겨 넣은 나무 바구니를 들고 이번에는 왕실의 도서관으로 향했다. 로맨스 소설만 주야장천 읽었을 적에는 이런 곳은 귀족들이나 돼야 출입이 가능한 줄 알았건만, 실제로는 나같이 왕실 소속의 메이드 역시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곳이었다.

나는 왕성 앞에서 했던 것처럼 도서관의 사서에게 내 신분을 증명했다. 알이 굵은 안경을 낀 사서가 내 시계를 확인한 뒤 짧게 조언했다.

“안쪽에 공주님이 계신다. 눈에 띄지 않도록 조심해.”

“…네, 물론이에요.”

내가 알기로 소설 속의 레티스는 책과 담쌓은 인물이었다만. 순간적으로 흥미가 일었으나 나는 빠르게 대답했다. 생각해 보니 그렇게나 아름답다는 레티스를 나는 회귀 전에도 만나 본 적이 없었다.

멀찍이 숨어서 구경만이라도 하는 건…. 아니다, 그만두자. 괜히 여주인공과 엮이고 싶지는 않다. 한번 보기만 한다고 했다가 본격적으로 소설의 전개에 말려드는 건 아주 흔한 전개가 아니던가?

나는 남들의 이목을 끌지 않도록 사뿐사뿐 카펫 위를 걸었다. 내가 찾는 책은 유아용 그림책으로, 운 좋게도 아직 그쪽 책장에는 아무도 없었다.

서둘러 그림책을 고른 뒤, 사서에게 대출을 허락받아 도서관을 빠져나왔다. 도서관 내부가 넓어서 그런지 그동안 레티스의 모습은 코빼기도 찾아볼 수 없었다.

“다프네? 너 어쩐 일이야.”

바구니에 그림책을 집어넣은 내가 마지막으로 향한 곳은 주방이었다. 이름 없는 성과는 규모 자체가 다른 본성 주방은 갖가지 향신료 냄새로 가득했다. 거기다 마담 셀라가 감시하는 탓에 조용했던 세탁실과는 달리 왁자지껄한 분위기였다.

나는 잔느와 마찬가지로 내 입사 동기인 실비아에게 다가갔다.

“볼일이 있어서 왕성에 좀 들렀어. 가는 길에 네 얼굴이나 보고 갈까 하고.”

“그래? 잘 왔어. 마침 레티스 공주님을 위해 새로운 요리를 개발 중이었거든.”

내가 라 우스테 후작가에서 왕성으로 넘어왔다면, 실비아는 뮤리에 후작가에서 국왕 동생의 부탁을 받고 왕성으로 들어왔다. 나보다 다섯 살 정도 많은 그녀는 젊은 나이에 후작가에서 이미 부주방장의 위치까지 올라간 인재였다.

언젠가 뮤리에 후작가를 방문한 국왕의 동생이 실비아의 요리를 맛보고 감명받아, 그녀를 왕성에 데려왔다고 들었던 기억이 난다. 통통하게 살이 오른 뺨에 밀가루를 묻힌 그녀는 잠시 이쪽으로 와 보라며 내 바구니를 앗아 들었다.

“이건 여기 내려놓고. 어? 보기보다 별로 무겁지 않네?”

“옷밖에 들어 있지 않았으니까. 어디로 가면 돼?”

“내 자리로 갈 거야. 그런데 너 매운 거 좋아하지? 가서 내가 만든 요리 좀 먹어 봐 주라.”

실비아는 바구니를 구석에 밀어 넣은 뒤 나를 질질 끌고 걸어갔다. 온갖 음식 냄새가 가득한 데다 뜨거운 김으로 시야가 흐린 주방은 꼭 미로처럼 복잡했다. 실비아는 그곳을 요리조리 빠져나가 어느 한가운데 멈춰 섰다.

“짜잔. 공주님의 설명을 듣고 내가 완성한 거야.”

나는 핑크색과 민트색이 금빛 테두리와 함께 조화된 접시를 내려다보았다. 그 안에는 새빨간 소스로 뒤덮인 길쭉한….

“어? 이건.”

“희한하게 생겼지? 터크포키라고 하는 거래.”

“…….”

내가 잘못 들은 건가? 지금 실비아가 ‘떡볶이’라고 말한 거 맞지? 이 단어를 이 세계의 사람한테서 듣게 될 줄은 몰랐는데.

그런데 발음 무슨 일이야. 아무리 떡볶이가 외국인에게는 어려운 단어라고 해도 그렇지.

나는 실비아의 설명과 접시에 놓인 음식의 모양새만 보고도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차렸다. 세상에, 떡볶이를 본 지 벌써 20년은 더 된 것 같은데.

“어서 먹어 봐. 공주님이 이렇게 생긴 음식이라고 하면서 직접 그려 주시기까지 했거든? 그대로 재현해 보긴 했는데 어떨지 모르겠네.”

공주님이? 이 요리를 알고 있다는 건 그녀 역시도 빙의, 혹은 환생을 했다는 소리인데. 설마 레티스가 나와 같이 소설 속에 들어온 제3의 인물일 줄이야.

“자, 잘 먹을게.”

<공주는 꺾이지 않는다>에 환생한 뒤로 전생의 음식을 맛보게 될 일은 절대로 없을 줄 알았다. 그리운 기분에 젖은 나는 실비아가 건넨 포크를 들고 손을 살짝 떨었다. 그렇게 모양만은 그럴듯한 이 세계의 떡볶이의 맛은….

“악!”

“왜, 왜 그래? 너무 매워서 그러니?”

엄청나게 짰다. 소금 덩어리를 입 안에 집어넣은 것처럼.

공주님은 어째서 떡볶이가 매콤하면서도 달콤한 요리라고 설명하지 않은 것일까.

나는 근처에 있던 물잔을 들어 입 안을 헹궈 냈다. 놀라운 맛과 예상치 못한 사실에 침묵에 잠겨 있으려니 실비아가 한숨을 쉬었다.

“공주님은 외국에 여행을 간 적도 없는 분이신데 대체 어떻게 이런 이국적인 음식을 알게 되신 건지 모르겠어. 얼마 전부터 도서관에 틀어박혀 사신다던데, 거기서 새로운 요리책이라도 발견하신 걸까?”

“어… 글쎄, 나도 궁금하네. 아무튼, 잘 먹었어.”

“낙마 사고를 당하신 뒤로 뭔가 이상해지셨어. 국왕 폐하도 참, 겉으로 보기에 별 탈이 없다 해도 당분간은 안정을 취하시도록 하시지.”

“그게 무슨 소리야? 난 처음 듣는데?”

이게 대체 무슨 뻔하디뻔한 빙의물 전개 같은 소리란 말인가. 하지만 내가 아니라 남이 겪은 실화를 옆에서 들으니 흥미가 솟구친다. 실비아는 쯧쯧거리며 내 어깨를 위로 손을 턱 얹었다.

“너는 외딴곳에 혼자 갇혀 살고 있으니 세상 소식을 전혀 모르지? 왕성이 아주 난리였는데.”

“혼자 아니야. 왕자님도 계시고, 예니체 경도 계시고.”

“계시면 뭐 해. 꼭대기 층에 틀어박혀 사신다며. 예니체 경은… 전에 얼핏 본 게 다지만 말도 못 걸게 생겼더라.”

여기서 아니라고 부정해 봤자 아까 세탁실에서 그랬던 것처럼 한바탕 소란이 일 게 뻔했다. 나는 적당히 실비아의 맞장구를 쳤다.

“그렇긴 하지. 그나저나 슬슬 가 봐야겠어. 왕성에 들린 김에 실비아를 보려고 잠깐 온 거거든.”

“감동이네. 잔느만 아니었어도 자주 볼 수 있었을 텐데… 아, 맞다. 잠깐만 기다려. 아침에 만든 스콘을 좀 챙겨 줄게.”

드디어 주방에 온 목적을 이루었다. 실비아는 손이 큰 편이었기에 종종 난감할 정도로 요리를 많이 하곤 했다. 나는 그녀가 따로 챙겨 준 스콘을 받아 들고 말했다.

“고마워, 잘 먹을게. 그런데 떡볶이는 달콤한 편이 좋지 않을까?”

“너 발음 좋다. 공주님도 딱 그렇게 말씀하셨던 것 같은데. 그러니까… 떠크, 뭐라고?”

“어머, 벌써 시간이.”

똑같이 소설 속에 들어왔어도 내 쪽은 떡볶이를 찾을 만한 시간적, 금전적 여유를 갖지 못했다. 속으로 내심 레티스의 입장을 부러워하면서, 나는 실비아를 두고 주방을 빠져나왔다.

그러나 다시 이름 없는 성으로 돌아가는 길에서는 금방 생각을 고쳐먹었다. <공주는 꺾이지 않는다>는 마냥 로맨틱하기만 한 소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태어난 나라가 망하는 것은 물론이요, 남주인공인 세스나 제국의 황제는 레티스에게 반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 끝까지 그녀를 못살게 군다.

황제 이놈, 대체 나중에 얼마나 구르려고 이러나 싶을 정도였으니 말 다 했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걸음을 서둘렀다. 왕자에게 글을 가르쳐 줄 생각에 벌써부터 가슴이 설렜다.

⋆★⋆

이름 없는 성에서 본성까지 왕복을 했으니 오늘치 운동은 다 했다. 나는 관자놀이를 타고 흐른 땀을 닦으며 성문 주위를 둘러보았다.

평소 같으면 묵묵히 성을 지키고 있어야 할 예니체 경이 보이지 않았다. 설마 벌써 점심시간이 된 것일까. 시계를 확인해 보니 예상했던 시간보다 내가 늦게 오긴 했다.

“예니체 경?”

나는 가장 먼저 식당을 찾았다. 식탁에 바구니를 내려놓고 예니체 경을 찾았지만, 그는 이곳에 없는 듯 인기척조차 느낄 수 없었다.

이상했다. 회귀 전에는 좀처럼 성문을 떠나지 않던 사람이었는데.

땀을 식히기 위해 손부채질을 하며 위층으로 올라갔다. 혹시나 싶어서 그의 침실에도 가 봤지만 그곳에도 그는 없었다. 그러고 보니, 왕자는 또 어디에 있을까?

둘이 함께 보물찾기 모험이라도 떠났는지 모를 일이다. 나는 두 떡대가 거미줄을 잔뜩 뒤집어쓴 상상을 하며 키득키득 웃었다. 그러다 문득 어디선가 예니체 경의 목소리가 들려온다는 것을 깨닫고 멈춰 섰다.

희미하게 들리는 것을 보니 가까운 거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위층이나 아래층에서 들리는 것도 아니었다. 나는 제자리에서 한 바퀴를 빙글 돌다 복도 끝에 난 침실 문이 약간 열려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저 방은 청소를 한 적도 없는 곳인데. 긴가민가하면서도 성큼성큼 안쪽으로 걸어가자, 예니체 경의 목소리가 점점 더 분명해졌다.

“…드립니다. 언제까지….”

“예니체 경? 여기서 뭐 하세요?”

사람의 발길이 거의 닿지 않는 탓에 문은 삐걱대는 소리를 내며 열렸다. 그곳에서 나는 엉덩이를 쭉 빼고 엎드려 있는 예니체 경을 마주할 수 있었다.

“아, 다프네 양. 마침 잘 왔습니다.”

그는 원래는 하얀색이었을 회색 천이 덮인 침대 아래를 향해 목을 쭉 내밀고 있었다. 나를 보고 상체를 일으킨 그의 제복은 바닥에 쌓인 뿌연 먼지가 묻어 새카맣게 더러워진 상태였다.

그 꼴을 보고 있자니 얼굴이 절로 구겨졌다. 예니체 경의 제복을 씻는 것은 내 담당이었기 때문이다. 내 표정을 본 예니체 경이 머쓱하게 뒷덜미를 쓸었다.

“왕자님이 저 아래 숨어 계십니다. 털이 지저분해진다고 말씀드려도 별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예니체 경의 손아귀에는 새파란 강아지풀이 들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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