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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왕자 길들이기 (2)화 (2/123)

2화

모르겠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모르겠다.

왕자와 나는 1여 년간의 시간을 함께했지만, 이걸 함께했다고 봐야 할까 싶다.

과거의 나는 내 업무에만 충실했다. 때가 되면 왕자의 침실 앞에 쟁반을 두고 사라졌다. 물론 가끔은 방에 틀어박혀 코빼기도 비추지 않는 왕자가 심심할까 봐 읽을거리를 두고 간 적이 있기는 했지만.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나는 저주를 받았다는 소문이 도는 왕자에게 철저히 무관심했다.

예니체 경과도 말을 섞은 적이 별로 없었다. ‘이름 없는 성’은 삭막한 공간이었다. 그러나 나는 전생에서도 현생에서도 심각할 수준의 로맨스 소설 중독자였기에, 심심할 틈은 없었다.

“실례합니다.”

“아, 예니체 경.”

그래도 이왕 회귀했으니 뭔가 달라져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이제 나는 예니체 경과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지낸다.

회귀 전에는 이런 것도 하지 않았다. 예니체 경이 성 밖을 지키고 있다 시간에 맞추어 식사를 하고 다시 밖으로 나갈 때면 나는 할 일도 없으니 내 방에 틀어박혀 책을 읽거나 낮잠을 잤다. 그렇게 우린 ‘이름 없는 성’의 유일한 존재들이지만 서로를 모르는 체하며 살고 있었다.

재미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일상이었다.

“여기, 예니체 경의 식사를 덜어 두었어요. 차 한잔하시겠어요? 아니면 주스?”

“차가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내가 부모 없는 고아 출신이라 이곳에 오게 됐다면, 예니체 경은 군대 생활을 하다 높으신 분의 눈 밖에 나 이곳으로 유배 아닌 유배를 오게 됐다.

처음에 그는 전쟁터에서는 마른 빵과 육포만으로도 충분하다며 내 호의를 한사코 거절하려 했다. 아마 평민 신분인 나와 말을 섞는 것 자체에 거부감이 있었으리라.

그러나 과거로 돌아온 뒤부터 내가 그의 앞에서 보란 듯이 뜨거운 차에 우유와 설탕을 듬뿍 때려 넣은 향긋한 밀크티를 해 먹자 조금씩 내 쪽을 쳐다보는 일이 많아졌다.

전쟁터의 군인도 뭐가 맛있고 뭐가 맛없는지는 안다. 지금의 예니체 경은 내가 끓여 준 차를 마시는 것을 아주 좋아했다.

“오늘 점심은 미트파이예요. 저녁으로는 훈제 오리고기에 단호박 수프고요. 벌써 기대되지 않나요?”

“기대됩니다. 다프네 양이 오고 나서는 따뜻한 음식을 먹을 수 있게 되어 기쁩니다.”

“그전에는 식어 빠진 음식만 드셨다고요.”

“네, 이름 없는 성에서 일하려는 메이드는 구하기가 쉽지 않고, 구한다고 해도 사흘을 채 넘기지 못하고 그만두니까요.”

예니체 경은 내 맞은편에 앉아 베이컨을 잘라 먹었다. 그 역시도 이제 겨우 반년이 넘게 이곳에서 근무 중이었다.

이름 없는 성에 감히 침입하려는 자들은 사실상 없다고 봐도 좋았다. 그러니 대놓고 말해서 문지기는 필요 없는 역할이었다.

하지만 명목이라는 게 있으니, 왕실은 꿋꿋하게 죄를 지은 기사나 예니체 경처럼 왠지 줄을 잘못 섰을 법한 귀족들로 하여금 성을 지키게 했다.

메이드들은 대부분 나처럼 오갈 데 없는 고아 출신들이 많았다. 그러나 왕자에 관한 소문을 듣고 지레 겁을 먹고 튀어 버리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흉측한 몰골을 하고 있다던가, 기괴한 울음소리를 낸다던가.

소설의 내용을 몰랐더라면, 회귀를 하지 않았더라면 아마 나도 그들과 비슷한 이유로 직장을 그만두지 않았을까? 이 나라에서 아셰라드렌 왕자는 실체 없는 괴물이었다.

국왕과 왕비를 제외하고는 그를 본 사람이 없는데도, 레르베 라예트 왕국의 국민이라면 저잣거리의 아이들조차도 그에 관한 소문을 알고 있었다.

‘아셰라드렌 왕자는 사팔뜨기에 곱사등이, 밤이 되면 악마로 변해 아이들을 잡아먹는대요!’

그것은 왕국의 부모들이 아이들을 혼낼 때면 불러 주는 노래였다. 하지만 실제로 왕자를 마주했던 나는 그 노래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소설 <공주는 꺾이지 않는다>에서는 아셰라드렌 왕자에 관한 에피소드가 아주 짧게 정리되어 있었다. 여주인공 레티스를 낳기 전에 먼저 왕자를 출산했던 왕비와, 첫 후손을 보기 위해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국왕에 관해서.

“왕자님입니다! 왕비께서 왕자님을 낳으셨어요!”

지금으로부터 약 19년 전, 산파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외쳤다. 그 소리를 듣고 나타난 국왕은 저를 꼭 닮은 보랏빛 눈을 한 아기를 보고 함박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행복은 찰나에 불과했다. 땀으로 범벅이 된 왕비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제 아이를 안으려고 할 때였다. 국왕과 산파는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했다.

왕비의 품에서 순식간에 털북숭이 짐승으로 변해 버린 아셰라드렌을.

“꺄악! 아니야! 아니라고! 이런 거, 내가 낳지 않았어!”

인간이 낳은 아기가 눈앞에서 짐승으로 변했다. 아직 핏덩이에 불과했던 왕자는 하얀 털이 복슬복슬한 괴생명체가 되어 있었다.

왕자의 입은 주둥이였고, 코는 새카맣게 물들어 있었으며, 무엇보다 인간에게는 없는 꼬리가 달려 있었다. 왕비는 그 자리에서 그대로 혼절해 버렸다.

국왕은 그 즉시 허리춤에서 뽑아 든 검으로 산파의 목을 그어 버렸다.

그것으로 왕자의 부모를 제외하고는 그의 모습을 목격한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게 되었다.

왕은 예로부터 죄를 지은 왕족들을 살게 하던 ‘이름 없는 성’에 왕자를 가둬 놓았다. 그러고는 유모를 선별해 왕자를 기르게 만들었다.

어차피 유모를 뽑을 거면 대체 왜 그 산파는 죽였는가? 자신의 씨로 낳은 생명체를 받아들여야 하는 분노를 참지 못해서?

그 부분은 아직까지도 이해가 가지 않는 점 중 하나였지만, 어쨌든 왕은 그날 이후로 단 한 번도 왕자를 보러 가지 않았다.

아셰라드렌은 국왕 부부에게 있어 잔인한 추억이자, 그들의 배로 낳았기에 차마 죽일 수는 없던 괴로운 골칫거리였다.

그러나 다음 해, 국왕 부부가 레티스 공주를 낳은 후에는 왕자도 서서히 그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져 갔다. 부부는 멀쩡하게 열 개의 손가락과 열 개의 발가락을 가지고 태어난 공주를 보고서 안심했다.

다행이다. 우리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었어.

부부는 아셰라드렌에게 줄 예정이었던 애정까지 끌어모아 레티스를 사랑했다. 레티스는 힘들고 어려운 일일랑 아무것도 모르는 그저 행복한 철부지 공주님으로 자라났다.

하지만 아셰라드렌은? 소설에서는 그 이상 왕자에 관한 이야기가 실려 있지 않았다.

“…저, 잠시 꼭대기 층에 다녀올게요. 지금쯤이면 왕자님께서도 식사를 마치셨겠죠.”

“저도 이만 근무를 서러 가야 합니다.”

“그러면 같이 나가요.”

식당에서 나온 나는 예니체 경과 나뉘어 계단을 올라갔다. 하루에도 몇 번이고 이 높은 층계를 오르고, 또 오르는 건 상당한 체력을 요구하는 일이었다.

어떻게, 이번에는 왕자를 아래층에 살게 할 수는 없나? 운동으로는 더할 나위 없이 좋긴 한데 솔직히 너무 힘들다. 나는 숨을 헉헉거리며 꼭대기 층에 다다랐다.

그러고는 발견했다. 아직 손도 대지 않아 아침나절에 내가 두고 간 그대로 남아 있는 식사를.

뭐야. 나랑 얼굴을 마주한 게 그 정도로 충격이었나? 식음을 전폐할 정도로?

똑똑.

“왕자님. 아셰라드렌 왕자님.”

“…….”

역시나 이번에도 들려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러나 왠지 모를 오기가 생긴 나는 계속해서 왕자의 방문을 두드렸다.

똑똑.

똑똑.

똑똑.

똑똑 똑똑 똑똑 똑똑 똑똑 똑똑 똑똑 똑똑 똑똑 똑똑.

똑….

“그만!”

한참이 지나서야 방문 안에서 반응이 튀어나왔다. 진작에 이렇게 할 것을 그랬다. 나는 왕자에게 묻고 싶은 것이 아주 많았다.

어째서 나를 살려 주었나요? 어째서 지난 생에 한 번도 마주하지 않았던 나를 곧바로 알아보았나요? 만약 나를 두고 홀로 대피했더라면, 조금이라도 더 오래 살 수 있었을 텐데….

아니다, 그건 아닐지도 모르겠다. 오래전 국왕 부부는 시름을 앓다 못해 왕자의 향후에 관해 묻기 위해 신전을 찾았다.

“그는 건국왕 기르시의 피를 짙게 타고난 반신(半神)입니다. 건국왕이 그리하였던 것처럼, 운명의 반려를 만나지 못한다면 성년을 맞이하지 못하고 인간계를 벗어날 겁니다.”

하지만 왕자는 성년을 맞이한 뒤에도 반년을 넘게 더 살았다. 레티스 공주를 제외하고는, 남은 왕족들 중에서 가장 오래 살았을 것이다.

아셰라드렌이 스무 살을 넘기고도 계속 살아 있자, 국왕 부부는 더 이상 신탁을 믿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얼마 있지 않아 왕국이 사라지게 될 것이라는 예언도 믿지 않았다.

그러나 결국 레르베 라예트는 불바다가 되어 사라졌다. 왕자도 반려를 맞이하지 못하고 죽고 말았다.

안타까운 일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이번 생에 왕자의 반려를 찾아 주고 싶었다.

절대로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유폐된 왕자는 성 밖은커녕, 침실 밖으로도 한 발자국 나오지 않고 있었으니까.

만약 내가 왕자의 반려를 찾아 주지 못한다고 해도, 적어도 내게는 왕자에게 목숨을 빚졌다는 의무감이 있었다. 게다가 만에 하나의 만에 하나의 만에 하나 내가 왕자의 반려일 가능성도….

“제발 나를 내버려 둬! 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 대체!”

음, 설마 그럴 리는 없겠지. 그렇게 된다면 그거야말로 소설이 아닌가 싶다. 나는 폭격처럼 쏟아지는 노크 세례에 질린 듯 소리치는 왕자의 모습을 그려 보며 웃음을 참아 냈다.

“식사를 하지 않으셨잖아요, 왕자님. 제 업무는 왕자님의 끼니를 챙기는 것인데요.”

“…….”

“잠시만 나와서 쟁반을 가지고 들어가실 수는 없을까요? 아까처럼 놀라게 하진 않을게요.”

“…거짓말. 그 말을 어떻게 믿어.”

고백하건대, 회귀 전에 나는 왕자와 이렇게까지 길게 대화를 해 본 적이 없었다. 물론 왕자가 듣는다고 생각하고 얘기한 것은 아니지만 일방적으로 재잘대기는 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알고 있지. 책 속에서는 새하얀 털북숭이의 괴생명체로 묘사된 왕자가 실제로는 엄청나게 잘생긴 미소년이라는 것을.

그 엄청난 사실을 알고도 왕자를 이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다. 솔직히 말해서 이건 내 사심에 가까웠다.

한 번만 더 왕자의 얼굴을 볼 수 있다면….

“저는 거짓말을 하지 않아요. 제가 어떻게 감히 왕자님께 거짓말을 하겠어요. 그렇지만 제가 맡은 업무를 해내지 못한다면, 저는 해고를 당하고 말 거예요.”

“…….”

“왕자님은 제가 여기서 잘려서 거지꼴로 길바닥에 나앉으면 좋으시겠어요?”

“…아, 아니.”

뒤이어 흘러나온 왕자의 목소리에는 망설임이 어려 있었다. 그것 봐, 역시 그는 사팔뜨기에 곱사등이, 밤이 되면 아이들을 잡아먹는 악마가 아니다.

왕자는 착한 사람이다.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나를 구하려, 이름 없는 성을 빠져나와 불타는 왕성을 찾아 헤맬 만큼이나.

“어디 보자. 지금이 딱 오전 아홉 시 30분이니까, 지금부터 딱 한 시간 뒤에 돌아올게요. 그때까지 식사를 하시고 빈 접시를 챙겨 밖에 놔둬 주세요. 부탁드릴게요.”

“…….”

“부탁! 드릴게요!”

“…응.”

그렇게 말하고 나는 부산스럽게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아니, 내려가는 척했다.

그러나 순진무구한 왕자는 내 말을 덥석 믿은 모양이었다.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나자 꼭대기 층의 방문이 열렸다.

이번에도 나를 보면 왕자가 방문을 덜컥 닫아 버릴 게 분명했다. 나는 복도에 세워져 있던 먼지 묻은 대걸레로 문틈 사이를 단단히 벌리고 외쳤다.

“안녕하세요, 왕자님! 다시 한번 인사드립니다. 일주일 전부터 이름 없는 성에서 일하게 된 다프네라고 합니… 어?”

“왕왕! 왕!”

그러자 보이는 건 잔뜩 당황해 나를 향해 열심히 짖고 있는 새하얀 강아지 한 마리였다.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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