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룡귀해老龍歸海
1
폐포자의 예상보다 위휘국의 대처는 훨씬 빨랐다. 가겸후가 바다에서 고전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은 그날 저녁나절에 벌써 상가웅은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보고를 받은 좌괴는 즉각 위휘군 전체에 비상을 걸었다. 합진성에 남아 있던 장수들이 모두 모였음은 물론이었다.
그중에서 특히 주목을 받은 사람은 막주의 수군제독 주융이었다. 율천국의 수군이 상초국의 해전에서 패한 것이나 진배없었으니 당연한 건지도 모른다.
“주군, 어떻게 대처하실 생각이신지요?”
두건득이 가장 먼저 편월에게 물었다. 지금까지는 율천국과 상초국의 해전에 관한 것이었을 뿐, 위휘군의 대처 방안에 대해선 한마디의 언급도 없었던 것이다.
“뭘 그리 서두르시오. 가겸후는 아직 우리의 동맹 제의에 엉뚱한 조건이나 내걸고 있소이다. 이럴 땐 섣불리 움직일 게 아니라 자중하는 게 좋을 것이오.”
담개가 두건득의 말에 반박하고 나섰다. 그는 가겸후가 내건 조건에 대한 분노를 지금까지 다스리지 못한 상태였다. 그는 시선을 돌려 편월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어쨌든 모든 건 주군께 달려 있습니다. 명을 내려 주소서.”
재미있는 건 편월에게 하는 이들의 말투가 변했다는 점이다. 왕후장상에게 하는 극존칭은 아니었지만, 예전과 같은 거친 어조는 결코 아니었다.
편월은 눈을 감았다. 여기서 진퇴를 그르치면 평생 후회할 게 뻔하다. 어쩌면 지금껏 쌓아 올린 기반이 일거에 와해될지도 모른다.
“좌 선생의 생각은 어떠시오?”
편월이 말이 없자 담개는 좌괴에게 질문을 던졌다.
“당장 출전해야 한다고 생각하오. 하지만 그건 수군만입니다. 그러니 주 제독께서는 최대한 빨리 수군을 출동시켜 주셨으면 합니다.”
“그 말씀을 기다리고 있었소이다. 소장은 이 길로 연미포로 떠나겠소이다.”
“정면 격돌은 피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그렇지 않아도 우리 수군은 실전 경험이 없소이다. 우선은 원거리에서 포위하는 걸로 싸움을 시작해 볼까 하오.”
“지당하신 말씀. 가겸후도 그 같은 수모를 당하고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겁니다. 그러니 적이 상륙을 시도하면 그 배후를 치고, 응전해 오면 물러서면서 시간을 끄십시오.”
“알겠소이다. 그럼 소장은 이만!”
원래가 이처럼 급한 성격의 주융이 아니었다. 일의 다급함을 알기에 서두르는 것이다.
그길로 주융은 방을 나가 출발을 서둘러 그날 밤 중에 합진성을 출발했다.
“그럼 우리들도 출발을 서둘러야겠군. 좌 선생, 우리들은 어떻게 하면 되는 거요?”
“기다려야지요.”
“그럼 정말 막주의 수군만 출동시킨다는 말이오? 그래서는 우리 위휘군의 체면이 서지 않소이다. 벌써 위중한 광운 장군께서도 탄금성으로 몸소 나가지 않으셨소이까.”
“그 후로 가겸후에게선 동맹에 대한 답신이 없었소. 그런데 우리가 섣불리 병력 이동을 계속한다면 가겸후를 자극할 우려도 없지 않소이다. 가뜩이나 지금 가겸후는 궁지에 몰린 듯한 기분일 게요. 우리까지 움직여 그런 오해를 사서는 안 될 것이오.”
“딴은…….”
장수들은 수긍했다. 가겸후의 동맹 조건에 지금껏 불만을 품고 있던 담개도 고개를 끄덕였다. 입장이 바뀌었다면, 자신도 똑같은 심정이 될 테니까 말이다.
“주군, 이렇게 결정해도 되겠는지요?”
좌괴가 장수들의 뜻이 결정되었다는 의미로 편월에게 물었다.
그러나 편월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지금 광운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라면 과연 어떻게 했을까?
사자로 파견한 사람들의 위험을 대뜸 간파한 광운은 아픈 몸을 이끌고 탄금성으로 갔다. 실로 예리한 판단력과 기민한 실행력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자신은 지금 망설이고 있다. 행동하지 못하는 건 물론 도대체 어떻게 해야 될지 판단조차 서지 않았다.
‘나는 지금까지도 광운에게 어리광이나 부릴 생각만 하는 걸까?’
편월은 자괴감까지 들었다. 주군이라는 호칭으로, 또 전대 황제의 종제로 떠받들림을 받고 있지만, 기실 자신이 한 일은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았다.
“주군?”
한참 동안이나 편월이 말이 없자 좌괴가 재차 조용히 불렀다. 다른 장수들도 한결같이 시선을 집중하고 있었다.
“좌괴의 말처럼 당분간은 움직이지 않는 게 좋겠소. 막주에도 더 이상 병력을 보내지 말도록. 대신 윤주성에 주둔시키는 게 좋겠소. 그리 알고 행하시오.”
“존명!”
“잠깐!”
장수들이 복명했을 때 돌연 좌괴가 그들을 제지했다.
“주군의 말씀에 한마디만 더 보태겠소. 윤주성도 탄금성과 마찬가지로 이젠 율천국과 국경을 접하게 되었소. 그러니 병력을 넣을 땐 은밀히 하는 게 좋을 것 같소.”
“그리하리다.”
더 이상 가겸후를 자극하지 말자는 얘기는 진즉부터 나왔다. 새삼 좌괴의 말에 이의를 제기할 건 없었다.
“주군, 막주의 수군이…….”
“나도 윤주성으로 가겠다.”
“그야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막주의 수군이 크게 패할 경우도 생각해 두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막주의 수군이 패할까? 그들은 상초국 수군과의 전면전은 피하겠다고 하지 않았나?”
“그렇긴 합니다만, 해전에 있어서는 아무래도 상초국을 따르기는 어렵습니다. 주 제독은 신중한 사람인 것 같지만 상초국의 도발이나 함정에 걸리지 말란 법도 없습니다.”
“그래서 대책은?”
“지금쯤이면 가겸후도 최대한 서두르고 있을 것입니다. 율천국의 빠른 참전이 최고의 방책이겠으나, 그와는 별도로 막주에 남은 수군도 서둘러 참전시켜야 할 듯합니다.”
“날이 밝기 전에 전령을 보내도록.”
“알겠습니다.”
허리를 숙이는 좌괴에게서 등을 돌려 편월은 방 한쪽에 놓여 있는 갑옷을 집어 들었다.
“도와 드릴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아니. 혼자 입을 수 있어.”
시큰둥하게 거절하면서 편월은 손을 저었다. 좌괴에게 그만 나가 보라는 신호였다.
편월은 천천히 갑옷을 입기 시작했다. 튼튼한 가죽으로 만들어진 끈을 하나씩 조일 때마다 각오 역시 단단히 세워졌다.
투구와 애병인 장도를 들고 편월은 밖으로 나갔다. 성 전체가 마치 대낮처럼 밝았다. 곳곳에 횃불은 물론 화톳불도 엄청나게 피워 놓았기 때문이다.
평소 출동 때와 달리 북소리도 없고, 소라고둥도 울리지 않았다. 합진성에 스며들어 있을 율천국의 간인들을 필요 이상으로 긴장시키지 않기 위해서였다.
야전용 의자를 가져오게 해서 편월은 거기에 앉았다. 다른 장수나 병사들이 준비될 때까지 그렇게 기다릴 작정이었다.
아장 중 한 명이 한 무더기의 장작을 가지고 왔지만, 편월은 그냥 돌려보냈다. 곳곳에 화톳불이 피워져 있었지만, 그걸로 모든 병사들이 추위를 달랠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들의 고통을 함께하고 싶었다.
이번엔 뒤쪽이 어수선해진다 싶더니 한 무리의 시녀들이 모습을 보였다. 유화와 증화강이 그들을 이끌고 있었다.
두 사람을 본 편월은 깜짝 놀라 의자에서 일어섰다. 둘 다 가죽으로 만든 갑옷을 입은 경무장 차림이었기 때문이다.
“이게 무슨……?”
너무도 어이가 없어 편월은 말을 잇지 못했다. 유화야 그렇다 쳐도 증화강은 강국의 규중심처에서 곱게만 자란 여인이었다. 무장한 모습이 사뭇 어색하기만 했다.
하지만 증화강의 눈매만은 여느 병사 못지않게 이글거리고 있었다. 유화에게 부추김을 받기도 했겠지만, 저런 차림을 하기까진 상당한 마음가짐이 필요했으리라.
“이번 출전은 여느 때와는 다르다고 들었습니다. 뒤에 남은 우리들은 걱정하지 마시고, 마음껏 싸우세요.”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증화강이 말했다. 목소리는 조금 떨렸지만, 결연한 의지만은 확연히 느껴졌다.
그사이 유화는 시녀들에게 지시를 내려 솥을 걸게 했다. 뜨거운 차를 끓여 병사들에게 먹일 생각인 모양이었다.
편월은 마음이 불편했다. 구태여 묻지 않아도 지금 증화강의 심정이 어떨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녀는 내가 가겸후에게 복수해 주길 원하고 있다.’
하지만 정작 자신은 지금 가겸후와 동맹을 추진하고 있다. 비록 상초국을 물리칠 때까지의 얘기지만, 일시적이라도 증화강에게 실망과 상처를 주는 것 같아 기분이 찜찜했다.
그래서 편월은 애써 웃었다.
“하하하. 무엇 때문에 그렇게 거창한 무장을 했는지 모르지만, 이번 싸움의 상대는 상초국이오. 그대의 아버지를 도와주는 척하다가 정작 위급한 상황이 되자 헌신짝처럼 버리고 달아난 놈들이오. 이 기회에 놈들의 씨를 말릴 작정이오.”
편월은 굳이 가겸후는 언급하지 않았다. 상초국군의 비열한 행위만을 강조함으로써 증화강의 관심을 돌리려는 의도에서였다.
“그러니 그 무장일랑은 벗어 던지고 내전으로 돌아가시오. 출전해 있는 동안 황후 마마와 내전을 잘 보살피고.”
“저어…….”
편월의 뒤에서 유화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이번 싸움, 결코 상초국을 물리치는 것만으로는 끝나지 않는다고 생각됩니다. 설사 주군께서는 그렇게 하고 싶다 하셔도, 율천국왕이 그냥 있지 않을 것입니다. 반드시 주군을 멸하고 천하를 얻으려 할 테니, 이 점 유념해 주십시오.”
“그런 얘긴 대체 누구에게 들은 거야?”
“들어서 아는 게 아닙니다.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는 일입니다. 무리하게 탄금성으로 가신 광운 아저씨도 그걸 잘 아셨기에…….”
“그만.”
편월은 유화의 입을 막았다. 말을 계속하게 두면 증화강이 동요하게 된다. 애써 가겸후와의 일에 대한 언급을 피한 의미가 없어져 버리고 만다.
유화는 고분고분하게 입을 다물었다. 이미 할 말은 모두 다 했다. 이제부터 남은 건 전장에 나간 모든 사람들의 무운과 무사 귀환을 비는 일뿐이었다.
아니, 한 가지 일이 더 있다. 만에 하나 편월이 패한다면 적군은—그게 율천국이든 상초국이든—이 합진성까지 밀고 올 게 분명하다. 그때 적과 맞서 끝까지 저항함으로써, 위휘군 내전은 과연 훌륭했다는 소릴 들어야 한다. 허주가 망할 때 편씨 부인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일부러 무장까지 한 것이다.
편월은 다시 의자에 앉았다. 밤이 깊어질수록 싸늘한 한기 또한 짙어졌지만 병사들의 사기는 의외로 높았다. 시녀들의 뜨거운 차 대접이 한몫 톡톡히 한 것도 사실이었다.
“주군, 선발대의 출발 준비가 끝났습니다!”
누군가 토끼처럼 달려와 편월 앞에 한쪽 무릎을 꿇으며 큰 소리로 보고를 올렸다. 맹아가 근위대 오백을 이끌고 사자로 파견된 후 임시로 근위대장 직을 맡고 있는 위휘였다.
“알겠다. 선발대의 대장은 오강 장군인가?”
“그렇습니다.”
“가서 전하라. 지금은 한밤중이니 성 안팎의 백성들이 놀라지 않게끔 조용히 행군하라고.”
“존명!”
복명을 한 후 위휘는 왔을 때처럼 빠른 달음박질로 달려갔다. 그 뒤를 이어 나타난 사람은 담개였다.
“본대는 아무래도 축시경에는 준비가 끝날 듯합니다. 그에 대해 한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말씀하시오.”
“그 본대의 인솔을 소장에게 맡겨 주시오.”
“본대는 내가 맡기로 되어 있을 텐데…….”
“압니다. 그러니까 이리 부탁드리는 겁니다.”
“그럼 정한대로 하는 게 좋겠소.”
“우리가 이처럼 은밀히 움직이는 건 가겸후를 자극…….”
“그만 하시오!”
편월은 돌연 언성을 높여 담개의 말을 막았다. 증화강에게 가겸후라는 이름을 들려주기 싫어서였다.
처음엔 황당함과 다소 분노한 표정을 짓던 담개는 약간의 시간이 흐르자 편월의 뜻을 짐작했다.
“아무튼 적을 속이자면 주군께서는 움직이지 않으시는 게 상책입니다. 후진과 더불어 이 합진성에 계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나러더 여기 남으라는 말씀이오?”
“그렇습니다. 비록 송 장군이 건주 각 성에 대한 진무를 하고 있긴 하지만 그것만으론 부족합니다. 이 합진성에 주군께서 떡하니 버티고 계셔야 일선의 장졸들도 안심하고 싸움에 전력을 다할 것입니다.”
“각 성에 대한 진무라면 지금도 송 장군이 잘해 내고 있소. 굳이 나까지 남을 필요는 없겠지.”
“하지만 주군, 이제부터 우리 위휘군의 싸움 방식도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전처럼 주군께서 진두에 나서시는 건 어불성설이고, 싸움에 참가하시는 것도 삼가 주셔야겠습니다.”
“나서지 말라고? 그렇게 한다고 과연 내가 안전할 것 같소? 선두에 서든 후미에 있든 우리 위휘군이 패하면 나도 위태로워지는 건 마찬가지요. 저 여인들을 보시오. 저들도 저렇게 무장을 하고 있지 않소. 그러니 다른 말씀 마시오.”
더 이상 이의를 제기할 수 없도록 편월은 못을 박았다. 그러고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말을 대령하라. 각 부대의 출발 준비를 둘러보겠다.”
“존명!”
대기하고 있던 병사 한 명이 재빨리 마구간 쪽으로 달려갔다.
그 자리에 좌괴와 상가웅이 빠른 걸음으로 달려왔다. 뭔가 급박한 정보가 들어온 것 같았다.
“방금 막주에서 전령이 왔습니다.”
“막주에서?”
“예. 그곳의 어부들이, 상초국이 이번에 동원한 병력을 알아낸 것 같습니다.”
“그게 사실인가? 대체 얼마 정도나 되는가?”
편월 역시 다급한 어조로 물었다. 지금 상황에선 가장 중요한 정보가 아닐 수 없었다.
“예. 대형 전선 약 칠만여 척. 거기에 따른 소형 쾌속선은 이루 헤아릴 수 없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상초국은 온 나라의 저력을 송두리째 동원했다고 여겨집니다.”
“병력은? 병사들의 숫자는?”
“거기까지는 전갈이 없었지만, 소생의 생각으로는 적어도 이십만여, 많게는 삼십만을 상회할 거라 봅니다.”
“배 한 척에 오백 명씩만 타고 있다고 쳐도 삼십만은 훨씬 넘을 테지.”
담개가 혼잣말처럼 나직이 중얼거렸다. 배 한 척에 병사 오백이라는 수치는 그냥 나온 게 아니었다. 상초국이 강국의 원군으로 등장한 이래 율천국과 막주에서는 연일 수군의 육성에 힘썼다.
그 결과 조선 기술도 비약적으로 발전되어 예전에는 꿈도 꿀 수 없었던 크기의 배도 만들 수 있게 되었다. 한 척에 오백의 병력을 싣는 건 요즘 들어 흔한 일이었다.
“위협적인 것은 숫자만이 아닙니다. 그 정도 병력이야 율천국에서도 얼마든지 동원할 수 있을 겁니다. 정작 주의를 기울여야 할 점은 상초국 병사들의 전투 능력입니다. 그들과 율천국 사이에 벌어졌던 몇 차례 전투를 조사해 보니 결코 해전에만 능한 게 아니었습니다. 설사 육지에서 싸우더라도 그 점만은 간과하셔서는…….”
“놈들을 절대 상륙시켜서는 안 되오!”
좌괴가 강한 어조로 상가웅의 말을 잘랐다. 굳이 가겸후와 동맹을 맺으려고 애를 쓰는 이유가 뭔가. 바로 상초국 놈들을 이 땅에 한 발짝도 들여놓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러기 위해선 율천국의 수군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소장의 말은 최악의 경우도 생각지 않을 수 없다는 거요. 게다가 상초국은 섬나라인지라 해전에 강점이 있소이다. 이번에도 율천국이 그처럼 치밀하게 준비를 하고 있었음에도 하마터면 상초국 병사들을 상륙시킬 뻔했소이다. 이 점을 간과하시면 안 됩니다.”
상가웅의 마지막 말은 편월을 향한 거였다. 이제 곧 출격할 주군의 주의를 환기시키기 위함이었다.
편월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기실 그는 단 한 번도 상초국 장졸들과 싸워 본 적이 없었다. 그들이 어느 정도의 전투력을 가졌는지 직접 부딪쳐 보고 싶었다.
‘하지만 난 해전은 전혀 모른다. 심지어 배를 타 본 적도 없다.’
그 점이 편월은 안타까웠다. 좌괴는 상초국의 상륙을 절대 허용하지 않을 생각이다.
그렇다면 자신은 상초국 놈들과 싸움을 해 볼 기회는 전혀 없다고 봐야 한다. 해전엔 문외한이고, 배도 타 본 적 없는 자신이 나선다면 오히려 전군에 방해만 될 뿐이니, 모든 장수들이 나서서 말릴 게 분명하다.
‘아니, 그보다 더 중요한 건 내가 저들의 주군이라는 사실이다. 함부로 경거망동해서는 안 된다.’
편월은 지금 자신의 어깨에 실린 생명의 무게를 아리도록 절감했다. 위휘군만이 아니다. 광운이 이끌고 온 막주군도 있고, 곽가군 그리고 건주에서 이미 편입되었거나 편입될 많은 사람들을 책임져야만 한다.
그런 점에서 보면 조금 전에 했던 담개의 말이 정곡을 찌른 셈이다. 주군이라는 존재는 싸우고 싶다고 해서 나서서도 안 되고, 피하고 싶은 상황에 직면해도 굳건히 버티고 있어야만 한다. 바로 그게 자신의 어깨에 올려진 많은 생명들에 대한 책임을 다하는 길일 것이다.
“상초국왕의 이름은 뭐라고 하던가?”
“예? 아, 등촌태일藤村太一이라 합니다. 올해 쉰 살이라고 알려졌지만, 확실한 나이는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 역시 막주의 어부들에게서 나온 정보인가?”
“그렇습니다. 막주의 어부들이 먼 바다에서 표류하는 상초국 백성들을 몇 명 구했나 봅니다. 말이 통하지 않아 어렵긴 했지만, 간신히 그 정도는 알아낼 수 있었나 봅니다.”
“등촌태일… 그자가 왜 이 땅에 욕심을 내는지 모르겠지만, 불운한 자로군. 나와 가겸후를 동시에 적으로 맞게 되었으니 말이야.”
나직한 편월의 독백이 끝났을 때, 조금 전 마구간으로 달려갔던 병사가 흑풍을 끌고 왔다.
하지만 편월은 말을 타는 대신 다시 의자에 앉았다.
“여기에 있겠다. 각 부대는 준비가 끝나는 대로 보고하도록.”
예전의 편월 같았으면 벌써 흑풍에 올라 각 부대를 돌며 직접 준비를 독려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늘 밤, 불과 조금 전에 뇌리를 스친 생각에 따라 실천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평소와 다른 편월의 모습에 다들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담개만은 입가에 미소를 휘감은 채 걸음을 옮겼다. 자신의 뜻이 편월에게 조금이나마 통한 것 같아 가슴이 훈훈했다.
본대가 합진성을 나간 건 담개의 예상대로 축시 말경이었다. 그 속에 편월이 속해 있었지만, 그 표정만은 어느 때보다 느긋했다. 싸우러 가는 게 아니라 마치 사냥이나 들놀이를 나가는 듯한 모습이었다.
2
상초국왕 등촌태일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새벽의 해무를 이용한 기습 공격으로 율천국 수군의 절반 이상을 궤멸시켰다. 당분간은 적어도 바다에서 역습을 당하거나 공격받을 일은 없다고 여겼다.
그래서 오늘은 위풍도 당당하게 상륙전을 감행했다. 막대한 희생을 치르겠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상초국을 떠나 여기까지 오는 데만 벌써 한 달이 걸렸다. 배에 싣고 온 물자가 점점 바닥을 드러내니, 어떻게 하든 뭍에 올라야만 한다.
상륙전은 예정대로 진행되었다. 어느 정도의 희생이야 처음부터 각오했던 참이니 아쉬울 것도 아까울 것도 없었다.
그러나 배후에 나타난 적의 전선은 그리 가볍게 생각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율천국의 해상 역습이 이처럼 빠르리라곤 전혀 예기치 못했기에 적절한 대응도 할 수 없었다.
약간의 시간이 지나서야 새로운 적이 율천국이 아님을 알 수 있었지만, 그때는 벌써 후미의 보급선들이 상당한 타격을 입은 뒤였다.
등촌태일은 당장 상륙전을 중지할 수밖에 없었다. 뭍에 오르는 것도 중요했지만, 해상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하면 앞으로의 작전에도 지대한 차질을 빚을 것이기 때문이다. 당장 선단을 돌려 우선 배후의 적부터 제거해야만 한다.
일단 마음을 정하자 상초군 수군의 대응은 눈부실 정도로 빨랐다. 이미 해안 가까이 접근했던 전선들은 물론 대기하고 있던 배들도 일제히 방향을 돌려 응전 태세를 갖추었다.
이 시점에서 등촌태일은 또 한 번 뒤통수를 강하게 얻어맞는 충격에 빠져야 했다. 맹렬하게 공격을 감행하던 적선들이 돌연 방향을 돌려 달아나기 시작한 것이다.
추격할 수 없는 건 아니지만 등촌태일은 포기했다. 원군으로 파견했던 소촌과 송평에게 미리 이 지역의 조류와 해저의 지형에 대해 조사를 시켰지만 완전한 건 아니었다. 추격하느라 멀리까지 나가면 바다는 더욱 낯설어지기만 할 터, 익숙지 않은 바다에서 적과 싸울 수는 없는 일이었다.
추격을 포기한 등촌태일은 상륙전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가뜩이나 물자가 부족해지던 참에 보급선들이 상당한 타격을 입었다. 조속한 시일 내에 해안을 확보하지 못한다면, 전군이 바다 위에서 아사할지도 모르기에 더욱 맹렬해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상륙전이 절정으로 치달을 즈음 예의 그 적선들이 다시 배후를 공격해 왔다. 등촌태일로선 미치고 환장할 일이었다.
그가 가진 일국 국왕으로서의 면모는 여기에 대한 대처로 잘 나타났다.
우선 등촌태일은 전투의 중단을 명했다. 연방 후미를 노리는 적선을 두고서 제대로 된 상륙전을 치를 수는 없다. 그보다는 선단을 한곳에 모으고, 그 중앙에 보급선들을 배치시켰다.
그리고 작은 쾌속선들을 제법 먼 곳까지 보내 정박시킴으로써 집결된 선박들의 파수把守로 삼았다. 율천국 수군의 주 병기라 할 수 있는 대노궁大弩弓의 위력을 잘 알고 있기에 취한 조치였다.
바다 위의 진지가 구축되자마자 등촌태일은 각 배로 전령선을 보내 장수들을 대장선으로 불러 모았다.
“오늘 우리를 공격했던 수군은 어디 소속인가?”
장수들의 집결이 끝나자마자 등촌태일은 송평에게 물었다. 그는 지난번에 상초국의 수군도독으로 강국에 지원을 왔었기에 이 땅의 수군에 대해서도 보다 소상히 알 것 같아서였다.
“막주로 생각되옵니다.”
“막주? 그곳은 어딘가?”
“이 땅의 서남단에 위치한 곳이옵니다. 해산물이 풍부한 바다를 끼고 있어 예로부터 어업이 발달한 곳이옵니다.”
“거기도 가겸후가 정복한 곳인가?”
“아니옵니다. 아직 거기까지는 가겸후의 손이 미치지 못했사옵니다.”
“그런데 왜 막주의 수군이 우릴 공격하는가?”
“거기까진 알 수가 없사옵니다.”
송평으로선 정말이지 모를 일이었다.
등촌태일의 질문은 계속 이어졌다.
“막주를 다스리는 자는 누군가?”
“소장이 강국을 떠날 때만 해도 광운이라는 장수가 다스리고 있었사옵니다.”
“그렇다면 가겸후와 광운이 손을 잡은 거로군.”
단정을 짓는 듯한 등촌태일의 말에 송평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 말에 의혹을 가진 듯한 얼굴이로구나. 까닭이 있겠지? 말을 해 보라.”
송평이 자신이 조사해서 알아낸 것을 얘기하기 시작했다. 우선 편월과 강국의 관계에서부터 시작해서, 편월과 광운의 관계까지 설명하고 잠시 말을 맺었다.
“그러니까 송 장군의 말은 편월이란 자와 부자지간처럼 지내는 광운이 편월의 장인을 친 가겸후와는 절대 손을 잡지 않을 거란 얘기군.”
등촌태일은 결코 어리석은 자가 아니었다. 거기까지만 듣고도 송평이 무슨 얘기를 하고자 하는지 간파해 냈다.
“그러하옵니다.”
“이 나라는 지난 이백여 년간 전란으로 날이 새고 저물었다고 들었다. 전시의 이합집산은 변화가 무쌍해 그 진의를 가늠할 수 없다. 이번 경우도 그런 것 같군.”
송평은 더 이상 입을 열 수가 없었다. 등촌태일의 말이 조금도 틀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거기까지는 좋다. 남은 건 앞으로 어떻게 해야 그들을 격파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의견들이 있으면 말을 하도록.”
송평이 가장 먼저 입을 열었다.
“오늘 막주 수군의 용병을 보니 아직 해전은 서툰 것 같았습니다. 그러니 다음에 또다시 덤비면 철저히 격퇴시켜야 되리라 보옵니다. 만약 오늘처럼 달아나면 끝까지 추격을 감행해야 될 것이옵니다.”
“불가! 우리는 이미 충분히 바다에서 머물렀습니다. 이제 슬슬 군량이나 여타 물자들이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니 막주의 서툰 수군 따위는 상관치 말고 조속히 상륙을 시도하는 게 상책일 것입니다.”
선실에 둘러앉은 장수들 중 가장 나이 들어 보이는 노장이 송평의 뜻에 반박하고 나섰다.
“불가! 뒤에 적을 두고 상륙전을 시도한다는 건 위험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옵니다. 송 장군의 말처럼 우선 바다부터 깨끗이 청소한 뒤에 상륙을 시도하는 게 가한 줄 아뢰오!”
“찬동! 지금 상륙전을 시도하는 건 개죽음을 당하겠다는 것에 다름 아니옵니다. 송 장군의 말처럼 막주의 수군은 아직 해전에 익숙지 못한 걸로 보였습니다. 하오니 우선 그들부터 섬멸하는 게 가한 줄 아뢰오.”
소촌이 송평의 뜻에 찬성을 표했다. 병략兵略에도 맞을 뿐 아니라, 함께 강국에 지원군으로 파견됐었다는 친분도 작용한 까닭에서였다.
마치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장수들은 제각기 의견을 개진했다. 순식간에 선실 안은 왁자한 소음으로 그들먹해졌다.
가장 상석에 앉은 등촌태일은 팔짱을 낀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주변이 아무리 소란스러워도 그의 귀에는 장수들의 의견 하나하나가 고스란히 꽂혀 들었다.
장수들의 의견은 팽팽했다. 노장들은 주로 상륙전의 감행을 주장했고, 비교적 젊은 장수들은 바다 위의 적부터 소탕하는 게 옳다는 얘기를 반복했다.
이건 다분히 경험의 많고 적음에서 오는 이견이었다. 경험이 많은 노장들은 바다 위에서 오래 주둔하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잘 알고 있기에, 다소 무리를 하더라도 상륙을 감행하자는 주장이었다. 굶어 죽는 것보다는 싸우다 죽는 게 그래도 낫다는 명분이 뒤를 받쳤다.
젊은 장수들은 노장들만큼이나 바다의 무서움을 절실하게 알지 못한다. 그러니 전쟁 자체도 깔끔하게 처리하려고 한다. 그들이 주로 내세우는 명분은, 이 먼 타국을 치러 왔으면 어디까지나 승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자칫 크게 패전할지도 모르는 작전을 감행해서는 안 된다는 게 주된 골자였다.
“그만!”
등촌태일은 논의를 중단시켰다. 그대로 두면 논의는 팽팽한 줄다리기만 거듭할 뿐 타협점을 찾을 수 없을 터였다.
순식간에 선실에 고요가 감돌았다. 왕이 논의를 중지시켰다는 건 이미 결단을 내렸다는 의미다. 귀를 기울여 경청하지 않을 수 없었다.
등촌태일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장수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의 얼굴에 날아가 박혔다.
“제장들의 의견은 잘 들었다. 모두가 타당하고 틀린 곳이 없었다. 해서 이 몸은 이렇게 결정했다.”
“봉명奉命!”
입을 모아 외친 후, 장수들은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내일 우리는 전군을 둘로 갈라 양동작전을 편다. 상륙을 주장했던 장수들은 최선을 다해 상륙전을 전개하라. 막주의 수군과 결전을 벌이고자 하는 장수들은 해전을 벌여도 좋다.”
너무 뜻밖의 말에 장수들은 말없이 서로의 얼굴만 돌아보았다. 특히 상륙을 명받은 노장들은 황당한 기색이 역력했다. 총력을 기울여도 성공하기 어려운 터에 병력을 쪼개야 한다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에 비해 해전을 명받은 젊은 장수들은 어깨에 팽팽한 힘이 들어갔다. 오늘 나타났던 막주의 수군은 누구의 눈에도 서투름이 완연히 보였다. 싸우면 반드시 이기게 될 터였다.
“그리 알고 지금부터 세부적인 작전을 세워 상신하도록 하라.”
“존명!”
마지못해 혹은 신명이 올라 장수들은 힘차게 복명했다.
그 소리를 들으며 등촌태일은 천천히 선실을 나갔다.
등촌태일은 결코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병력을 나눈다는, 병법에도 없는 결정을 내린 건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첫 번째 이유는 병력이 월등히 많다는 자신감에 기인한다. 물론 상륙전 쪽에 좀 더 많은 병력을 충당하겠지만, 어쨌든 숫자상 우위에 있는 건 사실이다.
두 번째는 약간의 희망이다. 둘 중 어느 쪽이든 한쪽만 성공해도 그리 큰 손해는 보지 않는다는 판단에서였다.
가장 중요한 원인은 세 번째다. 만약 내일 중으로 이 전쟁의 돌파구가 보이지 않으면 깨끗이 철수할 작정이었다. 군량과 물자의 부족을 겪으면서 싸움을 계속할 수는 없으니, 퇴각할 구실을 찾기 위해서라고 해도 좋다.
그러기 위해선 모두들 뼈에 사무치는 패배를 경험해야만 한다. 그게 전제되지 않은 퇴각은 모두를 납득시키기 어렵고, 불만의 씨앗을 남기는 일이다. 그건 쉽게 전군의 분열로 직결되기도 한다. 한 번의 패배보다 그 편이 더 치명적인 건 말할 것도 없다.
자신의 개인 선실로 들어간 등촌태일은 침상에 길게 몸을 뉘었다. 한숨 자고 나면 장수들이 몇 개의 작전을 세워 가지고 올 것이다. 그중 가장 낫다고 생각되는 걸 하나 골라 내일 실행하면 된다.
이 밤에도 해무가 스멀거리며 피어오르는 걸 온몸으로 느끼며 등촌태일은 잠 속으로 잠겨 들었다.
* * *
그날 밤 막주군 수군제독 주융은 잠을 잊었다. 낮에 치른 최초의 해전을 스스로 돌이켜 보고, 또 보완할 점은 없는지 생각하느라 그랬다.
사실 오늘 낮의 접전은 성공적이었다. 상륙전에 치중하는 적의 배후를 찔러 삼십여 척의 적선을 불태우거나 침몰시켰다.
그에 비해 아군의 피해는 전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병사들 몇 명이 상했지만, 전선은 단 한 척의 손실도 없었으니 오늘 작전은 대성공이었다.
그러나 주융은 목구멍이 절반쯤 막힌 듯한 찜찜함을 떨어 버릴 수가 없었다. 성공은 했지만 도무지 만족할 수 없는 뭔가가 남은 듯한 기분이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주융은 밖으로 나갔다. 차가운 밤바다의 공기라도 마시면 답답함이 좀 가실 것 같아서였다.
밤이 머물고 있는 바다는 그대로 안개의 천지라고 해도 좋았다. 가장 가까이 있는 아군 배의 불빛도 습기에 녹아 간신히 보였다가는 다시 잠겨 들곤 했다.
“후우…….”
주융은 크게 심호흡해서 폐부 깊숙이 안개를 가득 채웠다. 이대로 온몸이 해체되어 안개 속으로 녹아들었으면 싶었다. 그렇게 되면 이 바다 위 어디든 마음대로 갈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가만, 안개?’
그 순간 뇌리를 스치는 한 가지 생각에 주융은 자신도 모르게 뱃전을 두드렸다.
지난 전투에서 율천국 수군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던 건 안개를 이용한 상초국 수군의 접근을 몰랐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걸 이쪽이 이용하지 말란 법은 없다. 안개는 그저 자리하고 있을 뿐 어느 쪽을 돕는 게 아니다. 그걸 이용하여 적이 성공했다면 아군 역시 그러지 말란 법은 없다.
‘적은 어제 하루 종일 상륙전을 치르느라 지쳐 있을 게 뻔하다. 그에 비해 아군은 어제의 승리로 한껏 사기가 올라 있다. 이 밤에 야습을 감행한다면?’
타고난 신중함을 가진 주융이었지만, 그 역시 전국난세를 헤치고 살아온 무장의 한 사람이다. 전쟁에 임하면 공훈을 탐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런 점에서 보면 비록 성공적이었다 해도 오늘 전과는 미미한 것이다. 보다 확실한 공훈을 세워야 막주에서 이 먼 곳까지 수군을 이끌고 온 보람을 찾을 수 있을 터였다.
‘그렇다. 야습이 최선이다.’
내일이면 벌써 적은 오늘의 피로를 대부분 푼 상태일 게다. 거기다 적이 오늘과 같은 작전으로 나오리란 보장도 없다. 오늘 밤이 아니면 야습 따위는 꿈도 꾸지 못할지도 모른다.
“전령선에 전하라. 각 장수들에게 지금 즉시 집결하라 이르라!”
어둠과 안개에 대고 주융은 고함을 질렀다. 사람은 보이지 않았지만 누군가는 분명히 듣고 있을 터였다.
과연 불붙은 향전 한 발이 허공으로 높게 쏘였고, 즉각 모인 전령선들이 명을 받고는 흩어져 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장수들이 전령선을 타고 속속 모여들었다. 회의는 짧았다. 낮의 성공에 고무된 장수들은 주융의 야습 계획에 일절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 회의에서 주융이 강조한 건 단 두 가지였다. 움직일 때는 은밀하게, 그리고 적과의 지나친 근접전은 불허한다는 것이었다.
막주 수군의 선봉대가 움직이기 시작한 건 그로부터 한 시진 후인 인시가 막 시작될 무렵이었다. 그때도 안개는 여전히 밤과 바다를 온통 적시고 있었다.
그 속에서 주융은 미소 짓고 있었다. 이 안개가 짙을수록 야습의 성공에 대한 확신도 강해지기만 했다.
이동은 비교적 쉬웠다. 적은 진파구 앞바다에 정박해 있다는 걸 익히 알기에 애써 찾아 헤맬 일도 없었다.
진형은 장사진長蛇陳이었다. 어차피 피로에 지쳐 노곤한 잠에 빠져 있을 적을 치는 공격이다. 최대한 넓게 벌려야 적이 받는 타격도 그만큼 클 것이 아닌가.
공격 진형이 완전히 갖춰진 것은 묘시 중반 무렵이었다. 주위는 희뿌염하게 밝아졌지만, 안개는 여전히 짙어 바로 곁에 있는 배의 형체도 보이지 않았다.
그 사이를 헤치고 전령선들이 대장선과 각 선단 장수들의 배를 미꾸라지처럼 빠르게 왕래했다.
“북을 울려라! 자아, 공격 개시!”
드디어 주융의 입에서 명령이 떨어졌다.
동시에 향전과 불화살 그리고 공격의 북소리가 안개를 출렁거리게 만들었다.
“불화살을 주시하라! 불화살이 가는 방향에 적이 있다!”
목청이 큰 병사들로 구성된 각 배의 독전대가 연방 고함을 질렀다. 곧이어 발사될 노궁의 방향을 지시하기 위해서였다.
막주 수군의 공격은 맹렬했다. 병사들 개개인의 사기가 한껏 올라 있던 터라 주융이 기대했던 이상의 강도로 시작되었다.
불덩어리를 매단 막주 수군의 노궁이 일제히 발사되었다. 이 순간만큼은 안개도 새벽의 어스름도 한꺼번에 지워져 버린 듯했다.
“더 이상의 접근은 허용치 않는다! 이 자리에서 마음껏 노궁을 쏘아붙여라!”
대장선의 망루에 올라 주융은 연방 명령을 내렸다. 그건 기수나 향전 그리고 전령선들에 의해 각 지휘 장수들에게 시시각각 하달되었다.
하지만 막주의 수군이 기세를 올린 건 개전 후 약 이각 정도에 불과했다.
가장 먼저 요동을 보인 건 좌익이었다. 별다른 보고가 없었음에도 주융은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
“좌익으로 전령선을 보내라! 아직은 움직일 때가 아니다. 속히 명을 하달하라!”
동요의 기척은 감지되었지만, 정확한 사정을 알 길이 없었다. 이런 때는 짙은 안개가 원망스러울 따름이었다.
‘그토록 접근전을 허용치 않는다고 했는데도!’
주융은 좌익의 지휘 장수가 명령을 무시하고 적에게 다가가는 것이라 믿었다. 그만큼 그는 이 싸움에서 승리를 자신하고 있었다.
그 순간 좌측의 안개가 벌겋게 물들기 시작했다. 처음엔 아군의 배에서 날리는 불붙은 노궁인 걸로 여겼지만, 그게 점차 커지자 주융의 생각도 달라졌다.
“보고! 좌익 선단이 현재 적과 접전 중!”
고물에 불이 붙은 전령선 한 척이 다가와 보고를 했다.
“접전이라니? 그토록 적과의 근접전을 삼가라 일렀거늘! 자초지종을 소상히 고하라.”
“아군이 접근한 게 아닙니다. 오히려 적의 기습을 받은 것입니다.”
“기습이라니?”
“적은 아군의 동정을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공격이 시작되자마자 적의 쾌속선이 안개 속에서 접근하여…….”
“퇴각하라! 퇴각이다!”
전령의 보고가 채 끝나기도 전에 주융은 고함을 질렀다.
이건 전혀 예상치도 못한 일이었다. 어떻게 적이 이쪽의 움직임을 알 수 있었단 말인가?
“적이다! 전방에 적 출현!”
주융이 생각의 갈피를 잡기도 전에 바로 지척에서 아군의 고함이 연방 들려왔다. 동시에 주융이 타고 있는 대장선에도 적의 불화살이 날아들었다.
“막아라! 적을 막으면서 후퇴한다! 퇴각이다!”
주융으로선 이게 최선의 명령이었다. 손수 퇴각을 알리는 징을 울리면서 연방 고함을 질렀다.
막주의 수군이 뱃머리를 돌리기 시작했다. 이미 접전이 시작된 좌익은 어쩔 수 없었지만, 대장선을 필두로 우익은 나름대로 기민하게 후퇴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것도 경험 부족에서 오는 주융의 실수였다. 이왕 접전이 시작되었으면 최선을 다해 싸웠어야만 한다.
그런데 퇴각의 명을 내렸으니 전군은 삽시간에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적함 출현! 우현에 적함의 출현이다!”
주융이 탄 대장선이 절반쯤 방향을 돌렸을 때, 누군가의 고함이 들렸다.
“서둘러라! 이대로는 내장이 터진다!”
아마도 편장 중 한 명이리라. 적함의 출현과 동시에 찢어질 듯한 목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내장이 터진다는 말은 절대 과장이 아니었다. 적에게 배의 옆구리가 노출되었으니, 공격을 받는다면 그대로 침몰당하고 만다.
배의 회전속도가 급격히 빨라졌다. 그게 적이 돌진해 온 것보다 느려서 탈이었지만.
꽈앙!
선수에 굵은 철침이 박힌 적의 대형 전선이 그대로 막주 대장선의 옆구리를 들이박았다. 그걸로 두 척의 배는 하나가 되고 말았다.
그와 함께 상초국 병사들이 마구 넘어 들어왔다.
화르륵!
불길이 일었다. 상초국 병사들이 지른 불에 휩싸인 막주 수군의 대장선은 마침내 서서히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3
수군제독 주융을 비롯한 전사자 이만 이상. 침몰 및 파손으로 인해 사용이 불가능한 배가 구천여 척 이상.
오늘 새벽, 막주 수군의 기습으로 벌어진 해전에서 아군이 입은 피해였다.
만약 좌괴가 합진성에 있었다면 이 보고는 빨라도 내일 날이 밝을 때에야 받을 수 있었을 터였다. 편월을 따라 윤주성에 옮겨 와 있었기에 이 밤에 알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보고를 받은 좌괴는 한동안 넋을 잃고 멍하니 앉아 있기만 했다. 전신의 힘이 빠져 손가락 하나도 까닥할 수 없었다.
“그처럼 전면전을 피하라 일렀거늘…….”
좌괴는 간신히 이 말만 내뱉었다. 자신의 귀에조차 제대로 들리지 않을 정도로 낮은 것이었다.
그러나 어떻게든 움직여야만 한다. 편월도 이미 보고를 받았을 터이니 사후 조치를 논의하고 행동을 취해야 한다.
후들거리는 다리로 간신히 온몸을 지탱하며 좌괴는 편월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합진성은 병사들로 터져 나갈 듯했다. 편월이 옮겨 온 뒤에도 건주 각처에서, 또 막주의 원군이 밀어닥쳐 병력만 해도 십만을 바라보게 되었다.
당연히 성안에 모두 수용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성 밖에 주둔한 병사들은 밤이면 화톳불을 피웠고, 그 바람에 자시가 가까워진 지금도 윤주성 주변은 대낮처럼 밝았다.
편월은 따로 거처를 정하지 않았다. 내성의 연무장에 진막을 치고, 마치 전장에 나와 있는 것처럼 거기서 숙식을 해결했다.
좌괴가 진막에 도착했을 때 이미 장수들은 모두 모여 있었다.
“출동하셔야 합니다.”
편월의 얼굴을 보자마자 좌괴는 예를 갖추지도 않고 말을 뱉었다.
“출동이라니? 어디로 출동한단 말이오?”
윤주성을 맡고 있던 강숙이 성급하게 물었다. 장소만 정해 주면 금방이라도 출동할 기세였다. 과격했던 젊은 시절의 성정이 조금도 사라지지 않은 모습이었다.
“율천국이 구축한 해안 방어 막을 강화해야 되오. 우린 그 지원을 해 줘야 하고.”
상초국의 상륙만은 막아야 한다는 얘기는 굳이 하지 않았다. 그래도 장수들은 모두 자신의 뜻을 알아줄 거라고 좌괴는 생각했다.
“주군, 명을 내려 주시오. 출동 준비는 이미 갖추어 놓았소.”
강숙이 격렬한 목소리로 편월에게 말했다. 윤주성에 떨어져 있었기에 예전의 말투 그대로였다.
“강 장군, 잠깐만. 아직은 율천국과 정식으로 동맹을 맺지 않은 상태요. 우리들이 성급하게 움직이다가는 자칫 가겸후에게 오해를 살 수도 있소. 이제 곧 사자들에게서 연락이 올 때가 됐으니 조금 더 기다리도록 합시다.”
담개가 서두르는 강숙을 제지했다. 지금의 상대는 어디까지나 상초국이다. 자칫 섣불리 병력을 출동시켰다가는 엉뚱한 율천국과 전쟁을 치르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강숙도 자신의 뜻만 고집할 수는 없었다. 그 역시 현재 위휘군과 가겸후 사이에 동맹이 진행되고 있는 걸 잘 알고 있는 까닭에서였다. 왕래하는 사자들이 반드시 윤주성을 거쳐 갔으니까 말이다.
“아니요, 아닙니다. 지금은 그런 것에 연연할 때가 아니오! 즉시 출동을 해야 하오. 주군, 결단을 내리소서!”
꺼져 들 것 같은 강숙의 성미를 다시 부추긴 건 다름 아닌 좌괴였다.
“담 장군의 말씀이 틀리지 않다는 건 소인이 가장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일은 사자를 기다려 결정할 사안이 아닙니다. 내일 새벽이면 적은 또 상륙전을 감행할 것입니다. 하오니 곧 출동하셔야 됩니다. 가겸후의 오해가 두려워 망설이신다면, 전령을 파견하면 될 것입니다. 율천국 병사들을 지휘하는 장수에게 우리의 뜻을 알린다면, 그 역시 쉽사리 거부하지 않을 것입니다.”
마치 불을 뿜는 듯한 좌괴의 열변이었다. 그만큼 상초국의 상륙을 두려워한다는 의미였다.
“좋아. 출동하겠다! 그 전에 탄금성에도 전령을 보내라. 아무래도 여기보다는 거기서 출동하는 게 빠르다.”
“존명!”
찬성하든 반대하든, 일단 편월의 명은 떨어졌다. 그것도 진막 안에서 갑옷을 입은 채 내린 명이었다. 전시와 같은 효력을 지니는 것이니, 장수들은 승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장수들이 빠른 걸음으로 진막을 빠져나갔고, 거의 동시에 윤주성 전체는 북소리와 소라고둥 소리로 울려 퍼졌다.
그 전에 두 명의 전령이 바람보다 빠르게 윤주성을 빠져나갔다.
* * *
가겸후에게 해안 수비를 명받은 장수는 오기총감장 육우맹의 직속 무장 중 한 명인 종자영從子榮이었다.
그는 일찍부터 군문에 투신하여 두각을 드러냈다. 요즘 같은 전시엔 보기 드물게 문무를 겸비한, 용장이면서도 지장이었다.
종자영은 자욱한 안개 속에서 밝아 오는 새벽을, 번뜩이는 눈빛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오늘 적들은 또다시 상륙을 감행할 것이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종자영도 어제 새벽에 벌어진 해상의 전투와 그 결과를 잘 알고 있다. 어제 하루 적이 조용했던 건 그 새벽 전투의 뒤처리를 하느라 바빴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오늘은 다르다. 어제 대승리를 거둔 적은 오늘 가일층 맹렬하게 이 해안으로 육박해 올 게 분명하다.
“장군, 병사들의 식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부장 중 한 명이 진막 안으로 들어서며 종자영에게 물었다. 그 역시 적의 상륙이 임박해졌다는 걸 알기에 병사들의 식사에까지 신경 쓰고 있는 것이었다.
“배가 고파서는 싸우지 못한다. 부대를 셋으로 나눠 차례로 취사를 시키도록.”
“존명!”
“아뢰오! 탄금성에서 전령이 왔습니다.”
“뭣이? 탄금성에서?”
막 복명한 부장이나 종자영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이들은 아직 위휘군과 율천국 사이에 동맹 결성이 추진되는 걸 알지 못했다. 그러니 지금까지 막주군이 들어가 있는 탄금성에 대한 긴장도 풀지 못하던 상태였다.
게다가 전령이 왔다고 한다. 정식으로 싸운 적은 없었지만, 위휘군은 적임에 분명하다. 이런 경우에 사람을 보낸다면 그건 사자여야만 한다.
어쨌든 왔다는 사람을 만나지 않을 수는 없다. 서로 대진한 채 연일 피를 흘리는 전쟁을 치르는 와중에도 사자의 왕래는 막지 않았으니 말이다.
“불러오너라.”
종자영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병사들에게 둘러싸인 위휘군 전령 한 명이 진막 안으로 들어왔다.
“위휘군의 전령이오. 탄금성에 계신 광운 장군과 지두룡 장군의 명을 받고 밤을 새우며 이렇게 달려왔소이다!”
위축되지 않겠다는 듯 전령은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로 자신의 신분을 말했다.
“군말은 필요 없다. 용건은?”
“이제 곧 광운 장군께서 탄금성의 병사들을 이끌고 이곳으로 올 것이오. 이는 율천국에 대한 도전이 아니라, 상륙을 감행하려는 상초국을 막고자 함이오. 그리 아시고 수상쩍게 생각지 마시라는 전언이오.”
“알겠다. 물러가라.”
설혹 납득하지 못하는 얘기라도 전령은 이렇게 돌려보내는 게 상례다.
전령이 나가자마자 부장이 종자영을 쏘아보았다.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는 눈빛이었다.
“가서 병사들의 식사를 챙기도록. 전령의 말은 숙고해 보겠다.”
“예, 그럼…….”
궁금했지만 부장은 물러갈 수밖에 없었다. 판단은 그의 몫이 아니었고, 또한 병사들의 식사도 크게 중요한 문제 중 하나이기 때문이었다.
‘진심일까?’
만약 그렇다면 지금 상황에서 이보다 더 든든한 힘도 없다. 이곳의 전황이야 벌써 국왕인 가겸후의 귀에 들어갔겠지만, 궐주에서 여기까지 원군을 내려면 아무래도 시간이 걸린다. 그보다는 국경을 접하고 있는 탄금성의 병력이 훨씬 빨리 도착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속이는 것이라면 문제는 달라진다. 얼씨구나 하고 맞아들였다가는 일거에 전멸당하는 건 물론 율천국에서 그처럼 많은 노고를 들여 구축한 해안의 방어 막까지 와해되어 버린다. 신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대기를 찢어발기는 소라고둥 소리가 길게 울려 퍼졌다.
“적이다! 상초국 놈들이 다시 상륙을 시도하고 있다!”
둥둥둥둥!
병사들의 고함과 북소리, 소라고둥 소리가 뒤섞여 진파구 전체가 들썩거리는 것 같았다.
더 이상의 생각은 접어 두고, 종자영은 재빨리 밖으로 나갔다. 병사들의 눈에 보일 정도라면 벌써 놈들은 해안에 바짝 접근했다는 얘기다.
“대노궁은 필요없다! 투석기投石機를 사용하라!”
각 부대의 장수들이 연방 부하들을 독려하는 소리를 들으며, 종자영은 목책 바로 곁에 세워진 망루에 올랐다.
확실히 적은 해안 가까이 접근한 상태였다. 게다가 오늘은 지금까지보다 훨씬 많은 병력이 동원된 것 같았다.
그리고 또 하나 종자영의 신경을 건드린 것은 후방에 있는 지계산地鷄山에서 오른 봉화였다. 아직도 짙은 안개 탓에 연기 신호는 보이지 않았지만 불길이 오른 건 사실이었다.
‘위휘군이다!’
봉화를 보는 순간 종자영은 알 수 있었다. 벌써 위휘군은 율천국이 병합한 옛 강국의 영내로 들어온 게 확실했다.
만약 위휘군이 이 해안으로 직행한다면 세 시진이면 충분히 도착할 수 있다. 봉화는 그들이 영내로 들어온 순간 올랐을 것이고, 곧바로 여기까지 전달되었을 테니 그 정도 시차는 나는 게 정상이다.
일단 종자영은 위휘군에 대한 생각은 접어 버렸다. 당장은 벌 떼처럼 뭍으로 기어오르려는 상초국 놈들을 상대하는 게 급선무였다.
“막아라! 단 한 놈도 육지에 발을 딛지 못하게 하라!”
몇 차례 고함으로 병사들을 독려한 후, 종자영은 재빨리 망루에서 달려 내려갔다. 해안으로 가서, 거기서 적을 막고 있는 아군을 지휘하기 위함이었다.
이제 곧 해변에는 적군이 상륙할 터이고, 백병전은 불가피해진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 * *
통상 행군할 때는 전력을 다해야 할 만큼 신속하게 움직이지 않는다. 병사들의 피로도 염두에 둬야 하기 때문이다.
특히 전선으로 향하는 병사는 결코 행군을 서두르지 않는다. 아무리 신속한 게 좋은 병력 이동이라지만, 너무 빨리 달려서 헐떡거리는 호흡과 힘이 빠져 후들거리는 다리로는 싸울 수가 없지 않겠는가 말이다.
그러나 광운은 그 모든 걸 무시해 버렸다. 윤주성에서 온 전령의 말을 듣자마자 그는 탄금성에 들어와 있던 막주군 전체에 비상을 내렸고, 우선적으로 기병 이만 오천을 이끌고 달려 나왔다. 뒤에서 출발하는 보병과의 보조나 거리 따위는 상관하지도 않았다.
기실 막주 수군이 패배한 해전에 대한 정보는 광운이 편월보다 먼저 알았다. 윤주성보다 탄금성이 진파구에서 훨씬 가까웠기 때문이다.
그 즉시 광운은 장수들을 소집했고, 지두룡의 반대를 물리치고 막주군만으로 구성된 부대를 결성해 미리 준비를 갖춰 뒀다.
물론 막주의 장수들은 당장 달려가자고 들썩거렸다. 비록 수군이라 소속은 다르지만 같은 막주 출신이 아닌가. 그들의 원수를 갚자고 설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광운은 그들을 억눌렀다. 이제 막주군은 없다. 있는 건 오직 위휘군뿐. 그 주군이자 전대 황제의 종제인 편월의 명 없이는 단 한 병의 병사도 움직일 수 없다는 게 그 이유였다.
막주군 장졸들의 결속은 무서울 정도였다. 다들 불만이야 있었겠지만, 모두가 광운의 말에는 승복했다. 적어도 겉으로는.
그 결과 이처럼 빠르고 무리한 출동이 이루어졌고, 그 결과는 종자영의 예상을 여지없이 깨뜨리며, 한 시진 반 만에 전선에 도착했다.
다행인 건 그사이 그들의 진군을 막는 율천국군이 없다는 점이었다. 탄금성에서 가장 가까운 대수성을 지날 때 약간의 저항이 있었지만, 광운은 철저하게 무시하고 앞으로만 내달렸다.
그리고 그건 적절하게 맞아떨어졌다. 율천국군이 상초국군에 밀려 이제 본격적인 상륙이 임박해졌을 때 도착한 것이다.
“모두 전장을 유심히 살펴라! 우선 율천국과 상초국의 구분부터 확실하게 해 두라! 싸우는 건 그다음이다!”
광운은 진군을 멈추고 큰 목소리로 명을 내렸다. 필요한 일이기도 했지만, 지금껏 잠시도 쉬지 않고 달려온 장졸들과 말들에게 약간이나마 쉴 시간을 주고 싶었다.
서로를 구분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상초국은 이국이다. 갑옷도 확연히 다르고, 기치의 모양이나 문양도 독특하기 짝이 없었다.
“전령을 보내라. 지금부터 우리 위휘군이 싸움에 가담한다고 율천국 장수에게 알려라.”
명이 떨어진 것과 동시에 다섯 명의 전령이 화살처럼 빠르게 달려 나갔다.
“지금 상륙을 감행하는 놈들은 이방의 적군이다! 무기와 힘을 아낄 것 없다! 모조리 도륙하여 한 놈도 살려 보내지 마라!”
이건 평소의 광운답지 않은 명령이었다. 어떤 적이라도 무기를 버리고 항복하면 그 직위에 맞게 결례됨 없이 받아들이던 그였다. 한데 이국인 상초국의 침략에 대해 광기에 가까운 분노를 표출한 것이다.
“대장군의 명이시다! 한 놈도 살려 보내지 마라! 자아, 공격!”
애병인 도끼를 높이 치켜든 수자윤이 소리를 높이며 선두를 달렸다.
“와아!”
“쳐라!”
달리 지시된 작전도 없었다. 있다면 오직 상초국 놈들을 전멸시키라는 광운의 명령뿐이었다. 이만 오천에 달하는 막주의 기병들은 수자윤의 뒤를 따라 한꺼번에 왈칵 쏟아져 들어갔다.
그건 바다에서 이는 파도와는 또 다른 거대한 물결이었다. 이만 오천에 이르는 인마가 치달리니 해변의 모래가 안개처럼 튀어 올랐고, 밀려들던 조수도 오히려 먼 바다로 거꾸로 물러가는 것 같았다.
일시지간 율천국과 상초국 사이의 싸움이 자른 듯 그쳐 버렸다. 느닷없이 끼어든 위휘군 때문에 양쪽 모두 놀라 얼이 빠져 버린 탓이었다.
그 속으로 위휘군의 기치를 건 막주의 기마대가 휩쓸고 들어갔다.
“적은 상초국이다! 이 점에 실수하지 말라!”
도끼를 휘둘러 상초국의 장수 한 명을 찍어 넘기며 수자윤은 다시 한 번 병사들의 주의를 환기시켰다.
그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든 건 위휘군이 아니라 율천국군을 이끌고 있는 종자영이었다.
“아군이다! 원군이 당도했다! 모두 정신 차리고 상초국 놈들을 주살하라!”
“와아!”
“우리의 원군이다! 힘을 내자!”
종자영의 외침에 율천국 병사들도 함성을 올리며 호응했다. 그들로선 위휘군의 개입이 가뭄의 단비와도 같은 것이었다. 만약 그들이 조금만 늦게 도착했어도 해안의 방어 막은 여지없이 무너졌을 테니 말이다.
전세는 순식간에 역전되었다. 상초국 병사들 중 이미 해변에 올라선 자들은 위휘군 기마대의 밥(?)이 되었고, 아직 노를 저어 접근하던 자들은 서둘러 방향을 돌려 후퇴하느라 자기들끼리 충돌을 거듭하는 일대 혼란에 빠져 버렸다.
그처럼 한껏 기세를 올리는 위휘군 중에서 고역을 치르는 사람이 딱 한 명 있었다. 바로 고숭이었다.
“대장군, 고정하시오. 이미 끝난 거나 진배없는 싸움이오. 어찌 이리 경망되게 행동하신단 말이오!”
“놔라! 나는 이제 위휘군의 일개 무장. 주군께서 명을 내리셨다. 어찌 한가하게 쉬고 있는단 말인가?”
“그걸 어찌 쉰다고 생각하시오? 전군을 지휘하시는 거야말로 어떤 싸움보다 더 힘들다는 걸 정녕 모르고 계시오!”
차앙!
돌연 광운은 옆구리의 장검을 뽑아 들었다.
“그 손을 놔라! 그러지 않으면 베고 가겠다.”
광운은 그 어느 때보다 강경했다. 자신을 비롯한 막주군은 이미 위휘군에 편입되었으니 편월의 명에 따라야 한다고는 했지만, 기실 그는 자신의 죽음을 내다보고 있었다. 설혹 이 싸움에서 살아남는다 하더라도 한 달을 넘기기 힘들 거라 여겼다.
그렇다면 죽을 장소로 삼기엔 여기보다 더 좋은 곳도 없다. 마지막 생명의 심지를 최대한 끌어 올려 눈부시게 타오르고 싶었다.
“베시오! 설사 목만 남을지언정 이빨로 물어뜯어서라도 이 고삐는 놓지 않겠소!”
광운 못지않게 고숭도 완강했다. 정말 베일 각오인지 고삐를 쥔 손을 더욱 바짝 조였다.
“하압!”
광운은 장검을 높이 쳐들었다. 간신히 한 군데가 터진 안개의 장막 속으로 스며든 햇살에 검날이 번쩍이는 빛을 발했다.
쉿!
짧은 파공성과 더불어 광운의 장검이 떨어져 내렸다.
그러나 정작 장검이 내려친 곳은 투구 아래로 드러난 고숭의 미간이었다. 그것도 검날이 아니라 손잡이 끝으로 친 것이었다.
“크헉!”
나직한 신음성을 토하며 고숭은 그대로 말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애당초 광운이 의도했던 그대로였다.
한 가지 생각지 못했던 게 있다면, 말에서 떨어지고도 고숭은 고삐 쥔 손을 놓지 않았다는 점이다. 바닥에 끌려가면서도 그는 한사코 광운을 제지하려 했다.
다시 한 번 광운의 검이 허공을 갈랐다. 그 칼날에 고삐가 끊어지고, 고숭이 떨어져 나갔다.
고삐가 없음에도 광운은 전혀 불편함을 느끼지 않았다. 어차피 무기를 사용하자면 놓을 수밖에 없었고, 또 말과의 호흡도 완벽하게 들어맞았다.
“위휘군의 선봉장 광운이 바로 나다! 상초국에 내 검을 받을 자 있거든 썩 나서라!”
한 소리 크게 질렀을 때 벌써 광운은 서너 명의 적병을 베어 넘긴 뒤였다.
“으하하하하!”
광운은 웃었다. 폐부 깊숙한 곳까지 상쾌함이 밀려들었다.
대체 얼마 만에 느껴 보는 후련한 기분인가? 모름지기 이래야만 한다. 전쟁을 떠나서는 삶도 죽음도 결정할 수 없는 무장의 순간순간은 이래야만 한다. 이런 순간이 연결되는 게 삶이라면, 한 점 미련 없이 끊어져 버리는 게 바로 죽음인 것이다.
“우이얏!”
광운의 가슴을 노리고 상초국 병사 중 한 명이 얍시리한 창을 내질렀다.
그에 대응하는 광운의 움직임은 본능에 가까웠다. 내질린 창날을 막았다 싶은 순간, 이미 그의 장검은 적의 동체를 두 조각으로 갈랐다.
그 순간 전장으로 변해 버린 해변의 공기가 격렬하게 요동쳤다. 위휘군의 개입 이후 퇴각만 하려던 상초국 병사들이 돌연 방향을 바꿔 강한 역습을 시도해 왔기 때문이다.
전쟁에 익은 광운이 그걸 놓칠 리 없었다. 덤비는 적병 둘을 더 거꾸러뜨린 뒤 재빨리 주변을 둘러보았다. 많이 옅어지긴 했지만, 여전히 안개로 인해 시야는 그리 밝지 못했다.
하지만 그 안개조차 가릴 수 없는 것이 있었다. 바로 진파구 앞바다를 온통 메워 버린 듯한 상초국의 전함들이었다.
“저, 적의 전함이다! 놈들이 본격적으로 상륙을 시도하려고 한다!”
누군가 잡아 찢는 듯한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차라리 절규에 가까운 외침이었다.
거기에 고무된 것일까. 이미 해변에 올라온 적병들도 필사적으로 반격을 시도했다.
광운으로서는 반가운 일이었다. 무장으로 호흡하는 마지막 순간을 미적지근하게 마무리하긴 싫었다. 마음껏 적을 치고 힘이 다하면, 그때 역시 마음껏 죽으면 그만이다.
“내가 바로 광운이다! 전장의 공훈을 아는 자는 물러서지 말고 덤벼라!”
다시 자신을 밝히는 광운의 고함 뒤끝에 실낱같은 핏줄기가 입 꼬리를 타고 흘렀다. 그간 무리했던 게 드디어 몸에 자국을 남기기 시작한 것이다.
그 말 때문이었을까. 광운의 주변으로 상초국 병사들이 왈칵 몰려들어 일제히 병기를 내밀었다.
실은 상초국 병사들은 대부분 광운의 이름을 듣고 있던 참이었다. 그저께 자신들의 배후를 엄습했던 수군이 바로 막주군이었고, 그 대장군이 광운이라는 걸 장수들로부터 들었기 때문이다.
그걸 마다할 광운이 아니었다. 어차피 마지막 생명의 불꽃을 사르는 싸움이다. 적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찔러 오는 한 자루의 창 대를 왼손으로 휘감아 쥔 광운은 그대로 검을 휘둘러 그자를 베어 버렸다. 그리고 창을 확 잡아챘다.
대륙의 창보다 짧고 가벼운 상초국 창이었다. 왼손만으로 충분히 다룰 수 있을 정도였다.
돌연 광운의 말이 앞발을 번쩍 치켜들며 길게 울었다. 적병의 창 한 자루가 목을 스친 것이다.
고삐가 없는 광운으로선 위태로운 순간이었지만, 그의 기마술은 노련했다. 등자를 디딘 발에 힘을 주며, 말 등에 몸을 착 붙이는 걸로 안정을 되찾았다.
말의 앞발이 다시 땅을 딛는 것과 동시에 광운은 왼쪽 허벅지에 힘을 가했다. 한 바퀴 회전하기 위해서였다.
광운의 의도는 적중했다. 말은 그의 의지대로 움직였고, 동시에 휘두른 검과 창에 의해 주변에 있던 적들은 우르르 무너졌다.
그건 비단 광운에 의한 것만은 아니었다. 대장군이 직접 전투에 참가한 걸 본 막주의 장수들이 그를 포위하고 있던 적병들을 마구 베어 넘기며 접근해 온 것이다.
“나를 보호할 필요는 없다! 적은 저쪽이다! 적을 막아라!”
“대장군께서 부상을 당하셨다! 대장군을 보호하라!”
입을 열어 고함을 지를 때마다 피를 토하는 걸 본 장수 중 한 명이 크게 소릴 지르며 광운에게 접근하려 했다.
하지만 그때 광운은 이미 말을 달리고 있었다. 적이 몰려들고 있는 곳, 바다를 향해서였다.
전면의 바다는 그대로 적의 파도였다. 거대한 전함에선 연방 작은 쾌속선이 떠나고 있고, 해변에 이른 적들은 살기 가득한 얼굴로 짓쳐 들고 있었다.
“여기 광운이 간다!”
울컥!
말의 앞발을 치켜들며 광운이 외쳤을 때 또 한 모금의 선혈이 그의 입에서 토해졌다.
그러나 광운은 멈추지 않았다.
“오너라! 모두 상대해 주겠다!”
파앗!
광운의 말이 모래를 흩날리며 달리기 시작했다. 그가 지나간 뒤에는 적의 시체들이 쌓였다.
대장군이 이런 지경이니 막주의 장졸들 역시 눈이 뒤집혔다. 싸우고 있던 자들은 적을 내팽개쳐 둔 채, 또 적을 찾아 헤매던 자들도 일제히 광운의 뒤를 따라 말을 몰았다.
상초국이 바다에서 밀려오는 파도라면, 막주의 기마대는 대륙으로부터 불어 가는 거센 광풍이었다.
그 두 개의 기세가 부딪친 곳은 뭍과 물의 경계점 바로 거기였다.
하지만 광운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양손에 칼과 창을 치켜든 채 곧바로 바다로 뛰어들었다.
“대장군!”
고숭이 목청껏 외쳐 불렀지만, 광운의 귀에는 그조차 들리지 않았다. 곧바로 저 멀리 아스라한 안개에 잠겨 있는 적의 대장선을 향해 돌격할 따름이었다.
“뭣들 하느냐? 어서 대장군을 따르라! 대장군을 모시고 와!”
입에 거품을 문 수자윤이 도끼를 휘두르며 길길이 날뛰었다. 부하들을 독려한 후, 그 역시 말을 몰아 광운의 뒤를 따르려 했다.
“멈추시오!”
수자윤을 제지한 건 고숭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전군에 정지 명령을 내렸다.
처음엔 수자윤도 장졸들도, 말리는 고숭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해 들썩거렸다. 그러나 광운의 뒷모습을 본 순간 그들은 잠잠해지고 말았다.
광운이 탄 말은 이미 옆구리를 적실 정도의 깊이까지 들어가 있었다. 그래도 멈추지 않고 계속 달렸다.
그 주변으로 적의 쾌속선이 빽빽하게 몰려들었다. 한순간 바다가 육지로 변한 듯한 광경이었다.
바로 그때 광운의 말이 앞발을 번쩍 치켜들었다. 동시에 옅어져 가던 안개가 툭 갈라지며 눈부신 햇살이 쏟아졌다.
고숭은 보았다. 아니, 보지 못했다. 앞발을 치켜든 말의 모습은 마치 그림처럼 정지된 채 선명하게 보였지만, 그 위에 타고 있을 광운의 모습은 볼 수가 없었다.
그 자리엔 사람의 눈을 시큰하게 만드는 강한 햇살만이 자리하고 있을 뿐이었다.
“대장군…….”
누군가 나직하게 광운을 불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변에 도열한 이만 오천 위휘군의 귀에는 또렷이 들렸다.
문득 장수기가 앞으로 천천히 기울어졌다. 동시에 모든 기치와 깃발이 바닥과 수평으로 내려졌고, 병사들은 병장기를 일제히 아래로 내렸다.
안개가 걷히며 드러난 태양에 의해 바다는 황금빛 광채를 번뜩이고 있었다.