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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왕자 길들이기 (6)화 (6/123)

6화

“문을 강제로 열 만한 물건이 보이지 않습니다. 아래로 내려가 쇠막대라도 찾아오는 편이 나을는지.”

“어… 그런데 예니체 경, 저희가 감히 왕자님의 침실에 멋대로 침입해도 되는 걸까요?”

“당연히 안 됩니다. 하지만 이런 경우에는 어쩔 수가 없으니, 처벌을 받게 된다 해도 정상 참작되지 않을까요.”

겉보기에는 차분해 보였던 기사는 은은하게 돌아 있었다. 어깨를 으쓱인 그가 간만에 힘을 좀 쓰겠다며 중얼거렸다.

“잠시만요. 아무래도 오늘은 그냥 내버려 두는 편이 낫겠어요. 왕자님도 처음 침실 밖으로 나오시는 바람에 많이 놀라셨을 테니….”

“그런데 어쩌다 그분께서 식당까지 와 계셨던 겁니까?”

“아, 그건요.”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까. 대화가 길어질 것 같아 나는 잠시 망설였다. 왕자가 만약 문 앞에서 귀를 기울이고 있다면 우리의 목소리가 다 들릴 것이 틀림없었다.

나는 결국 손도 대지 않은 식사를 챙겨 들고 아래로 내려가자 눈짓했다. 예니체 경은 묵묵히 내 뒤를 따라와 주었다.

쉴 새 없이 이어지는 나선형의 계단을 걸으며 아침부터 낮까지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다프네 양은 오늘 본인이 저지른 짓이 있으니 저를 말린 거나 다름없네요.”

어이가 없다는 듯 나를 흘겨보던 예니체 경이 짙은 눈썹을 치켜올렸다.

“저는 얼핏 봐서 왕자님을 제대로 보지도 못했습니다. 그런데 다프네 양은 왕자님을 껴안고, 만지고, 심지어 공놀이까지 하고….”

“원래 강아지를 좋아하셨던가요?”

“가세가 기울기 전엔 산만 한 덩치의 사냥개들을 여러 마리 키우곤 했습니다. 제가 많이 예뻐해 주곤 했죠.”

“왕자님은 진짜 개가 아닌데요.”

“무슨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왕자님께 공을 물어 오라고 던졌던 사람이.”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할 말은 없지만요.”

그렇지만 왕자가 처음으로 내게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었다고. 나는 속으로 투덜거렸다. 그 보석 같은 눈동자가 반짝이는 걸 봤다면 예니체 경도 스타킹 공을 던져 주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다시 식당으로 돌아갔다. 그러곤 남은 미트파이를 해치운 뒤 예니체 경은 성 밖으로 갔고, 나는 식당에 남아 왕자가 먹지 않은 음식을 정리하고 접시를 씻었다.

왕자는 아직 성장기이니 분명 지금쯤 납작한 배를 껴안고 꼬르륵대고 있을 텐데. 대체 하루에 계단을 몇 번이나 오르는지 모르겠지만, 차라리 미리 저녁 식사를 가져다주는 편이 좋을 것 같다.

나는 씻은 접시에 예쁘게 잘라 놓은 미트파이를 포함해 훈제 오리고기를 잔뜩 올려놓은 다음 수프 그릇에 단호박 수프를 넘칠 만큼 옮겨 담았다.

“오늘은 이것만 가져다주고 더는 건드리지 말자.”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꼭대기 층을 향했다. 땀이 식었던 자리에 다시 또 땀이 뻘뻘 흘렀지만, 그 정도는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저녁에는 목욕을 할 예정이었다.

똑똑.

“왕자님, 저 다프네예요. 음… 오늘은 무례하게 굴어 죄송했어요. 많이 놀라셨을 텐데 부디 저를 싫어하진 말아 주셨으면 좋겠고…. 저는 그만 내려갈 테니 저녁은 꼭 챙겨 드세요.”

하지만 왕자는 저녁을 먹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새로 전해 받은 아침 식사를 챙겨 꼭대기 층에 올랐을 때였다. 나는 내가 어제 두고 간 그대로 남겨져 있는 쟁반을 내려다보며 입술을 씹었다.

역시 어제 내가 너무 과했나. 갑자기 엄청난 후회감이 몰려왔다.

“왕자님…. 에휴.”

아련하게 왕자를 부르던 나는 이내 입을 다물었다. 그러다 문득 주위 환경이 눈에 들어왔다.

이름 없는 성은 전체적으로 지저분했다. 그중에서도 꼭대기 층은 가장 지저분했다.

나는 내가 사용하는 방이나 식당 그리고 예니체 경의 침실 정도는 주기적으로 청소하는 편이었다. 이곳에서 전에 일하던 메이드에게 잡일은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그때는 어차피 메이드는 나 하나뿐인데 쓸데없이 힘을 빼지 말라던 그 말을 얼씨구나 좋다고 받아들였었다. 그랬더니 자연스럽게 왕자의 침실은 물론이고 그 바깥의 청결까지도 흐린 눈으로 무시하게 됐다.

그런데 아무래도 이제는 그럴 수가 없을 것 같다. 본격적으로 대청소를 하다 보면 왕자와 다시 마주칠지도 모르고.

“어디 이사 가십니까?”

“아뇨, 꼭대기 층 복도를 좀 치워 보려고요.”

나는 식당에서 막 아침을 먹고 나온 예니체 경과 인사했다. 매일같이 이어지는 바뀌지 않는 일상이 지루할 법한데도 그는 별로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어쩌면 사람 하나 보이지 않는 이름 없는 성의 문지기 역할이 그의 천직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솔직히 하루 종일 멍때리고 있으면 꽤 든든한 녹봉이 나오니 나 같아도 싫을 것 같진 않았다.

“그런 식으로 해서 천천히 왕자님과의 거리를 좁혀 보려는 겁니까?”

“네. 어차피 할 것도 없는데요, 뭐.”

무뚝뚝한 얼굴에 아무 생각 없어 보이는 눈을 하고 있는 주제에 예니체 경은 눈치가 무섭도록 빨랐다. 나는 찔끔 어깨를 들썩이며 양손 가득 쥐고 있는 청소 도구들을 추슬렀다.

예니체 경이 한숨을 쉬었다.

“도와드리겠습니다. 그렇게 가다 넘어지면 답도 없을 테니.”

“말씀을 해도 꼭….”

“네? 뭐라고 했습니까?”

“아뇨, 감사하다고요.”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그와 함께 계단을 올랐다. 확실히 예니체 경이 없었다면 꼭대기 층으로 향하는 데만 해도 체력을 죄다 소모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나저나 대체 어디서부터 청소를 시작해야 할는지. 허리에 손을 올리고 주위를 둘러보고 있으려니 한숨밖에 나오지 않는다. 먼지떨이를 든 예니체 경은 굳게 닫힌 왕자의 방문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고.

“왕자님은… 오늘도 끼니를 거르셨나 봅니다.”

“그러게요. 제가 어제 너무 심했나 봐요.”

“다프네 양은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 왕자님을 만나 뵙고자 한 겁니까?”

“글쎄요… 심심해서였을까요.”

꿈을 꾸었다느니, 과거로 회귀했다느니 그런 말은 당연히 할 수 없었기에 나는 검은 머리 남자의 어이가 없다는 시선을 한 몸에 받아야만 했다.

그가 짙은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

“어리석습니다. 만약 왕자님이 정말로 위험한 괴물이었다면 어떡할 뻔했습니까?”

“하지만 아니잖아요. 경도 직접 보셨잖아요.”

“물론 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천만다행인 줄 아십시오.”

예니체 경이 잔소리가 이렇게 심한 사람인 줄은 몰랐다. 머쓱해진 내가 코끝만 긁고 있자니, 그가 굳은 얼굴을 풀었다.

“혼자서 이 넓은 곳을 청소하기엔 무리가 있을 듯합니다.”

“그래도 계속 이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을 것 같아서요. 아, 경은 이제 그만 내려가셔도….”

쾅!

갑자기 들려오는 부서질 듯한 소리에 우리는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분명 문가에서 소리가 났건만, 그곳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금 조용해졌다.

예니체 경과 나는 놀란 눈을 하고 서로를 마주 보았다. 그가 먼지떨이를 쥔 손으로 방문을 가리켰다.

“전에도 이런 적이 있습니까?”

“아, 아뇨. 단 한 번도.”

“저 너머에는 왕자님 한 분밖에 계시지 않는 걸로 압니다.”

“네, 맞아요. 혹시… 왕자님께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

회귀 전에도, 회귀 후에도 그 누구도 살지 않는 것처럼 고요했던 꼭대기 층이었다. 나는 단박에 침실 쪽으로 달려가 문을 두드리지 않을 수 없었다.

“왕자님! 안에 계세요? 어디 아프신 건 아니에요?”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 대신 다시 한번 쿵! 하는 굉음만 들려와 나를 움츠리게 만들었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지.

초조해진 내가 뒤를 돌아보자 예니체 경이 비켜서라는 듯 내게 고갯짓을 했다. 심호흡을 내뱉은 그가 있는 힘껏 방문을 걷어찼다.

그러나 약간 흔들리는가 싶던 문은 만화처럼 쉽게 부서지지 않았다. 나는 예니체 경을 실망스럽게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이 문은 왕자님을 가둬 놓기 위해 특수한 합금을 섞어 만든 것으로 압니다.”

“갑자기 그런 말씀을?”

“갑자기 전임자가 했던 말이 떠올랐습니다.”

그가 뻔뻔하게 대꾸했다. 그러면서 뭔가 아쉬웠던지 다시 한번 방문을 걷어찼다. 왕자를 위해 별도로 개조한 문이라면 저래 봤자 별 소용없는 게 아닐까.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오래된 돌벽에 금이라도 간 모양인지, 아니면 문의 이음새가 헐거워진 모양인지 예니체 경이 열린 틈 사이로 스르르 미끄러져 들어갔다.

“경? 예니체 경?”

“…다프네 양! 얼른 피하십시오!”

다급한 외침과 함께 문이 활짝 열렸다. 무슨 일인가 싶어 어안이 벙벙해진 찰나, 바닥에 눕혀져 끙끙대고 있는 예니체 경이 보였다.

기사의 그을린 피부로 뚝뚝 떨어지는 침과 그의 어깨를 붙잡고 있는 사람 머리만 한 앞발. 나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뭐, 뭐죠?”

그도 그럴 것이 예니체 경이 생전 처음 보는 거대한, 늑대를 닮은 짐승에게 붙들려 바닥에 쓰러져 있던 것이다.

나는 본능적으로 뒷걸음질을 쳤다. 짐승의 크기가 과장을 좀 보태 집채만 하게 컸다. 새하얀 털을 바짝 세운 그것은 예리한 동공을 번뜩이며 내 쪽을 쳐다봤다.

크르르르릉. 커다란 주둥이가 벌어져 날카로운 송곳니가 드러났다.

“다프네 양! 그대로 물러나 성을 빠져나가십시오! 그리고 본성에 가서 지원을… 윽!”

고개를 돌려 날 바라보던 예니체 경이 얼굴을 와락 찌푸렸다. 매서운 발톱이 그의 어깨를 파고들었다.

물감처럼 번져 나온 핏물이 기사의 제복을 적셨다. 입가를 손으로 막은 나는 그 자리에 서서 조금도 움직일 수 없었다.

저 무시무시한 짐승은 어제까지만 해도 내 품에 폭 안겨 있던 귀여운 강아지가 틀림없었다. 그런데 대관절 어떻게 된 노릇인지, 지금은 그 깜찍한 모습을 찾아보려야 찾아볼 수가 없다.

코끼리만 한 덩치를 마주 보고 있자니 식은땀이 뻘뻘 흐르고 온몸이 멋대로 덜덜 떨렸다. 차마 저 위협적인 눈빛을 피하지도 못하고, 나는 눈 한번 깜빡이지 못한 채 주춤거렸다.

“…다프네 양! 다프네! 정신 차려요! 까딱하다간 우리 둘 다 개죽음입니다!”

“하, 하지만….”

“내 말 들어! 이 괴물은 당신이 멋대로 사랑스럽게 여기던 왕자의 실체입니다!”

“왕자님은 괴물이 아니에요!”

드디어 정신을 차리고 소리칠 수 있었다. 내가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울먹이자, 집채만 한 짐승이 움찔거렸다. 사나운 송곳니를 감추듯 주둥이를 천천히 다문 그가 불시에 생겨난 고요 속에서 나를 응시했다.

“차, 착하지. 왕자님. 부탁이니 예니체 경을 놔주세요.”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러면서 진정하라는 듯 양손을 허공에 들고 느릿느릿 위아래로 오르내렸다.

짐승이 내 말귀를 이해했는지는 모르겠다. 그는 그저 크르릉, 하는 소리를 내며 다시금 이빨을 보일 뿐이었다.

대체 어떻게 하면.

고민하던 내 머릿속에 어느 순간 환한 불이 켜졌다. 나는 왕자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에이프런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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