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귀정天下歸正
1
편월이 진파구에 도착한 것은 전투가 끝난 그날 신시 중반이었다. 윤주성을 지날 무렵 광운이 직접 출정했다는 얘기를 듣고 말에 박차를 가해 달려왔음에도 이처럼 늦고 말았다.
이미 바다에선 상초국 전함들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진파구는 한창 전장 정리 중이었다. 아직은 이월. 겨울 끝 자락의 짧은 해는 벌써 바다에 잠길 것처럼 기우뚱 기울어졌고, 안개 대신 적의 시신을 태우는 연기가 자욱하게 깔려 바람에 밀리고 있었다.
그 와중에서도 먼저 출동했던 탄금성의 위휘군—당연히 막주군도 포함된—이 정연하게 도열한 채 편월을 맞았다.
그걸 본 편월은 가슴이 섬뜩해졌다. 도열한 병사들의 표정에서 감당하기 힘든 분노를 느꼈기 때문이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그 분노 아래 애써 억눌러 둔 슬픔이 역력히 보였던 것이다.
“광운은? 광운은 어디 있나?”
가장 앞에서 편월을 맞은 수자윤의 갑옷 자락을 움켜쥐며 편월은 물었다. 의당 웃으며 자신을 맞아 줘야 할 광운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서였다.
“크히악!”
기성을 지르며 수자윤은 편월을 노려보았다. 눈빛은 원망으로 이글거렸고, 전신은 금방이라도 등에 메고 있는 도끼를 휘두를 듯 격렬하게 떨렸다.
순간 편월은 휘청거리다 그대로 말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주군!”
“주군, 정신 차리소서!”
원래 위휘군에 소속되어 있던 장수들이 급히 말에서 내려 편월을 부축했다.
그러나 막주의 장졸들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마치 금방이라도 큰 전투가 벌어지는 걸 기다리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편월은 쉽게 깨어나지 못했다. 급하게 달려온 길인지라 군의도 없었기에, 장수들이 할 수 있는 건 그저 그의 얼굴에 찬물을 끼얹고 물을 마시게 하는 게 고작이었다.
얼마 후 편월은 간신히 눈을 떴다. 하지만 그 눈에는 초점이 없었다. 멍하니 허공 저 깊은 곳을 더듬는 듯한 눈동자였다.
“광운…….”
“주군, 고정하소서. 전시엔 항시 있는 일임을 잊지 마소서.”
노련한 담개가 엄한 어투로 위로했지만, 편월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러다 돌연 편월은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휘청거리며 수자윤 앞으로 걸어갔다.
와락!
다시 수자윤의 갑옷 자락을 움켜쥔 편월은 바짝 끌어당겼다. 두 사람의 코가 맞부딪칠 것처럼 가까워졌다.
“말, 해, 라. 광, 운, 은?”
편월은 한 음절씩 끊어 말했다. 그 속에는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오싹한 한기를 느끼기에 충분한 살기가 깃들어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조금 전에 초점 없던 눈도 흡사 광인의 그것처럼 기묘한 광채가 줄줄 뿜어져 나왔다. 한마디로 악귀와도 같은 모습이었다.
그 점에 있어서는 수자윤도 만만치 않았다. 다른 사람 같았으면 시선을 돌려 버렸을 편월의 눈을 고스란히 맞받고 있었다. 아니, 악귀의 형상에 보다 가까운 건 오히려 수자윤이었다. 가뜩이나 험악한 인상을 붉게 물들이고,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처럼 눈알을 부라려 편월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끼에에에익!”
좀 전보다 더 거친 기성을 지르며, 기어이 메고 있던 도낏자루를 거머쥐었다.
“수 장군!”
고숭이 재빨리 달려들어 수자윤에게서 도끼를 뺏어 들었다. 그대로 두면 정말 편월의 정수리를 쪼개 버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래도 두 사람은 살벌한 대치를 멈추지 않았다.
“편월 장군, 아니 주군. 이제 그만 수 장군을 놓아주십시오.”
털썩, 무릎을 꿇으면서 고숭은 편월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비록 군신의 예를 갖춘 것이었지만 눈동자는 떨구지 않았고, 그 눈빛은 수자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광운 대장군께선 주군이 보내신 전령을 맞기도 전에 벌써 출동 준비를 갖추고 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령을 기다리셨던 건 주군의 명을 직접 듣지 못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명을 들으시자마자 광운 대장군은 위휘군의 선봉장 자격으로 우리들을 독려해…….”
고숭은 출동하기 전부터 지금까지의 일을 순서에 따라 얘기하기 시작했다.
어느새 편월은 수자윤을 놓고 고숭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마침내 얘기가 광운의 최후에 이르렀을 때, 돌연 편월은 몸을 일으켜 흑풍에 올라타고 바다를 향해 달렸다.
“주군!”
“따르라! 주군을 따라!”
“멈추시오!”
놀라서 허둥거리는 위휘군 장수들을 담개가 우렁찬 노성으로 억눌렀다. 그러고는 고숭과 수자윤 앞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조의 따위는 표하지 않겠소. 광운 대장군은 우리 주군에게 부친과 같았던 분. 조의를 받을 분은 오히려 우리의 주군이시오. 이렇게 예를 갖추는 건 감사를 드리기 위함이오. 잘 말씀해 주셨소. 정말 잘 말씀해 주셨소이다. 오늘에서야 이 늙은이는 무장의 삶과 죽음을 안 것 같았소이다. 이렇게 감사드리오. 정말 고맙소이다.”
담개는 두 사람 앞에서 허리를 숙이고 이마를 바닥에 댔다. 말은 잔잔했지만, 엎드린 그의 잔등은 잔잔하게 떨리고 있었다.
“으아아아아아-!”
상처 입은 맹수의 포효와도 같은 외침이 들려온 건 그때였다. 편월이었다. 물과 뭍이 맞닿은 그 경계에 꿇어앉아 바다를 향해 절규하고 있었다.
모든 장졸들이 술렁거렸다. 편월의 절규에는 분명 울음이 섞여 있었기 때문이다.
편월의 이름을 아는 사람은 그가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울지 않았다는 사실도 함께 들었다.
그렇다면 저 울음은 분명 태어난 이래 처음으로 우는 것일 터였다. 적어도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우는 건 그렇다는 얘기다.
담개가 가장 먼저 돌아앉았다. 들어 올린 그의 얼굴은 주름이고 수염이고 온통 눈물에 젖어 있었다.
“주군, 삼가 조의를…….”
담개의 이마가 다시 한 번 진파구의 싸늘한 모래에 닿았다.
털썩, 털썩, 털썩…….
십만을 상회하는 위휘군 전체가 차례로 무너지듯 무릎을 꿇었다.
누구도 소리 내어 울지 않았다. 그건 이미 편월의 절규만으로도 충분한 터. 하나같이 격렬하게 어깨를 출렁거리며 바닥에 이마를 비벼 대고 있을 뿐이었다.
위휘군의 군기와 기치가 조기弔旗로 대체되었다. 율천국 장수 종자영이 마련해 준 것이었다.
편월은 꼬박 사흘 동안 그 자리에서 오열을 그치지 않았다. 조수가 밀려와 몸이 잠길 때에도, 썰물 때 찬 바람이 갑옷 자락을 헤치고 들어와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건 위휘군도 마찬가지였다. 그들도 편월을 따라 사흘간 식음을 전폐한 채 광운에게 애도를 표했다.
입장이 묘해진 건 종자영이었다. 비록 도움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아직은 피아가 구분되지 않은 위휘군을 보호하는 꼴이 되었으니 말이다. 거기에 율천국에 사자로 파견되었던 곽준방 일행이 돌아왔다.
* * *
위휘군이 상초국의 침략을 물리쳤다는 소식은 삽시간에 천하를 진동시켰다.
특히 그 소문들은 무장들보다 백성들 사이에서 널리 회자되었다. 이국의 군세에 이 땅이 유린되고 황폐화되는 걸 막기 위한 위휘군의 고심과 노고가 알려졌기 때문이다.
여하튼 그 결과는 다소 엉뚱하고 놀라운 현상으로 나타났다. 그때까지 저항하거나 투항을 망설이던 이천강 이동以東의 각 성들이 다투어 위휘군에 복속될 것을 희망하고 나선 것이다.
그 바람에 부산스러워진 것은 윤주성과 합진성이었다. 복속을 희망하는 군세들이 끊임없이 밀어닥쳐, 그들이 주둔할 곳을 정해 주는 일만 해도 손이 모자랄 지경이었다. 편월은 여전히 진파구에 머물러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 같은 천하의 정세가 고스란히 가겸후의 귀에 들어갔음은 물론이었다.
가겸후로선 결코 기분 좋은 소식일 수 없었다. 해상을 봉쇄했던 자신의 수군은 상초국에 패했고, 자칫 상륙까지 허용할 뻔했다.
거기까진 괜찮다. 전쟁에 있어서의 승패는 항상 있는 일이니까 말이다.
가겸후의 신경을 건드린 건 바로 위휘군의 개입이었다. 비록 사자들에겐 동맹을 허락한다는 전언을 보냈지만 사전에 양해도 없었을뿐더러 그들이 상초국의 상륙까지 훌륭하게 격퇴하고 결국 그들로 하여금 물러가게 만들었다.
그 결과 천하의 군벌들이 스스로 위휘군에 복속되고자 하고 있다. 이국 침략군을 물리쳤으니 당연한 반응인지도 모른다.
“이제 슬슬 위휘군에 손을 써야 할 때라고 사료되옵니다. 간인들의 보고에 의하면 어제 합진성에 모인 각지의 군벌만 해도 약 오십만에 이를 거라고 했사옵니다. 기존의 위휘군과 막주군을 보태면 칠십만은 족히 넘을 듯하옵니다.”
폐포자의 말이었다. 누구보다 가겸후의 심정을 잘 아는 그로선 이제 곧 위휘군과의 일전을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적의 숫자가 불어나는 걸 예의 주시해야만 했다.
“그들의 숫자가 칠십만이든 백만이든 신경 쓰지 않소이다. 구심력이 약한 군은 오합지졸에 불과한 것. 마음에 걸리는 건 위휘군이 상초국을 몰아냈다는 점이오. 그 바람에 천하의 인심이 위휘군에 쏠렸으니, 이것만은 신경이 쓰이는구려.”
폐포자는 대답할 말이 없었다. 장차 황위에 오르려는 가겸후에게 천하 민심의 향배만큼 관심이 가는 부분도 없을 터였다.
“전하의 말씀이 옳사옵니다. 적들이 수십만이 모인들 무슨 소용이겠사옵니까? 소장에게 이십만만 주신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짓뭉개 버리겠사옵니다.”
커다란 목소리로 육우맹이 장담하고 나섰다. 전쟁이 아니면 그의 존재를 부각시키기 어려운 요즘이었다. 어떻게든 가겸후의 눈 밖에 나지 않으려면 큰 싸움을 치러야만 한다.
“믿음직스럽소. 육 장군의 용맹은 언젠가 크게 쓰일 데가 있을 것이오.”
“황공하옵니다, 전하.”
“우리의 전력은 어느 정도나 되오?”
“임항 장군이 보유한 병력까지 합치면 수군이 약 십오만. 그 외에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이 약 오십만. 합쳐서 육십오만에 이를 것으로 사료되옵니다.”
“흐음.”
가겸후는 침음성을 토했다. 오합지졸이라고는 했지만, 역시 전쟁에서 병력의 다과를 무시할 수는 없다. 현재 칠십만여에 이르는 위휘군을 상대로 당장 싸움을 벌일 수는 없는 노릇이다.
가겸후의 심정을 눈치 챈 폐포자가 재빨리 입을 열었다.
“설혹 천하의 군벌들이 지금은 위휘군의 기치 아래 모여들었다고 하나, 그들은 이익이 없으면 움직이지 않을 것이옵니다. 만약 전하께서 큰 은전을 내리신다면 우리 쪽으로 귀순할 군벌도 없지 않을 것이옵니다.”
“생각해 둔 사람은 있소?”
“우선은 융주의 적비를 투항시켜야만 하옵니다. 융주는 비록 병력은 적지만 예로부터 병사들 개개인이 사납고 용맹했사옵니다. 그들을 투항시킨다면 이 나라의 전력에 커다란 보탬이 될 것이옵니다.”
“적비를 어떻게 투항시킨단 말이오?”
“그들에게 약탈한 모든 물건의 소유권을 인정해 주시옵소서. 또한 석주에 있는 성들 중에서 마음에 드는 걸로 두 개 정도 주시면 될 것이옵니다.”
“투항한 후에 그들이 발호할 염려는 없겠소?”
“어차피 그들은 위휘군과의 싸움에서 선봉에 세울 것이옵니다. 전쟁이 끝난 뒤엔 그들도 막대한 피해를 입을 터, 발호를 하고 싶어도 할 힘이 없을 것이옵니다. 또한 발호를 한다면 그땐 섬멸시키는 것도 무방하옵니다. 이 점 유념하소서.”
가겸후와 육우맹은 일순 말을 잃었다. 각자의 마음이야 다를지언정 저런 말을 쉽게 하는 폐포자의 독심에 혀를 내두를 지경이었다.
“그리고 건주의 유강성柳疆城 성주 이유李儒와 매향성梅香城 성주인 강도길姜度吉은 충분히 포섭할 수 있사옵니다. 이들은 세력도 크고 또 욕심도 많은 자들이라 이익으로 꾈 수가 있사옵니다. 또한 소생과 개인적인 친분도 있으니…….”
“만약 그들이 벌써 위휘군에 복속되었다면?”
“무슨 상관이 있사오리까? 오히려 그 편이 더 나을지도 모르옵니다. 전시에 진중 반란만큼 무서운 게 어디 있겠사옵니까?”
“하면 누구를 보내면 되겠소?”
“누구라도 상관이 없사옵니다. 제 서찰을 가지고 가면 그들은 만나 줄 것이옵니다. 하온데 전하께서는 이들에게 어떤 은전을 내리실 생각이옵니까?”
“어떤 게 좋겠소?”
“저 두 사람으로 하여금 건주를 나눠 다스리라고 하면 될 것이옵니다.”
“그렇게까지?”
“그 역시 하나의 방편일 따름이옵니다. 그렇게 해 두면 두 사람은 서로 으르렁거리며 싸울 것이옵니다. 그때 전하께서 나서시면…….”
말꼬리를 흐리며 폐포자는 씨익 웃었다. 인자한 미소였지만, 그 마음 씀씀이는 섬뜩함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다.
“알겠소. 그럼 당장 사람을 보내시오. 그리고 또 하나, 지금 편월은 진파구에 있다고 들었소. 그자를 공격하라고 하면 어떻겠소?”
“하오나 진파구에 나가 있는 우리 병력이…….”
이번에도 말꼬리를 흐리며 폐포자는 미간을 찌푸렸다. 현재 진파구에 나가 있는 율천국과 위휘군 병력을 비교하는 중이었다.
“종자영 장군의 병력이 약 십만에 임항 장군의 수군까지 합치면 십오만은 넘을 것이고… 위휘군은 잘해야 십만일 테니 공격을 해 봄 직도 하옵니다.”
“알겠소. 그럼 당장 공격 명령을 내리겠소. 그와는 별도로 과인이 직접 대군을 이끌고 진파구로 가겠소.”
“그러실 필요까지는 없사옵니다.”
“만약의 경우를 대비한 일이오. 병력의 집결은 이미 끝났다고 알고 있소이다만…….”
“이를 말씀이옵니까? 이미 대인성과 대수성에 각기 십만의 병력을 주둔하라 했사옵고, 삼십만의 대군이 준비를 갖춘 상태로 대기하고 있사옵니다.”
“알겠소. 지필묵을 준비해 주시오. 융주의 적비와 다른 두 명의 성주에게 보내는 친서를 쓰겠소.”
“알겠사옵니다.”
폐포자가 손수 지필묵을 가지러 간 사이 육우맹이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편월을 공격하는 이번 일에 소장이 앞장서겠사옵니다. 부디 명을 내려 주시옵소서.”
“아니요. 육 장군은 과인과 동행합시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육우맹은 깊숙이 허리를 숙였다. 굳이 자신이 싸우겠다고 한 건 어떻게든 가겸후에게 그의 존재를 부각시키기 위함이었다. 하물며 그와 동행한다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은 없는 것이다.
“그럼 소장은 나가서 언제라도 대왕께서 전 병력을 사열하실 수 있도록 준비를 해 두겠사옵니다.”
“그렇게 하시오.”
폐포자로부터 지필묵을 받아 들며 가겸후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밖으로 나온 육우맹은 크게 심호흡을 했다. 언제부턴가 잊힌 사람처럼 되어 버린 자신을 존재를 다시 한 번 강하게 부각시킬 기회를 맞은 것이다.
‘고리타분한 책상물림 따위가 전쟁을 뭘 알아?’
평소 폐포자에 대한 육우맹의 생각이었다. 그가 가겸후 곁에 나타나면서부터 자신은 멀어지게 되었다. 곱게 보일 턱이 없었다.
그러나 막상 전쟁이 시작되면 달라질 게 뻔하다. 누가 뭐래도 최일선에서 피 흘리며 싸우는 건 무장들이다. 어느 쪽이 더 필요한지 가겸후의 눈으로 직접 판단하게 될 터였다.
“여봐라. 각 부대의 장수들을 즉시 집결시켜라!”
실로 오랜만에 육우맹은 큰 소리로 부하 장수들을 모으라는 명을 내렸다.
명령은 즉각 하달되었고, 창일성 밖에 집결해 있던 각 부대의 장수들이 오기총감부五旗摠監府로 모여들었다.
모인 장수들을 둘러보는 육우맹은 피가 끓어오르는 걸 느꼈다. 벌써 여든에 가까운 나이지만, 아직도 전장을 달리면서 적장의 목을 몇십 개라도 딸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제 곧 대규모 출동이 있을 예정이다. 각 부대는 한 치도 차질이 없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추도록!”
그렇게 중요한 얘기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육우맹이 모든 장수들을 모은 건, 다시 한 번 자신의 존재를 인식시키기 위해서였다.
“존명!”
장수들은 일제히 군례를 갖췄다. 본능적으로 대규모 전쟁을 예감하는 그들의 눈은 굳은 결기로 반짝거렸다.
그날 밤, 야음을 틈타 은밀하게 창일성을 빠져나가는 간인 몇 사람이 있었다. 그들의 품속엔 가겸후의 친서가 들어 있었다.
2
간인을 통해 가겸후의 명을 받은 종자영은 마음이 편치 않았다. 아직도 애도에 잠겨 있는 위휘군을 공격해 반드시 편월의 목을 베라는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종자영은 무장이다. 일단 내려진 명령엔 무조건 복종해야 된다는 얘기다.
반면 무장이기에 괴로운 마음을 떨칠 수 없었다. 엄밀히 얘기하면 편월의 위휘군이 있었기에 자신들도 살 수 있었다. 외국 군세에 이 땅이 유린되는 걸 막았다는 건 새삼 말할 필요도 없다. 무장이라면 의당 가지고 있어야 할 의리 때문에라도 쉽게 결정할 수 없었다.
종자영은 위휘군이 있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내일이면 철수한다고 했으니, 그 준비로 분주한 광경이었다.
“시간이 촉박하지만 오늘 밤에 결행해야 되지 않겠소?”
같은 명령을 받은 임항이 나직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의 말처럼 기습을 하려면 오늘 밤뿐이다. 아니, 내일 철수하는 위휘군의 후미를 짓밟아도 되긴 한다. 위험 부담이 크다는 단점이 있긴 하지만 말이다.
하긴 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과연 위휘군을 칠 수 있는 배짱이 자신에게 있는지가 관건이었다.
“종 장군, 왜 말이 없으시오? 오늘 밤 기습을 하자는 소장의 계획에 반대하시오?”
“아, 아니요. 기습을 하려면 아무래도 오늘 밤이 좋지 않겠소. 부하 장졸들에게 준비를 시키겠소.”
보병이든 수군이든 전투력에 있어서는 별 차이가 없지만, 그래도 엄연히 소속은 다르다. 직속상관이 아니면 어떤 명령도 제대로 시행되지 않는다.
진막 밖으로 나서면서 종자영은 다시 한 번 위휘군 진영을 살폈다. 저녁을 준비하는지 여기저기 솥이 걸려 있고, 병사들도 긴장이 풀어진 느슨한 모습들이었다. 개중에는 부상병들도, 그들을 치료하는 자들도 보였다.
“장군, 갑작스러운 명령으로 장졸들이 동요하고 있소이다. 대체 어찌 된 일입니까?”
부장 중 한 명이, 그 역시 조금은 상기된 표정으로 다가오며 물었다.
“출동 준비는 끝난 건가?”
“우리야 벌써 준비를 갖춰 뒀소이다만, 수군 쪽은 어떻게 되는지 알 수가 없소이다.”
“그쪽은 임 장군이 알아서 하실 게다. 병사들에겐 평소와 다름없이 행동하라고 이르게.”
“대체 어디로 출동한단 말이오?”
“지금은 말할 수 없네. 목표는 출동 직전에 얘기해 주겠네.”
부장은 약간 불만 어린 눈초리로 종자영을 쳐다보았다. 병사들에게 작전을 하달할 때는 충분한 시간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각자 할 일을 보다 명확하게 숙지할 수 있다.
그런데 출동 대기 명령만 내려왔을 뿐 정작 뭘 해야 될지는 알지도 못한다. 이래서는 작전 시 병사들에게 최선을 다해 주길 바랄 수 없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종자영의 닫힌 입은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한번 내려진 명령에 계속 거부하는 모습을 보일 수도 없었다.
“그럼 소장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여전히 불만을 떨쳐 버리지 못한 음색으로 말한 후 부장은 걸음을 옮겼다.
“내 말을 가져다주게. 더 어두워지기 전에 한 바퀴 돌아야겠네.”
“알겠습니다.”
부장이 사라지자마자 병사 한 명이 종자영의 말을 끌고 왔다. 막사 안으로 들어간 종자영은 활과 전통을 가지고 다시 나왔다.
“나가는 길에 사냥감이라도 있으면 잡아 오겠다.”
“수행을 하오리까?”
“필요 없다. 위험한 일도 없을 테니 혼자 다녀오겠다.”
수행하려는 병사를 떼어 놓은 후 종자영은 말에 올랐다. 그러고는 곧바로 해안가에 있는 언덕 위로 몰았다.
언덕 위에선 해변의 정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서서히 깔리는 저녁 어스름 속에서 군데군데 피워 둔 화톳불들이 마치 별처럼 보였다.
종자영은 전포의 한 자락을 찢었다. 그러고는 칼을 조금 뽑아서 중지를 살짝 그었다.
피가 흘러나오자 종자영은 전포 조각에 재빨리 몇 글자를 휘갈겨 썼다. 오늘 밤에 율천국군의 기습이 있을 테니 준비하라는 내용이었다. 수신인은 물론 편월이었다.
전포 조각을 화살에 묶은 종자영은 그대로 시위에 걸었다. 여기서 쏴도 위휘군의 진영까지는 충분히 닿을 수 있을 터였다.
시위가 팽팽해질 때까지 당겼지만, 종자영은 막상 쏘지 못했다. 긴 한숨과 함께 다시 활을 내려놓았다.
이건 분명 이적 행위다. 알리지 않고 야습을 해도 아군에서 사상자가 나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런데 이렇게 알려 준다면 그 피해는 더 커질 게 분명하다. 어쩌면 괴멸적인 타격을 입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자신이 없는가?’
종자영은 스스로를 돌아보았다. 무장으로서 자신이 혹시라도 겁을 내고 있는 게 아닌가 싶었다. 위휘군에 야습 계획을 알리고 정당하게 맞붙기를 꺼려 하는 게 아닌가 하고 말이다.
다시 한 번 내려다본 해변의 율천국 진영에서 어수선한 움직임이 감지되었다. 많이 어두워진 탓에 정확하게 보이진 않았지만, 임항의 수군이 움직이는 게 분명할 터였다.
그 순간 종자영은 다시 활시위를 당겼다. 팔의 근육이 뻣뻣하게 굳어질 때까지 힘껏 당겼다가 놨다. 표적은 위휘군의 대장군 막이었다.
피융!
화살은 경쾌한 소리를 남기고는 이내 어둠 속으로 잠겨 들었다.
그걸 확인한 종자영은 미련 없이 말 머리를 돌려 진영으로 복귀했다. 이제부터는 무장과 무장, 위휘군과 율천국군의 정당한 전쟁이 될 것이다. 마음에 거리낄 게 없는 셈이다.
* * *
“이렇게 되면 선공이 상책이오. 비겁한 놈들!”
좀처럼 흥분하는 일이 없는 담개가 수염까지 파르르 떨면서 노기에 찬 음성을 토했다. 종자영이 보낸 전포에 적힌 서한을 읽은 뒤의 반응이었다.
“찬성입니다, 주군. 명령을 내려 주십시오!”
맹아도 빠질 리가 없었다. 그 역시 목에 핏대를 세우며 편월을 쳐다보았다.
“잠깐! 이 서한의 내용이 진짜라는 보장도 없소. 보낸 자의 이름도 없는 걸 보니, 어쩌면 우리들이 먼저 도발하길 노리고 이리했을 수도 있소. 그러니 신중히 결정하는 게 좋겠군.”
무거운 어조로 편월이 말했다. 광운이 죽은 이후 부쩍 수척해진 모습이었다.
그러나 왠지 모를 무게감도 한 겹 더 보태진 듯했다. 광운의 죽음이 큰 충격이었음에는 분명하지만, 그걸 이겨 내고 난 뒤에 보다 더 성숙해졌다고 할까.
“그러다 자칫 늦을 수도 있습니다. 싸움에 있어선 기선 제압이 제일! 그러니 선공을 가하는 게 옳을 듯하오.”
“담 장군의 말씀이 옳습니다. 이처럼 피로 쓴 글이 거짓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우선 놈들의 허를 찌르고 재빨리 탄금성으로 철수하는 게 상책일 겁니다.”
오늘은 담개와 맹아가 마치 미리 말을 맞춘 듯 죽이 척척 맞았다. 평소엔 보기 힘든 광경이었다.
“만약 이 서한이 진짜라고 해도, 율천국군은 자시를 기해 공격하겠다고 되어 있소. 대비만 충분히 하고 있으면 되겠지.”
“그게 바로 함정일지도 모릅니다. 자시에 공격한다고 해 놓고서 해시에 공격하지 말라는 법도 없습니다.”
“그럼 지금부터 병사들에게 은밀히 전하시오. 내일 철군을 앞두고 오늘 일찍 자는 척하라고. 물론 준비는 철저히 해야만 하오.”
“그보다는 선공을…….”
“그만 됐소. 이쪽에 준비만 갖추어져 있다면 무얼 두려워하겠소. 율천국군이 눈치 채지 못하게 준비를 해 두시오.”
편월은 더 이상의 논쟁을 허용하지 않았다. 짧은 시간에 불과했지만, 광운까지 죽는 격렬한 전투를 수행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속임수일지도 모르는 서한에 속아 율천국을 도발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럼 주군부터 준비를!”
그때 편월은 평복 차림이었다. 맹아가 재빨리 진막 한편에 있는 그의 갑옷을 들고 왔다.
편월은 거부하지 않았다. 이마저 거절해 버리면 준비를 해 두라고 했던 자신의 말에 위배되는 것이다. 진막 밖으로만 나가지 않으면 율천국군의 눈에 자신이 갑옷 차림인 건 보이지 않을 터였다.
“난 다른 장수들과 함께 부대를 한 바퀴 돌아보며 병사들에게 지시하겠습니다. 막주군이 잘 따라 줘야 할 텐데.”
몸을 일으킨 담개가 진막을 빠져나가면서 말했다. 이미 병사들의 저녁 식사는 끝났을 터였다. 무기들만 잘 챙기고, 잠들지 않게만 엄명을 내려 두면 된다.
진막 안의 불은 모두 껐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어둠을 느낄 수 없었다. 바깥의 병사들이 피워 둔 화톳불 탓이었다.
그 부실한 어둠 속에 편월은 앉아 있었다. 곁에는 맹아 한 사람이 있을 뿐 나머지 장수들은 각자의 부대로 돌아가 대기하는 중이었다.
“주군, 자시가 가까워집니다.”
진막 안에선 하늘의 별을 볼 수도 없다. 그런데도 맹아는 정확하게 시간을 가늠했다.
편월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지금 그는 자신의 생각이 틀렸음을 절감하고 있었다. 태어나면서부터 전쟁터를 누볐던 그의 감각은, 이 밤의 한구석에서 뭔가 벌어지고 있다는 걸 강하게 암시하는 중이었다.
그건 아마 맹아도 느끼고 있으리라. 조금이라도 전쟁에 익은 무장이라면 공기의 미세한 진동마저 감지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적의 병력은 얼마나 되는가?”
편월은 조용히 물었다. 율천국군을 거리낌 없이 적이라 부르는 낮은 그 음성에도 어둠은 일렁거리는 것 같았다.
“십오만 이상.”
맹아의 답변은 간단했다. 기실 더 이상의 긴 말은 필요치도 않았다.
“십오만이라면 싸워 볼 수 있겠군.”
“싸우는 정도가 아닙니다. 반드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승리를 서둘러선 안 돼. 오늘 밤은 적중 돌파를 감행해 탄금성으로 귀환하는 게 목적이오. 이 점을 각 장수들은 물론 병사들에게 잘 주지시켜 두시오.”
“이미 그렇게 말해 두었습니다.”
볼멘소리로 맹아가 대답했다. 그로선 이런 소극적인 작전이 불만이었다. 말이 좋아 적중 돌파지, 그건 어디까지나 적을 피해 달아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신 나게 한번 붙어도 최소한 지지는 않을 것 같은데…….
돌연 진막 밖의 화톳불이 일제히 꺼졌다. 동시에 먼 곳에서부터 인마의 북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시작됐습니다.”
맹아가 입을 열었을 때 편월은 벌써 진막 밖을 향해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적의 야습은 불화살 공격으로 시작될 터, 그 전에 빠져나가야만 한다.
“주군 출격!”
맹아가 재빨리 뒤를 따르면서 소리를 질렀다. 편월이 나가니, 대기하고 있던 근위대원은 준비를 하고 맞으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땐 이미 밤하늘이 환하게 밝아진 뒤였다. 예상대로 적들의 불화살 공격일 것이다.
“말을! 주군의 말을 대령하라!”
근위대원들이 씌워 준 방패 아래에서 맹아는 연방 고함을 질렀다. 말을 타야 적중 돌파든 뭐든 할 것 아닌가 말이다.
흑풍은 즉각 대령되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벌써 위휘군 중 일부는 반격에 나서고 있을 정도로 만반의 준비가 끝나 있었다.
편월은 훌쩍 흑풍의 잔등에 올랐다.
“자, 지금부터 적중 돌파다! 덤비지 않는 적은 상대하지 마라. 오직 앞을 막는 자만 쳐라! 공훈을 다투다 머뭇거려 전군의 진군에 방해가 되는 자는 군율로 다스리겠다. 최대할 빨리 달려 탄금성으로 복귀한다!”
말을 끝낸 것과 동시에 편월은 흑풍의 옆구리에 박차를 가해 가장 선두에 나서 달렸다.
“근위대 출격! 주군을 따르라!”
정신없이 소리를 지르며 맹아도 재빨리 말에 올라 편월의 곁에 바짝 붙었다.
“와아아-!”
근위대를 필두로 한 위휘군이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각자 부대별로 대오를 갖추기 시작했다.
어떻게 보면 위휘군 진영은 마치 벌집을 쑤신 것처럼 어수선했다.
하지만 그건 겉으로 봤을 때 그렇다는 것일 뿐, 편월을 중심으로 위휘군이 모여들었을 땐 무려 십만에 달하는 병력으로 이루어진 날카롭고 거대한 어린진이 형성되었다.
싸움에 있어 기습만큼 재미있는 것도 또한 작전도 드물다. 적의 의표를 찔러, 아군의 피해는 최소화하고 적의 타격은 최대한으로 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러니 임항은 가겸후의 명을 받았을 때부터 들떠서 설쳐 댔다. 상초국과의 해전에서는 말하기 창피할 정도로 패배를 당했으니, 위휘군을 기습하는 걸로 상쇄하겠다는 계산도 없지 않았다.
자연히 임항은 초저녁부터 수하 장졸들을 독려했다. 어찌 된 일인지 종자영은 이 기습에 시큰둥했으니, 자신이 거느린 수군만이라도 전력을 다할 수밖에 없다.
수군으로만 치자면 병력에서 위휘군보다 월등히 적은 게 사실이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기습이다. 병력의 다과가 문제가 아니라 적의 의표를 얼마나 잘 찌르느냐에 승산이 달렸다는 얘기다.
그런 점에서 임항은 승리를 확신했다. 종자영의 병력을 뺀 수군만 해도 오만이 넘는다. 위휘군을 십만으로 봤을 때 배 정도의 차이가 나지만, 그만한 것은 기습의 효만 잘 살리면 얼마든지 감당해 낼 수 있다.
‘편월의 목만 벤다면 다음 오기총감장 자리도 노려 볼 수 있다.’
가겸후는 명령 속에 편월의 목만은 반드시 베라고 했었다. 그것만 취하면 자신의 출세는 보장된 거나 마찬가지다.
하긴 오기총감장 자리가 꼭 탐이 나는 건 아니었다. 다만 다시 한 번 대규모 수군을 조직해서, 이번엔 자신이 상초국에 쳐들어가고 싶었다. 그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서라도 현재의 수군총령보다는 보다 높은 자리에 올라야 한다.
서서히 자정에 가까워졌고, 병력이 조용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 야습에 소극적이던 종자영도 어느새 무장을 갖추고 장졸들을 지휘하고 있는 듯했다.
“장군, 자정입니다.”
“망설일 것 없다. 공격을 개시하라!”
“존명!”
부장 중 한 명이 시각을 알리자마자 임항은 공격 명령을 내렸다. 종자영과의 보조 따위는 생각지도 않았다. 어떻게든 그보다 한발 앞서 공격해야 편월의 목을 자신의 손으로 딸 수 있는 기회도 많아질 테니 말이다.
아군 진영에서 화톳불이 피어오른다 싶더니, 이내 하늘을 가득 메운 불화살이 날았다. 모든 게 미리 지시해 둔 그대로 진행되고 있었다.
임항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 불화살 공격으로 위휘군은 틀림없이 혼란에 빠질 터이고, 그때 병력을 이끌고 짓밟아 주면 그만이다.
“와아아!”
위휘군 진영에서 함성이 일었을 때만 해도 임항은 그게 혼란에 빠졌기 때문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위휘군이 형성한 어린진의 뾰족한 첨단이 어둠 속에서 불쑥 튀어나와 정면으로 찌르고 들어왔을 때, 임항의 착각은 깨어지고 말았다.
‘어, 어떻게……?’
임항은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문제는 계속해서 그 문제로 고민할 시간적 여유가 없다는 점이었다. 가장 선두에 선 수자윤의 도끼가 벌써 그의 정수리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황했건 어쨌건 임항도 율천국의 수군총령을 맡을 정도로 기량을 가진 장수다. 재빨리 허리를 젖혀 수자윤의 도끼를 피하면서 옆구리의 장군도를 뽑아 반격을 개시했다.
하지만 그 자리에 이미 수자윤은 없었다. 한차례 도끼만을 휘두른 후 곧바로 저만치 달려가고 있었다. 누구의 눈에도 적중 돌파를 감행하려고 한다는 게 역력히 보였다.
“네 이놈! 게 섰거라!”
임항은 커다랗게 고함을 질렀다. 수군인지라 말馬이 없었기에 뒤를 쫓아가지 못하는 게 안타까울 뿐이었다.
하긴 지금의 임항이 어떻게 수자윤의 마음을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 그 역시 제대로 싸우지 않고 달리기만 하는 걸 불만스러워하고 있다는 걸 말이다. 게다가 임항의 처지는 지금 수자윤에 연연할 때가 아니었다. 위휘군 어린진의 그다음 비늘인 근위대가 뒤를 받치고 밀려들었던 것이다.
“못 간다, 이놈들!”
기세만은 좋게 수자윤은 위휘군을 막아섰다. 그 속에 희대의 싸움 중독자(?)인 맹아가 있다는 걸 몰랐다는 게 그의 불행이라면 불행이었다.
쓰읏!
맹아의 손에 들린 한 자루 창은 너무도 자연스럽게 임항의 목젖을 파고들었다. 설사 두부 한 모를 찌른다고 해도 이보다는 힘이 들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다.
창에 찍힌 임항을 맹아는 번쩍 치켜들었다. 마음 같아서는 그렇게 적들에게 시위하면서 달리고 싶었지만, 무게 때문에 이내 머리가 쪼개지며 시신이 바닥에 떨어져 말발굽에 짓이겨졌다.
“보군과의 보조를 흩트리지 마라! 속도를 조절해!”
뒤에서 편월이 연방 고함을 질렀다. 어린진의 한가운데에 편성한 보군들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사실 그 때문에 율천국 수군들이 입은 피해는 더욱 커졌다. 차라리 기병들이 빨리 스치고 지나갔으면 필요 이상의 싸움은 벌어지지 않았을 게다.
그런데 보군들과 보조를 맞추느라 기병들은 속도를 늦출 수밖에 없었고, 자연적 주변 적들과의 접전을 피할 수 없었다. 육전은 아무래도 서툴 수밖에 없는 수군이 막강한 위휘군의 기마대를 제대로 상대할 턱이 없었다.
돌연 율천국군 뒤편에서 급박한 꽹과리 소리가 터져 나왔다. 처음부터 이 야습에 소극적이던 종자영이 울린 것이었다.
어쨌거나 율천국 수군 입장에서는 반갑기 짝이 없는 후퇴 명령이었다. 그들은 일제히 병기를 말아 쥐고 종자영이 있는 곳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이 후퇴 명령은 종자영의 양심에 따른 결정이었다. 적이라 할 수 있는 위휘군에 야습을 알린 것이 무장으로서의 도의에 의해서였다면, 무고한 수하들이 피를 뿌리며 죽어 가는 걸 보는 것도 더 이상은 괴롭기 짝이 없었다.
물론 퇴각 명령을 내리면서도 종자영은 굳게 결심한 것이 한 가지 있었다. 만약 위휘군이 수군의 뒤를 추격한다면, 그 땐 정말이지 사력을 다해 싸워 자웅을 결할 것이라고 말이다.
“봉화를 올려라! 이곳의 위급을 인근에 알려라!”
수군들의 철수가 어느 정도 마무리되었다 싶자, 종자영은 재차 명을 내렸다. 율천국의 나머지 장수들은 자신처럼 양심의 가책 없이 위휘군을 맞아 싸울 수 있을 터였다. 이로써 오늘 여기서 자신의 할 일은 다 한 것이다.
그래도 종자영은 혀를 내둘렀다. 아무리 야습에 대한 걸 미리 알려 줬다고 해도, 위휘군의 대처는 너무도 기민했을뿐더러 한 치도 흐트러짐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을 지휘하는 편월의 능력에 적아를 떠나 존경심이 우러났다.
어둠 속에 잠긴 위휘군의 뒤에서 종자영은 가볍게 군례를 갖췄다.
율천국군의 야습에 제대로 반격을 가하고 돌파했다고 해서 위휘군의 위기가 끝난 건 결코 아니었다. 적이 피운 봉화를 대수성에서 봤을 테니 적어도 그들은 준비를 갖추고 저항해 올 게 분명하다.
물론 그들과 접전을 벌일 수는 없다. 그러는 사이 뒤에서 율천국의 협공을 받으면 위휘군 아니라 그 할아비라도 견딜 재간이 없다.
그렇다면 해답은 하나다. 지금처럼 그대로 뚫고 나가는 것 말이다.
‘보군들의 피해가 엄청날 텐데.’
아무리 보조를 맞추는 데 신경 쓴다고 해도, 난전이 되면 보군과 마군은 격차가 생기기 마련이다. 정면 승부를 하고자 마음먹는다면 어떻게든 끌고 갈 수 있겠지만, 지금처럼 적중 돌파라면 문제가 달라진다. 보군이 뒤로 처질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대인성을 우회해 가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러다 보면 시간이 걸리고, 그렇다면 추적을 당해 배후를 얻어맞는 건 매한 가지다. 그럴 바엔 차라리 싸우는 게 낫다.
그 같은 편월의 심정을 안 것일까. 가장 선두에 섰던 수자윤이 갑자기 부하 장졸들을 정지시켰다.
“후미는 우리가 맡겠소이다. 다른 분들은 곧장 대인성의 적들을 돌파하시오.”
“불가하오. 후미는 이 늙은이가 감당할 테니, 젊은 분들께 주군을 부탁드리겠소.”
담개가 즉각 반발하고 나섰다. 비록 하나로 통합되었다지만, 엄밀히 얘기하면 막주군은 손님 격이다. 위험한 임무를 맡길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아니요. 만에 하나 편월 장군, 아니 주군께 무슨 일이 생긴다면 돌아가신 광운 대장군을 뵐 낯이 없소. 그러니 후미는 우리가 맡겠소이다.”
“진형을 그대로 유지하시오.”
두 사람의 언쟁에 편월이 끼어들었다.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이대로 대인성의 저지를 돌파하겠소!”
광운이 죽은 뒤로 편월의 언행에는 이상한 무게감이 더해졌다. 이렇게 한마디 하자 누구도 선뜻 반대하지 못했다.
그들은 계속해서 달렸다. 옛 강국 영토 전역의 봉수대에선 봉화가 줄을 이었고, 그건 밝음보다는 위휘군의 앞길에 어두운 그림자를 던지고 있는 것 같았다.
밤새 하늘을 불사를 듯한 봉화들 속을 달린 위휘군이 대수성에 도착한 건 주변이 훤하게 밝아져 가는 아침나절이었다.
긴장 속에 도착한 위휘군의 눈에 비친 대수성 주변은 조금 의아한 광경이었다. 병력을 풀어 자신들의 앞길을 막고 있으리란 건 충분히 예상했지만, 묘하게도 적들은 들떠 보였다.
“전투 중인가?”
“그런 것 같습니다. 적들의 배후에 심상치 않은 움직임이 보입니다.”
경험이 많은 장수들의 눈에는 지금 대수성의 율천국군이 소규모 전투를 벌이는 게 확연히 보였다.
“진중 반란일까?”
“뭐든 상관없지 않습니까? 이대로 치고 들어가시지요.”
“좋아. 전진!”
편월은 결단을 내렸다. 설사 저게 적의 함정이라 해도 예까지 온 이상 뚫고 나갈 수밖에 없다. 어차피 약간의 희생을 치르는 한이 있더라도 돌파하기로 작정했으니까 말이다.
동시에 위휘군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여전히 그 속도는 빠르지 않았지만, 반드시 대수성의 저지선만은 돌파하겠다는 의지가 뜨거웠다.
대수성의 저지는 쉽게 뚫렸다. 미리부터 배후를 교란하고 있던 도연각의 군세 덕분이었다.
허주가 망할 때 조환의 장남인 조강을 데리고 대인성에서 철수했던 도연각은 그 후로도 위휘군에 합류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허주의 패잔병들을 꾸준히 끌어 모아 병력을 이만으로 늘렸고, 호시탐탐 대인성을 노리고 있었다.
하지만 대인성의 장웅은 수비를 견고히 했고, 그보다는 지난 며칠 사이에 옛 강국 영토인 대수성이 들썩거리는 게 감지되었다.
도연각의 발길이 대수성으로 향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어떤 성이 됐든 우선은 이만에 달하는 병력이 마음껏 쉴 수 있는 곳이 있어야 한다. 정확한 이유는 알 길이 없었지만, 마치 벌집을 쑤신 듯 옛 강국 영토가 들썩이는 걸 지켜볼 수는 없었다.
그렇게 따지면 도연각은 편월을 돕기 위해 군사행동을 일으킨 게 아니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 덕에 위휘군이 거의 아무런 피해 없이 대수성의 저지선을 돌파했고, 도연각의 군세도 자연스레 그들과 합류해 탄금성으로 들어왔다.
불과 열흘도 되지 않는 기간 중에 벌어진 출동과 철수였다.
그래도 그사이의 전투는 격렬하기 짝이 없었고, 탄금성 후방에 있는 윤주성과 합진성에 모여든 각 군벌의 병력은 벌써 오십만을 너끈하게 넘어서고 있었다.
이로써 위휘군은 율천국군과 자웅을 결할 수 있는 저력을 확보하게 된 것이다.
3
위휘군과 율천국군의 대치는 벌써 한 달을 넘겨 두 달째에 접어들려 하고 있었다.
그사이 가겸후는 율천국의 총력이라고 할 수 있는 오십만 대군을 이끌고 출정해서 직접 진두지휘하고 있었다.
물론 위휘군의 병력도 늘었다. 가겸후에게 지배되지 않은 각지의 군벌들이 모두 합류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니, 그 숫자는 폐포자의 예상대로 근 칠십만에 육박했다.
병력만 따지면 당장이라도 율천국군과 일전을 불사해도 불리하지 않은 위휘군이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좌괴는 연방 후퇴를 주장했고, 편월도 별다른 이의 없이 그 말에 따랐다.
그 결과 위휘군은 탄금성과 윤주성은 물론 거성居城이라 할 수 있는 합진성까지 버렸다. 그렇게 해서 들어간 곳은 합진성에서 서북쪽으로 이백 리 정도 떨어진 건천성乾川城이었다. 옛날엔 큰 강이 흐르던 곳이었지만, 물길이 변했는지 모두 말라 버린 곳에 세워진 작은 성이었다.
그러나 주변은 넓었다. 성이 너무 작아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위휘군이 주둔한 서북쪽의 완만한 구릉을 제외하면 눈에 걸리는 게 없다고 할 정도로 평평한 황무지였다. 오죽했으면 이 근처 사람들은 여기를 여해평如海坪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사실 지금까지 버린 성 주변은 양측 합쳐 백만이 넘는 대군이 전쟁을 치르기엔 지나치게 비좁았다. 공간이 있어야 진을 형성하든 작전을 펴든 할 게 아닌가 말이다.
이건 다시 생각해 보면 편월의 의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기도 했다. 성 몇 개 따위에 연연하지 않고, 이번에야말로 가겸후와 건곤일척의 승부를 내고야 말겠다는 투지의 표현이기도 했다.
가겸후의 대응도 빨랐다. 위휘군이 여해평에 진을 펴자마자 선발대를 보냈다 싶더니, 그다음 날 곧바로 본진을 이끌고 나타났다. 그 역시 이번 싸움에 모든 것을 걸 각오인 것 같았다.
두 사람의 각오가 그렇다는 걸 알면 장수들도 그냥 있지 않는다. 부하 장졸들을 더욱 닦달하며, 한편으론 선봉 싸움을 치열하게 벌이기도 한다.
하지만 어느 쪽도 선뜻 선제공격을 취하지 못했다. 장수들끼리의 싸움은 물론 병사들 간의 사소한 접전도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여해평은 문자 그대로 폭풍우를 앞둔 바다처럼 잠잠하기만 했다.
“이대로 마냥 대치하고 있을 수만은 없어. 결전은 언제가 좋을까?”
편월이 모처럼 둘만 앉은 자리에서 좌괴에게 물었다.
이제 달은 벌써 사월로 접어들었다. 갑옷 속에 들어앉은 육신에선 진득한 땀이 배기 시작하고, 보리가 한창 영글어 가는 계절이었다. 결전을 더 이상 늦추다가는 백성들이 제때에 수확하지 못할 우려도 없지 않았다.
“소인은 비를 기다리는 중입니다.”
“비를?”
다소 엉뚱한 좌괴의 대답에 편월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면서 되물었다.
“아시다시피 여기는 큰 강이 흐르다 마른 곳입니다. 그러니 비만 내리면 진구렁으로 변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진을 친 곳은 비교적 지대가 높습니다. 그러니까 비가 내리길 기다려 공격하거나, 아니면 적이 철수할 때를 노려 배후를 쳐야 합니다.”
“비가 온다고 가겸후가 철수를 할까? 그보다는 병력이 우위에 있을 때 한번쯤 치는 게 좋지 않을까? 아군의 사기도 고무시킬 겸.”
“불가합니다. 이 싸움은 서전이고 종전이고 따로 있을 수가 없습니다. 한 번의 싸움에 모든 걸 결정해야만 합니다. 아군의 사기를 올리기 위해 한두 번의 전투를 치르자고 하셨는데, 그야말로 위험한 일입니다. 적은 비록 숫자는 적지만 예전부터 하나로 뭉쳐진 군세인 데 반해 우린 여러 곳의 연합군과도 같습니다. 서로 손발도 제대로 맞지 않을 터에, 자칫 패전이라도 한다면 오히려 사기에 악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물론 비가 내린다고 적이 철수하지는 않겠지만 가겸후는 상당한 곤욕을 치를 게 틀림없습니다. 이런 야전을 치른 경험이 많지 않을 터이니, 비가 내리면 어떤 틈을 보일 게 분명합니다. 진정한 싸움은 그때부터 시작될 것입니다.”
어쩌면 좌괴도 다소 흥분한 건지도 모른다. 논리는 정연했지만 평소보다 말이 길었다.
“그렇다면 비가 오는 시기의 문제겠군. 언제쯤 비가 내릴까?”
“그건 나이 든 장수 분들이나 이 근처의 늙은 농부들에게 묻는 게 정확할 것입니다.”
“그럼 담 장군을 부를까?”
농담처럼 가볍게 말하며 편월은 기지개를 켰다. 근 두 달 가까이 싸움다운 싸움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긴장을 조금도 늦출 수 없었으니 전신의 뼈마디가 뻐근하게 당기는 듯했다.
“내일 저녁부터는 비가 내릴 것 같습니다.”
“뭐? 알고 있었나?”
“점심때부터 바람이 습기를 머금기 시작했습니다. 늦어도 내일 저녁부터는 비가 내릴 것 같습니다. 다만 그 양이 어느 정도일지는 짐작하기 힘듭니다.”
좌괴의 말에 편월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번 배호성을 수공했을 때도 그는 비가 내린다는 걸 정확하게 예측했다고 한다. 이번에도 틀리진 않을 터였다.
“그렇다면 나도 슬슬 몸을 풀어 둬야겠군.”
“직접 나서실 생각이십니까?”
“그럼 내가 뒷짐 지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세찬 반문으로 좌괴의 입을 막은 후, 편월은 진막을 빠져나갔다. 이 시간이면 일과처럼 정해진 진중 순찰을 돌려는 것이었다. 그저 한 바퀴 돌아보는 것에 불과했지만, 여러 군세가 합류한 위휘군의 사기 진작엔 상당한 도움이 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편월이 나가자 우선 근위대원들이 함성을 올렸다. 그건 물결처럼 쭉 이어져 칠십만에 달하는 위휘군 전체로 번져 나갔다.
거리가 있는 탓에 편월의 모습을 직접 보긴 어려웠지만, 그가 있는 곳에서 항상 펄럭이는 대장군기는 가겸후의 눈에도 똑똑히 보였다.
저 꼴을 볼 때마다 가겸후는 속이 뒤집혔다. 저 많은 군벌들의 환호는 자신만의 것이어야 한다. 오직 자신만을 위해서 저들은 함성을 올리고 땅에 부복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모두가 편월의 것이 된 듯했다. 친아버지를 내치면서까지 이룩하려고 했던 모든 걸 핏덩어리보다 작은 꼬맹이 놈에게 날치기당해 버린 것만 같았다.
그 점을 가겸후는 참을 수가 없었다.
“오늘 밤 야습을 감행하겠소.”
“아니 되옵니다!”
“오, 오! 드디어 결심하셨사옵니까?”
가겸후의 말을 들은 폐포자와 무장들의 반응은 극명하게 엇갈렸다. 전자가 질색하며 반대한 것에 비해 후자는 반색을 띠며 찬동의 뜻을 표했다.
무장들 중에서는 특히 융주의 적비가 유난히 설쳤다. 약탈물에 대한 소유권을 인정해 주고, 거기에 석주의 성 두 개까지 받기로 한 싸움에서 벌써 두 달이나 아무 소득(?)이 없었다. 좀이 쑤셔 견딜 수 없어 하는 상태를 알고 싶다면 지금 그의 모습을 보면 정확할 터였다.
“어허, 폐포자는 왜 또 반대를 하시오? 벌써 두 달이오! 그런데 또 버티자는 말이오?”
육우맹이 언성을 높여 폐포자를 질타했다. 실로 오랜만에 기분이 후련해졌다.
그러나 가겸후는 육우맹처럼 감정대로만 움직일 수 없었다. 비록 조금 전엔 격해진 기분에 공격 명령을 내리긴 했지만, 반대 의견이 있다면 그것도 들어 둬야 한다. 전쟁은 그처럼 신중하게 치러야 하는 것이다.
“말해 보시오, 폐포자. 왜 반대하는 거요?”
“우선 우리는 병력이 부족하옵니다. 그리고 이곳의 지형에도 익숙지 않으니 야습을 감행한다는 건 위험천만한 일이옵니다.”
“병력이 부족하니 기습을 하는 것 아니겠소? 폐포자는 병법의 기본도 모르시오?”
이번에도 육우맹이 나섰다. 이 기회에 그동안 폐포자에게 밀려 희미해졌던 자신의 존재감을 마음껏 부각시킬 심산이었다.
“말씀드렸지 않소! 우린 이 근처의 지형에 익숙하지 못하다고. 대낮의 기습에도 신중해야 될 판에, 야간 기습을 감행하다 자칫 아군끼리 한편 싸움이 벌어질지도 모르오. 그런 위험을 감수하고까지 야습할 필요는 없소이다.”
폐포자도 만만치 않았다. 목소리나 기세, 그 어느 것에서도 육우맹에게 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폐포자에겐 복안이 있다는 말이군. 있다면 기탄없이 말해 보시오. 과인의 조금 전 야습 명령은 일단 못 들은 걸로 하고.”
가겸후가 나서서야 육우맹은 입을 닫았다. 그러나 얼굴에 드리워진 불만의 기색까지 지울 수는 없었다.
“아마 위휘군도 결전이 임박했다고 여기고 있을 것이옵니다. 그건 곧 지난번에 포섭해 둔 두 명의 성주가 움직일 때가 됐다는 뜻이옵니다. 하오니 그들이 움직일 때를 기다려 일거에 밀어붙이는 게 좋을 듯하옵니다.”
“하면 그들 성주와 연락이 닿는다는 말이오?”
“이 여해평에 와서는 연락이 되지 않고 있사옵니다. 하나 이제 곧 모종의 변화가 일어날 것이옵니다. 우린 그때를 놓치지 않도록 준비를 단단히 해 두고 기다려야 할 것이옵니다.”
“만약 그들이 변심했거나 작전이 들통 났다면 어쩌시겠소? 혹은 아무런 일도 하지 않고 그저 이기는 쪽에 붙자는 마음이 들었다면?”
“말씀드렸다시피 이유와 강도길은 욕심이 바다보다 큰 자들이옵니다. 그들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라도 변심하거나 기회주의자가 되지는 않을 것이옵니다. 들통이 났다면 위휘군 진영이 저렇게 조용할 리가 있겠사옵니까. 하오니 그 점은 심려치 마시오소서.”
“그럼 결전의 날이 언제일 거라고 폐포자는 생각하시오?”
“그걸 정확히 말씀드리기는 어렵사옵니다. 하지만 조만간, 요 며칠 사이에 틀림없이 뭔가 일어날 것이옵니다. 욕심이 많은 자는 원래 참을성이 부족한 법, 벌써 두 달씩이나 참은 것도 대단하다고 생각하옵니다.”
“알겠소. 육 장군, 며칠 안으로 싸움이 벌어질 게요. 그렇게 알고 모든 장졸들에게 만반의 준비를 해 두라고 하시오.”
“존명!”
복명을 한 것은 비단 육우맹만이 아니었다. 가겸후 앞이라 대화에 끼어들지 못했던 장수들이 일제히 군례를 갖추며 대답했다.
그 모습에 가겸후의 기분이 조금 풀렸다. 요 며칠 내에 싸움이 벌어지고, 그 결과 승리한다면 천하의 모든 군벌의 장수들이 자신 앞에서 저처럼 예를 갖추게 되리라.
모처럼 가겸후는 편안한 밤을 맞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 * *
비를 기다린 건 좌괴만이 아니었다. 이유와 강도길도 모가지가 길어질 정도로 기다렸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들이 기다린 건 비가 아니라 먹구름이었다. 밤이 되어도 각 군영마다 지펴 둔 화톳불 때문에 그리 어둡지 않아서, 움직여 보려고 해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런데 오늘 오후부터 먹구름이 몰려들기 시작하자 두 사람은 쾌재를 부르며 서로 머리를 맞댔다. 오늘 밤이야말로 문자 그대로 칠흑 같은 밤이 될 테니, 아무리 화톳불을 피웠다고 해도 평소만큼 순라병들의 시야가 확보되지 못한다. 그 틈을 노리고 우선 흑유를 보관한 막사에 잠입해 불을 지르고, 그길로 군사를 일으켜 진중 반란을 꾀하자고 서로 입을 맞췄다.
비라도 내리면 금상첨화라고 두 사람은 생각했다. 경계는 그만큼 해이해질 테고, 빗속에서도 흑유는 꺼지지 않고 타오를 테니까 말이다.
병사들의 저녁 취사가 끝나기 무섭게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그것도 봄비치고는 너무 거창하게 내려서, 마치 한여름 소낙비를 연상케 했다.
당연히 이유와 강도길은 춤이라도 추고 싶을 만큼 기분이 좋아졌다. 조금만 더 기다렸다가, 해시 말경에 거사를 하자고 정하고는 그길로 병사들에게 무장할 것을 명했다.
출동 명령이 떨어진 건 그 직후였다. 그건 이유와 강도길에게 있어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리였다.
하지만 이왕에 내친걸음이다. 출동 명령으로 술렁거리는 위휘군의 동정은 벌써 율천국군도 알아챘을 터, 이쪽에서 먼저 행동을 일으키면 반드시 호응해 줄 것이다.
그들은 각자 자신들의 부하 장졸들을 이끌고 행동을 개시했다. 원래는 흑유 보관 막사에 먼저 불을 지르고 진중 반란으로 옮겨 가려고 했지만, 순서가 뒤바뀌고 말았다.
바로 이게 그들에게 커다란 불운으로 작용했다. 대개의 사람들은 예기치 않았던 불을 보면 당황한다. 그때 진중 반란을 일으켰으면 혹 두 사람의 의도가 성공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순서가 뒤집혀 진중 반란이 선행되고 말았다. 그것도 출동 명령이 떨어진 상태에서의 일이니 성공할 턱이 없었다. 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진압되었고, 두 사람은 그 자리에서 참수되었다.
어쩌면 이들이 실패한 건 단순히 거사의 순서가 바뀌었기 때문만은 아닌지도 모른다. 욕심이 조금만 적었다면 그들은 기회주의를 택했을 것이고, 적어도 자신들의 성이나 목숨은 보존할 수 있었으리라.
그러나 위휘군이 이겼을 때의 보장은 하나도 없었고, 율천국군이 이겼을 때만 건주의 반을 주겠다는 약속을 가겸후로부터 얻어 냈다. 바로 그게 두 사람의 명줄을 당긴 근본 원인이었을 게다.
조기에 진압되었지만 소란은 큰 소란이었다. 그걸 온전하게 숨길 수는 없는 노릇이고 보면, 두 사람의 진중 반란 기도는 고스란히 율천국군에 알려질 수밖에 없었다.
위휘군의 진영이 들썩거린다는 보고를 받았을 때, 폐포자는 전혀 망설임 없이 출동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갑옷으로 중무장한 채 밖으로 나왔을 때 그의 얼굴은 낭패감으로 핼쑥해지고 말았다.
“아뿔싸!”
이게 진막 밖으로 서너 발짝 내디딘 폐포자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비를 맞은 대지는 마치 늪과 같아서 말이 쑥쑥 빠지고, 당연히 출동 명령을 받은 장졸들의 행동은 굼뜨기 짝이 없었다.
그 순간 폐포자의 머릿속은 새하얗게 비고 말았다. 무려 육십만에 이르는 율천국군이다. 이들이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바닥의 진흙은 더욱 깊게 사람을 빨아 당길 터이고, 그렇다고 움직이지 않으면 위휘군이 쏘는 화살에 고스란히 노출되고 만다. 이런 상황에서 그가 생각해 낼 수 있는 건 고작 가겸후를 보호해야 된다는 것뿐이었다.
근처의 병사들에게 몇 가지 지시를 내린 후, 무릎까지 빠지는 진흙탕을 헤치며 가겸후의 진막에 도착한 폐포자는 약간은 안심할 수 있었다. 아직 가겸후는 갑옷을 입는 중이라 밖의 상황을 제대로 알지 못한 것 같아서였다.
“지금 병사들에게 이 진막을 통나무로 에워싸고 진흙을 바르라고 명해 두었사옵니다. 하오니 전하께오선 밖으로 나가지 마시옵소서.”
“대체 무슨 일로? 지금이야말로 결전을 벌일 때인데, 과인으로 하여금 진막 안에 머물러 있으라고?”
“어떻게 해서든 이 싸움을 이겨 보이겠나이다. 하오니 오늘은 소인의 말에 따라 주소서.”
폐포자는 필사적이었다. 만약 밖으로 나간 가겸후가 진구렁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 적의 화살이 집중되기라도 한다면 만사는 끝장나는 것이다. 어떤 일이 있어도 그것만은 막아야 한다.
거기에 역시 사색이 되어 뛰어든 것은 육우맹이었다.
“전하, 지금 즉시 퇴각하여야 하옵니다. 퇴각 명령을 내려 주소서!”
“퇴각이라니? 아직 싸움이 시작되지도 않았… 아니?”
그제야 가겸후는 두 사람의 갑옷에 온통 칠갑을 한 진흙을 본 모양이었다. 비가 내리는 건 익히 알고 있으니, 바깥의 상황도 짐작할 만했다.
이런 경우 가겸후는 무서울 정도로 냉정하게 대처한다.
“폐포자가 과인더러 진막에 머물라 하고 육 장군은 퇴각 명령을 요구하고 있다면, 이 싸움은 우리가 진 것이로군. 그렇다면 전군에 퇴각을 명하시오. 수단과 방법은 아무래도 좋소. 다음 집결지는 합진성으로 정하시오.”
노기라고는 단 한 점도 찾아볼 수 없는 가겸후의 명이었다.
하지만 폐포자나 육우맹은 안도의 한숨을 내쉴 겨를조차 없었다. 진막을 두드리는 빗소리보다 더 강한 파공성과 더불어 치명적인 화살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아뿔싸!”
폐포자는 다시 한 번 장탄식을 토했다. 위휘군이 술렁거린다는 보고를 받았을 때, 그는 그걸 이유와 강도길이 일을 벌였기 때문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이처럼 빠른 공격을 당하고 보니 그건 이 비를 기다린 적이 미리 출동 준비를 하고 있었다고 깨닫게 되었다.
“어서 대왕 전하를 뫼시어라! 어서!”
이럴 땐 무장인 육우맹의 판단이 빠르다. 그는 가겸후의 근위대를 불러 그의 주변에 온통 방패의 벽을 세운 뒤 밖으로 나갔다.
밖은 이미 아비규환이었다. 연방 화살이 날아들었고, 그보다 더 치명적인 건 작은 흑유 주머니를 매단 불화살이었다. 그건 물 위로도 번져 가며 거침없이 율천국군의 진막들을 불태웠고, 심지어는 사람과 말까지도 한꺼번에 사르고 있었다.
그때 용맹을 발휘한 사람은 융주의 적비였다.
“용맹한 융주병들은 나를 따르라!”
한 소리 크게 외친 적비가 쏟아지는 화살 비를 뚫고 전진하자, 융주병들은 일제히 그의 뒤를 따랐다. 그게 여해평에서 율천국 최초의 반격 시도였다.
폐포자와 육우맹에게는 천금 같은 시간을 벌게 된 셈이었다. 그들은 재빨리 가겸후를 도와 퇴각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이유와 강도길이 진중 반란을 일으켰을 때 좌괴는 오히려 잘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쪽의 동요를 눈치 채면 율천국군은 움직이지 않을 수 없을 터이고, 그들이 진을 친 곳이라면 온통 진구렁으로 변해,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더 심한 곤란에 빠질 것이기 때문이다.
확실히 척후병의 보고는 예상했던 그대로였다. 출동 명령을 받은 율천국군은 그들이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진흙탕이라는 복병을 만나 혼란에 휩싸였다는 것이다.
더 이상의 기다림은 무의미했다. 좌괴는 즉각 총공격을 건의했고, 편월 역시 미련 없이 명을 내렸다.
물론 군사를 몰고 간 건 아니었다. 그래 봐야 율천국군 진영에 접근하면 위휘군 역시 적과 마찬가지 상황에 빠지게 되니까 말이다.
위휘군이 선택한 건 화살 공격이었다. 육십만이 넘는 대군이다. 그들 중 절반이 활을 쏜다고 해도 삼십만 발이다. 그처럼 세찬 공격을 받은 율천국군이 얼마나 살아남을 수 있을까?
당연히 적도 화살로 반격을 가할 수 있다. 문제는 지형의 차이다. 위치상 위휘군이 높은 곳을 차지하고 있으니, 같은 활이라도 화살이 더 멀리 날아갈 건 정해진 이치다.
과연 율천국군에서도 화살을 쏘아 댔다. 하지만 그건 위휘군이 진을 친 구릉의 아래쪽까지 간신히 미칠 뿐이었다.
거기에 나타난 것은 이만에 달하는 융주군이었다. 원래는 삼만이었지만, 위휘군의 화살 공격에 일만이 희생되었다. 그들이 저돌적으로 적비의 뒤를 따라 돌격을 감행해 왔다.
가장 먼저 그들을 발견한 사람은 최전방에 나가 있는 수자윤이었다.
“적이다!”
한 소리 크게 외친 그는 곧바로 말을 몰아, 선두에서 달려오는 적비를 향해 일직선으로 달려갔다.
좌괴를 경악하게 만든 건 편월의 행동이었다.
“전군 돌격!”
그는 엉뚱하게도 위휘군 전체에 돌격 명령을 내린 것이다. 이대로 화살만 쏴 대도 충분히 이길 수 있는 싸움인데 말이다.
그러나 전시에 내려진 명은 거역하거나 반대할 수 없었다. 편월을 비롯한 근위대가 가장 먼저 짓쳐 드는 융주군의 곁을 스쳐 율천국군 본대를 향해 곧장 진격했다.
편월도 자신의 명령이 무리했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그 결과 양측에 필요 이상의 엄청난 희생이 나리란 것 역시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이렇게 해야만 한다. 이번만큼은 자신의 손으로 가겸후의 목을 쳐서 온전한 승리를 거두고 싶었다. 호윤천을 상대했을 때와 같은 찜찜함은 남겨 두기 싫었다.
“가겸후는 어디 있는가? 여기 편월이 왔노라! 달아나지 말고 나와서 목을 늘여라!”
편월이 율천국의 진영으로 뛰어들며 고함을 질렀을 때, 옆에 있던 맹아가 돌연 말을 버리고 갑옷을 벗어 던졌다. 진흙탕 속에서는 차라리 발가벗는 게 움직이기가 훨씬 편하기 때문이다.
대장이 저러면 부하들도 따르지 않을 수 없다. 근위대원은 샅 가리개 하나만 착용한 모습으로 편월의 주변을 에워쌌다.
그런 점에서 보면 흑풍은 과연 명마였다. 조금이라도 멈추면 발이 빠진다는 걸 알았는지, 같은 자리에 머무는 법이 없었다.
그 바람에 고역을 치르는 건 근위대원들이었다. 편월이 한자리에 머물러 있어도 보호하기 힘든 판에, 그를 실은 흑풍이 연방 위치를 이동하니 뒤따르는 것도 고역이었다.
하지만 이미 적진 속으로 뛰어든 상태였다. 위휘군이 쏘는 화살은 더 이상 날아오지 않았지만, 사방이 온통 적들뿐이다. 적어도 아군이 가세할 때까지는 편월을 보호해야만 한다.
“가겸후는 어디 있느냐? 여기 편월이 그대를 찾고 있노라!”
흑풍이 움직이는 곳엔 어김없이 적이 있었고, 주변에 몰려드는 적들을 일일이 베어 내며 편월은 엄청나게 큰 고함을 질렀다.
다시 한차례 흑풍이 훌쩍 도약했을 때 별안간 편월의 상체가 크게 출렁거리며 낙마할 듯 위태롭게 흔들렸다. 왼쪽 쇄골 바로 아래에 한 대의 화살이 깊숙이 꽂힌 까닭에서였다.
“주군!”
맹아가 경악성을 토하며 달려왔지만, 편월은 그쪽으로 시선도 주지 않았다. 그의 눈에는 저만치 앞에서 활을 들고 서 있는 가겸후만이 보일 뿐이었다.
“가겸후!”
그의 이름을 크게 부르며 편월은 흑풍의 옆구리를 걷어찼다.
“안 돼! 주군, 안 됩니다! 에라이, 바보 같은 놈의 주군!”
맹아가 달려들어 흑풍의 고삐를 잡으려고 했지만, 그때 이미 편월은 성큼 내닫고 있는 중이었다.
“뭣들 하느냐? 주군을 보호하라! 주군을 보호해!”
근위대원들에게 고함을 지르며, 맹아는 필사적으로 진흙을 헤치며 달렸다. 편월은 혼자지만 가겸후의 주변엔 많은 병사들이 있었던 것이다.
맹아는 편월이 위기 속으로 뛰어든다고 여겼지만, 정작 당사자에게 그런 의식은 조금도 없었다. 여기가 전장이라는 사실조차 생각지 않았고, 오로지 활을 쏘는 가겸후의 모습만이 또렷이 보일 뿐이었다.
꽈악!
편월이 수중의 대도를 쥔 손에 새삼 힘을 가한 건 가겸후가 다시 한 발의 화살을 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단순한 본능이었다. 이제 곧 삶과 죽음이 극명하게 교차될 시점이 온다는 걸 알게 된 몸이 저절로 반응한 것에 불과했다.
“융주의 수괴 적비의 목을 막주의 수자윤이 쳤노라!”
뒤에서 수자윤의 고함이 터졌지만, 편월의 귀에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소음도 없고, 빛도 어둠도 없는, 쏟아지는 빗줄기조차 한 방울 스며들 곳 없는 묘한 공간 속에 가겸후와 자신만 존재하는 것 같았다.
모든 게 느려졌다. 벌써 오래 전에 발사했던 가겸후의 화살이 이제야 편월의 코앞에 이르고 있었다.
편월은 상체를 옆으로 숙여 화살을 피했다. 그 동작도 마치 물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처럼 더디기 짝이 없었다.
다시 가겸후가 화살 한 대를 시위에 걸었다. 동시에 흑풍은 그를 보호하는 병사들 속으로 뛰어들었다.
쉬잇!
편월의 대도가 빗줄기를 잘랐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비를 어떻게 자를 수 있을까마는 실제로 그건 가녀린 대나무처럼 가닥가닥 끊어져 나갔다.
비명이 터져 나왔다. 편월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지만 그가 헛되이 빗방울만 자를 리 없으니 의당 적의 희생이 뒤따랐다.
가장 먼저 바닥에 목을 떨군 건 폐포자였다. 전장에서 단련된 장졸들도 제 한 몸 가누기 힘든 진흙탕인지라, 그의 동작은 굼뜨기 짝이 없었다. 가장 먼저 편월에게 희생된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네 이노옴!”
일성 노갈과 더불어 육우맹이 거대한 대도를 휘두르며 편월의 목을 노렸다.
하지만 그의 대도는 편월에겐 이르지도 못했다. 간신히 따라붙은 맹아가 절풍검을 휘둘러 육우맹이 타고 있는 말과 그의 허리를 동시에 베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 일격으로 육우맹은 죽지 않았다. 맹아의 검이 말을 베었지만, 사람은 갑옷의 보호를 받고 있었는지라 그저 말에서 떨어뜨리는 걸로 족해야 했다.
그래도 맹아는 실망하지 않았다. 일단 말에서 떨어져 진흙탕에 뒹굴면 발가벗은 것이나 다름없는 자신이 훨씬 유리할 건 뻔한 일이다.
맹아는 마치 먹이를 향해 덮치는 여우처럼 빠르게 육우맹에게 달려들었다. 이내 그 근처는 벌건 핏물이 진흙 위를 어지럽게 굴렀다.
“율천국 오기총감장 육우맹의 목을 맹아가 쳤노라!”
맹아가 육우맹의 목을 높이 쳐들고 고함을 지를 때 편월은 가겸후에게 대도를 휘두르고 있었다.
가겸후는 들고 있던 왼손의 활로 편월의 대도를 막았다. 동시에 오른손은 허리에 찬 장군도를 뽑아 그대로 휘둘렀다.
가겸후로선 사력을 다한 공격이었다. 몸을 피할 시간적 여유도 없지 않았지만 그는 전장에 남았다. 온 나라 전체를 들어 시작한 이 전쟁에서 패하면 더 이상 자신이 갈 곳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대도를 거둔 편월이 그 자루로 가겸후의 검을 막았다. 그러고는 곧바로 날을 세워 그의 정수리를 그대로 내려쳤다.
“율천국 장수 장웅의 목을 위휘군의 담개가 쳤노라!”
“위휘군의 강숙이 율천국 장수…….”
난전이 한창인 전장에선 장수들이 자신의 공훈을 알리는 외침이 연방 울려 퍼졌다.
그러나 편월의 귀를 울린 건 오직 한 가지 소리뿐이었다.
뻐억!
그건 자신의 대도가 가겸후의 정수리를 내려쳐, 투구와 두개골을 동시에 자르는 소리였다.
그 순간 편월은 모든 동작을 멈췄다. 아니, 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모든 게 스스로 정지되어 버렸다. 인간 욕심의 가장 극단적 표출이랄 수 있는 전쟁도, 그 속에서 치열하게 삶과 죽음을 나누고 있던 사람들의 허망한 몸짓도, 억겁 세월의 저 아득한 이전부터, 그보다 훨씬 먼 미래까지 흘러갈 시간조차도 이 순간엔 정지되어 버렸다.
그리고 또 하나, 이백여 년을 이어 왔던 피에 물든 난세도 그 지긋지긋한 발길을 멈추었다.
계속되는 건 빗물뿐이었다. 쏟아져 흐르면서, 지상의 핏물도 그 비는 조용히 씻어 내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