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폐왕자 길들이기 (11)화 (11/123)

11화

“글쎄요, 어떨까요?”

“…치, 친한 것 같아. 다프네는 왠지 친구가 많을 것 같고….”

그는 단단히 착각을 하고 있었다. 이런 외진 곳에 사는 내게 무슨 친구가 있다고.

하지만 그가 나를 꽤 좋게 보는 것 같아, 나는 그의 말에 부정하지 않았다. 내가 말없이 싱글싱글 웃고 있자니 왕자가 고개를 떨어뜨렸다.

“이, 이사카 왕국은 어디야?”

“저도 자세히는 몰라요.”

소설에 나오는 가상의 왕국인데 어떻게 알아. 나는 왕자에게서 등을 돌려 앉았다.

“그보다 얼른 옷을 입으셔야죠. 벌거벗고 계신 쪽이 더 편하시다면 어쩔 수 없지만요.”

“그, 그럴 리가 없잖아. 나도 부, 부끄러움을 알아.”

씩씩대는 왕자의 숨소리가 다시금 나를 미소 짓게 만들었다. 부스럭부스럭, 그가 옷을 입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책을 펼쳐 들었다. 레이몬드가 그려진 삽화는 전과 달리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아마 내 뒤에 전에 본 적 없던 미남이 앉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그 미남은 저가 얼마나 잘생긴 줄도 모르고, 자존감은 바닥에다 성격은 소심의 극치를 달리고.

“왕자님.”

“…….”

“옷 다 입으셨어요?”

“자, 잠깐만.”

충분한 시간을 준 것 같은데, 왕자는 허겁지겁 입을 열었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내가 다시 뒤를 돌아본 뒤였다. 나는 왕자의 고운 손이 가슴팍에 멈춰 있는 것을 확인했다. 단추가 아닌, 끈으로 앞섶을 묶는 방식의 셔츠를 그는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잠깐만이라고 했, 했잖아….”

“그치만 너무 오래 걸리시는걸요. 어디 봐요, 제가 도와드릴까요?”

“아, 아니. 시, 싫어.”

“싫다고 하시면서 손은 왜 내리시는 거죠.”

말은 어떻게든 까칠하게 굴려고 하면서, 행동은 전혀 그렇지 못하다. 나는 푹푹 꺼지는 침대 위를 무릎걸음으로 걸어갔다. 왕자는 이 상황이 못내 불편한지 내리깐 눈을 열심히 이리저리 굴려 대고 있었다.

툭 튀어나온 목젖 아래로 훤히 드러난 하얀 가슴팍. 어떻게든 끈을 묶어 보려고 애를 쓴 모양인지 피부가 군데군데 붉어져 있었다. 대리석 같은 피부라는 건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인가 보다.

나는 매끄러워 보이는 왕자의 가슴께를 향해 손을 뻗었다.

“…다프네 탓이야. 다프네가 어, 어려운 옷을 골라 와서.”

“아, 네. 그렇죠. 전부 제 잘못인 거죠.”

“아, 아니. 저, 전부라고는.”

하지 않았는데…. 라고, 왕자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손끝에 왕자의 살결이 살짝 닿았다.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나는 그 감각에 집중하지 않으려 용을 쓰며 양옆으로 벌어진 끈을 잡아당겼다.

X자로 몇 번이고 교차된 끈을 묶는 일은 절대 어렵지 않았지만, 왕자가 너무 심하게 긴장을 하니 덩달아 나까지 몇 번이나 끈을 놓쳤다. 신비로운 은빛 속눈썹 사이로 보이는 보랏빛 눈동자가 어느샌가 내 손을 지켜보고 있는 탓이었다.

“와, 왕자님. 보고 배우세요. 이렇게 동그란 모양을 만들어서 옆에 있는 끈을 돌려 묶으면 돼요.”

“어, 어려운데.”

왕자의 긴장이 전염이 된 듯 나까지 말을 절기 시작했다. 나는 진정하기 위해 크게 심호흡을 한 뒤 침을 삼켰다.

“그래도 이 정도는 알아서 할 줄 아셔야 하는걸요.”

“그런가… 아, 알겠어.”

“아니다. 그냥 앞으로는 제가 묶어 드릴게요. 하기야 귀족들도 뭐 하나 제 손으로 하는 법이 없는데, 왕자님이 굳이 배우셔야 할 필요는 없죠. 애초에 저는 왕자님의 시중을 들기 위해 존재하는 사람이니까요.”

고개를 약간 들자 통통한 아랫입술을 헤 벌린 왕자가 보였다. 내 손길에만 고정되어 있는 줄 알았던 그의 시선이 이제는 나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순간 나는 숨을 쉬는 것도 잊고 왕자의 얼굴을 빤히 마주 보았다.

아름답다. 깊은 눈동자에 빨려 들어갈 것만 같다.

세상에 이렇게 완벽한 피조물이 또 존재할 수 있을까? 감탄하듯 왕자를 보고 있자니 홀린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너무나도 잘 알 것만 같았다.

그러나 여느 때와 같이 왕자는 이내 내게서 시선을 돌리고는 큼직한 손을 들어 제 입가와 코끝을 가렸다. 그림처럼 느릿하게 눈을 깜빡인 그가 목이 막힌 듯 옅은 기침을 뱉었다.

“다, 다 했어?”

“네. 한번 보실래요?”

“다, 다 했으면… 그, 그, 그만 떨어져.”

“어머나. 강아지로 변했을 땐 제 품에 꼭 안겨 계셨으면서.”

“으… 하지 마. 자, 자꾸 놀리면 화낼 거다.”

그건 안 될 말씀이었다. 내 방은 왕자의 침실처럼 넓지 않았으므로.

그가 다시 거대한 짐승으로 변했다간 내 침대는 박살이 날 것이고, 소중히 모아 둔 로맨스 소설들도 갈기갈기 찢어질지 모른다.

나는 잠시 아찔했던 어제의 그 순간을 상상하다 고개를 저었다. 그나저나 왕자는 대체 어떤 때마다 새끼 강아지로 변하거나 커다란 늑대개로 변하는 걸까? 미리 알아 두면 좋을 것 같은데.

“알겠어요, 죄송해요. 솔직히 어제는 진짜 무서웠단 말이에요. 어제처럼 커다래지는 건 당분간 좀 참아 주세요.”

“…무, 무서웠, 어?”

“네. 이빨 하나가 제 얼굴만 하던걸요. 아, 하지만 털이 너무 예뻤어요. 보들보들하고, 따뜻하고.”

“무, 무섭다면서.”

“어쩔 수 없잖아요. 처음 봤으니까요. 그래도 차차 익숙해져 볼게요.”

“다프네는….”

왕자의 고개가 옆으로 비스듬하게 기울어졌다. 미간을 모으고 인상을 쓴 그가 망설이듯 입술을 열었다 닫길 반복했다.

그는 아직 말이 서투르니, 나는 차분히 왕자를 기다려 주기로 했다. 한참이 지나자 왕자는 새로 입은 셔츠가 어색한 듯 제 앞섶을 꾹 말아 쥐며 입을 뗐다.

“…왜, 왜 자꾸 그렇게 말해? 나, 난 너무 어려워. 다프네 같은 사람은… 처음 봤어.”

“아, 진짜요? 저도 왕자님같이 예쁘고 잘생기고 다 하는 사람은 처음… 헉, 우세요?”

“…아니.”

울잖아. 왜 뻔히 보이는 거짓말을 하지? 나는 난데없이 닭똥 같은 눈물을 똑똑 떨어뜨리는 왕자를 황망하게 지켜보았다. 내가 무슨, 엄청나게 감동적인 발언이라도 내뱉었나?

전혀 모르겠는데. 나는 그냥 솔직한 내 기분을 그대로 뱉어 냈을 뿐이다. 스스로도 인정할 만한 명언이라도 했으면 몰라, 그저 왕자를 보고 예쁘다 잘생겼다만 반복한 게 전부이거늘.

“죄송해요. 잘못했어요. 그러니까 그만 우시면 안 돼요? 물론 우는 것도 눈 돌아가게 사랑스럽긴 한데.”

“큽….”

아, 웃었다. 이번엔 웃었다. 부드럽게 사르르 말려 올라가는 입꼬리에 심장이 쿵 떨어질 것만 같다.

웃는 모습은 또 처음 보는 것 같은데. 심지어 아직 그의 눈가는 축축한 물기를 머금고 있다. 나는 멍하니 왕자를 응시하다, 길게 기른 은빛 머리칼이 옆으로 내려와 그의 얼굴을 가릴 때쯤에야 정신을 차렸다.

“왕자님…. 웃으니까 너무 예뻐요. 진짜, 제 부족한 표현력이 원망스러울 정도로.”

“…그만해.”

전생에서나 현생에서나 책을 그렇게 읽어 댔는데 말문이 막히다니, 다 헛일 아닌가? 난 대체 뭐가 문제일까?

하루 종일 왕자의 얼굴만 구경하고 있어도 시간 가는 줄 모를 것 같다. 어쩌면 난 왕자의 얼굴을 잊지 못해 계속해서 그가 나오는 꿈을 꿨을지도 모르겠다.

“알겠어요, 그만할게요. 대신, 앞으로도 자주 그렇게 웃어 주세요.”

“그, 그런 말도 그만하면 안 돼?”

“왕자님은 하지 말라는 게 너무 많네요…. 모시기 힘들겠다.”

“아, 아냐. 난 모시기 힘들지 않아.”

“그걸 어떻게 알아요. 메이드를 가까이 두신 적도 없으면서.”

“…….”

달리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한 그가 아이처럼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것도 아닌데, 이럴 때 보면 꼭 육아를 하는 기분이 든다.

나는 토라진 듯 침대만 내려다보는 그의 팔을 살짝 건드렸다.

“슬슬 식당으로 갈까요? 선물을 드리기로 했잖아요.”

“…아.”

왕자의 눈길이 다시금 내 손을 향했다. 나의 행동 하나하나에 일일이 반응하는 그는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을 때에도 꼭 강아지 같았다.

왕자와 함께할 때면 심심할 일은 없겠다. 호기심 어린 눈을 하고 나를 바라보는 그는 하얀 귀를 쫑긋하게 세운 강아지를 연상시켰다.

나는 작게 웃으며 먼저 침대에서 내려와 문가를 향했다. 왕자는 뒤늦게 허둥지둥 나를 따라왔다.

“아직 예니체 경이 오지 않았네요. 왕자님, 아무 데나 편한 곳에 앉으세요.”

“…으응.”

식당 문을 열고 들어간 내가 익숙하게 식탁을 지나쳐 가자, 왕자는 불안한 듯 두리번거리며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기다란 식탁 앞에 놓인 여러 개의 의자는 보지도 못한 것처럼 구석 바닥에 쪼그리고 앉았다.

“…….”

“…왜?”

“아무것도 아니에요.”

앞으로 가르칠 것이 산더미 같이 많을 듯하다. 나는 식당의 안쪽에 마련된 주방으로 들어가 주전자를 두 개 챙겼다. 하나에는 우유를, 하나에는 물을 담고 끓이며 찬장을 뒤져 초콜릿을 찾고 있으려니 자꾸만 시선이 느껴졌다.

뒤를 돌아보자 고개만 빼꼼 내민 왕자가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꼭 어미 새를 쫓는 아기 새 같은 시선이었다.

“왜요? 제가 뭘 하는지 궁금하세요?”

“구, 궁금해하면 안 돼?”

“안 될 리가요. 저는 지금 왕자님을 위한 핫초코를 만들 거예요.”

“하, 핫초코.”

“네. 아침을 먹기 전에 단 걸 먹는 건 좀 그렇지만… 선물이니까요. 그래도 아침 식사는 꼭 다 드셔야 해요.”

나는 왕자에게 말하며 금테를 두른 머그잔에 초콜릿을 넣었다. 시커먼 덩어리를 신기하게 바라보던 그가 갑자기 위로 솟아올랐다.

“다, 달콤한 냄새.”

“맛있어요. 드셔 보세요.”

처음 들어와 보는 주방이 낯선 듯 그가 조심스럽게 발을 들이밀었다. 나는 그 모습을 지켜보며 잔에 따뜻하게 데운 우유를 부어 찻숟가락으로 휘저었다.

진짜로 애 하나를 키우는 것 같잖아. 덩치는 전혀 그렇지 않지만.

“여기요. 다 됐어요.”

초콜릿이 우유와 섞인 것을 확인한 뒤 나는 그에게 머그잔을 내밀었다. 왕자는 쭈뼛거리며 잔을 받아 들었다.

“이, 이게 선물인 거지?”

“네. 꼭 선물 같은 맛이 날 거예요.”

“그게 무슨 맛인데…?”

아, 그냥 좀 마셔 보시라고. 나는 핫초코를 곧바로 입에 대지 않고 노려보는 왕자를 향해 헛웃음을 지었다. 내 소리를 들은 그가 울컥한 듯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더니 사약이라도 마시는 것처럼 인상을 쓴 채 핫초코를 한 모금 꿀꺽 삼켰다.

“…다프네.”

“네, 왕자님.”

잠시후, 눈시울을 촉촉하게 붉힌 왕자가 입을 열었다. 입가에 묻은 초콜릿을 자각하지 못한 듯, 그가 아이처럼 해사한 미소를 지었다.

“고, 고마워. 이, 이런 걸… 이런 걸 나한테 만들어 주고.”

그 미소를 본 나는 마치, 세상에서 가장 진귀한 요리를 발명한 요리사라도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왕자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은 얼굴로 쉬지 않고 핫초코를 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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