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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왕자 길들이기 (1)화 (1/123)

1화

“죽지 마, 다프네. 너는 나의 유일한 구원이었어.”

누군가 다정한 목소리로 내 귓가에 속삭였다. 눈을 떴을 때 보이는 건 불타오르는 성벽, 무너져 가는 천장뿐이었고, 매캐한 연기가 시야를 가렸다.

숨이 막힐 듯 뜨거운 공기에 저절로 눈물이 흘렀다. 부서진 기둥에 다리가 깔린 나는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이대로 숨이 끊기기만을 기다려야 하는 걸까. 전생의 부모님이 보고 싶었다. 흐릿해져 가는 시야에 결국 눈을 감아 버린 찰나였다.

어디선가 나타난 아셰라드렌이 내 몸을 잡아 일으켰다. 유폐된 왕자님.

“…포기하지 마. 너만은 내가 구할 거야. 너만은 내가 살리겠어.”

“왕자, 님. 제발 혼자 가세요. 여기 있다 같이 죽어요.”

“그래도 상관없어. 어차피 버려진 목숨이다. 이제껏 나를 사람 취급해 준 건 너밖에 없었는걸. 너를 살리지 않는다면 내 인생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 된다.”

왕자의 눈가에서도 눈물이 줄줄 흘렀다. 검댕이 묻은 창백한 뺨, 붉게 충혈된 눈.

그는 양다리가 부러져 걷지도 못하는 나를 공주님 대하듯 품에 안아 들었다. 그러고는 끝내 불바다가 되어 버린 왕성을 뒤로하고 푸른 언덕에 나를 내려놓았다.

새하얀 별들이 쏟아질 듯 가득했던 밤하늘을 배경으로, 왕자는 안타까우리만치 해사하게 웃었다. 그런 그를 보며 두근거리는 내 심장은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났기 때문인지, 아니면 정말로 그에게 반했기 때문인지.

나는 알 수 없었다. 그저 원래는 아름다웠던, 나를 구하느라 심한 화상을 입어 엉망진창이 된 왕자의 몸을 울먹이며 바라봤을 뿐.

“치, 치료를, 치료를 해야 해요. 이러다 큰일 나겠어요.”

“나는 괜찮아.”

어느샌가 왕자는 힘겹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의 생명은 꺼져 가고 있었다.

반인반신의 피를 갖고 태어나, 짐승으로 변하는 저주에 걸린 그는 이미 한참도 전에 성년의 나이를 넘겼다. 신탁에 따르면 본디 왕자는 만으로 스무 살을 넘기기 전에 죽게 될 운명이었다.

“…내가 이제까지 산 것만 해도 네 덕이야. 너만은 나를 징그러운 버러지 취급하지 않았어. 너만이 나를 끔찍한 것처럼 바라보지 않았다.”

“그만하세요, 왕자님. 잠시만 여기서 기다려 주세요. 의사를 불러올 테니….”

“성 안에 남은 의사가 몇이나 되겠어. 나는 마지막 남은 시간을 네 곁에서 보내고 싶다.”

우리는 적국의 병사들을 피해 거대한 아름드리나무 뒤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왕자는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나를 올려다보는 따스한 눈빛이 너무도 슬퍼서, 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평생을 갇혀 살아야만 했던 폐왕자, 아셰라드렌은 그렇게 내 옆에서 숨을 거두었다. 나는 깊은 잠에 든 듯 눈을 뜨지 않는 그를 있는 힘껏 끌어안고서 신께서 남은 내 목숨마저 함께 거두어가시기만을 조용히 기다렸다.

-라는 꿈을 꾸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참새가 짹짹 지저귀는 이른 아침이었다.

⋆★⋆

“후… 피곤하다.”

나는 기지개를 켜고 일어나 산발이 된 머리를 정돈했다. 꿈을 꾸다 일어날 때면 잠을 제대로 잔 것 같지 않아 속상했다.

벌써 며칠째 똑같은 꿈을 반복해서 꾸는 건지 모르겠다. 이제는 꿈속의 왕자의 속눈썹의 길이가 정확히 몇 센티인지, 우리를 숨겨 줬던 아름드리나무에서 떨어진 나뭇잎이 정확히 몇 개인지마저 다 외울 수 있을 것 같다.

굳이 이렇게까지 선명하게 기억을 덧그려 주지 않아도 나는 충분히 알고 있는데. 이것이 꿈이 아니라 현실인 것을, 현실에서 일어났던, 실제로 내가 경험했던 일인 것을.

“아 씨, 벌써 일곱 시야?”

벽에 걸어 놓은 검은 드레스의 주머니에서 시계를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유폐된 왕자가 기거하는 성의 아침은 빨랐다.

왕자는 눈을 뜨면 아침을 먹어야 했고, 그 아침을 포함해 매 끼니를 가져다주는 역할이 내가 맡은 업무였다. 그 외의 시간은 자유였다. 하릴없이 흘러가는 조용한 하루하루.

내 일은 업무의 강도에 비해 보수가 심하게 높은 편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맡으려는 자가 나타나질 않아, 자리는 돌고 돌아 고아로 환생한 내게 주어졌다.

내 입장에선 그저 압도적인 감사였지만 다른 이들은 전혀 그렇지 못한 모양이었다. 저주받은 왕자에 대한 두려움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눈앞에 들이밀어지는 금화를 보고도 고개를 저었다.

덕분에 나만 땡잡았지, 뭐. 나는 서둘러 어깨를 넘실거리는 갈색의 긴 머리칼을 하나로 묶고 그 위에 검은 리본을 달았다.

‘이름 없는 성’에 고용된 유일한 메이드인 나는 매일같이 검은 드레스에 프릴이 달린 하얀 에이프런을 둘렀다. 검은 스타킹에 검은 구두까지 신고 준비를 마치고 나오면, 성 밖에는 검은 머리를 가진 예니체 경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녹이 슨 문을 열고 나온 나는 막 고개를 돌린 예니체 경과 눈을 마주치며 웃었다. 몰락한 귀족 가문 출신인 그는 나와 마찬가지로 ‘이름 없는 성’에 고용된 유일한 문지기였다.

“좋은 아침이에요, 예니체 경. 간밤엔 좋은 꿈 꾸셨나요?”

“저는 대개 꿈을 잘 꾸지 않습니다. 하지만 오늘 아침은 확실히 날씨가 좋군요.”

무뚝뚝한 성격의 예니체 경은 턱을 까딱이며 내 인사를 받아 주었다. 그런 그의 앞에는 새벽부터 왕성의 요리사들이 준비해 준 하루치의 식량이 바구니에 담겨 놓여 있었다.

벌써부터 좋은 냄새가 나는 것 같다. 나는 바구니를 챙겨 곧바로 성 안으로 들어와 1층에 마련된 식당을 향했다. 바구니에 든 음식은 나와 예니체 경 그리고 왕자의 몫이었다.

그 음식들을 적당히 배분하는 것 또한 내가 맡은 일 중 하나였다. 나는 씻어 놓은 접시 하나에 아직 훈기가 남아 있는 새하얀 빵과 베이컨, 계란 요리와 샐러드를 차곡차곡 옮겨 담았다.

지금부터 나는 꿈속에서만 줄기차게 등장했던 폐왕자를 만나러 갈 예정이었다. 과연 오늘은 그를 직접 만날 수 있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똑똑.

“아침입니다, 왕자님.”

아셰라드렌 왕자는 ‘이름 없는 성’의 꼭대기 층에 혼자 살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까지 단 한 번도 내 앞에서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었다.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를 마주한 것은 꿈속이 유일했다. 레르베 라예트 왕국이 적국인 세스나 제국에 함락되었을 때, 폭격으로 인해 천 년간 지속되었던 왕조가 한순간에 멸망하게 되었을 때.

그러니까 정확히는 지금으로부터 약 1여 년 후에.

똑똑.

“안에 계신가요, 왕자님? 여기 아침 식사가 준비되었는데.”

“…밖에 두고 가. 알아서 먹을 테니까.”

하지만 목소리는 이전에도 몇 번 들어 봤다. 예전에도 나는 언제나 왕자의 얼굴을 궁금해했었고, 가끔은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문 앞에서 몇 번이고 왕자에게 말을 건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럴 때마다 왕자는 저런 식으로 답했지. 하지만 오늘은 어림도 없다. 나는 뚜벅뚜벅 구둣발 소리를 내며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척, 계단 난간에 몸을 숨겼다.

그러자 잠시 후, 끼이익 하는 불편한 소리와 함께 두꺼운 나무 문이 열렸다.

“…왕자님?”

“…악!”

재빠르게 계단을 올라 닫히려는 문 틈을 향해 발을 끼워 넣었다. 철퍼덕, 엉덩방아를 찧은 왕자가 놀란 눈으로 나를 올려다봤다.

매일 꿈속에서 봤던 그가 현실의 내 앞에 주저앉아 있었다.

어둠 속에서도 은은한 빛을 뿜어내는, 치렁치렁하게 기른 은빛 머리칼과 우뚝 솟아오른 콧대.

해를 거의 보지 않아 희고 고운 살결은 살짝 붉어져 있고, 도톰한 입술은 갑작스러운 내 등장에 당황해 약간 벌어져 있다.

왼쪽 눈꼬리의 작은 눈물점 하나와 그 위로 보이는 선명한 보랏빛 눈동자. 왕자의 섬세한 이목구비는 아직 앳된 티를 벗어나지 못한 듯 보였으나, 작은 셔츠에 우겨넣은 듯한 커다란 몸은 이미 성인 남성의 그것에 가까웠다.

나는 왕자를 내려다보다 말고 천천히 그의 앞에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과거로 돌아와 처음 마주하게 된 왕자가 눈이 시릴 만큼 반갑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는 나와 기억을 공유하고 있지 않은 게 틀림없었다. 왕자는 허겁지겁 자리에서 일어나 그대로 문을 닫아 버렸다.

철컥.

“…왕자님?”

심지어는 전에 한 번 쓴 적 없던 잠금장치까지 사용하면서.

“죄, 죄송해요. 저는 얼마 전에 새로 들어온 메이드 다프네라고 해요. 얼굴을 보고 인사하는 게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해서, 무례인 줄은 알지만 왕자님이 나오시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어요.”

“…….”

“그렇지만 아무래도 제가 실수, 아니다, 잘못을 한 것 같네요. 죄송합니다. 아무튼 저는 그만 내려갈게요.”

“…….”

나는 문 뒤에 있을 왕자를 향해 거듭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그 안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고, 나는 그냥 허공에 대고 주절거리는 이상한 여자가 되어 버렸다.

젠장, 오늘도 실패인가. 예니체 경이 이 꼴을 보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왠지 모르게 밀려오는 부끄러움에 얼굴이 뜨거워졌다.

나는 주섬주섬 자리에서 일어나 계단을 타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그러고는 식당에 준비해 둔 내 몫의 아침을 먹었다.

회귀한 뒤에도 ‘이름 없는 성’에 보내지는 음식들은 여전히 맛이 좋았다. 왕성에서 저주받은 왕자에게 마치 공물을 바치듯 마련되는 것이긴 했지만, 그런 것쯤은 크게 마음에 걸리지 않았다.

“그렇지만 앞으로는 어떡하면 좋지….”

혼자 있는 시간이 많다 보니 미친 사람처럼 혼잣말만 늘어나고 있었다. 나는 오렌지 주스를 한 모금 들이켜며 턱을 괴고 천장을 바라봤다.

아주 오래전에, 21세기 대한민국에 살던 나는 이른 나이에 죽어 로맨스판타지 소설 속에 환생했다. 소설의 제목은 <공주는 꺾이지 않는다>.

제목에 등장하는 공주이자, 여주인공인 레티스는 아셰라드렌 왕자의 동생으로 왕자와는 달리 모두에게 사랑받는 존재였다.

그러나 행복한 한때도 잠시, 옆 나라인 세스나 제국이 왕국을 침략하자 볼모로 끌려가 남주인공을 만나게 된다. 그렇게 시작되는 두 남녀의, 시공을 초월한 피폐하고도 지독한 러브 스토리….

그런데 사실 여주인공이니 남주인공이니, 소설의 내용은 내게 별로 중요하지 않다. 난 그들의 측근으로 태어난 것도 아니었고, 아셰라드렌 왕자 역시도 소설에는 거의 등장하지 않는 엑스트라였다.

다만 우리는 왕국이 멸망할 때 함께 죽게 된다. 내가 직접 겪었으니 그 사실은 확실하다.

조금 전에 나를 보고 소리 지르며 문을 잠가 버린 그 왕자, 아셰라드렌은 기둥에 깔려 죽을 뻔한 나를 구하고 세상을 떠났다.

심한 부상을 입었던 나는 이윽고 그를 따라 숨을 거두었고, 정신을 차려 보니 과거로 돌아와 있었다.

그 후로 나는 계속해서 똑같은 꿈을 반복해서 꾸고 있다.

왕자가 나를 살려 준 것을 잊지 말라는 듯, 이번에는 내가 그를 살려야 한다는 듯.

나는 이것을 하나의 계시로 여기고 있었다. 그래서 과거로 돌아온 뒤에도 또다시 ‘이름 없는 성’에 취직했다.

그러나.

“…악!”

나를 보자마자 비명을 지른 왕자를 과연 어떻게 살려야 한단 말인가? 그리고 회귀 전의 나는 아무것도 한 게 없었는데, 어째서 왕자는 내가 그의 유일한 구원이었다 말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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