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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왕자 길들이기 (7)화 (7/123)

7화

“왕자님! 이거 보세요, 스타킹 공이에요. 왕자님이 그렇게나 좋아하던.”

주먹만 한 공을 빼내 이리저리 흔들었다. 그러자 일순 보랏빛 눈동자가 현재의 상황마저 잊은 듯 내 손을 쫓는 것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덩치가 몇백 배는 거대해졌어도 본성은 바뀌지 않는 모양이었다. 나는 선발 투수라도 된 기분으로 스타킹 공을 있는 힘껏 침실 안쪽으로 던졌다.

“왕!”

짐승…인지, 왕자인지. 아무튼 그는 새끼 강아지였을 때보다 훨씬 큰 소리로 짖으며 단숨에 스타킹 공을 따라 달려갔다.

그사이, 나는 예니체 경의 상태를 재빨리 살폈다. 왕자의 발톱에서 벗어난 순간부터 그는 이미 상체를 일으켜 앉아 있었다.

“괜찮으세요? 많이 다치신 것 같은데….”

“생각보다는 상처가 깊지 않습니다. 구멍이라도 뚫리는 줄 알았지만 자세히 보면 살짝 긁힌 거나 다름없어요.”

“그치만 피를 엄청나게 흘리고 계시는데요.”

“아무래도 왕자님 발톱을 좀 자르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예니체 경이 힘겹게 제복을 벗었다. 안에 받쳐 입은 흰 셔츠가 붉게 물들어 있는데도 그는 제 어깨를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설마, 일부러 힘을 주지 않은 걸까요. 아무리 봐도 저를 봐준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그나마 다행이네요. 하지만 의사에게 상처를 보이는 편이 낫겠어요.”

“의사에겐 뭐라고 하고요.”

“그건….”

그러게. 안 그래도 세간에 어린아이를 잡아먹는 괴물이라 불리는 왕자가 상해를 입혔다는 걸 들킨다면 과연 어떻게 될는지.

그래도 그는 왕족이니 따로 처분을 받진 않을 것이다. 그에겐 이미 갇혀 산다는 것 자체가 벌을 받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으니까.

나는 우물쭈물 망설였다. 그러다 스타킹 공의 크기에 비해 너무나 큼직한 주둥이로 차마 공을 물지 못하는 왕자를 향해 눈길을 던졌다.

그는 새까만 콧등으로 공을 툭툭 건드리며 끼잉끼잉 하고 있었다. 처음엔 몸도 움직이지 못할 만큼 겁을 먹었건만, 지금 저 모습은 또 어쩐지 안쓰러워 보인다.

아무래도 내 눈이 제대로 삔 것 같다. 나는 입고 있던 에이프런의 매듭을 풀어 예니체 경에게 건넸다. 그러곤 그가 에이프런으로 지혈을 하는 것을 확인한 뒤 조심스럽게 왕자의 곁으로 다가갔다.

“공이 너무 작나요, 왕자님?”

“…크르릉!”

“엄마야, 깜짝이야! 그 덩치 좀 어떻게 하실 수 없어요?”

왕자가 나를 돌아보며 울부짖었다. 소스라치게 놀란 나는 자리에서 튀어 올랐다. 그러나 나보다 왕자가 더 놀랐는지, 그는 안 그래도 커다랬던 눈을 동그랗게 뜨고 주둥이를 살짝 벌렸다.

왠지 모르게 억울해 보이는 그가 큼직한 귀를 축 늘어뜨리며 요상한 울음소리를 냈다.

“아우우우….”

“사람 말로 해 주셨으면 좋겠는데…. 그나저나 꼬리가 엄청 크고 탐스럽네요. 한 번만 만져 봐도?”

스리슬쩍 손을 뻗자 보랏빛 동공이 잘게 떨렸다. 송곳니를 보이며 나를 위협하거나 피할 줄 알았는데.

왕자는 복슬복슬한 엉덩이를 천천히 바닥에 붙여 앉았다. 작은 강아지였을 때보다 훨씬 풍성해진 꼬리를 살랑거리며.

“언제 사람으로 변할지 또 모르는 일이니까… 지금 얼른 만져 볼게요. 괜찮나요?”

언제나 그렇듯 왕자에겐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한 걸음을 더 다가가도 그가 경계하는 낌새는 없었다.

꼬리의 길이만 해도 내 허리까지는 오는 것 같다. 나는 왕자의 꼬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언젠가 그와 많이 친해져서, 그의 꼬리를 배에 덮고 낮잠이라도 자고 싶다.

왕자는 제 꼬리를 만지작대는 나를 생전 처음 보는 생명체를 보듯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직전에 예니체 경을 덮쳐 누르며 위협하던 짐승은 더 이상 이곳에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다.

어쩌면 이렇게 온순할 수가. 키가 닿는다면 머리라도 쓰다듬어 주고 싶었다. 나는 은은하게 퍼져 나가는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이렇게 폭신폭신한 꼬리를 혼자만 만지고 있었다니, 반칙이에요. 물론 저는 작고 귀엽고 사랑스러운 강아지 상태일 때의 왕자님을 선호하긴 하지만요.”

“…….”

“하지만 이런 모습도 나쁘진 않네요. 꼭 껴안아 파묻히고 싶어요.”

펑!

그때였다. 내 손길을 피하려는 듯, 피하지 않으려는 듯, 살랑살랑 움직이던 꼬리가 눈앞에서 사라졌다.

그 대신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건 토마토처럼 새빨갛게 얼굴을 붉힌 왕자였다. 상대의 덩치가 작아졌으니 내 시선은 자연히 아래를 향했다.

나와 눈이 마주친 왕자가 허둥지둥 한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손가락 사이로 보이는 눈꼬리가 거대한 늑대였을 때와 같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촉촉하게 젖은 입술이 오물거렸다. 망설이듯 이곳저곳에 눈을 돌리던 그가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나, 나를 두고… 자꾸만 귀엽다니….”

“바닥이 차요, 왕자님. 어서 일어나세요.”

“아, 안 돼! 나 지금 발가벗고 있단 말이야.”

내가 손을 내밀자 왕자가 기겁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 난감해 보이는 그가 뒤늦게 제 아래를 가렸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다 침대 쪽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왕자가 보급받은 옷가지들이 멋대로 널브러져 뽀얀 먼지와 함께 쌓여 있었다.

쟤네는 하루 날을 잡아서 싹 다 빠는 편이 좋을 것 같군. 흠, 하고 고민하던 나는 침대 한구석에 돌돌 뭉쳐 있는 천 자락을 안아 들었다.

그러고는 왕자에게 돌아와 그의 머리 위로 천을 덮어 주었다. 왕자는 천을 끌어내려 제 몸을 대충 가린 뒤 너른 어깨를 움츠렸다.

“이, 일부러 그런 건 아니다. 밖이 너무 시끄러워서… 또 어제처럼 나를 괴롭히려나 싶어 화가 나는 바람에.”

그가 웅얼웅얼 내 뒤를 쳐다봤다. 아, 맞다. 예니체 경!

왕자의 매력에 흠뻑 빠져 잠시 잊고 있었다. 피를 줄줄 흘리고 있던 예니체 경을.

나는 앗, 하고 소리를 내며 입을 가렸다. 뒤를 돌아보니 그가 아까처럼 어이없다는 듯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헛기침을 하며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한숨을 쉰 예니체 경이 작은 신음 소리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니까 이게 모두 다프네 양이 왕자님을 너무 괴롭힌 탓에 벌어진 일이라는 거 아닙니까.”

“아, 아뇨. 괴롭히다니. 말이 너무 심하신 거 아닌가요? 애초에 왕자님이 그렇게 귀엽고 깜찍한 모습을 제게 보여 주지 않았더라면.”

“남 탓을 굉장히 희한한 방법으로 하네요.”

“…으으. 나, 나를 또 귀엽고 깜찍하다고….”

왕자의 갸름한 얼굴이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았다. 예니체 경을 향해 쏘아붙이려던 나는 하려던 말도 잊고 멍하니 왕자를 바라보았다.

저러다 또 변신하려나. 그러나 이번에는 구름 같은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오르지도, 펑! 하는 공기가 터지는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이곳에는 그저 살짝 마른 듯한 키가 큰 미소년 하나가 주저앉아 있을 뿐. 그리고 그의 긴 은빛 머리카락이 몸을 떠는 그를 따라 살랑이고 있을 뿐.

“좋아하시는 건지 싫어하시는 건지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입꼬리가 슬쩍슬쩍 올라가시는 걸 보니 아마 기뻐하시는 거겠죠?”

“…기, 기뻐하지 않았다! 자꾸 내게 이상한 말들을 지껄이니까, 그, 그게 내 기분을 이상하게 해서….”

“귀여워…. 아, 그런데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죠. 왕자님의 매력이 저를 정신 차리지 못하게 하네요.”

“그, 그만해! 그런 말….”

왕자가 눈을 질끈 감고 소리쳤다. 거의 190센티에 육박하는 체격을 가지고도 저렇게 순수할 수 있다니.

경이로운 수준이었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나는 어느샌가 근처까지 다가온 예니체 경의 상처를 살폈다. 그는 언제 상의를 벗었는지 내 주위에는 온통 살색뿐이었다.

에이프런으로 피를 닦아 낸 예니체 경의 어깨는 두툼한 근육으로 멋지게 짜여 있었다. 그리고 그 어깨에는 문신처럼 발톱 자국이 남아 있었다.

“제 방에 구급상자가 있어요. 소독은 물론이고 약을 바르고 붕대를 감을 수도 있어요. 저는 의사를 만나 뵙는 걸 추천하지만….”

“상처가 꿰매야 할 정도로 심하지도 않습니다. 다프네 양에게 부탁하죠.”

왕자를 바라보는 예니체 경의 시선이 아까보다 훨씬 누그러져 있었다. 그도 긴장한 듯 몸을 굳히고 있는 왕자를 안심시키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였다.

왕자의 실체는 괴물이라고 한 사람은 대체 어디로 갔을까. 나는 예니체 경이 왕자에게 입은 상처를 왕실에게 보고한다 해도 차마 말릴 수 없다고 생각했다.

“지금 내려가는 편이 좋을까요? 어, 그럼 왕자님은.”

“저희가 빨리 나가 주기만을 바라고 계실 겁니다.”

“진짜요?”

나는 아쉬운 눈길을 던졌다. 우리 조금만 더 같이 시간을 보낼 수만 있다면 전보다 친해질 수 있을 것 같지 않나? 왕자도 사람이라면 예니체 경에게 미안한 감정을 가지고 있을 터.

“나, 난.”

왕자가 고운 미간을 찌푸렸다. 어제만 해도 왜 저를 건드냐며 바락바락 화를 냈던 그가 지금은 예니체 경의 상처를 힐끗대고 있었다.

저럴 줄 알았으면 내가 먼저 들어와서 왕자의 발톱에 찢길 걸 그랬다. 그랬으면 앞으로 더 당당하고 뻔뻔하게 굴 수 있었을 텐데.

“…맞아. 둘 다 빨리 나가. 어서 내 앞에서 꺼, 꺼져.”

고민하던 왕자가 고개를 떨어뜨렸다. 역시 아직까지는 호감도가 영 부족한 듯하다. 이렇게 생각하니까 꼭 게임 같네.

왕자님 길들이기, 같은. 탑에 갇힌 미소년 왕자님을 육성해 보세요.

씁쓸한 마음에 나는 속으로 헛소리를 지껄였다. 그러다 문득 왕자를 내려다봤다.

꼬르륵.

“나, 나 아니다.”

누가 뭐랬느냐고. 아무도 먼저 입을 여는 이가 없었거늘, 제 발이 저린 왕자가 희번덕 눈을 치켜떴다. 그러나 다음 순간.

꼬르륵.

왕자의 위장이 요동쳤다.

“그러고 보니 벌써 하루도 넘게 굶으셨죠.”

“나, 나 아니라고 했다.”

“게다가 몇 번이고 아기 강아지로 변했다, 엄청 큰 강아지로 변했다 하셨고.”

“엄청 큰 강아지라….”

예니체 경이 내 어휘력에 혀를 내둘렀다. 그런 그를 뒤로하고 나는 검은 원피스 주머니를 뒤적여 잘 포장된 초콜릿 하나를 꺼냈다.

“당장은 드릴 게 없어요. 이거라도 드시면서 기다려 주시겠어요?”

“…이게 뭔데.”

“초콜릿이요. 전임 메이드 말로는 가끔씩 이런 호화스러운 메뉴도 나온다고 하던데… 왕자님은 모르세요?”

“모, 몰라. 난 이런 거 처음 본다.”

왕자는 내 손바닥에 놓인 초콜릿을 받지 않고 유심히 살펴보았다. 설마 아무리 갇혀 살았기로서니 왕자씩이나 돼서 초콜릿을 맛본 적 없단 말인가?

이해가 가지 않았던 나는 포장지를 벗겨 왕자의 입가에 초콜릿을 대어 주었다. 그러곤 깨달았다. 전에 있던 메이드들이 왕자에게 가야 할 음식들을 빼돌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나 보다, 하고.

“무, 무슨.”

“이렇게 먹는 거예요. 아, 해 보세요.”

“그, 그만해라. 나를 어, 어디까지 어린애 취급할 셈이야.”

원래의 창백한 낯빛을 되찾았던 왕자가 삽시간에 또다시 얼굴을 붉혔다. 타인과의 교류가 거의 없다시피 살아온 주제에 어째서 이런 걸 부끄러워하는 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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