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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왕자 길들이기 (8)화 (8/123)

8화

“그렇지만 배가 고프다고 하시니까.”

“나, 난 그런 적 없어!”

왕자가 아이처럼 고개를 획 돌렸다. 뭐지. 어떡하라는 거지.

난감해진 나는 예니체 경을 바라보았다. 그도 딱히 좋은 방법이 떠오르진 않았는지 예니체 경은 어깨를 으쓱이려다 짧게 신음했다.

“안 드세요? 그러면 제가 먹고요.”

왕자와 입씨름할 틈은 없었다. 나는 초콜릿을 내 입 안에 털어 넣었다. 그러자 은발의 미소년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어떻게든 제게 초콜릿을 먹이려고 하는 줄 알았나 보다.

“왕자님은 어차피 여기서 나가지 않으실 테죠. 그렇다면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먹을거리를 챙겨 올라올 테니까요.”

“…….”

배고픔 앞에는 장사가 없는 모양이었다. 당연히 싫다는 둥, 필요 없다는 둥 할 줄 알았던 그가 입을 굳게 다물었다.

그렇다면 내 방에 들렀다 식당에도 가서 식사를 가지고 또 이 높은 곳까지 올라와야 하겠구나. 여기선 살이 찔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나는 한숨을 내쉰 후 멀뚱히 서 있는 예니체 경을 지나쳐 갔다. 문가에 서서 슬쩍 안을 확인하자, 예니체 경이 말없이 왕자에게 고개를 숙이는 것이 보였다. 왕자는 경계 가득한 눈초리를 하고 기사를 힐끔거렸다.

“그러고 보니 저도 배가 고프군요.”

“어깨가 따끔거리진 않으시고요?”

“간지러운 수준입니다.”

몰랐는데 예니체 경의 허세가 상당하다고 생각하며 나는 계단을 내려갔다. 그래도 큰일이 벌어지진 않아서 다행인가. 고작해야 팔뚝만 했던 새끼 강아지가 그렇게 커다란 짐승으로 변할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왕실에서는 이 사실을 알고 있나? 아마 그렇지 않을 것이다. 국왕 부부는 사람이 아닌 모습으로 태어난 왕자에게 극심한 거부감을 가졌다. 그리고 이름 없는 성에 왕자를 유폐시킨 후에는 단 한 번도 제 아들을 보러 오지 않았다.

“오늘 있었던 일을 본성에 보고할 예정인가요?”

예니체 경의 방과 마주하고 있는 내 방에 도착할 즈음, 나는 물었다. 아무 생각도 없어 보이는 얼굴로 제 어깨를 내려다보고 있던 그가 고개를 들었다.

“아뇨. 국왕 전하께선 되도록이면 이름 없는 성의 소식을 듣지 않길 원하십니다.”

“만약 알게 되신다 해도 별로 좋은 얘기는 못 들을 거고요.”

“그전에, 저같이 좌천된 일개 기사 따위가 부상을 입었다 한들 관심조차 끌지 못할 겁니다.”

“어머나. 그렇게까지 말씀하실 필요는.”

나는 예니체 경을 데리고 방으로 들어갔다. 그러고는 책을 읽을 때나 사용하는 작은 의자에 그를 앉혔다.

내가 구급상자를 챙기는 동안 그는 내 방을 조용히 둘러보았다. 검은 드레스만 가득한 옷장 하나에 로맨스 소설이 잔뜩 꽂혀 있는 책상, 그리고 메이드가 쓰기엔 꽤 널찍한 침대 하나.

전에 있던 저택과는 비교도 할 수 없게 좋은 내부였다. 전에는 메이드 네 명이 방 하나를 함께 썼다.

“방이 많이 좁군요. 맞은편에 있어서 제 방과 크기가 비슷할 줄 알았습니다.”

“네? 저는 이 방이 새삼 넓다고 생각 중이었는데요.”

“…아, 그렇습니까.”

예니체 경이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평소에는 웃지도 않는 사람이라 그런지 미소 짓는 모습이 아주 볼만했다. 망한 집안이라 한들 귀족인 그가 쓰는 방과 내 방이 다른 건 당연한 사실이었다.

이럴 때 보면 예니체 경도 좀 멀게 느껴진다니까. 나도 이왕 환생할 거라면 귀족이나 왕족이 좋았다. 돈 많은 백수로 태어나 무료하게 시간을 보내면서 살고 싶었다.

“피가 굳어서 좀 닦아 내야 할 것 같아요. 괜찮으실까요?”

“아, 네.”

나는 깨끗한 천에 소독약을 들이부었다. 고통스러울 만도 하건만, 그는 묵묵히 어깨를 내민 채 인내했다.

상처를 치료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예니체 경의 말마따나 피가 많이 흐른 것치고는 별로 심각한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왕자는 진짜로 화가 나면 그런 거대 짐승으로 변하는 것일까. 성인 남자를 압도적으로 짓누를 만큼 위협적인 짐승으로.

회귀 전에는 몰랐던 사실을 하나 알게 되었다. 앞으로는 절대로 왕자를 분노하게 만들지 말자.

나는 속으로 다짐하며 붕대에 매듭을 묶었다.

“자, 다 됐어요.”

“고맙습니다. 이제 저는 성을 지키러 나가 봐야겠습니다.”

“어차피 아무도 오지 않는 성을 열심히도 지키시네요.”

“아예 아무도 오지 않는 건 아닙니다. 가끔 길을 잘못 들어 근처까지 오는 귀족들도 있거든요.”

“오….”

“이곳이 이름 없는 성이라 설명하면 다들 꽁무니를 빼고 도망치지만.”

“그런데 그렇게까지 무서워할 필요가 있을까요? 아, 물론 오늘 왕자님은 좀 무섭긴 했지만요.”

“…다프네 양도 경각심을 가지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왕자님께 상냥한 건 좋지만, 언제 또 오늘 같은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까요.”

예니체 경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먼저 가 보겠다며 그가 나간 방에는 핏물에 젖은 에이프런이 남아 있었다.

그런가. 나는 왕자를 조심해야 하는 걸까. 하지만 나는 왕자에게 목숨을 빚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회귀 전의 나는 그를 위해 해 준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매일 밤 꿈에 나오는 그는 오직 나만이 그를 끔찍한 짐승 버러지 취급하지 않았다고 속삭였다. 하지만 나는 왕자에게 무심할 정도로 관심이 없었을 뿐인데….

대체 왕자는 얼마나 지독한 외로움을 겪어 왔으면.

그것도 그렇게나 잘생긴 사람이.

“…….”

성 안에만 갇혀 살기엔 왕자의 미모가 너무나도 아깝다. 이 세계에도 연예인이 있었더라면 왕자는 아이돌이나 영화배우로 평생을 먹고살았을 것이다.

안타까운 일이다. 나는 혀를 쯧쯧 차며 식당으로 향했다. 사람이 짐승으로 변하는 게 뭐 그리 대수라고. 전생에서 읽었던 로맨스 소설의 남주인공들은 아예 수인인 경우도 허다했는데.

나는 식당에서 왕자가 먹을 닭고기 수프와 버터가 듬뿍 들어간 롤빵, 차게 식힌 돼지고기 요리를 챙겼다. 그리고 또 등산했다. 아니, 꼭대기 층을 향한 여정에 올랐다.

“후….”

과거로 돌아온 지 벌써 일주일째 이 계단을 오르고 있어 근육통은 따로 없었다. 하지만 오를 때마다 욕지거리가 나오는 건 여전했다. 대체 어떻게 하면 왕자를 아래층에 살게 할 수 있을까?

이윽고 꼭대기 층에 다다른 나는 예니체 경이 망가뜨려 닫히지 않는 문틈 사이로 왕자를 찾아냈다. 그 역시 인기척을 느낀 듯, 곧바로 나를 돌아보았다. 왕자의 움직임에 따라 흔들리는 은빛 머리칼이 어슴푸레한 어둠 속에서 반짝였다.

“저 왔어요. 문이 닫혀 있질 않아서 노크는 하지 않았어요. 어서 드세요. 시장하시죠?”

나는 비스듬하게 기울어진 문가를 가리키며 말했다. 왕자는 로봇처럼 딱딱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힐끔힐끔 나를 쳐다봤다.

그는 여전히 서늘한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옷을 걸치지도 않았다. 커다란 천에 몸을 감싼 채, 제게 다가오는 나를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식사를 하신 후에는 평소처럼 밖에 쟁반을 놔둬 주세요. 제가 알아서 가져갈게요.”

“…오늘은, 나를 건드리지 않을 거야?”

“네? 제가 언제 왕자님을 건드렸다고 그러세요.”

“거, 건드렸잖아! 귀, 귀엽다고 막 그러면서, 나를 막 만지작거렸잖아. 내 배를 까뒤집어서 아래도 확인하고.”

“아, 아니… 그렇게 말씀하시면 제가 불한당이라도 된 것 같잖아요. 그리고 따지고 보면 먼저 귀여운 아기 강아지로 변한 왕자님 잘못인데.”

“부, 불한당…?”

아뿔싸. 왕자는 불한당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몰랐다. 고개를 갸웃거린 그가 억울한 눈을 하고 나를 올려다봤다. 보호 본능을 일으키는 애틋한 모습에 나는 당장에 무릎을 꿇고 사과할 뻔했다.

하지만 그러지는 않았다. 벌써부터 물러났다간 우리 사이의 관계에 진전은 없을 것이다.

“나쁜 놈이라는 뜻이에요. 어쨌든, 저는 밖에서 청소를 하고 있을게요.”

“내 방이… 더럽다면서 왜 바깥을.”

“안에도 할 거예요. 그렇지만 복도가 먼저예요. 왕자님이 아래층에 내려오신다면 굳이 그런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되겠지만….”

나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거미와 동거하는 왕자는 저도 모르는 사이에 생쥐와도 밥을 나눠 먹고 있을지도 몰랐다.

왕자가 최소한의 인간다운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내가 이 한 몸을 불 싸지르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왕자를 향해 꾸벅 고개를 숙인 뒤 복도로 나왔다. 그러고는 소매를 걷어붙이고 예니체 경이 두고 간 먼지떨이를 쥐었다.

하지만 나는 청소를 시작하기도 전에 큰 난관에 봉착했다. 꼭대기 층의 천장이 다른 층들보다 말도 안 되게 높다는 점이었다. 큰일 났다. 까치발을 뻗어도 천장 구석에 있는 거미줄에 닿을 것 같지가 않다.

그렇다면 차라리 바닥부터 시작하는 편이 좋을까? 나는 먼지떨이를 내려놓고 빗자루를 주워 들었다.

“…내, 내가 내려가면.”

“악! 깜짝이야. 식사하고 계시던 거 아니었어요?”

등 뒤에서 들려오는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소리를 내질렀다. 나보다 왕자가 더 놀랐는지 그는 주춤주춤 뒷걸음질을 쳤다. 눈을 둘 곳을 찾지 못하고 이리저리 방황하던 그가 슬그머니 문 뒤로 몸을 숨겼다.

얼굴을 반쯤 내민 왕자가 기다란 손가락으로 문틈을 붙들었다.

“…다 먹었는데.”

“벌써요? 빠르시네요.”

“배가 고, 고팠으니까.”

“언제는 아니라고 하시더니.”

“그, 그건…!”

왕자가 해명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러나 떠오르는 말이 없는지 이내 입술을 세로로 쭉 늘였다. 진짜로 어린아이 같네. 나는 빗자루를 벽에 세워 두고 왕자를 향해 총총 다가섰다. 굵직한 문짝을 사이에 두고 나와 마주 선 그가 우물쭈물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런데 방금 뭐라고 하셨어요? 저랑 같이 내려가 주신다고요?”

“아, 아니. 그건 그러니까, 네가 자꾸 내 침실이 더럽다고 하니까….”

“맞아요. 더러워요. 여긴 사람이 살 만한 환경이 아니에요.”

“하지만 난 여기서 19년을 살았는데….”

“제 말이 그 말이에요! 19년 동안 치운 적이 없었다는 뜻이잖아요. 그러니 얼마나 많은 병균들이 득실거리겠어요?”

“벼, 병균?”

왕자는 병균이라는 말도 몰랐다. 답답했다. 대체 어떻게 말이 통하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왕자는 무식했다. 혹시 어쩌면 글을 읽을 줄도 모르는 거 아니야? 그러고 보면 그의 침실에는 책 한 권도 보이지 않았다.

심심해서 이제까지 어떻게 살았대. 절로 찡그려지는 인상에 왕자가 내 눈치를 살폈다. 대충 병균이 안 좋은 뜻이라는 걸 깨달은 듯, 그가 제 손을 앞뒤로 뒤집으며 관찰했다.

이내 묘하게 시무룩해진 그가 눈을 내리깔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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