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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왕자 길들이기 (5)화 (5/123)

5화

“후… 왕자님. 하루에 몇 번씩 변신하시는 건가요? 싫어서 그러는 게 아니고 궁금해서 여쭤봐요.”

“끼우웅….”

잠깐이지만 왕자였던 강아지는 이불 속에서 나오려고 하지 않았다. 겁을 먹은 듯 웅크린 자세는 안 그래도 작았던 몸집을 더욱 하찮아 보이게 만들었다.

사람일 적에는 무슨 농구 선수만 하게 키가 크더니만, 강아지일 때는 이렇게 아담한 이유가 무엇일까? 의문이 들었지만 그렇게까지 궁금한 것은 아니었으니 나는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별로 상관은 없긴 하지만요. 그보다 전 지금 나가 봐야 할 것 같아요. 잠시만 여기서 기다려 주시겠어요?”

강아지 상태의 왕자에게 말을 거는 건 혼잣말에 가까웠다. 차라리 짖기라도 하든가, 아니면 동글동글한 얼굴이라도 보여 주든지 해서 무슨 반응이라도 해 주면 좋겠지만 그는 꼬리마저 슬그머니 이불 안으로 감춰 버렸다.

다시 사람으로 돌아와도 나체일 테니 부끄러움이 많은 왕자가 이 방에서 나갈 일은 없겠지. 나는 침대 위에 그가 좋아하던 스타킹 공을 올려다 두고 조용히 밖으로 나왔다.

식당에는 이미 예니체 경이 멀뚱멀뚱 의자에 앉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바구니에 있던 미트파이를 두 조각 잘라 예니체 경에게 건네주었다.

“기사님과 얼굴을 맞대고 식사를 하는 날이 오게 될 줄은 몰랐어요. 더구나 경이 먼저 저를 불러 주실 줄은.”

“이름 없는 성에 살다 보면 신분 같은 건 잊게 되기 마련입니다. 그보다는 피부로 느껴지는 외로움이 더 크게 다가오죠.”

검은 머리의 기사는 담담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런 것치고 회귀 전에는 먼저 다가오는 법이 없던데?

그래도 나는 기뻤다. 무슨 이유로 과거로 돌아오게 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벌써부터 뭔가가 달라지고 있는 게 보여 한편으로는 뿌듯하기도 했다.

어쩌면 이번에는 예니체 경도 살아남을 수 있을지도 몰라.

세스나 제국이 레르베 라예트 왕국을 침공하던 날, 이 무뚝뚝한 기사는 왕성으로부터 들려오는 폭음을 듣고 상황을 보러 나갔다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다.

홀로 불안에 떨던 나는 예니체 경을 찾을 겸, 무슨 일인지 확인도 해 볼 겸 이름 없는 성을 나섰다 기둥에 깔리는 사고를 당했고.

“그렇군요. 그런데 그건 왕자님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나는 미트파이를 포크로 콕콕 찔러 보다 물었다. 경과 나는 그래도 한 달에 한 번씩 휴가를 받아 성을 빠져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왕자에게는 그조차도 허락되지 않는다. 사실상 이름 없는 성 전체가 왕자의 소유이건만, 그가 꼭대기 층 아래로 내려오는 일은 절대로 없었다.

소문과는 다르게 보통 사람이나 다를 바 없는 그 또한 사무치는 외로움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토록 회귀 전의 내게 고마워했던가.

저를 두려워하지 않고 오래도록 성에 있어 줘서. 때때로 안부를 묻거나, 밖에서 꺾어 온 꽃이며 상업 지구에서 사 온 달콤한 케이크를 선물해 줘서.

“글쎄요… 아마도 그렇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제까지 왕자님의 기분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 적이 없군요.”

“경은 왕자님을 실제로 마주한 적이 있으신가요?”

“아니요, 없습니다. 제가 꼭대기 층에 향한 적은 첫 근무를 서던 날뿐이었습니다. 문밖에서 왕자님께 인사를 드리고 내려왔었죠.”

“그때 그분은 뭐라고 하시던가요?”

“아무런 말씀도 하지 않으셨던 것 같습니다.”

6개월 전이면 그렇게 오래된 것도 아닌 것 같은데 예니체 경은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그가 단숨에 접시를 비우기에 나는 미트파이를 한 조각 더 덜어 주며 말했다.

“경. 실은 저, 왕자님을 만났어요.”

“…대체 언제 말입니까?”

쨍그랑. 예니체 경이 바닥에 포크를 떨어뜨렸다. 믿을 수 없다는 듯 동요하는 검은색 눈이 나를 향했다.

이렇게나 가까이 왕자의 곁에서 일상을 보내는 자조차도 그에 대한 진실을 알지 못한다. 예니체 경은 아주 조심스러운 태도로 내게 물었다.

“그… 다치지는 않으셨습니까?”

“다쳤다면 제가 이렇게 경과 미트파이를 나눠 먹고 있을까요?”

“그것도 그렇군요. 하지만 듣기로는 굉장히 위험한 분이시라고.”

“위험하다면 위험하죠. 위험할 정도로 귀여우신 분이시거든요.”

“네? 저희 지금 아셰라드렌 왕자님에 대해 이야기하는 거 맞습니까?”

“그럼 저희가 예니체 경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을까요?”

“제가 귀엽지 않다고 말씀하고 싶으신 겁니까?”

“아뇨, 그렇게 말하지는….”

갑자기 목이 말라 나는 꿀꺽꿀꺽 물을 마셨다. 예니체 경은 머쓱한 듯 뒷덜미를 슥슥 쓰다듬더니 이내 떨어진 포크를 줍기 위해 허리를 숙였다.

“…다프네 양.”

그러고는 어정쩡한 자세 그대로 나를 불렀다.

“네, 예니체 경.”

“혹시 애완동물 키웁니까?”

“아뇨. 항상 키우고 싶다고 생각은 했지만요.”

“그렇다면 혹시 어느 귀부인의 강아지가 길을 잃고 이름 없는 성에 흘러들어 올 가능성은?”

“이름 없는 성 주위를 산책하는 귀부인이 과연 세상에 존재나 할는지… 아.”

식당 문을 열어 두었던가. 생각이 나지 않는다. 이곳을 이용하는 사람은 나와 예니체 경 둘밖에 없다시피 했으니까.

나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열린 문 사이로 한쪽 눈만 빼꼼 내밀고 있는 강아지 왕자가 얼음처럼 굳어 있는 것이 보였다.

나와 시선이 마주친 순간, 왕자는 눈 깜짝할 새 시야에서 사라졌다.

“와, 왕자님? 잠시만요.”

“다프네 양, 방금 저 새끼 강아지를 뭐라고 불렀습니까?”

“죄송해요. 잠깐 실례할게요.”

어느새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앉은 예니체 경이 물었다. 그러나 나는 그에게 설명할 새도 없이 식당 밖으로 달려 나가야만 했다.

강아지 상태일 때의 왕자는 다리도 짧은 게 쏜살같이 빨랐다. 나는 제 몸보다 큰 계단을 요리조리 쏙쏙 잘도 뛰어 올라가는 왕자를 열심히 쫓아갔다.

잡힐 듯 말 듯 잡히지 않는 왕자와의 추격전은 끝도 없이 이어진 나선형의 계단이 더 이상 보이지 않을 즈음에야 막을 내렸다.

쾅! 왕자가 들어간 꼭대기 층의 방문이 커다란 굉음을 내며 굳게 닫혔다. 숨넘어가겠네. 나는 헐떡이며 뺨을 타고 흐른 땀을 닦아 냈다.

“왕자님. 왕자님?”

남아 있는 체력을 짜내 세차게 문을 두들겨 봤지만 들려오는 대답은 없었다. 거기다 안에서 철컥, 철컥하며 잠금장치를 설치하는 소리만이 내 귓가를 울렸다.

겨우 내 발바닥만 한 강아지가 대체 무슨 수로 잠금장치를 만지고 있나. 고개를 갸웃거리던 나는 문득 그가 이 짧은 사이 인간으로 되돌아왔음을 직감했다.

“왕자님. 아셰라드렌 왕자님. 저희 약속했잖아요. 당분간 이 침실은 쓰지 않기로.”

물론 그건 나 혼자만의 일방적인 부탁이었지만 아무튼. 나는 모처럼 바깥 공기를 좀 마시게 해 줄까 했더니 도로 칩거 모드로 되돌아간 왕자가 야속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왕자의 입장에선 어느 날 갑자기 들어온 내가 심하게 적극적으로 구는 것이 부담스러울 수도 있었다.

하지만 설마 내가 왕자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았느냐 하면, 그렇다. 고려하지 않았다. 다만 처음에는 나도 얼굴을 마주하는 것만으로 만족하고 돌아갈 예정이었다. 왕자가 마음을 여는 속도에 맞추어 게임처럼 차차 친밀감을 쌓아 갈 예정이었고.

내가 예상치 못한 것은 무시무시한 괴물이라던 왕자의 실체였다. 강아지일 적의 그가 납치하고 싶다는 충동이 일 정도로 깨물어 주고 싶게 깜찍했던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생각해 보라. 지금 눈앞에 나를 보고 겁을 먹은 강아지 한 마리가 있다면. 그리고 그 강아지는 주인이 없고, 아주아주 더러운 곳에 홀로 살고 있다면.

심지어 그 강아지는 털이 하얗고 보드랍고 발바닥은 내 손톱만큼 작은 데다 겉으로는 나를 무서워하면서도 꼬리는 분명하게 나를 반기고 있었다.

작고 소중한 생명체를 아낄 줄 아는 자라면, 그를 품에 안아 제 방에 데려가지 않고는 못 배길 것이 분명했다.

“꼭대기 층에는 오랜만에 올라오는군요.”

끙끙거리며 어떡해야 다시 문을 열 수 있을까 고민하던 찰나였다. 계단 손잡이를 잡고 나타난 예니체 경이 내 뒤에 섰다.

나와 왕자의 추격전을 구경하다 뒤늦게 따라오기라도 했던 건지 그의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기사가 오르기에도 힘든 계단이라니. 회귀 전의 나는 잘도 이런 곳을 1년 내내 왔다 갔다 했구나 싶다.

“무슨 일인가 싶어 와 봤습니다. 그런데 제가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다프네 양이 아까 그 새끼 강아지를 두고 왕자님이라고 부르던 것 같은데요.”

“잘못 들으신 게 아니에요. 그분이 왕자님이세요.”

“어느 귀부인의 잃어버린 반려견이 아니라.”

“상식적으로 어느 귀부인이 이름 없는 성에 가까이 다가오겠어요?”

“그것도 그렇군요.”

예니체 경은 빠르게 납득했다. 하지만 세상 무해해 보이던 강아지가 왕자라는 부분에 대해서는 아직 받아들이지 못한 것 같았다.

그도 ‘왕비가 낳은 사람이 아닌 존재’에 대해서는 익히 알고 있을 터였다. 그리고 그러한 표현이 선사하는 이미지는 확실히 러블리한 느낌은 아니었다.

“저는 당연히… 왕자님께서는 집채만 한 덩치를 가진 털북숭이 짐승으로 성장하셨을 거라고….”

“쉿. 그런 말씀 말아 주세요. 왕자님께서 들으시면 어떡하시려고요.”

“죄송합니다. 이렇게 가까이에 있으면서도 소문만 듣고 멋대로 판단하다니. 이건 제 불찰입니다.”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왕자님께선 위험할 정도로 귀여우시다고. 하지만 이젠 저렇게 문을 꼭꼭 잠가 두셨으니….”

나는 한숨을 쉬며 왕자의 내면처럼 단단히 잠긴 문을 아련하게 바라보았다. 예니체 경은 말없이 나를 응시하더니 한참 후에 대뜸 물었다.

“왕자님의 아침 식사가 아직 밖에 나와 있군요. 배가 고프지 않으신 걸까요?”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벌써 점심때니 두 끼나 거르시게 됐네요.”

“그런 건 별로 좋지 않습니다. 왕자님께서 식음을 전폐하셨다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저희는 처분을 받게 됩니다.”

“아뇨, 겨우 두 끼 걸렀다고 식음을 전폐한다고 보는 건 좀.”

“다프네 양. 저희는 왕자님의 건강과 안위를 위해 고용되었습니다.”

“아.”

그제야 나는 예니체 경의 말귀를 알아들었다. 그는 근처를 둘러보며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직전까지도 왕자를 위협적인 존재로 간주하던 출셋길이 막힌 기사는, 이제 왕자의 방문을 뜯어 부수려고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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