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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왕자 길들이기 (14)화 (14/123)

14화

“싫어도 어쩔 수 없어요. 저랑 같이 본성에 가실 것도 아니잖아요.”

“하, 하지만 난 여기서 나갈 수 없는걸.”

“그러니까요. 답답하시겠다.”

“답답하다니…. 그런 생각은 해 본 적도 없, 없었는데.”

이런 소리는 또 처음 들어 보는 게 분명했다. 왕자는 허를 찔린 듯한 표정을 지으며 입술을 가로로 길게 늘였다.

나 때문에 괜히 뒤숭숭해진 왕자를 두고 가는 것이 마음이 걸리긴 했지만, 본성에 들러 해야 할 것들이 많았으니 계속 식당에만 머무를 수도 없었다. 나는 왕자를 향해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아니면 이름 없는 성 여기저기를 돌아다녀 보시는 건 어때요? 저나 예니체 경이 쓰는 층 말고는 제대로 청소가 된 적이 없어서 지저분하긴 하겠지만….”

“지, 지저분한 건 싫어. 다프네도… 싫어하잖아.”

“네. 그래도 여긴 예로부터 죄를 지은 귀족이나 왕족들이 수감되던 성이니, 탐험하다 보면 금은보화라도 찾을지 몰라요.”

“무, 무슨 소린지 모르겠어. 알아듣게 말해.”

“아. 보물 같은 거요. 보석이나 금화 같은.”

“…반짝반짝하는 것들 말이야?”

어린애치고 보물찾기를 싫어하는 경우는 본 적 없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주머니에서 시계를 꺼냈다. 서둘러 다녀오면 점심 식사 전까지는 갔다 올 수 있을 것이다.

왕자는 해맑은 눈을 하고 물었다.

“다프네도… 좋, 좋아해? 그믄보화.”

“금은보화요.”

“아, 아무튼.”

“좋아하죠. 비싼 것들은 언젠가 유용하게 쓰일 날이 오거든요.”

“다프네가 하는 말들은… 너, 너무 어려워.”

“그런가요? 쉽게 말해서 좋아한다는 뜻이에요.”

왕자의 눈빛이 순간 비장해진 듯했다. 우리 아기 새가 어미 새를 위해 벌써부터 효도를 결심할 줄이야. 하지만 그냥 해 본 말이었지 설마 진짜로 이름 없는 성에 금은보화가 숨겨져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왕자가 내 뒤를 쫓아다니는 것에 그새 익숙해진 나는 그를 데리고 성문으로 걸어갔다. 녹이 슨 거대한 문가에 다다랐을 즈음 그는 서서히 속도를 늦추었다.

“어, 언제 올 거야? 느, 늦으면 안 돼.”

“왜 안 되나요?”

“어? 그건….”

그것까진 생각 못 했냐고요. 나는 왕자의 머리라도 쓰다듬어 줄까 하다가 그건 정말로 주제를 넘은 짓이라는 걸 상기했다. 마냥 어리숙해 보이나 그도 엄연한 왕족이다. 이름 없는 성에 고립되었다는 특수성에 결코 현혹되어서는 안 됐다. 허공에 들린 손을 거둔 나는 대충 옷매무새를 확인한 뒤 왕자를 올려다보았다.

“다녀올게요. 기다리고 계세요.”

“응….”

왕자는 묘하게 슬퍼 보였다. 누가 보면 한 10년은 함께한 사이인 줄 알겠다. 하지만 나 역시 그를 두고 가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나는 왕자를 두고 성문 밖으로 나와 문 앞을 지키고 있는 예니체 경에게 말을 걸었다.

“경, 저 본성에 다녀오려구요.”

“그렇습니까? 혹시 주방에 들리신다면 간식거리나 얻어 오십시오.”

“그럴까요? 아는 메이드가 하나 있긴 한데.”

“아침에 왕자님이 드시던 핫초코 냄새가 아주 좋더군요.”

“경은 그렇게 드시고도 살이 찌지 않는 축복을 타고나셨네요.”

“칭찬 감사합니다.”

그게 과연 칭찬일까. 나는 예니체 경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

“왕자님이 혼자 계세요. 시간 되시면 가끔 확인해 주세요. 혼자 두고 가려니 영….”

“다프네 양은 왕자님의 보모십니까?”

“그런 기분이네요.”

홀로 외롭게 서 있는 문지기마저 뒤로하고, 마침내 본성을 향해 출발했다. 이름 없는 성에서 국왕이 사는 왕성까지는 걸어서 족히 한 시간은 넘는 거리였다. 마차를 탄다면 금방이겠지만, 국왕은 이름 없는 성에는 마구간을 마련해 주지 않았다.

왕자를 아래층으로 데려와도 운동은 계속되는군. 나는 햇살이 쨍쨍한 하늘을 한번 올려다본 뒤 힘차게 걸음을 내디뎠다.

⋆★⋆

초여름이라 그런지 땀이 흐른다. 성 안에 있을 때는 오히려 추웠는데.

나는 이름 없는 성과 왕성 사이에 위치한 호숫가를 빙 둘러 갔다. 사치스럽게 여유를 즐기는 귀족들이 뱃놀이를 하는 것을 멀리서 구경하기도 하고, 길가에 핀 꽃들에 감탄하기도 하면서.

그렇게 어느덧 목을 쭉 빼고 올려다보아도 지붕이 보이지 않는 웅장한 왕성에 도착했다. 겉부터 화려하게 금칠이 되어 있는 데다 섬세한 문양으로 가득한 입구를 보고 있자니 문지기의 시선이 느껴졌다.

“왕성 내부에 들어가십니까?”

“네. 이름 없는 성에서 왔습니다.”

“…확인되었습니다. 최근 국왕 부부의 심기가 좋지 않으시니 눈에 띄지 않도록 유의하십시오.”

“네?”

나는 되물었지만, 해야 할 일을 마친 문지기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갈 뿐이었다. 왕성의 메이드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옷차림을 한 나는 뚜껑에 이름 없는 성이 그려진 회중시계를 주섬주섬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잔느!”

왕성에 들어온 뒤에는 넓은 정원을 지나쳐 곧장 세탁실로 향했다. 그러곤 문 앞에 서서 두툼한 천들을 다리고 있는 메이드들 사이에서 내 동기를 찾아냈다. 잔느는 내가 왕성으로 이직하던 날 함께 들어온 이들 중 하나였다.

하나로 땋아 내린 주홍빛 머리에 연둣빛 눈동자가 인상적인 그녀는 원래 이름 없는 성에 배치되었던 메이드이기도 했다.

“…다프네? 어쩐 일이야?”

“왕자님의 옷을 좀 구할까 해서 왔어. 전임 메이드가 가져왔던 옷으로는 충분치 않은 것 같아서.”

“그래? 그렇구나. 어서 들어와. 문을 막고 있으면 마담 셀라한테 혼나.”

하지만 그녀는 이름 없는 성에 대해 알게 되자마자 눈물 콧물을 쏟으며 그녀의 자리를 거부했다. 자신은 아직 어리기 때문에 왕자님께 잡아먹히고 싶지 않다나 뭐라나.

참고로 그녀는 나와 동갑이었다. 그리고 나는 배정된 자리가 싫으면 나가라는 경고를 받은 잔느가, 잘 알지도 못하는 나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매달리는 바람에 할 수 없이 그녀와 내 업무를 교환했다.

회귀 전에는 영 찜찜했지만 지금 와서 보면 오히려 내게 잘된 일이었지 뭐. 이름 없는 성의 메이드는 본성의 메이드들보다 2.5배가 넘는 봉급을 받는다.

“세탁실 메이드 일은 어때? 할 만하니?”

“전혀! 내 손 부르튼 것 좀 봐. 난 왕성에서 일하면 화려한 응접실의 먼지나 터는 줄 알았다?”

“그런 자리는 인맥이 있어야 가능하지. 그런데 마담 셀라는 어디에 계셔?”

“조금 전까지 여기 계셨는데… 아, 맞다! 라 우스테 후작가의 시르시안 님이 셔츠를 버렸다고 찾아오셨었어.”

그래서 대체 마담 셀라는 어디에 있다는 건데. 내가 무심하게 코를 문지르며 묻자 잔느가 연둣빛 눈동자를 커다랗게 떴다.

“반응이 그게 뭐야? 너 시르시안 님이 누군지 모르니?”

“아냐, 알아. 내가 라 우스테 후작저에서 일하다 왕성에 들어왔는걸.”

“어머, 세상에! 그럼 너 시르시안 님이랑 아는 사이야?”

“아니, 그럴 리가. 난 거기서도 메이드였는데.”

같은 저택에 산다고 해도 귀족 도련님을 마주치는 일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다. 그러나 잔느의 소란스러운 음성을 들은 세탁 메이드들이 너도나도 호기심 어린 눈을 하고 나를 쳐다보기 시작해, 나는 난감해졌다.

“너 이름 없는 성에서 온 다프네지? 네가 시르시안 님을 어떻게 알아?”

“아니, 모른다니까….”

“부럽다! 난 그렇게 잘생긴 분은 처음 봤어. 하긴, 시르시안 님의 누님이신 프리지어 님이 사교계의 꽃이라 불리시니까.”

모르겠고, 정신없어서 빨리 나가고 싶은데 마담 셀라는 어디에 있나. 나는 삼삼오오 몰려든 메이드들 사이에서 한숨을 쉬며 고개를 돌렸다. 그때, 막 세탁실로 들어오는 마담 셀라와 시르시안이 보여 메이드들은 재빠르게 원래의 자리를 찾아 흩어졌다.

“감사합니다, 마담. 아끼는 옷이라 당장 저택으로 돌아가야 하나 했거든요.”

“천만에요. 그래선 안 되겠지만, 만약 또 이런 일이 생기면 저를 찾아오세요.”

“친절하시군요. 셔츠가 마를 때까지 얼마나 기다려야 하지요?”

“오늘은 햇볕이 강하니 금방이랍니다. 그동안은 화원에 돌아가 계심이….”

본디 귀족들에게 있어 메이드란 보여도 보이지 않는 존재였다. 마담 셀라와 시르시안은 저들끼리 하하 호호 웃으며 떠들다 그제야 세탁실 한가운데 서 있는 나를 발견했다.

나는 원래 세탁실 소속으로 배정된 메이드였으니, 마담 셀라는 나를 보자마자 내가 누구인지 알아챘다. 그녀는 시르시안에게 잠시만요, 하고 속삭이더니 또각또각 구둣발 소리를 내며 내 앞으로 다가왔다.

“이름 없는 성의 다프네구나. 이곳에 왔다는 건 왕자님의 새로운 옷이 필요해서겠지?”

“네, 마담. 바로 아시네요.”

“당연하지. 네 전에도 가끔씩 전임 메이드들이 찾아오곤 했었으니까. 그래, 사이즈는 어느 정도면 되겠니?”

“왕자님이 생각보다 키가 크세요. 전에 입었던 옷들은 작아서 손목이 다 튀어나올 정도예요.”

“…너 설마, 왕자님을 실제로 뵈었니?”

진짜 피곤하다, 피곤해. 마담 셀라는 새빨갛게 칠한 입술을 크게 벌리며 호들갑을 떨었다. 내가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어지럽다는 듯 지척에 서 있던 시르시안에게 머리를 살짝 기대었다.

“들으셨나요, 시르시안 님? 여기 이 아이가 아셰라드렌 왕자를 직접 만났다고 하네요.”

“안녕하세요.”

얼굴이 뽀얀 남자의 금갈색 눈과 마주치자 나는 빠르게 치마를 잡고 허리를 숙였다. 다시 상체를 들자, 시르시안은 귀족들 특유의 순진하지만 잔인한 호기심으로 반짝이는 눈을 하고서 내게 물었다.

“이름 없는 성에서 일한다고? 대단한 아가씨로군요. 겉으로 보기엔 연약해 보이기만 합니다만.”

“말씀을 편하게 해 주시기 바랍니다, 시르시안 도련님.”

“…나를 알고 있습니까?”

“먼발치에서나마 뵌 적이 있습니다. 저는 얼마 전까지 라 우스테 후작저에 근무했거든요.”

“그렇구나. 반가워요. 이름이….”

“다프네랍니다. 꽤 예쁘장한 아이죠?”

마담 셀라가 선수를 쳤다. 그녀는 키가 훤칠하게 큰 남자의 팔에 제 손을 올리며 깊은숨을 뱉어 냈다.

“처음에는 세탁 메이드로 뽑혔었답니다. 그런데 저기에 있는… 이름이 뭐더라. 아무튼, 다른 메이드와 위치를 바꾸게 되었죠. 아직 젊은 아이니 금방 그만둘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잘 버티고 있네요.”

“실례지만 저는 이름 없는 성에서 근무한 지 아직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았답니다, 마담.”

“그게 대단한 거야! 일주일은커녕 사흘도 채 견디지 못하던 메이드들이 얼마나 많았는데.”

마담 셀라의 얘기를 들은 시르시안이 새삼 나를 다시 보는 것 같은 미소를 지었다. 화사한 금빛 머리칼에 하얀 얼굴, 따스한 금갈색 눈을 가진 그가 내게 제안했다.

“왕자님을 마주친 적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바쁜 게 아니라면 자세히 들을 수 있을까요? 어떤 분이신지 줄곧 궁금했거든요.”

“죄송합니다만 저는 세탁실 외에도 가야 할 곳이 있어서요.”

“얘, 다프네!”

나는 사랑스러운 왕자가 한낱 귀족의 오락거리용 수다로 전락하길 바라지 않았다. 그러나 마담 셀라는 시커먼 눈에 불을 켜고 벼락같이 나를 야단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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