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다프네, 가, 가르쳐 준다면… 배울게. 수저 쓰는 방법.”
“정말이요?!”
망설이던 왕자가 고개를 들었다. 여전히 부끄러운 듯, 차마 내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그의 입가에는 브로콜리 수프가 말라붙어 있었다.
아니, 진짜로 애기냐고. 나는 한 손으로는 그와 계속 손을 맞잡은 채, 다른 손으로 냅킨을 챙겨 그의 얼굴을 벅벅 닦아 주었다.
왕자는 인상을 찡그리면서도 싫어하는 내색을 하지는 않았다.
“아, 그런데 그런 예의범절은 저보다는 예니체 경에게 배우는 게 낫지 않을까요?! 솔직히 저도 남을 가르칠 만큼 자세히 알지는 못해서요.”
“그, 그럼 안 배워.”
“그렇게까지 딱 잘라 말씀하실 일인가 싶네요.”
“난 다프네한테… 배, 배우고 싶으니까.”
왕자가 저렇게까지 단호하게 자기주장을 한 적이 있던가. 나는 잠시 말을 잃고 예니체 경을 마주 보았다.
이미 식사를 해치운 그는 반쯤 식은 차를 음미하고 있었다. 여기서 본인이 끼어들 틈은 없다고 생각했는지, 그는 어깨를 으쓱이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다프네 양도 전에는 후작가에서 일했으니, 어깨너머로 배운 지식이 상당하지 않겠습니까.”
“뭐 없다고는 못 하겠지만… 그래도 진짜 귀족 나리와는 다르죠.”
“하지만 왕자님이 저렇게까지 말씀하시니까요. 저는 이만 일어나겠습니다. 자리를 너무 오래 비워 둔 것 같아서요.”
나는 예니체 경이 왕자를 위해 배려해 주려는 것임을 알았다. 평소라면 그는 차를 리필하면서까지 나와의 식사 시간을 나름대로 즐기고는 했다.
오늘의 그에게는 안된 일이었지만, 차차 왕자도 예니체 경과 함께하는 시간을 익숙하게 여기게 될 것이다.
나는 먼저 자리를 뜨는 예니체 경을 향해 눈인사를 건넸다. 그는 내게 고개를 끄덕인 뒤 왕자님을 따뜻한 눈으로 바라보며 식당을 나갔다.
“좋아요. 수프는 이미 다 마셔 버렸으니까, 소시지를 자르는 것부터 연습해 볼까요?!”
“그, 그런데.”
왕자의 양손에 포크와 나이프를 쥐여 주었다. 어색하게 수저를 든 그가 입을 달싹였다.
“어차피… 보, 보는 사람도 없는데 왜 이런 걸 배워야 하지?”
“보는 사람이 왜 없어요. 저나 예니체 경도 있고, 또… 언젠가는 남들 앞에서 식사를 하게 될 수도 있잖아요?”
“그, 그럴 리가… 나는 펴, 평생 이곳에 갇혀 살아야 하는데.”
“그렇게 단정 짓지 마세요. 세상 밖에 얼마나 넓고 아름다운데요.”
아직 나의 큰 뜻을 알아차리지 못한 왕자가 고개를 작게 갸웃거렸다. 그러나 배움에 대한 갈망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는지 내가 제 손을 잡고 소시지를 써는 시범을 보여 주는 것을 온 신경을 다해 지켜보았다.
날카로운 나이프가 통통한 소시지를 가르고, 작은 조각이 된 그것을 포크로 집어 소스에 찍어 주었다. 내가 먹어 보라는 시늉을 하자 왕자가 조심스럽게 포크를 입가에 가져갔다.
그 놀라운 미모 덕분인지 고작 그 정도의 행동에도 불과하고 왕자는 한결 더 우아해 보였다. 나는 삶은 당근을 포함한 야채들도 한번 썰어 보라며 왕자에게 제안했다.
“어, 어차피 입에 넣으면 다 똑같아지는데… 왜 굳이 자, 작게 잘라서 먹는지 모르겠네.”
“음… 그편이 더 소화가 잘돼서일까요? 천천히 먹을 수 있으니까요.”
“난 하, 항상 급하게 먹었지만 속이 안 좋았던 적은 없어.”
“그거 다행이네요. 건강하다는 증거니까요.”
“건강하면… 좋은 거야?”
그럼 좋지 안 좋냐. 처참한 지식수준에 한숨이 절로 나왔지만 또 왕자가 변신을 해 버릴까 두려워 열심히 참았다. 나는 눈높이 교육, 눈높이 교육 하고 되뇌며 방긋 미소 지었다.
“엄청 좋은 거예요. 아프지 않아도 되니까.”
“나, 난 아픈 적이 없는데.”
“어젯밤에 열이 펄펄 끓으시던 건 뭐죠?”
“그건… 개새끼로 벼, 변신을 자주 해서.”
“개새끼라뇨… 귀여운 아기 강아지라니까요.”
“자꾸 귀, 귀엽다고 하지 마….”
대화를 나누는 사이 서투르게 자른 야채를 모두 삼킨 그가 얼굴을 붉히며 중얼거렸다. 새하얀 얼굴이 하루에 몇 번씩 빨개졌다 파래졌다 하는 건지 모르겠다.
나는 턱을 괸 채 왕자가 식사하는 모습을 지켜보다 내 몫의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왕자는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임무라도 맡은 것처럼 진지한 태도로 빵을 작게 잘랐다.
더 이상의 수다는 없었건만, 우리는 식사를 하는 데만 해도 퍽 오랜 시간을 들였다. 비록 왕자가 먹은 접시는 왕족이 사용한 것이라기엔 처참하게 눌어붙은 자국이며 난도질당한 계란 요리들로 가득했지만 그래도 처음치고 나쁘진 않았다.
왕자가 나를 따라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을 때쯤, 나는 그의 손에 냅킨을 쥐여 주었다.
“마지막에는 입가를 닦으셔야 해요. 그건 알고 계시죠?”
“으응. 하지만 평소에는 옷으로 닦는데….”
“아하, 그래서 왕자님의 옷들이 지저분했군요?”
“…다프네는 맨날 나보고 더, 더럽다고.”
“하지만 사실이잖아요. 앞으로 제가 가져오는 새 옷들은 냅킨 대용으로 쓰지 말아 주세요.”
“아, 알았어.”
알긴 뭘 알았는지 그가 손에 들린 냅킨을 멀뚱멀뚱 바라보고만 있었다. 나는 손수 시범을 보여 냅킨으로 입가를 문질렀다. 그러자 왕자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예쁜 눈썹을 찡그렸다.
“으, 음식이 어디에 묻었는지도 모르는데 어, 어떻게 닦지.”
“저한테 하는 질문인가요? 아니면 왕자님 본인에게 물으시는 건가요?”
“…아, 아까처럼 다프네가 닦아 주면 되지 않나 싶어서.”
“왕자님은 애기인가요?”
“아, 아니!”
확실히 이 왕자는 애정 결핍이 틀림없다. 손을 한번 잡으면 쉽게 놓지 않으려 하고, 내가 저를 챙겨 주는 것을 저도 모르게 기뻐하고 있다. 나는 세차게 고개를 젓는 그를 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어쩔 수 없지. 당분간만이다. 내가 서서히 상체를 제 쪽으로 기울이자 왕자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대로 굳어 버렸다.
“왜 그러세요? 저보고 닦아 달라면서요.”
“아, 아니… 난 애, 애기가 아니니까.”
“그럼 혼자 할 수 있으신가요? 음식이 어디에 묻었는지도 모르는데?”
“아니… 못, 못 할 것 같아.”
왕자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답했다. 190센티에 가까운 남자가 어리광을 부리는 것은 보통이라면 용납 못 할 짓이었으나 그 미모가 아셰라드렌 왕자라면 말이 달랐다. 나는 너른 어깨를 소심하게 말아 내 손길을 기다리는 그의 붉은 입술을 톡톡 두드려 주었다.
“사실 아까 수프를 드실 때처럼 많이 묻진 않았어요. 자, 벌써 깨끗해졌답니다.”
“다프네도 다, 닦아야 하지 않아?”
“아뇨. 저는 방금 닦았잖아요.”
“하지만 여기 뭐, 뭐가 묻었는데.”
그럴 리가 없는데. 나는 갸우뚱하면서도 무릎에 내려놓았던 냅킨을 왕자에게 건넸다. 왕자가 이런 것까지 식사 예절 중 하나라고 여기게 되는 건 곤란하다고 생각하면서.
그는 내 입가를 심각하게 바라보며 냅킨을 공처럼 뭉쳐 쥐었다. 그러더니 분명 내가 아까 닦았을 부분을 벅벅 문질러 댔다.
…아? 그때서야 나는 깨달았다.
“…왕자님. 지금 복수하시는 거죠. 아까 제가 왕자님 얼굴 너무 빡빡 닦았다고.”
“아, 아닌데. 그, 그런 거 아, 아, 아닌데.”
“아니라고 하시면서 엄청 말 더듬으시잖아요.”
“나, 난 워, 원래 더, 더, 더듬어.”
“그래도 이 정도까진 아니셨잖아요.”
“…….”
아래층으로 내려온 지 고작 하루 만에 벌써부터 장난도 다 칠 줄 알고. 우리 아셰라드렌 다 컸네, 다 컸어.
왕자는 뜨끔한 듯 얼른 냅킨을 내리고 내 시선을 피했다. 딴청을 부리려는 모양인데, 그 모습이 몹시 어색했다. 그래도 내게 장난을 칠 정도의 친밀감을 느꼈다면 나는 충분히 만족한다.
내가 웃음을 터뜨리며 저를 빤히 쳐다보자, 왕자가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어깨를 더욱 접으려고 했다. 그래 봤자 골격 자체가 큰 편이라 별 소용은 없었지만.
“다 드셨으면 치울까요? 저는 슬슬 본성에 다녀올까 해요.”
“본성이라면… 아, 아바마마가 계시는 곳…?”
“그렇긴 한데요, 제가 국왕 폐하를 만나 뵐 일은 없으니까요. 저는 왕자님 옷을 가지러 가는 거예요.”
“내, 내 옷? 더, 더러워서?”
“네.”
“…너무해.”
나는 왕자의 투정을 못 들은 체하고 접시를 모아 트레이에 담았다. 먼저 자리를 비운 예니체 경의 몫이며 찻잔까지 모두 정리해 주방으로 들어가려니 그새를 못 참고 왕자가 종종걸음으로 내 뒤를 따라왔다.
“보, 본성에 가면 언제 돌아와?”
“글쎄요? 그렇게 오래 걸리진 않을 것 같아요.”
“그, 그러니까 그게 언제쯤인데.”
“그러고 보니 왕자님, 말씀을 많이 하실수록 말을 덜 더듬으시네요?”
“…그런가?”
스스로도 자각하지 못한 사실을 알게 된 왕자가 입가에 손가락을 대고 눈을 반짝였다. 나를 쫓느라 헝클어진 긴 머리카락이 살짝 살랑였다. 나는 그새를 또 못 참고 물었다.
“하…. 왕자님. 진짜 왜 이렇게 잘생겼어요?”
“하, 하지 말라니까. 그, 그, 그, 그, 그런 말…!”
왕자가 눈을 질끈 감고 소리쳤다. 순정만화 여주인공을 현실에서 보면 이런 느낌일까? 전생에서도 현생에서도 로맨스 소설광이었던 나는 이따금 왕자를 볼 때마다 전형적인 여주인공이 딱 이렇지 않을까 싶었다.
매번 놀릴 때마다 반응이 저렇게 귀엽고 깜찍하니 남주인공들이 킬킬대면서 계속 놀려 먹는 거겠지. 큰 깨달음을 얻은 나는 왕자의 가슴팍에 있는 매듭에 걸린 은빛 머리칼을 살며시 떼어 주었다.
왕자는 움찔하며 허리를 곧추세웠다.
“노, 놀랐어. 갑자기 다가오니까.”
“아, 죄송해요. 아까부터 자꾸 눈에 들어와서.”
별다른 관리를 하지 않았을 텐데도 그의 머릿결은 감탄이 나올 정도로 완벽했다. 역시 여주인공의 오빠라 이건가. 나는 당황한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청초한 얼굴로 서 있는 그를 감상하다 옆으로 비켜섰다.
“안 되겠어요. 왕자님이랑 같이 있으면 시간 가는 줄 모르겠다니까요. 저, 말 나온 김에 지금 바로 다녀올게요.”
“나, 나는?”
“네? 왕자님은요?”
“다프네가 어, 없으면 나는… 뭐, 뭘 하고 있어야 해?”
그러고 보니 꼭대기 층에 왕자가 더 이상 갈 일은 없고. 그렇다고 그곳에 쌓여 있던 장난감들을 챙겨 온 것도 아니고.
왕자는 글을 읽지도 못해서 책을 빌려줄 수도 없는데. 잠시 고민하던 나는 명쾌하게 입을 열었다.
“예니체 경이랑 놀고 계실래요?”
“그건 싫어.”
그러자 왕자는 대번에 정색하고 고개를 획 돌렸다. 말 한번 더듬지 않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